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1월 11일 신생 폴란드 공화국이 건국되고 폴란드는 곧바로 중부, 동유럽의 다른 신생국들과 피튀기는 영토분쟁에 돌입하게 됨.


이 과정에서 신생국 우크라이나를 두고 벌어진 영토 분쟁을 계기로 1919년 초 폴란드와 소련은 전쟁을 시작하게 됨.


사실 그 이전까지 레닌을 비롯해 볼셰비키들은 폴란드 내의 사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에 따라 소련에 호응해서 배후에서 지원을 하거나 혹은 소비에트 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할거란 낙관적인 판단을 했음.


그런데 스탈린은 그와는 정반대로 레닌 생전에도 폴란드에 대한 공격을 반대함. 이건 딱히 스탈린이 착해서가 아니라 스탈린은 빈에 살던 시절에 오헝이 가지고 있던 다민족에 의한 민족갈등과 민족주의를 옅보면서 깨닫게 된 사실 때문임.


스탈린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론에 따른 '민족의 울타리를 초월한 노동 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계급의식이 아닌 국가/민족에 충성하며 앞설수 있다'고 관측함. 즉 간단히 말해서 사회주의자조차도 '국제적 연대'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선택을 할수 있다고 판단한거임.


특히나 폴란드는 오랜시간 러시아에게 사실상 식민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민족적 감정으로 러시아를 받아들일수 없다는 점을 스탈린은 염두하기도 했음. 하지만 레닌을 포함해 볼셰비키들 다수는 그게 뭔 개소리냐고 주전론을 펼쳤고 결국 지속적인 고로시에 아직은 몸을 사리던 스탈린은 침공 찬성으로 의견을 바꾸면서 결국 레닌 사후 전쟁이 벌어지게 됨.


근데 이게 왠걸? 소련과 연대할줄 알았던 폴란드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그렇게 으르렁대던 자국의 우파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해서 소련에 끝까지 맞서 싸웠고 심지어 그 결과 바르샤바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선 투하쳅스키가 이끌던 소련의 최정예 기병대와 충격군이 개박살나면서 14만명 중 2만 5천이 전사하고 6만 5천은 포로로 잡힘.


전투 이후 폴란드군에게 노획된 소련군의 군기.


이 전쟁은 1921년 조약 협정을 통해 종전되는데 그게 바로 '리가 조약'임.


전쟁 결과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은 겨울전쟁에 비하면 덜 알려졌지만 소련의 굴욕적인 패배로 역사에 남게 됨. 하지만 동시에 폴란드에게도 큰 혼란을 끼치게 되는데 이때 얻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등 동부 땅의 대다수가 낙후된 지역이었는데 지켜야 할 범위가 너무 넓어졌기 때문임. 특히나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리투아니아인등 다른 소수민족의 합류는 그동안 크게 대두되지 않던 폴란드내의 우파 진영이 둘로 갈라지는 계기가 됨. 바로 민족주의와 연방주의의 갈등임.


연방주의는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로 상징되는 다민족 연방국가로의 변환을 목표로 했다면 민족주의는 오직 폴란드인만의 국가수립을 원했기에 소수민족 문제에 있어선 미적지근하거나 배타적이었음. 힘을 합쳐도 모자랄판에 정치판이 우파, 좌파 가리지 않고 쪼개졌으니 제대로 나라가 굴러갈리가 만무하지. 결국 1926년 피우수트스키의 쿠데타를 계기로 폴란드는 완전히 극우-권위주의의 길을 걷게되고 이는 주변국과의 외교에서도 소외되는 결과물로 이어지며 훗날 폴란드가 침공때 소외되는 원인중 하나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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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KKA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