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모토 테츠조.
일본군 최고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불리며
공인 격추수 80기로 세계 에이스 파일럿 랭킹 152위에 불과했지만 동시에 비독일계 2위와 동시에 해군 출신 파일럿 중에 격추수 1위와 일본 최고의 에이스 파일럿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으며
에이스 파일럿들중에서도 타고난 천재였다.
중일전쟁 당시 첫 출진에 적기 5기를 격추해 첫 출전에 에이스 파일럿이 된 기록을 세웠던
그야말로 타고난 신동이였다.
비록 평상시엔 조용한 성격에 왜소한 체격을 지닌 평범한 남자였지만
전투기에 탑승하면 활력이 넘치고 살기가 흐르는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개시 전날에 기동부대 정찰을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단독으로 야간정찰에 투입되어 레이더 방공망을 물리치고 적 상륙정에 총격까지 가하는 기엄을 선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더 놀라운 점은.
그가 술을 마시던 도중 긴급히 출동해
출격 당시 만취 상태였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시력이 1.0으로 파일럿들중에 나쁜 시력에 속했는데,
그가 말하길
"적기는 보는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실제로 그는 프로펠러에 반사된 빛이나 무전기에 적의 전파가 간섭되어 생기는 주파수 끊김 등으로 적기를 찾아내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그는 제로센을 타고 단독으로 거대한 폭격기인 B-29를 격추한 전과도 있으니.
그의 실력은 정말 타고났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조국인 일본제국은 이미 패전이 확정된 상황이였다.
그는 전쟁 말기엔 교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그는 뛰어난 실력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고 인자한 교관으로 유명했으며.
카미카제에 대해 항명까지 할 정도로 카미카제를 극도로 반대했었다.
하지만 결국 일본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와 펫 맨이 투하됨과 동시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이와모토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전범장교 색출 문제로 두 번이나 불려가 조사를 받음과 동시에 반군국주의 라디오에 불려가 선전을 강요당하는 시련을 격게되며.
그의 고향인 사할린 열도는 소련의 영역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이후 자신에게 연심을 품은 여인과 결혼하고 홋카이도로 떠났지만 1년 반만에 그곳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부인을 떠나보내게 되는 시련을 겪는다.
전후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술에 찌들어 살기도 했지만
정의감 강한 면모는 그대로여서 결핵 환자의 시신을 아무도 건들이지 않자 콧구멍에 솜을 끼우고 들어가 혼자서 염을 하고 장사를 지내준 일화도 있다.
손재주가 좋아 두 아이의 장난감을 손수 만들어줄 정도로 다정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이후 간신히 취직에 성공했지만 충수염을 장염으로 오진받고 대수술을 받고 무마취로 늑골을 제거하는 돌팔이에게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패혈증으로 어린 두 자녀를 두고 1955년 향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는 병상에서 이런 유언을 남기며 전설의 막을 내린다
"건강해지면 다시 비행기에 타고싶어.(元気になったらまた飛行機に乗りたい)"
비록 뛰어난 실력을 지닌 천재적인 파일럿이였으나 조국을 잘못만나 비참한 삶을 살은 비운의 파일럿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위의 사진은 1945년 4월경 카노야 기지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 이와모토 테츠조의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