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핵개발은 미국이나 독일처럼 정부에서 주도한것과 달리 군국주의 때문에 군부의 힘이 막강해 군부에서 핵개발을 주도함. 하지만 육군이랑 해군 대립때문에 같이 못하고 따로 해서 크게 육군이 주도한 니고연구랑 F연구로 나뉨

1. 니고연구(ニ号研究)/전시연구 37-1

육군에서 주도한 핵개발로 좃망한 해군과 달리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갔었음.

1940년 육군항공기술연구소 소장 야스다 타케오는 스즈키 타츠사부로에게 원자폭탄에 관하여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스즈키는 원자폭탄 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원자폭탄에 필요한 우라늄 광석의 일본 내 매장 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진행함. 이에 타케오는 1941년 6월에 이화학연구소 소장으로 있던 오코치 마사토시에게 정식으로 원자폭탄 연구를 의뢰하고 오코치는 일본내의 저명한 과학자 100명을 모아 실험반을 꾸렸고 물리학자인 니시나 요시오가 지휘를 맡음. 참고로 니시나 요시오의 실험실은 당시 일본에서 제일 최첨단이었음

니시나 요시오 (1890~1951)

100명이 넘는 연구원으로 이루어진 니시나 연구실은 우주선반, 사이클로트론 원자핵반, 이론반, 방사성이 생물에 영향을 주는 영향 연구반등으로 구성됨. 1942년 말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고 육군의 명령으로 U²³⁵와 U²³⁸을 분리하는 연구에 들어갔고 1943년이 3월이 되면 우라늄농축에 대한 실험에 들어감.

1943년 5월, 요시오는 육군한테 돈이랑 재료만 '충분'하다면 핵무기 제조가 가능할거 같다고 통보했고 타케오는 이를 군사작전에 버금가는 최고기밀로 치부하고 전시연구 37-1이라는 번호까지 부여되며 본격적인 핵개발이 시작됨.

하지만 저건 성급한 실험으로 충분한 결과가 도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단 싸지르고 본거기 때문에 아직 내부에서는 원폭을 개발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요시오는 일단 강행하기로 결정함. 이후 1943년 6월 입자가속기, 일명 사이클로트론 건설에 들어갔고 7월에 우라늄 농축 실험에 들어가지만 11월이 되며 끝내 실패해버림. 하지만 육군에서는 실험 물자와 자본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개발하라고 달달 볶고있었지만 해군이 어떻게든 미군의 공세를 뚫고 (자기들 실험 하기 위해) 중국의 우라늄 광산과 독일에서 지원한 우라늄 원석 560kg을 들여오는데 성공하고 육군이 이걸 빼돌려서 계속 실험하게 함.

육군에서 온갖 염병을 떨은 끝에 1944년 육군과 해군은 후쿠시마에 우라늄 정련시설을 만들고 기고시 쿠니히코가 U²³⁵를 농축분리하기 위한 UF⁶ 제조에는 성공하긴 하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우라늄 농축은 실패하고 미국의 공세가 강해지며 해상길이 완전히 막히게 되자 재료공급이 불가능해지고 돈도 부족해지자 1945년 3월 연구는 중지됨. 거기에 4월에는 도쿄 대공습으로 입자가속기와 원자로가 파괴되며 니고연구는 완전히 물거품이 됨. 당시 기술력만 본다면 재료만 충분하다면 성공했다는 의견이 많았음.

2. F연구 (F-Go 연구)

해군에서 주도한 핵실험으로 뒤늦게 육군이 핵개발 시작했다는 소식듣고 부랴부랴 시작했다가 좃망함.

1943년 해군 사령부 명령으로 교토 제국 대학의 아라카츠 분사쿠의 지휘 아래 핵연구 프로그램인 F-Go 연구를 시작함. 해군의 연구팀에는 니시다 요시오 다음으로 일본에서 유명한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가 포함되있었음.

유카와 히데키 (1907~1981)

근데 해군도 1941년 일명 B-리서치라는 이름으로 핵기술을 연구하기는 했었는데 미드웨이 해전 이후 폐기됬고 대가리들도 교체되며 잊혀짐.

해군의 핵개발은 육군에 비해 상당히 부실했는데 시작 시점도 늦었으며 인력이나 자본등 모든면에서 뒤쳐졌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해군 연구소 화학과장인 기타가와 사령관은 아라카츠에게 우라늄-235의 분리 작업을 수행할 것을 명령했지만 기반이 좃병신이던 해군 연구팀이 제대로 뭘 할리는 없었고 보다못한 해군성의 주도로 육군에 스파이를 보내서 정보를 빼돌리기 시작하고 자신들의 병과를 이용해 직접 해외에서 우라늄을 공출해오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해도 부족한건 극복하기 어려워서 육군과 달리 중수를 사용해 핵개발을 하기로 결정함. 규슈와 흥남의 암모니아,질소비료 공장에서 중수를 구해왔지만 매우 적은 규모였고 이것도 실패해버림.

결국 1944년 해군과 육군 양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라카츠와 니시나가 만나 육군-해군 기술 집행 위원회를 결성함. 합법적으로 육군 정보를 빼돌리게된 해군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그는 60,000 rpm으로 회전하는 초중심 원심 분리기를 설계했고 핵개발이 곧 성공할거라는 기대감에 빠져 있었지만 육군에서 공습으로 원자로 터졌다는 소식듣고 해군은 시골지역으로 옮기며 7월까지도 연구를 지속함. 하지만 시작부터 개병신이던 해군이 그나마 성공할뻔 했던 육군도 던져버린 마당에 원자로만 겨우 지은 상황에서 혼자서 성공할수는 없었고 사이좋게 히로시마랑 나가시키에 핵꿀밤 맞으며 완전히 무산됨.

이후 해군이랑 육군 양측에서 만든 핵시설은 대부분 해체되 태평양에 던져지거나 미국이 뜯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