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능양군이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보고 개연히 난을 제거하고 반정할 뜻을 두었다. 무인 이서와 신경진이 먼저 대계를 세웠으니, 경진구굉·구인후는 모두 상의 가까운 친속이었다. 이에 서로 은밀히 모의한 다음, 문사 중 위엄과 인망이 있는 자를 얻어 일을 같이 하고자 하였다. 곧 전 동지 김류를 방문한 결과 말 한 마디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드디어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으니, 곧 경신년-1620년이었다. 그 후 경진이 전 부사 이귀를 방문하고 사실을 말하자 이귀도 본래 이 뜻을 두었던 사람이라 크게 좋아하였다. 드디어 그 아들 이시백·이시방 및 문사 최명길·장유, 유생 심기원·김자점 등과 공모하였다. 이로부터 모의에 가담하고 협력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임술년-1622년 가을에 마침 이귀가 평산 부사로 임명되자 신경진을 이끌어 중군으로 삼아 중외에서 서로 호응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 모의한 일이 누설되어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심기원 등이 후궁에 청탁을 넣음으로써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신경진구인후 역시 당시에 의심을 받아 모두 외직에 보임되었다. 

마침 이서가 장단 부사가 되어 덕진에 산성 쌓을 것을 청하고 이것을 인연하여 그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키다가 이때에 와서 날짜를 약속해 거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훈련 대장 이흥립이 당시 정승 박승종과 서로 인척이 되는 사이라 뭇 의논이 모두들 ‘도감군이 두려우니 반드시 이흥립을 설득시켜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에 장유의 아우 장신이 흥립의 사위였으므로 장유흥립을 보고 대의로 회유하자 흥립이 즉석에서 내응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이서장단에서 군사를 일으켜 달려오고 이천 부사 이중로도 편비들을 거느리고 달려와 파주에서 회합하였다.

그런데 이이반이란 자가 그 일을 이후배·이후원 형제에게 듣고 그 숙부 이유성에게 고하자, 유성이 이를 김신국에게 말하였다. 이에 신국이 즉시 박승종에게 달려가 이이반으로 하여금 고변하게 하고 또 승종에게 이흥립을 참수하도록 권하였다. 

이반이 드디어 고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2일 저녁이었다. 그리하여 추국청을 설치하고 먼저 이후배를 궐하에 결박해놓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하는데, 광해는 바야흐로 후궁과 곡연을 벌이던 참이라 그 일을 머물러 두고 재결하여 내리지 않았다. 승종이흥립을 불러서 ‘그대가 김류·이귀와 함께 모반하였는가?’ 하므로 ‘제가 어찌 공을 배반하겠습니까?’ 하자 곧 풀어주었다.

의병은 이날 밤 2경에 홍제원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김류가 대장이 되었는데 변란을 고발했다는 말을 듣고 포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 가고자 하였다. 지체하며 출발하지 않고 있는데 심기원원두표 등이 김류의 집으로 달려가 말하기를, ‘시기가 이미 임박했는데, 어찌 앉아서 붙잡아 오라는 명을 기다리는가.’ 하자 김류가 드디어 갔다.

이귀·김자점·한교 등이 먼저 홍제원으로 갔는데, 이때 모인 자들이 겨우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 김류장단의 군사도 모두 이르지 않은 데다 고변서가 이미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군중이 흉흉하였다. 이에 이귀가 병사 이괄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김류가 이르러 전령하여 이괄을 부르자 이 크게 노하여 따르려 하지 않으므로 이귀가 화해시켰다.

상이 친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연서역에 이르러서 이서의 군사를 맞았는데, 사람들은 연서를 기이한 참지로 여겼다. 장단의 군사가 7백여 명이며 김류·이귀·심기원·최명길·김자점·송영망·신경유 등이 거느린 군사가 또한 6∼7백여 명이었다. 밤 3경에 창의문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다가, 

선전관으로서 성문을 감시하는 자를 만나 전군이 그를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렀다. 이흥립은 궐문 입구에 포진하여 군사를 단속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초관 이항돈화문을 열어 의병이 바로 궐내로 들어가자 호위군은 모두 흩어지고 광해는 후원문을 통하여 달아났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침전으로 들어가 횃불을 들고 수색하다가 그 횃불이 발에 옮겨 붙어 여러 궁전이 연소하였다

상이 인정전 계상의 호상에 앉았다. 궁중의 직숙관이 모두 도망쳐 숨었다가 잡혀왔는데, 도승지 이덕형과 보덕 윤지경 두 사람은 처음엔 모두 배례를 드리지 않다가 의거임을 살펴 알고는 바로 배례를 드렸다. 명패를 내어 이정구 등을 불러들이니, 새벽에 백관들이 다 모였다.

 박정길이 병조 참판으로 먼저 이르렀는데, 판서 권진이 뒤미처 이르러 ‘정길이 종실 항산군과 함께 군사를 모았는데, 지금 들어왔으니 아마도 내응할 뜻을 둔 것 같다.’라고 하였으므로 곧 정길을 끌어내어 참수하였다. 항산군을 잡아다 문초하니, 혐의 사실이 없어 석방하였다. 그런데 정길은 당연히 참형을 받아야 할 자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참수를 통쾌하게 여기었다.

 광해는 상제가 된 의관 안국신의 집에 도망쳐 국신이 쓰던 흰 의관을 쓰고 있는 것을 국신이 와서 고하므로 장사들을 보내 떠메어 왔고, 폐세자는 도망쳐 숨었다가 군인들에게 잡혔다.


광해군일기 187권, 광해 15년 3월 12일 임인 4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 3년

이이반이 상변하였다. 이반은 이유홍의 아들이다. 그는 길에서 친구 이후원을 만났는데 후원이 "오늘 반정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고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이반이 대궐에 나아가 후원이 반란의 말을 했다고 고발하였다.


광해군일기 187권, 광해 15년 3월 12일 임인 5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 3년

왕-광해군이 대신·금부 당상·포도 대장을 부르게 하고, 또 도승지 이덕형, 병조 판서 권진을 입직하게 하였다. 이반의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여러 여인들과 어수당에서 연회를 하며 술에 취하여 오랜 뒤에야 그 상소를 보았는데, 역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 

이에 유희분·박승종이 두세 번 비밀리에 아뢰어 속히 조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 명을 내렸다. 대신 이하 관원들이 대궐에 나갔으나 대궐문이 벌써 닫혔으므로 비변사에 모였는데, 비변사 당상들도 와서 모였다.

도감 대장 이흥립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호위하게 하고, 흥립은 박승종의 사돈으로서 그의 추천으로 직임을 제수받았는데 이 때 은밀히 반정군과 합세하였다. 천총 이확을 보내어 창의문 밖을 수색하게 하였다. 이반이 문 밖에 반정군이 주둔해 있다고 고했기 때문이었다. 이확이 명령을 받고 즉시 시행하지 않았는데 이 때 밤이 이미 자정이 지났다.

 이날 금상-능양군은 연서역 마을에 주둔하였는데, 대장 김류, 이때 전 강계 부사로 집에 있었다. 부장 이귀 이때 전 평산 부사로서 논핵을 받아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은 최명길 전 병조 좌랑. ·김자점·심기원 유생. 등과 홍제원 터에서 모였고, 장단 방어사 이서는 부하 병사를 거느리고 왔고, 이괄 북병사에 제수되었는데 떠나지 않았다. ·김경징 전 찰방인데 김류의 아들이다. ·신경인 도총도사. ·이중로 이천 방어사. ·이시백·이시방· 유생인데 이귀의 아들이다. 장유 전 한림. ·원두표·이해 유생. ·신경유 무신인데 전 부사이다. ·장신·심기성·송영망 유생. ·박유명·이항 무신. ·최내길 사예. ·한교 전 현감. ·원유남 전 병사. ·이의배 무장. ·신경식 전 현감. ·홍서봉 전 승지. ·유백증 전 좌랑. ·박정 승문원 정자. ·조흡 등이 모두 와서 모였다. 

문무 장사 2백여 명이 군사는 모두 1천여 명이었다. 밤 3경에 창의문으로 들어가 전날부터 바람이 불고 운애가 끼어 성안이 낮에도 어두웠었는데 반정군이 문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바람이 멈추고 구름이 걷혀 달빛이 대낮처럼 밝았다. 창덕궁 문 밖에 도착했을 때 이흥립이 지팡이를 버리고 와서 맞이했고 이확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그리고 대신 및 재신들은 군대의 함성소리를 듣고 모두 흩어져 도망갔다.

김류 등이 단봉문을 열고 들어갔고, 상-능양군이 구굉 무장. ·심명세 유생. ·홍진도 전 현감. 등과 함께 잇달아 도착하였는데 김류가 인도하여 인정전 서쪽 뜰에 가서 동향하여 호상에 앉았고 여러 장사들이 줄지어 시위하고 있었으며, 궁 안의 시위 장졸은 모두 흩어졌다. 입직 승지 이덕형·정립, 형방 승지 박홍도, 좌우 사관과 선전관 등이 처음 군대의 함성을 듣고 침전의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 시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궁중에서 대답이 없었고 시신들도 모두 흩어졌다. 이때 승지 유진증·권규기·민성징은 집에 있었다. 

왕-광해군이 북쪽 후원의 소나무숲 속으로 나아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는데 평상시에 궁인들이 후원에 긴 사다리를 설치하여, 밤에 출입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는데 왕이 이 사다리를 사용하여 궁성을 넘어갔다. 젊은 내시가 업고 가고 궁인 한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여 사복시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 왕이 국신의 집 사람인 정담수로 하여금 나가서 변란이 일어난 것에 대해 탐지하게 하였는데, 담수가 돌아와서 들은 것이 없다고 아뢰니, 왕이 말하기를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니던가." 하였다. 왕이 이때 임취정 등을 신임하여 이첨의 권세를 억제하려고 했었는데 유희분이 은밀히 왕에게 아뢰기를 "이첨의 세력이 너무도 높으니 그가 꺾임을 받지 않고 변란을 일으킬 계략을 가질듯 합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왕이 의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자 이지는 왕을 뒤쫓다가 찾지 못하고 장의동 민가에 숨었다.


광해군일기 187권, 광해 15년 3월 13일 계묘 7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 3년

정담수가 왕-광해군이 숨어 있는 곳을 아뢰자, 상-능양군이 이중로 등을 보내어 대궐로 데려오게 하고 도총부 직방에 머물게 하였다. 담수가 상중에 있었는데 왕이 상복 차림을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다. 중로가 앞에 나아가 배알하니, 왕이 말하기를 "너는 누구냐." 하자, 대답하기를 "신은 이천 부사 이중로입니다." 하고, 끌어 안아 말에 태우고 돌아왔는데, 상이 송영망 등으로 하여금 간호하게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안정을 찾지 못하고 영망 등에게 묻기를 "오늘의 거사는 누가 한 것이며 어떠한 사람을 추대하였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추대한 분은 바로 왕실의 지친이신데 자전의 명을 받들어 반정한 것입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혼매한 임금을 폐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어찌하여 나인·내시·급사들을 보내주지 아니하여 나를 대우하는 데 있어 이처럼 박하게 하는 것인가." 하였다. 이에 상이 궁인 한 사람을 보내고 또 소용 임씨를 보내어 곁에서 모시게 하자, 왕이 편안하게 여겼다.


광해군일기 187권, 광해 15년 3월 14일 갑진 3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 3년

박승종과 아들 박자흥이 광주에 가서 자살하였다. 승종은 이때 체찰사의 직위에 있었고 자흥은 경기 감사의 자리에 있었는데 

반정이 일어난 날 승종과 자흥이 가동 몇 사람을 데리고 수구문으로 나아가 양주에 가서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고 자흥은 이미 군사를 징집하는 격문을 띄워 경기 도내에 전달하였다. 이 때 승종의 족부인 안례가 양주 군수로 있었는데, 상-능양군이 사신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다. 

길에서 승종과 서로 만났는데 주상-능양군이 거의하여 조정이 이미 안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써서 안례에게 주어 조정에 전하게 하였다. 그 편지에 "승종이 임금-광해군을 바른말로 간하지 못하여 오늘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다급한 상황에 이미 성을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려고 할 경우 여러 군사들에게 살해되어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죽음이 될까 염려되므로 못에 빠져 죽어 신명과 사람들에게 사죄하려고 한다." 하였고, 

또 영광 군수인 아들 박자응에게 보내는 편지에 "우리 가문이 불행하게도 왕실과 혼인을 하여 부자가 머리를 맞대고 죽게 되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너는 이위경과 서로 논쟁을 한 일이 있고 처음부터 조정의 큰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조정이 필시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살하지 말고 선조의 제사를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광주의 선산에 가서 배알하고 승방에 들어가서 자흥과 함께 술에 독약을 타서 마시고 죽었다. 승종은 재주와 기량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가 병판으로 있을 때 장사들의 인심을 샀다.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4일 갑진 5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 3년

경기 감사 박자흥이 양주로 달려가 목사 박안례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는데, 안례자흥의 족조이다. 무인 신흡이 그 사실을 고하자, 이서는 동성으로 출진할 것을 청하고 상-인조 은 수비를 엄히 할 것을 명하였다.

이윽고 양주의 군사가 반정의 소식을 듣고 모두 무너져 흩어졌다. 이때 조정의 아들 조유도가 수원 부사였는데, 조정이귀에게 이르기를,

"자흥 부자가 만약 위협한다면 유도가 군사를 돕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흥이 아직 감사의 직함을 띠고 있다. 둘 다 빨리 체직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여, 이귀가 아뢰니 상-인조 이 즉시 명하여 감사를 차출하게 하고 유도는 체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유도가 과연 군사를 모았었는데 곧 무너졌다. 안례유도를 체포하자, 김류가 상에게 아뢰기를,

"수령이 변란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곧 그들의 직분이니 사면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그때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는 자가 있었다면 내 마땅히 중한 상을 내렸을 것이다. 유도안례를 모두 불문에 부치고 방면하라. 

또 들으니, 의병이 입궁할 때 궐내로부터 대항하여 활을 쏜 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 뜻이 가상하다. 이를 찾아 포상하도록 하라."

하였다.


인조반정 진행 과정을 실록으로 찾아보니까 꽤나 흥미롭네. 인조반정부터 이괄의 난, 혹은 정묘호란까지 제대로 다루는 사극이 나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