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국공내전을 거치며 국민당의 좆같은 부패와 인플레이션이 겉잡을수 없이 커지고 재정경제긴급처분령으로 좆망한 국민정부의 좆망한 경제를 바닥 끝까지 떨어트리며 대륙에서 개좆된 국민당을 지지할 이들은 없을줄 알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1950년대 6.25전쟁으로 한반도에서 피터지게 싸울때까지도 신강과 사천성등 내륙 산악지방에선 국민당 잔당들이 게릴라전으로 싸우고 있었고 버마 국경지대에서는 무시못할 규모의 국민당 군대가 아편을 재배하며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들고 있었다. 게릴라전의 핵심은 민중의 지지가 필요했다는건데 이는 아직 대륙에서 국민당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재정경제긴급처분령으로 역대급 병크를 터트리지만 실제로는 '점령했을' 당시에만 공산당을 지지했고 얼마못가 다시 국민당을 지지하게 된다.

공산당의 대장정 이후 마오는 지방의 농민들을 포섭하여 난징을 옥죄고자 하였지만 국민당의 통제가 강력하던 양쯔강 유역에선 농업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져 농민들이 포섭당하기 전 국민당을 지지하게 되고 화북에선 옌시산,마부팡 같은 개발딸 군벌들이 개혁을 추진하고 무장이 개좆병신중에 개좆병신이던 공산당을 자체적으로 막아내며 농민들의 포섭을 막아낸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했을수도 있다 "대장정 이전에 도시 노동자를 포섭하면 됬을거 아닌가?" 여기에는 황금기라 불리는 난징 10년과 군벌,장제스의 공업정책이 있다. 북벌 이전 북양정부와 강남의 군벌들은 민생문제를 방치할 언정 공업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당시에는 군벌들이 각자의 영지에시 강력한 통제를 하고있던 상황이었고 장제스의 북벌이 진행되던 시기에 아직도 이 통제가 남아있어 난창 폭동,광저우 폭동 같은 공산당의 봉기가 실패하고  국민정부 시기에는 난징 10년이라 불리는 황금기가 있었는데 1927~1937년까지 연간 6% 이상이라는 높은 경제성장률과 장제스도 소련의 공업정책을 모방하여 중국 전역을 공업화 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1930년대로 접어들며 반 장제스 새력이 몰락하고 계계군벌을 제외하면 대부분 장제스에게 충성하게 되고 이는 국민당 중심의 경제정책에 힘을 실어주었다. 장제스는 공산당의 도시 노동자 포섭을 막기 위해 노동환경을 개선 시키고 임금을 올려주었으며 중일전쟁 직전에는 대공황으로 농촌과 경공업이 붕괴하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이은 GDP 세계 2위를 달성했고 이 대공황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왔을때는 이미 공산당이 대장정을 진행할때라 별 영향이 없었고 오히려 군벌들의 경제도 무너지며 상대적으로 피해를 빠르게 복구한 국민당이 지방 영향력을 강화할수 있는 계기가 된다.

중일전쟁 시기 국민당 군대는 일본한테 자진모리 장단으로 털리고 후베이성 까지 밀리지만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전 중국이 단결한 상황에서 장제스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공산당은 엄두도 못낼 상황에서 세력 확장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전쟁 말기쯤 공산당도 무시못할 수준으로 커지지만 이들 상당수는 표면적으로만  공산당을 지지하고 있었고 실제로는 국민당을 더 지지하고 있었다. 국공내전 당시 장제스,천청의 실책과 앞서 말한 국민당의 부패로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지만 일부 인민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국민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양쯔강 유역의 농민들과 황하 이남의 중산층을 제대로 포섭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들은 전통적으로 국민당의 핵심 지지층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마오의 중국사에서 버금가는 최악의 막장통치와 공포정치로 그마나 포섭했던 중국인들도 등을 돌리게 되고 6.25 전쟁때는 "장제스 위원장이 미군과 함께 우리를 해방 시키러 온다"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소문은 만주까지 퍼져 하얼빈에서는 장제스의 초상화와 청천백일기를 들며 반정부 시위를 일으켰고 이는 베이징 코앞까지 확산되게 된다. 시위는 중공의 진압으로 끝나게 되지만 아직 게릴라전을 하고있던 사천과 신강의 국민당 잔등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보여줬고 만주에서 끝날줄 알았던 시위는 화남 일대로 번져나가게 된다. 공산당이 다시 무참하게  진압하고 대토벌 작전으로 50년대 말 버마로 완전히 도망치며 국민당의 게릴라전은 끝나게 되지만 마오의 문화대혁명,대약진 운동으로 중국이 다시 바닥 끝까지 떨어지며 아직도 국민당을 지지하던 중국인들은 "장제스 때는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라며 반발하는등 70년대 까지고 친국민당 세력이 대륙에 남아있었지만 이후 덩샤오핑의 집권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6.4 천안문 항쟁에 가려진 중국 최초의 반정부 시위였고 규모도 더 컸지만당시 중국의 폐쇄성으로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