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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10일 을미 1번째기사 1479년 명 성화 15년

표류했던 제주사람 김비의·강무·이정 등 세 사람이 유구국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지나온 바 여러 섬의 풍속을 말하는 것이 매우 기이하므로, 임금이 홍문관에 명하여 그 말을 써서 아뢰라고 하였다. 그 말에 이르기를,

"우리들이 정유년 2월 1일에 현세수·김득산·이청민·양성돌·조귀봉과 더불어 진상할 감자를 배수하여 같이 한 배에 타고 바다로 출범하여 추자도로 향해 가다가, 갑자기 크게 불어오는 동풍을 만나 서쪽으로 향하여 표류하였습니다. 처음 출발한 날로부터 제 6일에 이르러서는 바닷물이 맑고 푸르다가, 제 7일부터 제 8일까지 1주야를 가니 혼탁하기가 뜨물과 같았으며, 제 9일에 또 서풍을 만나서 남쪽을 향하여 표류해 가니 바닷물이 맑고 푸르렀습니다. 제 14일 째에 한 작은 섬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미처 기슭에 대이지 못하여 키가 부러지고 배가 파손되어 남은 사람은 모두 다 물에 빠져 죽고, 여러가지 장비도 모두 물에 빠져 잃어버렸으며, 우리들 세 사람은 한 판자에 타고 앉아 있었습니다. 표탕하는 사이에 마침 고기잡이배 두 척이 있어서 각각 네 사람이 타고 앉아 있다가 우리들을 발견하고는 거두어 싣고 가서 섬 기슭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윤이시마라고 하였습니다. 

그곳 풍속에 섬을 일컬어 시마라고 한다.

인가가 섬을 둘러 살고 있고, 둘레는 이틀 길이 될 듯하며, 섬사람은 남녀 1백여 명으로 풀을 베어 바닷가에 여막을 만들어서 우리들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제주를 출발한 때로부터 큰 바람이 파도를 일으켜 파도가 이마 위를 지나고, 물이 배 가운데 꽉 차서 뱃전이 잠기지 않은 것은 두어 판자뿐이었습니다. 김비의이정이 바가지를 가지고 물을 퍼내고, 강무는 노를 잡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다 배멀미를 하여 누워 있어서 밥을 지을 수가 없어 한 방울의 물도 입에 넣지 못한지가 무릇 열나흘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섬사람이 쌀죽과 마늘을 가지고 와서 먹였습니다. 그날 저녁부터는 처음으로 쌀밥 및 탁주와 마른 바다물고기를 먹었는데, 물고기 이름은 다 알지 못했습니다. 7일을 머문 뒤에 인가에 옮겨 두고서 차례로 돌려가며 대접을 하는데, 한 마을에서 대접이 끝나면 문득 다음 동네로 체송하였습니다. 한 달 뒤에는 우리들을 세 마을에 나누어 두고 역시 차례로 돌려가며 대접하는데, 무릇 술과 밥은 하루에 세끼였으며, 온 섬사람의 용모는 우리 나라와 동일했습니다.

1. 그 나라 풍속은 귀를 뚫어 푸르고 작은 구슬로써 꿰어 2, 3촌쯤 드리우고, 또 구슬을 꿰어 목에 3, 4겹을 둘러서 1자쯤 드리웠으며, 남녀가 같이 하는데 늙은 자는 안했습니다.

1. 남자·여자 모두 다 맨발로 신이 없었습니다.

1. 남자는 머리를 꼬아 곱쳐서 포개어 삼베 끈으로 묶어서 목 가에 상투를 틀었는데 망건을 쓰지 않았습니다. 수염은 길어서 배꼽을 지나갈 정도인데, 혹은 꼬아서 상투를 두어 겹을 둘렀습니다. 부인의 머리도 길어서 서면 발뒤꿈치까지 미치고 짧은 것은 무릎에 이르는데, 쪽을 찌지 않고 머리 위에 둘렀으며, 옆으로 나무빗을 귀밑머리에 꽂았습니다.

1. 가마·솥·숟가락·젓가락·소반·밥그릇·자기·와기는 없고, 흙을 뭉쳐서 솥을 만들어 햇빛에 쪼여 말려서 짚불로써 태워 밥을 짓는데, 5,6일이면 문득 파열해 버립니다.

1. 쌀을 전용하고, 비록 조가 있더라도 심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 밥은 대나무 상자에 담아서 손으로 뭉쳐 덩어리를 만들되 주먹 크기와 같이 하고, 밥상은 없고 작은 나무 궤를 사용하여 각각 사람 앞에 놓습니다. 매양 밥을 먹을 때에는 한 부인이 상자를 맡아서 이를 나누어 주며 사람마다 한 덩어리씩인데, 먼저 나뭇잎을 손바닥 가운데 놓고 밥덩이를 그 나뭇잎 위에 얹어 놓고 먹으며, 그 나뭇잎은 연꽃잎과 같았습니다. 한 덩어리를 다 먹으면 또 한 덩어리를 나누어 주어 세 덩어리로 한도를 삼으나, 먹을 수 있는 자에게 덩어리 수를 계산하지 않고 다 먹는 데에 따라 주었습니다.

1. 염장은 없고, 바닷물에 채소를 넣어서 국을 만들며, 그릇은 바가지를 사용하거나 혹은 나무를 파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1. 술은 탁주는 있으나 청주는 없는데, 쌀을 물에 불려서 여자로 하여금 씹게 하여 죽같이 만들어 나무통에서 빚으며, 누룩을 사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많이 마신 연후에야 조금 취하고, 술잔을 바가지를 사용하며, 무릇 마실 때에는 사람이 한 개의 바가지를 가지고 마시기도 하고 그치기도 하는데, 양에 따라 마시며 수작의 예가 없고, 마실 수 있는 자에게는 더 첨가합니다. 그 술은 매우 담담하며, 빚은 뒤 3, 4일이면 익고 오래되면 쉬어서 쓰지 못하며, 나물 한가지로 안주를 하는데, 혹 마른 물고기를 쓰기도 하고, 혹은 신선한 물고기를 잘게 끊어서 회를 만들고 마늘과 나물을 더하기도 합니다.

1. 혹 쌀을 불려 보구에 찧어서 이를 뭉쳐 떡을 만들되 종려나무 잎의 크기와 같이 하고, 종려나무 잎으로 싸고 짚으로 묶어서 삶아 먹습니다.

1. 그 거처는 모두 1실을 만들고, 내실이 따로 없고 창이 없으며, 전면은 조금 높이 들려 있고, 후면은 처마가 땅에 드리워져 있으며, 대개 띠를 사용하고 기와가 없으며, 밖에는 울타리가 없고 잠자리는 목상을 사용하며, 이불과 요가 없고 포석을 깔아서 사용하며, 사는 집 앞에 따로 누고를 만들어 거둔 바의 벼를 쌓아 두었습니다.

1. 관대가 없고 더우면 혹 종려나무 잎을 사용하여 삿갓 모양의 것을 만들었는데, 우리 나라의 승립과 같았습니다.

1. 삼·목면이 없고, 양잠도 하지 않았으며, 오직 모시를 짜서 베를 만들고, 옷을 만들되 직령과 같았으며 옷깃과 주름은 없고 소매는 짧고 넓으며, 염색은 남청을 쓰고, 속옷은 백포 세 폭을 써서 볼기에 매었으며, 부인의 옷도 같았으나, 다만 속치마를 입고 속옷이 없으며 치마도 푸른 빛을 물들였습니다.

1. 집에는 쥐·소·닭·고양이가 있으나, 소와 닭의 고기를 먹지 않고 죽으면 곧 묻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르기를, ‘소·닭의 고기는 먹을 만한데 묻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더니, 섬사람들은 침을 뱉으면서 비웃었습니다.

1. 산에는 재목이 많고, 잡수가 없었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오직 비둘기와 황작뿐이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거북·뱀·두꺼비·개구리·모기·파리·박쥐·벌·나비·사마귀·잠자리·지네·지렁이·개똥벌레·게가 있었습니다.

1. 철야는 있으면서도 쟁기를 만들지 않고 작은 삽을 사용하여 밭을 파헤치고 풀을 제거하여 조를 심습니다. 수전은 12월 사이에 소를 사용하여 밟아서 파종을 하고, 정월 사이에 이앙을 하되 풀을 베지 않으며, 2월에 벼가 바야흐로 무성하여 높이가 한 자쯤 되고, 4월에 무르익는데, 올벼는 4월에 수확을 마치고 늦벼는 5월에 바야흐로 추수를 마칩니다. 벤 뒤에는 뿌리에서 다시 자라나 처음보다 더 무성하며, 7, 8월에 수확합니다. 수확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근신하여, 비록 말을 하더라도 소리를 크게 하지 아니하고, 입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지 아니하며, 혹 풀잎을 말아서 불면 막대기로 이를 금하다가, 수확을 한 뒤에야 작은 피리를 부는데, 소리가 매우 가늘었습니다. 한번 수확한 벼는 이삭을 연달아 묶어서 누고에 두고, 대나무 막대기로 이를 털어서 디딜방아로 찧습니다.

1. 풀과 벼를 베는 데에는 낫을 쓰고, 쪼개거나 찍는 데에는 도끼와 무자를 사용하며, 또 작은 칼이 있고, 궁시와 부극은 없으며, 사람들은 작은 창을 가지고 기거하며 놓지를 아니하였습니다.

1. 사람이 죽으면 관 속에 앉혀서 언덕의 석굴 밑에 두고 흙으로 묻지 않았으며, 만약 언덕의 석굴이 넓으면 대여섯 개의 관을 함께 두었습니다.

1. 그 지역은 따뜻하여 겨울에도 서리와 눈이 없고 초목이 마르지 아니하며 또 얼음이 없습니다. 섬사람들은 홑옷 두 벌을 입고 여름에는 다만 하나를 입는데 남녀가 같았습니다.

1. 채소로는 마늘·가지·참외·토란·생강이 있는데, 가지의 줄기 높이가 3, 4척이나 되고 한 번 심으면 자손에게까지 전하는데 결실은 처음과 같고, 너무 늙으면 가운데를 찍어 버리나 또 움이 나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1. 나무는 오매·뽕나무·대나무가 있었습니다.

1. 과실로는 청귤·작은 밤이 있는데, 귤은 사시로 꽃이 피었습니다.

1. 등촉이 없고, 밤이면 대를 묶어서 횃불을 만들어 비추었습니다.

1. 집에는 뒷간이 없고 들에다 그냥 눕니다.

1. 베를 짤 때에는 성서를 사용하는데 모양은 우리 나라와 같았고, 그 밖에 다른 기계는 같지 않았으며, 승수와 추세도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1. 땅을 파서 작은 우물을 만들고 물을 길을 때에는 바가지와 병을 썼습니다.

1. 배는 키와 돛대만 있고 노는 없는데 순풍에만 돛을 달 뿐이었습니다.

1. 그 풍속에 도적이 없어서 길에서 떨어진 것을 줍지 아니하고, 서로 꾸짖거나 큰 소리로 싸우지 아니하며, 어린아이를 어루만져 사랑하여 비록 울더라도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

1. 풍속에 추장이 없고, 문자를 알지 못했으며, 우리들은 저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땅에 있으니, 조금은 그 말하는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고향을 생각하고 항상 울었는데, 그 섬 사람이 새 벼의 줄기를 뽑아서 옛날 벼와 비교해 보이고는 동쪽을 향하여 불었는데, 그 뜻은 대개 새 벼가 옛 벼와 같이 익으면 마땅히 출발하여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말함이었습니다.

무릇 6삭을 머물고, 7월 그믐에 이르러 남풍이 불어 오는 것을 기다려서 섬사람 13명이 우리들과 같이 양식과 탁주를 준비해 가지고 같이 한 척의 배를 타고서 1주야 반을 가니,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소내시마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자들은 8,9일 동안을 머물다가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내시마는 좁으면서 길었는데, 둘레는 4, 5일정이 될 만하였고, 그 언어·음식·의복·거실·풍토는 대개 윤이시마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부인은 코를 양쪽으로 뚫어 조그마한 검은 나무를 꿰었는데, 모양이 검은 사마귀와 같았고, 정강이에는 조그마한 푸른 구슬을 둘러 매었는데, 그 넓이가 수촌쯤이었습니다.

1. 벼와 조를 쓰는데 조는 벼의 3분의 1쯤 되었습니다.

1. 수확한 나락은 가까이 있는 빈터에 쌓아 두었는데 높이가 모두 두 길쯤이었고, 같은 마을 사람은 한곳에 모여서 사는데 많은 것은 4, 50여 소에 이르렀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개를 기르는데, 소는 도살하여 이를 먹고 닭고기는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1. 산에는 산돼지가 있는데 섬사람이 창을 가지고 개를 끌고 가서 사냥해 잡아다가 그 털을 태우고, 베어서 삶아 먹으나, 사냥한 자만 먹고 비록 지극히 친한 자일지라도 주지 않으니, 만일 남에게 주면 잡기가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1. 과실로 유자·작은 밤·도토리가 있었습니다.

1. 채소로는 토란·치과·생강·마늘·가지·호박이 있었습니다.

1. 산에는 재목이 많아서 혹은 실어내어 다른 섬에 무역하기도 하고, 또 동백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두어 길이며 꽃이 피었습니다.

1. 마가 있는데 그 길이가 한 자 남짓하고 사람의 몸 크기와 같으며, 두 여자가 함께 하나를 이고 도끼로 끊어서 삶아 먹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까마귀·비둘기·바다가마우지·갈매기·해오리·황작이 있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모기·파리·두꺼비·개구리·뱀·달팽이가 있었는데, 그 풍속에는 달팽이를 삶아서 먹었으며, 큰 뱀의 길이는 5, 6척이나 되고 크기는 서까래와 같았으며,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가 구렁이를 보고서 아이의 발을 구렁이 등에 올려 놓고 구렁이의 꼬리를 어루만졌는데 커서 흔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무릇 5삭을 머물다가, 12월 그믐에 이르러서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과 같이 한 척의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갔더니, 한 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섬의 이름은 포월로마이시마라고 하였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서 산이 없었는데 모두 다 모래와 돌로 된 땅이었고, 둘레는 소내도에 비교하여 조금 작았습니다. 그 언어와 의복·거실·풍토는 대개 윤이도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논과 벼는 없어서, 소내도에서 무역해 온다고 하였습니다.

1. 밀·보리를 심고, 가을이 되면 우분을 사용하되 손으로 움켜서 밭에 넣고, 삽을 사용하여 흙을 일으켜서 덮으며, 2, 3월에 바야흐로 익습니다. 추수를 마치고 난 뒤에 밭을 일구어 심는데 아홉 종류의 곡식을 심고, 또 10월 사이에 파종하여 2, 3월에 수확해서 마치고, 다시 심어서 7, 8월에 또 수확하였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비둘기·황작·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를 기르며, 소를 잡아 먹으나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1. 채소는 가지·토란·마늘·박이 있었습니다.

1. 남녀가 귀를 뚫어 조그마한 푸른 구슬을 꿰었고 또한 구슬을 꿰어서 목에 걸었습니다.

1. 재목은 없고 집을 지을 때에는 모두 다 소내도에서 가지고 와서 짓는다고 하였으며, 또 과일 나무도 없었습니다.

1. 모기·파리·달팽이가 있었는데, 그 풍속에 달팽이를 삶아서 먹는다고 하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한 척의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포라이시마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2일정이 될 만 하였습니다. 인가는 겨우 40호 남짓하고, 언어·의복·음식·거실·토풍이 대개 윤이도와 같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그 풍속은 푸른 구슬로써 팔 및 정강이를 둘러감아 매었는데 남녀가 같았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비둘기·황작·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벼는 없었으며, 쌀은 소내도에서 무역해 온다고 하였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를 기르며, 소를 잡아 먹는데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1. 채소는 가지·토란·마늘·박이 있었습니다.

1. 재목이 없고, 과일나무도 없었습니다.

1. 곤충은 모기·파리가 있고, 거북이·뱀·두꺼비·개구리는 없었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에 올라서 하루 낮 동안을 가니, 한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섬의 이름은 훌윤시마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땅은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1일정이 될 만하였으며, 그 언어·음식·의복은 또한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벼는 없는데 쌀은 소내도에서 무역한다고 합니다.

1. 날짐승은 비둘기·황작·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집에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를 기르며, 소는 잡아 먹어도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토란이 있었습니다.

1. 과일나무와 재목이 없었습니다.

1. 곤충은 모기·파리·달팽이가 있었는데, 그 풍속에 달팽이를 삶아 먹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8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한 배를 타고 1주야반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타라마시마라고 하였습니다.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고, 둘레는 1일정이 될 만하며, 사람은 50여 호가 살고 있었고, 그 언어·음식·거실·토풍이 대개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벼는 없었습니다.

1. 재목이 없어서 혹은 소내도에서 가져오고 혹은 이라부도에서 취해온다고 하며, 또 과일 나무도 없었습니다.

1. 그 풍속에 저포를 사용하여 남색을 물들여 두드려서 옷을 만들었는데, 그 빛깔은 채단과 같았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비둘기·황작·갈매기가 있었습니다.

1. 곤충과 가축은 앞의 섬들과 같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토란이 있었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이라부시마라고 하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둘레는 2일정이 될 만하고, 그 언어·음식·거실·토풍은 대개 윤이도와 같았으며, 그 의복은 타라마도와 같고,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1. 부인은 수정으로 된 큰 구슬을 목에 걸었습니다.

1. 기장·조·밀·보리가 있고, 또한 벼도 있었는데 벼는 보리의 10분의 1이었습니다.

1. 작은 산골짜기가 있어서 종려나무·뽕나무·대나무가 있고, 또한 재목도 있었습니다.

1. 집에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를 기르며, 소는 잡아 먹는데 닭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술을 빚는 데에는 쌀 누룩을 사용하였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갈매기·해오라기·황작·비둘기가 있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모기·파리·달팽이가 있는데, 달팽이를 삶아 먹고 뱀은 없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토란·생강이 있었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한 섬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멱고시마였습니다. 호송인은 다음날에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땅은 평평하고 넓어서 산이 없고, 둘레는 5, 6일정이었으며, 그 언어·음식·거실·토풍은 대개 윤이도와 같았고, 의복은 타라마도와 같았으며,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술을 빚는 것은 이라부도와 같았으며, 벼·기장·조·밀·보리가 있었습니다.

1. 밥을 짓는 데에는 쇠 솥을 사용하는데, 발은 없고 가마와 비슷하였으며, 이는 곧 유구국에서 무역한 것이었습니다.

1. 부인은 구슬을 목에 걸었는데 또한 이라부도와 같았습니다.

1. 집에는 뒷간이 있었습니다.

1. 집에는 쥐가 있고, 소·닭·고양이·개를 기르며, 소는 잡아 먹어도 닭고기는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1. 날짐승은 새·비둘기·황작·갈매기·해오라기가 있었습니다.

1. 곤충은 거북이·뱀·두꺼비·개구리·모기·파리·달팽이가 있었는데, 달팽이를 삶아 먹었으며, 나머지는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채소는 마늘·수박·가지·토란이 있었습니다.

1. 종려나무·뽕나무·대나무가 있고, 산에는 잡목이 많았으나 그 이름을 다 알지 못하였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섬사람 15명이 우리들을 데리고 같이 한 척의 배를 타고 2주야 반을 가서 유구국에 이르게 되었는데, 바닷물의 기세가 용솟음치고, 파도가 험악하여, 섬사람도 모두 배멀미를 했습니다.

유구국의 국왕이 호송인을 포상하여 각각 청홍 면포를 하사하고, 술과 밥을 후하게 먹이어 종일토록 취해 있었으며, 그 사람들은 하사받은 바 면포로써 옷을 만들어 입고 한 달을 머물다가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나라 사람과 통사가 와서 우리들에게 묻기를,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므로, 우리들이 대답하기를, ‘조선 사람이다.’라고 하니, 또 묻기를, ‘너희들은 고기잡이를 하다가 표류되어 여기까지 이르렀느냐?’ 하므로, 우리들은 같이 의논하여 대답하기를, ‘다 함께 조선국 바다 남쪽 사람인데, 진상할 쌀을 싣고 경도로 향해 가다가 바람을 만나서 여기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습니다. 통사는 우리들이 한 말을 써가지고 국왕에게 아뢰었는데, 조금 있다가 두어 관인을 보내어 와서 우리들을 맞아 한 객관에 있게 하였습니다. 이 집은 바다와의 거리는 5리가 되지 못했는데, 판자로써 집을 덮었고, 문호와 창벽이 있었으며, 돌 담장이 있었는데 높이가 두 길이요, 담장에 문이 있어 밤에는 자물쇠를 걸었습니다. 또 관사가 곁에 있었는데, 수령 두 사람과 감고 두 사람이 있었고, 따로 하나의 창고를 두어 재물·전포·어염을 저장해 두었습니다. 무릇 출납하는 데에는 수령이 이를 감독하였는데, 통사가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나라에 군읍의 관청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을 대접하는 데에는 매일 세 끼이고, 술도 있었습니다.

1. 한 집에서 5일의 양미와 탁주와 생선젓을 관청에서 받아 대접하기를 마치면, 다음 집에서 또 받아서 윤차로 대접하였습니다. 대개 5, 6일마다 수령이 한 번 우리들을 찾아와 술과 안주를 대접했고, 또 관인으로 하여금 상시로 풍후하게 대접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마침 국왕의 어머니가 출유하는 것을 보았는데, 칠련을 타고 사면에 발을 드리웠으며, 멘 자가 거의 20인으로 모두가 흰 저의를 입고 비단으로 머리를 쌌습니다. 군사는 긴 칼을 가지고 활과 화살을 찼는데, 앞뒤를 옹위한 자가 거의 1백여 인이었고, 쌍각·쌍태평소를 불었으며, 화포를 쏘았습니다. 아름다운 부인 4, 5인이 채단 옷을 입고, 겉에는 백저포의 긴 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들이 길 곁에 나가서 배알하니, 연을 멈추고 두 개의 납병에다 술을 담아서 검은 칠을 한 목기로써 우리들에게 주었는데, 그 맛이 우리 나라의 것과 같았습니다. 어떤 소랑이 조금 뒤에 따로 갔는데, 나이는 10여 세가 될 만하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왔으며, 머리를 뒤로 드리우고 땋지 않았으며, 붉은 비단옷을 입고 띠를 묶었으며, 살찐 말을 탔습니다. 말굴레를 잡은 자는 모두 다 흰옷을 입었고, 말을 타고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4, 5인이며, 좌우에서 부옹하는 자도 매우 많았습니다. 위사로서 긴 칼을 가진 자가 20여 인이요, 일산을 가진 자는 말을 나란히 타고 가면서 햇빛을 막았습니다. 우리들이 또한 배알하여 뵈이니 소랑이 말에서 내리어 납병에다 술을 담아서 대접하는데, 마시기를 마치자 소랑은 말에 올라서 갔습니다. 국인이 이르기를, ‘국왕이 훙하고, 사군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모후가 임조하게 되었는데, 소랑이 나이가 들면 마땅히 국왕이 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1. 7월 15일에는 모든 사찰에서 당개를 만드는데, 혹은 채단을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채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인형 및 조수의 형상을 만들어 왕궁에 보냈습니다. 거민은 남자 가운데 소장한 자를 뽑아서 혹은 황금 가면을 쓰고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면서 왕궁으로 나아가는데, 피리는 우리 나라의 작은 피리와 같고, 북 모양도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그날 밤에는 크게 잡희를 벌이고 국왕이 임석하여 관람하였으므로, 남녀로 가서 보려는 자가 길을 메우고 거리에 넘쳤으며, 재물을 말에 싣고 왕궁으로 나아가는 자도 많았습니다.

1. 해안에서 왕궁과의 거리는 10여 리였는데, 우리들이 멀리 바라보자 한 전각이 매우 높으므로 물어보았더니, 곧 국왕의 거처라고 하였으며, 인가는 간혹 개와였으나 판옥도 매우 많았습니다.

1. 남녀가 상투를 이마의 가장자리에 틀어 올렸는데, 비단으로 싸고, 서인은 모두 다 백저 옷을 입었습니다. 부인은 머리 뒤에 머리카락을 쪽지어 올렸고, 모두 다 백저포의 적삼과 백저포의 치마를 입었고, 혹은 백저포의 장옷을 입었으며, 그 귀한 자는 또한 채단을 입었고 유오아·유상도 있었습니다. 그 수령은 아롱지게 물들인 비단을 사용하여 상투를 싸고 백세저포를 입었으며, 의대는 붉은 물을 들인 비단이고, 나갈 때에는 말을 타며 종자가 수인이었습니다.

1. 논과 밭은 서로 반반이었는데, 밭이 조금 많고 논은 겨울에 파종을 해서 5월에는 벼가 다 익어 수확을 마치며, 또 소로서 이를 밟아 다시 파종을 해서 7월에 이앙하고, 가을과 겨울 사이에 또 수확을 하였습니다. 밭은 작은 삽으로 이를 일구어서 조를 심는데, 또한 겨울에 처음으로 파종하고 5월에 수확하고, 6월에 다시 파종하면 8월에 처음으로 이삭을 드리우고 익어갑니다.

1. 밥은 쌀을 사용하고 또 염장을 사용하여 국을 만들며, 채소를 섞는데 혹은 고기를 쓰기도 합니다.

1. 술은 청주와 탁주가 있는데, 납병에다 담고 은술잔으로써 잔질하며 맛은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또 남만국 외 술이 있었는데 빛은 누렇고 맛은 소주와 같으며, 매우 독하여 두어 종지를 마시면 크게 취하게 됩니다.

1. 사찰은 판자로써 덮개를 하고, 안에는 옻칠을 했으며, 불상이 있는데, 모두 다 황금이었고, 거승은 머리를 깎았으며, 치의도 입고 백의도 입었으며 그 가사는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1. 밥은 옻칠한 목기에 담고, 국은 작은 자기에 담으며, 또 자접이 있고, 젓가락은 있으나 숟가락은 없는데 젓가락은 나무였습니다.

1. 국중에 시장이 있는데, 채단·증백·저포·생저·빗·전도·바늘·채소·어육·소금·젓갈이 있었고, 남만국의 아롱진 비단·아롱진 면포·단향·흰 날에 검은 씨의 면포·등당의 푸르고 검고 흰 면포·자기 등의 물건이 있었습니다.

1. 중국 사람이 장사로 왔다가 계속해서 사는 자가 있었는데, 그 집은 모두 다 기와로 덮었고 규모도 크고 화려하며 안에는 단확을 칠하였고 당중에는 모두 다 의자를 설치하였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감투를 쓰고 옷은 유구국과 같았으며, 우리들에게 갓이 없는 것을 보고서는 감투를 주었습니다.

1. 나라 사람은 모두 맨발이고 신발을 착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 통사는 반드시 일본인으로서 그 나라에 있는 자로 하여금 하게 하였습니다.

1. 강남인남만국 사람도 모두 와서 장사를 하여 왕래가 끊이지 아니하는데, 우리들도 다 보았습니다. 남만인은 상투를 틀어올렸는데, 그 빛이 매우 검어서 보통 사람보다 특이하였고, 그 의복은 유구국과 같았으나 다만 비단으로 머리를 싸지 아니하였습니다.

1. 활·화살·도끼·갈고리·도검·무자·낫·삽·갑옷과 투구가 있었는데, 갑옷은 혹 철을 쓰기도 하고 가죽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1. 군사는 철로써 정강이를 싸고, 혹은 가죽에 옻칠을 입힌 것을 사용했는데, 행전과 같았습니다.

1. 그 지대는 따스하기가 윤이도와 같았습니다.

1. 소나무·종려나무·대나무가 있고, 그 나머지는 잡목인데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1. 집에 쥐가 있고, 말·소·염소·고양이·돼지·개·닭·집비둘기·거위·오리를 기르며, 말과 소를 잡아 먹기도 하고 혹은 저자에 팔기도 하며, 또한 닭을 먹었습니다. 날짐승으로는 까마귀·까치·황작·매·제비·갈매기·바다 가마우지·올빼미가 있었습니다.

1. 과실로는 매화·복숭아·유자·청귤이 있었습니다.

1. 채소로는 토란·가지·참외·동과·무우·파·마늘·아욱·박·파초가 있었습니다.

1. 곤충으로는 모기·파리·두꺼비·개구리·거북·뱀·달팽이·벌·나비·사마귀·잠자리·등에·연가시새끼·지네·거미·매미·빈대·지렁이·개똥벌레가 있었고, 또한 메뚜기와 비슷하며 큰 것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잘 먹었으므로 혹 저자에 팔기도 하였고, 또 박쥐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무릇 석 달을 머물다가 통사에게 말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통사가 국왕에게 전달하자, 국왕이 대답하기를, ‘일본 사람은 성질이 나빠서 너희들이 보전할 수가 없으므로, 너희들을 강남으로 보내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보다 앞서 통사에게 물어서 일본은 가깝고 강남은 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본국으로 갈 것을 청하였습니다. 마침 일본의 패가대 사람 신이사랑 등이 장사하러 와서 국왕에게 청하기를, ‘우리 나라는 조선과 통호하고 있으니,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보호하여 돌려보내기를 바랍니다.’ 하니, 국왕이 이를 허락하고, 또 이르기를, ‘도중에 잘 무휼하여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이어 우리들에게 돈 1만 5천 문, 호초 1백 50근, 청염포·당면포 각 3필을 주고, 또 석달의 양미 5백 근, 염장·어해·왕골 자리·칠목기·밥상 등의 물건을 주었습니다.

8월 1일에 신이사랑 등 1백여 인이 우리들을 데리고 한 척의 큰 배를 같이 타고서 4주야를 가다가 일본의 살마주에 이르렀으나, 기슭을 오르는 데에 파도가 매우 사나워서 겨우 바다를 건넜는데, 형세가 제주와 같았습니다. 김비의포라이도에서부터 두통이 생겨서 낫지 않고 유구국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했는데, 국왕이 이를 알고 남만국의 약주를 주었습니다. 신이사랑 등도 이를 보고 또 쑥으로 뜸을 뜨는 등 곡진히 치료해 주었으며, 배 가운데에 있어서는 대변이나 소변 때에도 사랑이 매양 그 종자로 하여금 붙들어 주게 하였는데, 이는 뱃머리에서 추락할까 걱정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살마주에 도착하여서는 병이 즉시 나았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옛 주인집에 의탁하여 머물러 살게 하고, 술과 밥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사랑 등은 류구국에서 준 양식과 반찬으로 우리에게 하루 세 끼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주의 태수는 두 번 우리들과 신이사랑 그 집에 초대하여 술과 밥, 떡과 안주를 대접하였는데, 모두 마다 물고기였습니다. 그 집은 판옥으로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였으며 항상 집에 있으면서 공사를 보았고, 재산은 넉넉하고 많으며 준마 수필이 있었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긴 칼을 메고 있는 자 20여 인이 항상 문 아래에 있었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9월에 이르러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서 신이사랑 등이 별선을 사가지고 우리들을 데리고서 같이 타고 연안으로 해서 무릇 3주야 만에 타가서포에 이르러 기슭에 올랐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말을 타고서 우리를 데리고 육로로 왔습니다. 김비의가 병들었다가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기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또한 말을 구하여 타게 하고 남은 두 사람은 도보로 2일을 갔는데, 산골짜기가 매우 험했습니다. 패가대에 이르니, 부관인 좌미시 등이 비용을 마련해서 해로를 경유하여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인가가 조밀한 것이 우리 나라의 도성과 같았고, 그 가운데 저자가 있는 것도 우리 나라와 같았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데리고 그 집에 머물게 하였는데, 대접하는 술·밥·안주·반찬이 매우 풍부하였으며, 상관·부관 두 사람이 차례로 하루 세 끼씩 대접해 주었습니다. 대내전에서 보낸 바 주장이 우리들과 신이사랑을 맞아서 술과 안주를 대접하였는데, 사는 바의 기와집은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뜰 아래에 시립해 있는 자 30여 인은 모두 다 칼을 찼고, 문밖의 군사도 집을 지키는 자가 그 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주장을 보고난 뒤 그는 소이전을 공격하기 위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나갔는데, 창·칼, 작은 깃발을 가진 자가 3, 4만명이었습니다. 무릇 4일 만에 싸움에 이기고 돌아왔는데 6급을 베어서 장대 끝에 효수하고, 혹 어떤 사람은 그 이빨을 살펴서 그 사람의 귀천을 징험하였는데, 이는 대개 관작이 있는 자는 이빨을 물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병란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도망하여 숨었던 자가 몰래 해도에 있다가 나와서 노략질을 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달을 머물다가 병란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금년 2월에 이르러 우리들을 데리고 배에 올라 15리쯤 가서 작은 섬에 이르니, 이름을 식가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머물면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바다로 출범하여 초저녁 어두울 무렵에 일기도에 이르러 기슭에 오르니, 인가가 매우 많았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데리고 가서 주인집에 투숙시키고 가지고 온 양식과 반찬으로 우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사흘을 머물고 또 바다로 출범하여 하루 낮을 가서 저물녘에 대마도의 초나포에 이르러 기슭에 올랐습니다. 신이사랑 등은 우리들을 데리고 그 옛 주인집에 투숙시켰는데, 그 주인은 곧 신이사랑의 숙부였으며, 가지고 온 양식과 반찬으로 대접해 주었고, 주인도 술을 대접하였습니다. 그 땅은 메마르고 밭이 없으며 백성은 모두 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 지나온 바의 여러 섬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도주가 떠나기 어렵다고 만류하기도 하였고 바람도 순조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두 달을 머물러 있다가 4월 어느 날에 동풍을 만나 연안을 따라 가서 사포에 이르러 투숙하였습니다. 여기서 이틀을 머물고 바람이 순조로우므로 또 기슭을 따라 가서 도이사지포에 정박하였으며, 사흘을 머물다가 동풍을 만나 아침 일찍이 바다로 출범하여 하루 낮을 가서 저물녘에야 염포에 이르러 머물었습니다. 울산 군수는 우리들이 감투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각각 갓과 베 1필씩을 주었으므로, 우리들은 옷을 만들어 입고 올라왔습니다. 이상 윤이도 이하 여러 물산을 우리들이 본 것은 이 정도 입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제주도인들의 표류기가 나와있는데 15세기 후반 류큐 왕국과 일본 서부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흥미로운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