흔히 신라시대의 향찰을 소개한답시고 들고 오는 단골 작품이 서동요랑 처용가임.

아무래도 해독에도 별 이견이 없고 현대인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 그런듯...

근데 문제는 이 두 작품이야말로 삼국유사 향가들 중 유이하게 고려시대에 기록되었다는 거임.


먼저 서동요부터 살펴보겠음.

배경 설화만 보면 백제 무왕이 어릴 적 선화공주와 결혼하려고 노래를 퍼뜨렸다는 내용인데,

이를 그대로 따른다면 서동요는 무왕 즉위 이전인 6세기 후반에 창작되어야 했을 거임.

그러나 언어학적인 고증을 거친다면 작품 자체의 창작 연대는 그랬을지 몰라도,

삼국유사에 차자표기로 기록된 형태는 그보다 훨씬 후대의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남.


한국어의 목적격 조사인 '을/를'은 통일신라 때는 힐(肹), 고려 이후에는 을(乙)로 표기됨.

실제로 조사 표기에 을(乙)이 쓰인 문헌은 보현십원가, 도이장가, 석독구결 자료 등등

죄다 고려시대 혹은 그 이후인 조선시대에 작성된 것만이 현전하고 있음.

반면 삼국유사에 수록된 신라 향가들은 모두 '을/를' 표기에 힐(肹)자를 사용했음.

서동요와 처용가, 단 두 수의 작품만 뺀다면 말이지.


서동요에서 힐(肹)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서동방을(薯童房乙)'에서 을(乙)이 사용됨.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본래 '*흘'에 가까웠던 발음이 시간이 지나 '을'로 바뀐 것으로 보이는데,

즉 서동요의 표기법은 6~8세기경에 창작된 신라 향가들보다 후대의 어형을 반영한다는 거임.


이제 9세기 후반에 창작된 처용가를 분석해보도록 하겠음.

상술한 바와 같이 처용가 또한 '앗은 것을(奪叱良乙)' 부분에서 을(乙)자를 사용했음.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 비록 조사로서의 쓰임은 아니지만 힐(肹)자를 사용하기는 했는데,

바로 '둘'에 해당하는 당시 어휘 '*두흘(二肹)'의 끝소리를 덧대어 적기 위함이었음.

단어의 마지막 받침 혹은 음절을 덧붙여 적는 말음첨기는 신라시대부터 나타난 유서깊은 표기법임.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두흘'이라는 어형이 9세기에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임.

'둘'의 어형은 계림유사에서 '도발(途孛)', 조선관역어에서 '두부얼(覩卜二)'로 나타나며

이는 공통적으로 둘이 본래 '*두블'로 발음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음.

그런데 이 두 문헌은 각각 고려 중기인 1103년과 조선 초기인 15세기 초에 편찬되었으므로,

국어사에서 ㅎ이 ㅂ으로 변한 사례를 찾을 수 없기에 '*두흘'은 이보다 후대의 어형일 수밖에 없음.


반대로 ㅂ이 완전 탈락을 거쳐 ㅎ으로 변한 사례로는 '아욱'이 있음.

향약구급방(1236)에서는 아욱을 '아부(阿夫)'라고 하여 본래 '*아복'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한글이 창제된 15세기 이후의 문헌에서는 '아옥'과 '아혹'이라는 표기가 함께 나타남.

ㅂ이 순경음 ㅸ을 거쳐 탈락한 뒤, 이를 ㅎ이 탈락한 결과로 인식하여 ㅎ을 삽입한 것이라 추정됨.

그러므로 '*두블'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두을'에서 '*두흘'로 바뀌었을 수 있다는 거임.


여기서 혹자는 삼국유사는 13세기 후반, 조선관역어는 15세기 전반의 문헌인데

전자에서 후자보다 더 개신된 어형이 나타나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음.


나름 그럴듯한 의견이긴 하지만, 이 문제는 방언 차용의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함.

13세기 중앙어에서는 '*두흘'이 사용되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두ᄫᅳᆯ'이 사용되었고,

이것이 15세기 이전에 중앙 방언으로 다시 차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임.

실제로 현대 한국어 '우비다'는 15세기에 '우의다'였으므로 방언 차용의 결과로 해석되며,

'열매' 역시 기존 중앙어에서 쓰이던 '여름'을 대신하기 위해 방언에서 차용된 어휘임.


따라서 '*두흘'은 12세기의 '*두블'이 '*두ᄫᅳᆯ', '*두을'을 거쳐 변화한 형태로 추정되며,

처용가에서 이 어형이 나타난다는 것은 곧 해당 작품이 창작 시기인 9세기가 아니라

서동요와 마찬가지로 삼국유사가 집필된 13세기 후반에 채록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함.


이렇듯 서동요와 처용가는 현대 학계의 분석 결과 국어학적인 연대가 뒤로 밀려나게 되었지만,

분명 삼국시대 당대에 처음 지어졌으므로 국문학적인 연대는 달라지지 않음을 명심해야 함.

고려가요도 고려시대에 창작되었지만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이르러서야 한글로 적힌 것처럼,

어떤 구전되던 작품의 창작 시기와 그 작품이 처음으로 기록된 시기는 다를 수 있기 마련임.


다만 앞으로 서동요와 처용가를 향찰의 예시로 들고 올 때 신라어 타령을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음.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헌화가 등 신라 당대에 지어진 훌륭한 향가들도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