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막다’,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방어와 구분에 둔다. 이들에게 있어 그들 스스로의 깨끗함’, ‘거룩함이란 외부의 것, 더럽거나 부정한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것을 쳐냄으로서 지켜내는, 소극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들은 율법의 식습관과 의복, 종교 예식에 관한 규율들, 또 할례와 같은 외면적인 표상들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것으로써 그들의 깨끗함을 방어하고, ‘신에게 성별(聖別)된 백성으로서 신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이다.

 

이에 예수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한다(마태 15,11). 예수 역시 깨끗함을 중요시하며 더러움을 멀리하라고 가르쳤다는 데에서는 바리사이들과 같다. 그러나 예수와 바리사이의 차이는 그 거룩함의 근원에 대한 해석에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바리사이들은 깨끗함을 소극적으로 이해한다. 가령 시체를 만지는 행위는 시체의 부정함이 나에게 옮아 깨끗함을 잃는 행위로 간주되며, 깨끗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정한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항상 멀리하고, 그것을 두려워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바리사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소극적인 깨끗함이 아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깨끗함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정한 것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그것을 깨끗한 것으로 바꾸고자 한다. 이들의 깨끗함은 공격적이고 전염성이 강한 깨끗함이며, 적극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깨끗함이다.

 

예수의 사역 활동 일반이 이러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기존 유대 공동체에서 문둥병 환자를 비롯한 각종 병자와 세리, 창녀 등 더럽다고 간주되는 이들은 모두 공동체 밖으로 내던져졌다. 그렇게 함으로서 공동체의 깨끗함을 지켜냈다. 이들과 공존한다는 것은 곧 나의 깨끗함, 나아가서는 신의 백성이라는 정체성마저 위협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전통적으로 더럽다고 인식된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뻗는다. 그리하여 병자들의 병을 고치고, 세리와 창녀들에게 세례를 주고, 죽은 이를 되살린다. 깨끗함을 방어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전염시키는, 그리하여 더러움까지도 포섭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마귀의 소행으로 일컬어지던 각종 질병을 쫓아냄으로서 더러움, 부정함에 대해 승리하는, 전투적 깨끗함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의 이러한 전투적 신앙관은 승천 전 지상 대명령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19-20)”라는 명령은 유대 민족과 그 혈통, 정체성의 방어에 중심을 두던 기존의 신앙에서 벗어나, 부정한 자들로 간주되던 이스라엘 바깥의 모든 민족을 이스라엘로, 신의 회중으로 끌어들일 의무를 유대-기독교인들에게 부여한다. 이는 깨끗함의 전염이라는 예수의 신학과 일맥상통한다.


-참고: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