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타이완으로 병상에 누워있던 장개석에게 한통의 전보가 도착한다. 발송인은 베이징에 있던 등소평, 몸져누운 주은래를 대신해 모택동이 자신이 쫓아냈던 등소평을 부른것이다.

"베이징 측은 타이베이와 통일 문제를 직접 담판할 준비가 돼 있다. 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안의 평화다.”라고 등소평은 양안 통일의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장제스는 뉴욕 타임즈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들을 배신자라 비난하며 어떠한 타협에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췄지만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의 생각은 달랐다. 원래는 장경국도 아버지의 뜻을 같이했지만 1975년 장개석이 사망하고 모택동과 등소평은 그를 항일전쟁의 주인공으로 칭송하며 난징에 있는 쑨원 곁에 묘를 만들어주겠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유언에 따라 거부하게 된다. 1978년 장경국이 6대 총통자리에 오르고 얼마뒤 등소평도 대륙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그게 그거”라며 개혁·개방을 천명한 후 타이완의 장경국에게 우호 메시지를 날렸다.

장경국도 이에 화답해 대륙 시절 오랜 친구였던 등소평에게 2.28 사건 기념행사 폐지와 대만 계엄령 해제로 훗날 양안통일에 있을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민주화의 시작을 알렸다.

1979년 타이완 정부는 신년친서로 양안간의 무역,여행,우편을 허용하자는 3통을 제의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본토의 중국 공산 정부와는 정부 차원에서의 접촉, 담판, 타협을 거부한다는 3불 정책으로 응답했다. 하지만 대륙의 신임 총서기 호요방은 국민당 고위 관료들을 공식적으로 초청하며 "고향의 옛집과 산천이 그리운 사람들의 조국 방문을 환영한다. 언제든지 와라.”라며 대만인들의 본토 방문을 사실상 허용했고 등소평은 싱가포르에서 양측과 관계가 깊고 베이징과 타이베이를 자주 오가던 이광요를 이용하며 장경국과 접촉하기 시작한다. 등소평은 “1개의 중국이라는 원칙 외에 대륙 측에서는 특별한 조건이 없다. 다른 자질구레한 것들은 만나서 얘기하면 된다. 100년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면 통일은 저절로 된다”고 하면 이광요는 타이완의 장경국에게 달려가곤 했다.

얼마뒤 장경국도 등소평과 이광요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1986년 민주진보당이 창당을 선언하지만 장경국은 이를 묵인하게 되고 당장 해산해야 된다는 국민당 원로들의 난리를 무릅쓰고 설득했고 언론규제도 1985년에 이미 해제하며 대만의 민주화와 국민당의 개혁을 준비하게 된다.

한편 1987년 9월 14일 아직 대만의 대륙방문이 허가되지 않은 상황에서 타이완의 자이만보 기자 2명이 무단으로 베이징을 방문하게 되고

이는 대륙방문금지령을 철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국민당 내부와 양안 사이의 논의가 급속도로 활발해지고 마침내 2달뒤인 11월 대륙방문금지령이 폐지되며 양안 사이의 왕래가 가능해졌다

대륙방문은 대만 적십자사의 주도로 대륙에서 떨어진 이들의 이산가족 상봉이 다시 이루어졌고 약 40년만에 국민혁명군 참전용사들은 대륙에 남기고온 가족이나 친척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렇듯 양안관계는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고 장경국 사망 직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채제 통합, 즉 양안통일이 호요방과 조자양을 통해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장경국의 친중국적 태도로 중공도 전향적으로 나와 대만의 UN 복귀를 찬성하기도 했으나 소련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1988년 장징궈가 사망하며 양안간의 통일 논의는 다시 중단되었고 1년뒤 천안문 6.4 항쟁으로 관계는 다시 장제스 시절로 냉각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