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중세가 '암흑기'라는 말은 반박되는 추세라, 요즘은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면 오히려 비웃음을 사는 분위기지만, 서로마가 멸망하고 중세에 접어들면서 고대의 많은 지식들이 파괴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그리스의 과학은 한동안 서유럽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적 쇠퇴는 서로마의 멸망과 함께 순식간에 일어난 현상은 아니고, 기독교가 승리를 거둔 4세기에 이미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승리와 함께 그리스의 과학이 쇠퇴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극단적인 주장, 즉 로마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지 기독교와 전혀 관계없다는 주장과, 반대로 히파티아의 사례에서 보듯이 기독교도들이 그리스 학문을 적극적으로 탄압하고 파괴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모두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 중간쯤에 있는 듯하다. 즉 그리스의 과학은 실용적인 성격보다는 교양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는데, 기독교가 대세가 되면서 이러한 이교도적인 지식은 교양으로서의 인기를 잃었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그리스 학문에 대한 태도는 일관적이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처럼 그리스의 철학을 파멸과 이단의 상징으로 본 사람도 있지만, 유스티누스처럼 철학을 기독교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고 본 사람도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의 교양을 강조하고 심지어 백과사전 집필을 구상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는 그러한 교양의 가치를 부정하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그리스 철학 그 자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그리스의 과학은, 창세기와 관련된 내용에 대한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대체로 관심 밖이었다. 따라서 그리스의 과학은 서유럽에서는 중세의 시작과 함께 대부분 파괴되었고, 동로마 지역에서는 보존되기는 했지만 더이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고대 말, 그리고 중세 초 서유럽에서의 과학의 수준은 구체적으로는 어떠했는가?


서유럽에서 과학의 쇠퇴는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이를 교양으로만 받아들였을 뿐 직접 그러한 학문을 발전시키려 하지 않았고, 로마제국에서도 그리스의 학문을 발전시킨 것은 여전히 그리스인들이었다. 따라서 로마에서는 여러 분야의 지식을 모은 백과사전류의 서적이 유행했다. 각 시대별로 이러한 백과사전류의 서적의 수준을 보면 당대의 학문적 수준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백과사전 전통 초기의 제일 중요한 인물들 중 하나는 플리니우스(AD 23~79)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모은 지식을 37권의 "자연사"로 정리하면서 그 출처의 목록과 그 저자들인 473, 그리고 그 중에서 자신이 직접 본 출처의 저자인 100명의 목록을 완전하게 제시했다. 비록 신기한 것들에 대한 기이한 내용들이 많고 그리스의 과학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잘못 이해한 부분들이 많지만, 당대의 지식들을 정리한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저작들을 보면 플리니우스가 직접 접했던 지식들에 대한 정보는 점차 사라진 듯하다. 3~4세기에 살았던 솔리누스의 백과사전은 대부분이 플리니우스의 책을 표절한 것이었으며, 그 이후의 백과사전들은 솔리누스의 저작을 표절하고 그런 서적을 다시 표절하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잘못된 이해로 왜곡된 과학적 내용들은 더 줄어들고 다시 왜곡되기를 거듭하면서 그 내용을 잃어 갔다.


예컨대 고대의 천문학자인 헤라클리데스의 우주론은 고대 말~중세 초의 여러 저작들에서 설명되고 있는데, 불행히도 그 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아서 헤라클리데스의 실제 우주관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러한 고대 말의 저작들에서 묘사되고 있는 바는 헤라클리데스의 우주관에서는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돌고 있지만 수성과 금성은 지구가 아닌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헤라클리데스는 나중에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헤라클리데스의 우주론을 사실로 받아들인 고대 말의 저작에서는 동시에 지구에서의 거리가 (지구에서 가까운 순서로) 달-태양-금성-수성 의 순서인지 달-수성-금성-태양 의 순서인지를 진지하게 논하고 있다. 수성과 금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면 당연히 지구에서 수성, 금성까지의 거리는 달라지며, 수성, 금성, 태양의 고정된 순서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고대 말~중세 초의 학자들은 이러한 모순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중세 초에 서유럽의 과학 지식을 집대성한 책으로는 이시도레의 "어원학" 20권을 들 수 있다. 이 저작에서 이시도레는 수학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정작 수학에 대한 내용은 불연속, 연속, 선형, 평면, 원형, 완전수, 과대수, 부족수 등의 산술적 용어와 점, 선, 원, 사각형, 정육면체 등의 기학적 용어의 정의 정도였으며, 그나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정육면체는 "길이, 폭, 두께에 둘러싸인 입체"라는, 모든 입체에 적용될 수 있는 무의미한 말로 정의되어 있다. (참고로 유클리드는 정육면체를 "여섯 개의 같은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입체"라고 정의했다.) "사각형"의 정의는 "네 개의 직선으로 구성된 평면상의 정사각형"이라는 것이었다. 그나마 천문학의 수준은 수학보다 괜찮은 편이다.


이과 같이 중세 초기인 5세기~10세기의 기간, 혹은 고대 말부터의 기간 동안 서유럽 과학은 암흑기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11세기부터 아랍의 저작들이 유럽으로 번역되면서 비로소 반전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