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손에 서울이 떨어진지 3일 뒤인 7월 1일, 서울대 캠퍼스는 온갖 벽보로 가득 찼습니다.

"만고역적 리승만 도당 괴뢰집단 전면적 괴멸!"

"리완용의 정신적 후예 매국노 리승만 타도!"

"우리의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의 우수한 아들딸들인 영용무쌍한 인민군 만세!"

"조선민족의 친애하는 벗이시며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자이신 스딸린 대원수 만세!"

등의 온갖 눈꼴시려운 표어들이었죠.
이런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문리대(인문대+자연대) 교수들은 갑작스럽게 북한군에게 불려갔고, 이 교수들은 북한군 병사들의 따발총에 위협당하며 한 장교로 보이는 군인으로부터 섬뜩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중에 반동분자가 섞여있지 않소?"

당연히 교수들은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그 군인은 "남반부 대학은 전부 반동 소굴 아니갔소?" 라며 취조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한 교수가 "아닙니다. 문리과대학은 예전부터 좌익사상 소굴이라 하여 괴뢰정권으로부터 눈총을 받았습니다" 라고 변명하여 겨우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뜸 김구경이라는 교수가 갑자기 호명되어 인민군에게 잡혀갔습니다. 인민군에 붙은 한 학생이  반동이라고 지목한 것 단 하나 때문이라고 하는데, 남은 교수들은 그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민군은 한술 더 떠 김구경 씨가 중어중문학과 교수라는 걸 알고 "아, 그 공자왈 맹자왈 하는 놈들 말이오? 그러니 반동사상이 가득 차 있는거요! 학생들을 때리는 테로(테러)행위를 한 자 아니요?" 라고 무식한 넘겨짚기를 시도하기까지 합니다.
아마 영어영문이었으면 미제라서 반동, 사학과였으면 옛날 것만 연구해서 반동 소리를 들었을테니 전공이 달라도 큰 소용이 없었을 테지만 말이죠.

결국 교수들의 적극적인 변호로 김구경 교수는 겨우 취조를 받고 살아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이는 북한 치하의 서울대가 겪을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북한군 점령 시절의 서울대는 학문의 전당은 커녕 서로를 잡아 죽이려는 아귀다툼의 장이나 다름없었으니요.

그리고 딱 이맘때에 부속기관인 서울대병원에서도 북한군이 국군 부상자와 의료진들을 전부 몰아넣고 학살하는 참상이 벌어졌습니다. '서울대병원 학살사건' 이라 불리는 이 학살은 북한군이 일으킨 대표적인 학살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도 매년 추모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아무튼 다시 캠퍼스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7월 초순부터 대학에는 '자치위원회'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이 세워지며 모든 교수와 교직원, 학생들의 사상검증을 시작했고, 이들에게 자신의 출신성분이나 사상 등을 신분증명서와 함께 제출하게 시켰습니다.

교수들 대상으로는 기본적인 신상은 물론 8살 때부터 지금까지 한 일들을 기억나는 대로 전부 적어야 하는, 역대급 검증을 거쳤습니다. 당연히 여기서 불순하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교단에서 퇴출되는 건 기본이고 목숨의 위협까지 받았죠.

7월 10일에는 북한군의 손에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들의 총책임자가 새로 뽑혔습니다. 서울대와 단국대, 한국대(서경대의 전신)가 북한군이 완전히 접수한 주요 대학이 되었습니다.
서울대 총장으로는 이명선이라는 이름의 중어중문학과 강사가 임명되었는데, 김성칠 씨는 그를 일제 경성제대 시절 일본인 교수의 딸랑이 노릇이라 한 무능한 자라고 평했습니다.

이렇게 북한군 손에 벼락출세한 이명선은 총장 취임사에서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민망한 북한 찬양문을 늘어놓습니다. 이따구로요.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지금 리승만 매국도배와 및 그를 사주, 조종하고 있는 미 제국주의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고, 따라서 우리의 모든 힘은 조국을 수호하고 이를 승리에로 이끄는 방향으로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먼저 총을 들고 일어서고 학생과 및 사회가 이에 따르도록 인도하여야 할 것이다. 이 길밖에는 우리가 걸어갈 길이 다시 없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 대해서 추호라도 회의를 품는 이가 있다면 그는 민족의 대열에서 탈락되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학문을 연구해야 할 대학 교수들더러 총 들고 전장으로 나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대학 총장이 교수들에게 할 소립니까?
김성칠 교수도 "일제도 태평양전쟁 때 이러진 않았다" 라며 탄식을 금치 않았죠.

학생이라고 해서 광기에서 안전하진 않았습니다. 이미 북한에 충성을 맹세한 '세포위원' 학생들이 별별 해괴한 논리로 동료 학생들을 '의용군'으로 밀어넣은 것입니다.

이미 서울 함락 이틀 후인 6월 29일에 성균관대 학생 280여명이 전선 출동을 선동하며 인민군 지원을 부추겼고, 7월 2일, 3일에는 약 1만 6천여명의 각급학교 학생들이 서울운동장 등에서 의용군 지원하자는 시위를 엄청난 규모로 했습니다. 북한은 이 시위를 '애국학생궐기대회' 라며 상당히 띄워줬죠.

말이 의용군이지 한마디로 전장에 나가서 그냥 북한군 총알받이나 하다 죽으란 소리인데, 이들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지껄인 말은 이랬습니다.

"적어도 대학생 된 자는 지금 의용군으로 나가서 (전쟁을) 한번은 치르고 와야지만 앞으로 인민공화국에서 사람값을 하지, 그렇지 않으면 이미 대한민국의 백성질은 했겠다. 무엇으로 이를 속죄할 길이 있으며 반동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냐.

적어도 묵은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나라의 새로운 백성이, 그리고 지도층이 되려면 의용군 지원은 필수의 길이다. 그리고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위 말에 홀린 사람 자체는 몇 명 없었지만, 당시 북한 치하가 얼마나 빡셉니까? 반동 취급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원을 해야죠.
또한 미쳐돌아가는 쌀값으로 밥 한끼 먹기도 힘든 처지에 놓인 지방 출신의 하숙생들도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의용군에 지원했다고 합니다.


7월 중순부터는 본격적으로 북한군들이 서울대 건물 일부에 눌러앉아 점령군 행세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의 행적은 가관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쓰던 고문서나 지도를 아예 수세미나 휴지로 쓰질 않나,

책 표지에 알파벳만 써있으면 영어인 줄 알고 표지를 아예 뜯어 책을 못쓰게 하질 않나,

그것도 모자라 캠퍼스에 노상방뇨를 하거나 꼴보기 싫다고 낙서를 하지 않나...

그야말로 개판 5분전이었습니다. 못 배운 놈들이 학문의 전당에서 깽판을 치면 어떻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황이었죠. 당연히 이런 상황에선 강의는 이뤄지지 못했고, 교수들은 반강제로 건설현장에서 돌을 나르는 등의 노동에 종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부 친공성향 학생들이 북한군에 의해 임시로 '교수' 딱지를 달고 거들먹거렸다고 하는데, 이들은 아버지뻘 되는 기존 교수들에게 반동분자니 사상개조가 덜 되었다느니 등의 폭언을 일삼으며 대학 내의 질서를 어지럽혔습니다. 애초에 말만 교수지 수업도 하지 않는 놈들이지만요.

7월 말부터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아예 교수들까지 반강제로 '의용군'에 밀어넣었던 것입니다. 다른 단과대는 물론이고 최후의 학문 상아탑을 자처하던 문리대가 지원을 망설이며 저항을 해보긴 했지만 무위로 그쳤고, 북한군의 총칼 앞에 교수들이 의용군 지원서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군의 연이은 공습과 국군의 저항으로 병력자원이 바닥난 북한군의 발악을 잘 보여주는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평양에서 김일성대 쪽 사람이 내려와 북한은 학제가 이렇게나 좋다, 학문연구 역량도 좋다, 고기랑 설탕도 배급해준다... 이렇게 선전했는데, 북한군으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교수들에게 그걸 왜 말해줍니까?
자기네들이 억지로 끌고 가면서도 참 염치가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 문리대의 손우성 교수는 당시 공산당원들의 행태에 대해 딱 이렇게 말합니다.

"공산당원들은 피라미드를 쌓는 이집트의 노예와 같다"

한마디로 저렇게 거들먹거린다 할지라도 결국엔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 높으신 분들의 노예와 같은 삶인데, 그게 인민 대중 위주의 주체적인 삶일까요?



8월달은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학교에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가 걸리고, 사상적으로 의심되는 교수들을 전부 숙청 완료했습니다. 숙청이라고 해도 죽인 건 아니고, 그냥 교수직에서 내쳐졌을 뿐입니다. 아무리 북한이라도 교수들을 전부 죽이기엔 부담이 있었죠.

오히려 워낙 인텔리가 부족한지라 일부 교수들은 북한군 치하에서 재개교를 준비하고 있는 단국대, 한국대, 홍익대 등으로 차출 제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김성칠 교수도 단국대로 갈 거냐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외에는 그냥 조용했습니다. 학교 수업은 없었고, 교수들도 의용군 지원한다고 사인은 했지만 실제로 끌려간 사람들은 젊은 교수 몇 빼고는 그냥 살려주었고, 그렇게 살아남은 교수들은 학문이고 뭐고 광주(廣州)나 고양 등지로 식량 구하러 떠돌아다니는 삶이었죠.
물론 학생들은 상당수가 의용군으로 잡혀간 지 오래였습니다.

9월이 되자 아직 서울에 남아있는 교수들은 몰래 남한측이나 일본에서 송출하는 라디오 단파방송을 들으며 희망을 가질 정도로 마음이 북한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선전에선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니 뭐니 말이 많았지만, 정작 돌아온 건 의용군 '지원' 서류와 푸대접, 쑥대밭이 된 캠퍼스 뿐이었으니요.
비단 교수들뿐만 아니라 서울 시민들 다수도 미군의 총반격을 바랄 정도였죠.

그리고 운명의 날은 왔습니다.
인천상륙작전과 이어지는 UN군과 국군의 반격에 북한군은 단 2주만에 서울을 다시 내줬고, 서울대 캠퍼스도 대한민국 치하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이 캠퍼스엔 다시 미8군 사령부가 진주함으로써 서울대가 다시 학문의 전당이 되기에는 또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했습니다. 전쟁 역시 계속되고 있었고요.
참 가슴아픈 시절이긴 했습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무수천.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minjune98&logNo=222560427755&referrerCode=0&searchKeyword=%EA%B9%80%EC%84%B1%EC%B9%A0%20%EC%A7%80%EC%9D%8C,%20%EC%A0%95%EB%B3%91%EC%A4%80%20%ED%95%B4%EC%A0%9C,%20%27%EC%97%AD%EC%82%AC%20%EC%95%9E%EC%97%90%EC%84%9C%27,%20%EC%B0%BD%EB%B9%84,%20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