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모음



*간략히 썼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1. 프로이센의 공격

1740년 12월 16일

프로이센의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을 습격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근데 이 전쟁이 카를 6세의 죽음과 관련 있다는데...?



2. 상속 문제

앞서 얘기했듯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카를 6세의 죽음과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산 상속이었다


일단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알기 전에 상속이 어떻게

이어지는 것부터 알아야 하는데 프랑크 왕국에서 만들어진

살리카 법에 따르면 본래 여성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170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레오폴드 1세가 죽자

그의 첫 번째 아들인 요제프 1세가 즉위하게 된다


황제 생활 도중 천연두에 걸리게 되어 약 6년 정도 재위했고

자녀를 총 3명이자 낳았으나 아들은 단명하고 딸만 남기게 된다

한편 1701년 스페인에선

합스부르크 가문인 카를로스 2세가 후세 없이 사망하자

왕위를 뻇으려고 유럽이 전쟁에 휩싸이는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상속받게 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 광경을 본 요제프 1세와 미래의 황제가 될 카를 6세는

오스트리아도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하여

1703년 비밀스럽게 상호 승계 협정을 맺게 된다


내용은 만약 형제 중 한 사람이 아들을 갖지 못하면

다른 한쪽이 계승한다는 내용과 둘 다 아들이 없다면

요제프의 딸이 카를의 딸보다 우선권을 갖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요제프 1세는 17011년, 앞서 얘기했듯

딸만 남긴 채 떠났고, 그의 동생인 카를 6세가 즉위하게 된다

1713년

카를 6세는 요제프 1세와 맺은 협정을 공개함과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헤미아, 밀라노 등...

여성도 오스트리아는 물론 다른 국가도 상속받을 수 있다는 걸 알렸다

(1713년 국사 조칙)


그러나 여기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카를 6세의 아들인 있긴 했지만 얼마 못 가 사망했고

본인도 형과 똑같이 딸만 있는 상태였다


즉, 원래대로라면 동생인 카를의 자손에게 상속되지 않고

형인 요제프의 장녀인 마리아 요제파에게 상속되어야 한다


카를 6세는 아주 기똥찬 생각을 하게 되는데

발표 할 때 형의 자손을 우선하는것과 달리

통치자의 자손을 우선하는걸로 발표했다


아주 작은 말 바꿈이었지만

엄청난 파급력을 갖져다올줄 카를 6세는 몰랐을거다....



3. 좋지 않은 상황

국사 조칙이 통과된 거와 별개로 카를 6세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폴란드 왕위 계승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패한 것과 다름없어서

나폴리, 시칠리아 등을 스페인에게 빼앗기게 되고

베오그라드 조약으로 오스만한테 동부지역까지 잃게 된다

대외적으로 상황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계속 이기지 못하고 이득이 없자 내부 결속력이 약해졌고

거기에다가, 카를 6세가 건강이 악화하자 주위 국가들이 

국사 조칙을 지킬 생각이 없어져갔다


요제프 1세의 장녀인 마리아 요제파와 결혼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차녀인 마리아 아말리아와 결혼한 카를 알브레히트는 국사 조칙을 승인하길 거부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노리던 오스트리아와 앙숙인

프랑스는 카를 알브레히트를 지지하며 왕위 문제에 개입하였다

1740년 10월 20일

카를 6세는 사냥 여행을 떠나다가 독버섯을 잘못 먹게되고

사망하게 된다

아직 오스트리아는 국사 조칙을 따랐기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였으나 그녀는 황제 자리에 적합하지 않았다


먼저 국가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군주에게 필요한 교육도 잘 받지 못했다


이러나저러나 일단 즉위는 했기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중 최초의 여성 군주가 되었다




4. 일어나버린 전쟁

1740년 5월 3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프리드리히 2세

국사 조칙을 승인하는 대신 아주 오래된 문서를 들고 오면서

슐레지엔 양도를 제안하지만 거부하면서 전쟁을 준비하기로 한다

엎친 데 덮친 것으로 카를 알브레히트는

오래전 있었던 협약을 토대로 신성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자리로 요구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여성은 상속권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이야말로 적절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다

부르봉 왕조도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프로이센의 편을 들어줬고 나폴리까지 프로이센의 편을 들어줬다


그래도 오스트리아에겐 하나의 동맹이 있었는데 바로 '영국'

영국에선 프랑스가 참전했으니 우린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서 참전해야 된다

라는 여론에 오스트리아 편에 들어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유가 단순하게 저거뿐만 아니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가 무너질 때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노버가 위험해진다는 위기도 있었고 원래부터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이기도 했고)

그렇게 1740년 12월 16일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을 하였고

7~8년간 일어난 전쟁은 유럽 동맹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다



5. 제1차 슐레지엔 전쟁

오스트리아의 군사는 서쪽에 집중되어 있었고

침공 직전에는 슐리지엔에 약 7,000명의 병력이 있어가지고 

제대로 된 전투는 1741년부터 일어났다


프리드리히 2세는 빠른 속도로 지역을 점령했으나

남부 지역에 요새에 몇몇 남아있고 빠른 승리는 거둘 수 없게 되었다

1741년 4월 10일


빌헬름 라인하르트 폰 나이페르크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군대와

프리드리히 2세의 이끄는 군대가 몰비치에서 교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의 첫 전투였던지라 실수가 많았는데

대면했을 때 첫 상황에 오스트리아의 군대가 흩어져 있어서 공격할 기회가 있었으나

전선을 두 줄로 나누는 과정에서 2시간의 지연이 발생했고 그 틈을 타

오스트리아는 병력을 모았다


(대열을 정비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거리를 잘못 잡아서 강 뒤에 일부 군대를 배치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시작부터 좋은 기회를 날린 상태로 전투를 치루워야했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 것은 수적으로는 프로이센이 우월했다

병력도 많고 포는 3배나 차이났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포에 자극을 받아 명령을 받지 않고 돌격한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진열을 무너뜨리는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고

슈베른 백작은 프리드리히에게 어서 전장을 떠나라고 충고를 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떠났고 그렇게 지는 줄 알았으나

프로이센의 무기와 슈베른 백작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덕분에 이겼다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프로이센군 양성 정책 덕분에

철 꽂을대와 분 당 3~5발을 발사할 수 있는 머스킷(,다른 유럽군보다 3배나 빠르다)

철저하게 훈련이 된 프로이센군과 달리 오스트리아는 대부분 신병이어가지고

미숙함까지 더해 오스트리아 전선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무너져버렸다

(몰비츠 전투)

결과적으론 프로이센이 승리했으나

쉽게 이길 수 있는 전투를 큰 손해를 입어가면서 이겼기에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을 비난하고 새롭게 배우기로 했다


그는 적군의 기병대에 맞서기 위해 기병대를 개편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곧 기병대 훈련을 했고 점차 개선하고 나아가 대왕 프리드리히가 되어간다

오스트리아가 몰비츠에서 프로이센을 격퇴시키지 못한걸 들은

다른 강대국들은 용기를 내어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카를 알브레히트

프랑스와 함께 보헤미아 지역을 점령하고 자신을 신성 로마 제국의 왕이라고 지칭하고

1742년 1월 24일, 카를 7세로 대관식을 치르게 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가 분할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마땅한 동맹도 없는 상태라서(영국은 초기엔 중립 선언함)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했다


일단 큰 문제인 헝가리인데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도 반기를 일으킬 만큼 반오스트리아 정서가 강했는데

헝가리에서 연설을 해 귀족들로부터 충성을 얻어냈다


그리고 1741년 10월 9일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비밀협정을 맺게 되는데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동맹관계였지만 오스트리아를 멸망 시켜

독일의 지배국가가 된다는걸 마땅히 원치 않았다


그래서 두 국가는 클라인 슈넬렌도르프 협약을 맺게 되는데

슐리제엔에서 적대 행위를 그만두고 오스트리아는 최종평화의 대가로

슐리지엔을 양도한다는 협약이었다

프로이센의 휴전과 오스트리아의 반격 시작으로

바이에른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카를 7세는 틀어 박힌 채,

이저저도 못하는 상태와 조롱만 받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갑자기 협약을 깨고 다시 전투를 벌이는데

프랑스가 제대로 승기를 잡아서 프로이센은 최종협정에서 빠질가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와 대처하게 된다

 

1742년 5월 17일

다시 한번 전투가 일어나게 되는데

레오폴드 대공의 군대가 카를 기병대하고 맞이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이 올 때까지 버티라고 지시했고

레오폴드는 방어에 집중함과 프리드리히 군대가 올 때 배치할 수 있는 공간까지 고려했다

(이번에도 운이 좋게도 카를 군대가 오전 7시까지 공격할 준비가 안 됐다는 행운이 따랐다)

오전 8시경

전장에 도착한 프리드리히 2세는 보병을 조직화할 시간을 벌기 위해

기병대와 야포의 지원으로 돌격하려고 명령했고 적군의 기병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날이 덥고 습하고 건조하여 거대한 먼지 구름이 형성되었고 군대의 시야를 가리게 된다

일부 군대는 엉뚱한 방향을 공격하기도 했으며 

아군을 짐을 약탈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심하게 구름이 컸다

오전 9시 경


오스트리아 포병은 코투지츠를 포격하였고

다운 지휘관은 습격에 성공하여 레오폴드 군대를 천천히 몰아내는 동안

불을 질러버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연기까지 더해서

지휘권은 행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했다


10시 30분 경


프리드리히는 고원에 군대를 배치했고

왼쪽으로 돌면서 오스트리아 보병에게 포격을 가했다

오스트리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기병대가 없어 보병까지 위협이라서

후퇴하기로 결정했고, 프로이센은 또 승리를 거두게 된다

(코투지츠 전투)

이번에도 마냥 달콤한 승리는 아니였다


승리는 하긴 했지만, 전쟁의 흐름을 크게 바꾸긴 못했고

보병은 괜찮았으나 기병대는 여전히 고쳐야 할 문제점이 있다는 걸 알리는 전투이기 했다

먼지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 있어도 그전에 중요한 것이 자신의 말을 통제할 수 있는거였기에

여전히 프로이센군에게 고쳐야 할 문제점이 많았다

여기까진 프로이센의 생각이었고 오스트리아의 생각은

너무 많은 전선에서 싸우는걸 피하는거였기에 프로이센과 휴전 협상을 원했고

프로이센도 영국이 오스트리아를 본격적으로 지원해주지 판이 커지지 전에

적당한 선에서 끝내는 걸로 만족해 6월 11일. 브레슬라우 조약을 맺는다


조약에 따라 프로이센은 슐리지엔의 대부분을 얻게 되고

오스트리아는 테센 공국, 오파바 공국 등을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프로이센은 슐리지엔에 부채를 일부 떠맡는데 동의했으며

나머지 전쟁 시간 동안 중립을 유지하기로 했다

(베를린 조약)

제1차 슐레지엔의 승자는 명백히 프로이센였다

승자이지만 새로운 영토를 얻어 자원과 위신을 크게 항상 시킨 것과 달리

두 번이나 별도의 평화를 맺으면서 외교적으로 불안정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하급 독일 왕자에게 항복함과 부유한 지역을 잃었기에

군주제의 큰 타격이 갔으나 전쟁으로 보면 프랑스와 바이에른이 점령한

땅을 되찾을 수 있었기에 마냥 그렇게 손해뿐만은 아니였다



6. 프랑스는...?


바이에른은 지역 대부분을 점령당해서 도움을 주지 못한 상태고

그럼 남은 건 프랑스인데... 하필 이 타이밍에 영국의 왕인 조지 2세가 합류한다


1743년 6월 27일

오스트리아-영국 연합 군대는 아샤펜부르크를 떠나 

데뎅겐을 통과하는 하나우로 진군하였다

정찰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데뎅겐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기습하기 시작했다

그라몽 공작은 23,000명의 병력을 투입해 연합군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봉쇄했고 12,000명은 연합군의 후방을 찌르도록 지시했다


연합군 보병 사령관 일튼은 영국군과 하노버 보병대를 아샤펜부르크로 복귀시키고

나머지 병력은 행군 대열에서 4선 대열로 변경하여 프랑스 진지를

공격하기로 명령했다

정오 무렵

노아유 공작이 세 차례나 진지를 지키라고 강조했으나

프랑스 기병대는 연합군 전선을 향해 돌격했다

(누가 이 명령을 내렸는지는 불명이다)


그 뒤를 이어 보병도 단절되고 프랑스는 진형이 무너질까 봐 사격을 중지했다

그 덕에 영국은 전열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사이엔 하노버가 근거리 사격

오스트리아가 측면으로 침투해왔다

3시간의 전투 끝에

프랑스는 마인 강 좌안 쪽으로 후퇴했으나 다리가 무너져면서

병력을 더 많이 잃게 되었다

(데팅겐 전투)


프랑스는 후방 기습이 있기에 후방 기습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면

성공하고 왕까지 포로로 잡을 수 있었으나 기병대의 돌격 때문에 실패했다


그렇다고 연합국이 전장에서 승리했다고 크게 바뀐 건 없었다

위대한 승리보다는 행복한 탈출로 묘사되고 있다

1744년 2월 21일


아쉽지만 패배는 뒤로 미루고

이번에는 2년 동안 해안을 봉쇄한 영국의 함선을 돌파하려던 스페인 함대를 위해

프랑스가 지원하기로 출항하였다


저녁 11시 경


영국의 제독 토마스 매튜스전열을 형성하라고 신호를 보냈으나

시간이 좀 지난 뒤에도 되지 않았고 그 다음 전열을 완성하고 매튜스 근처 함대에 오라

라는 신호를 보냈어도 리처드 래스톡은 그냥 오는 등 영국은 전투 전부터 뭔가 삐걱 되기 시작했다


(래스톡이 저런 행동을 한 이유는 매튜스와 래스톡은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고 자기들도 시인할 정도였다)

결국, 매튜스가 HMS 나무르에 탑승하여 적과 교전하라고 했으며

전열에서 떠나 스페인 후방을 공격하며 그 뒤를 HMS 말버러가 따라갔며

스페인 함선에 공격을 성공한다


하지만 매튜스의 모습을 보고 모범을 따르는 사람도 어느 정도 있었으나

거의 매튜스를 불확신하며 아예 래스톡의 경우 협력하는걸 꺼려했다


영국 군함은 적 군함보다 더 크고 무장도 더 강했으며

대포도 25%나 더 많아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수적인 열세인 상황 속에서도

교전이 가능했으나 큰 피해를 보고 더 가관인것은 레스톡은 그냥 활동 자체를 안했다

영국에게는 지원, 함선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였다

매튜스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부하들이 필요했다


소통이 잘 된 스페인은 방어적인 태도로 대비했으며

때마침 온 프랑스 함대와 포데르호를 탈환하고 남서 쪽으로 비행했다

영국은 추격하였으나 선박을 수리하기 위해 메노르카로 갔다

(툴롱 해전)


영국이 잠시 철수했다는건 잠깐이나 지중해의 해안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스페인은 해안 작전을 실행했고 빌프랑슈쉬르메르를 점령했다



7. 제2차 슐레지엔 전쟁

1744년 8월 7일


프리드리히 2세는 반프로이센 연합이 형성되는걸 보고

전쟁이 끝났을 때 마리아 테레지아가 편하게 복수하는걸 막아야했다

즉, 프로이센은 전쟁의 균형을 대비하여 전쟁을 다시 일으켰다


오스트리아는 크게 바뀐 건 없었는데

1. 국사 조칙의 인정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통치할 권리

2.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랑수아 에티엔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하기

3. 보헤미아와 슐리지엔의 땅을 회복하고 보존하기

이렇게 3가지 목표를 가졌다

1745년 5월 말


오스트리아-작센군은 호헨프리트베르크 마을 주변에 진을 쳤고


6월 4일 아침 경

프리드리히 2세는 기습을 하기로 했다

(적에게 깜작 선물을 주고 싶었던 건지 행군 중에 대화나 담배를 피우는 것 금지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계획과 달리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는데

다리를 건너는 도중 공간이 부족한 탓에 병목 현상이 일어나고

제한된 병력만 건너갈 수 있었다


첫 번째 목표는 작센 전선 앞에 있는 두 개의 언덕이었지만

작센군이 프로이센이 발견했고 프리드리히가 원하던

완벽한 기습은 일단 실패했다


프로이센은 작센이 공격을 전개하기 전에 언덕을 우회해서

작센 진영을 공격하기로 했고 프로이센의 공격은 오전 7시부터 시작됐다

일부 작센 기병대가 전장으로 나왔지만 바로 격퇴당했고

보병은 작센 진영을 습격하여 격파했다

(다시 한 번 찾아온 행운으로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작센 얼굴에 연기와 먼지가 날아와 제대로 보지 못해서 프로이센이 더 유리했다)


이러한 소동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전투를 준비할 수 있었으나

오스트리아-작센 군대의 좌측(전체 작센군)은 

새벽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에 전멸했다

오스트리아 보병은 

호헨프리트베르크 북쪽에서 동쪽을 향해 두 개의 전선을 형성했고

프로이센이 수적으로는 우세였으나 근거리에서 많은 공방을 주고 받으며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이때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로이트 용기병대를 투입했다

강풍과 전장의 포연과 연기를 걷어냈고 취약한 오스트리아 보병을

돌격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전선에 구멍을 만들어냈다


이미 수적을 열세였고 기병대의 보호없이 버림받은 오스트리아군은 무더기로 항복한다

바이로이트 용기병대는 94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20개 대대를 휩쑬고 다녔으며 

2,500명의 포로(전체 포로가 5,080명이다. 절반을 함셈)

....오스트리아-작센군은 완전히 대패했다

(호헨프리트베르크 전투)


이 이후로 프리드리히는 '대장'이라고 불렸으며

바이로이트의 돌격은 후대 프로이센과 독일 장교에게 공격성의 모델로 연구했다

(그리고 코투지츠 전투와 달리 기병대가 큰일을 했기에

실패를 교훈 삼아 발전하는 사람이라는걸 보여주기도 했다)

오스트리아군에 못을 제대로 박은 전투라 그런지

프로이센에게 덤비는 족족 다 패배하게 된다


1745년 9월 30일


오스트리아-작센은 40,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20,000명의 프로이센을 기습 공격하였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명령을 거부한 예비군 연대의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프로이센이 승리하게 된다

(조르 전투)

1745년 11월 23일


프리드리히 대왕의 완벽한 작전으로 오스트리와 작센은 

제대로 싸우기 못하고 흩어졌고

(헨넬스도르프 전투)


12월 15일


점차 시간이 지나이 병사들도 경력이 생겨서 프리드리히 2세가

지휘권을 잡지 않은 전투에서 승리하며 드레스덴에 가는 길을 열게 된다

(케셀스도르프 전투)


12월 18일에는 드레스덴을 점령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시한번 평화를 제안했다

1745년 12월 25일


오스트리아와 작센 대표단과 영국 중재자는 신속하게 프로이센과 평화 조약을 협상했다


결과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이 슐리지엔과 굴라츠를 지배한다는 걸 인정했고

프리드리히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랑수아 예티엔(프란츠 1세)를

신성 로마 황제를 인정하기로 했다

거기에다가 국사 조칙 인정과 남은 전쟁 동안 중립을 유지하기로 햇다

(드레스덴 조약)



8. 평화이자 전쟁의 씨앗으로....

1748년

저지대라던가, 이탈리아라던가, 지구 곳곳에서 해전이 일어났지만

엄청난 소득을 얻지 못한 채 평화 조약을 맺게 된다


조약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1. 모든 서명국은 국사 조칙을 받아들인다

2.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슐리지엔 인수를 인정한다

3. 오스트리아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와 엘리샤베타 파르네세의 둘째 아들인

필리프에게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 공작령을 양도한다

4. 오스트리아는 비게노마를 포함한 작은 영토를 샤르데나에게 양도한다

5. 오스트리아는 모데나, 제노바에서 철수한다(후에 독립)....


그 외에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일부를 교환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었다

(엑스라샤펠 조약)

평화 조약은 전쟁을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긴 못했고

조약에 참여한 국가는 얻고 싶었던 걸 못 얻어서 분개하고 

미래에 동맹이 크게 역전된는 계기가 된다


만족할만한 국가는 있었는데 그건 프로이센

넒은 땅이자 산업지역인 슐리지엔을 얻으면서 강대국으로 발전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이 초반에는 실책이 많았지만, 명장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하는 전쟁이기도 하였다


손해는 오스트리아로 땅을 빼앗겼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켜냈고

잠재적으로 재앙적인 위기 살아남은 편이라 마냥 손해만 있는건 아니었다

스페인중부 이탈리아까지의 영향력을 뻗칠 수 있게 되었고

샤르데냐는 밀라노는 얻지 못했으나 타 영토를 얻게 되

영토 확보를 목표라고 보면 이루셈이긴 하다


프랑스는 이익을 반환한다는걸로 "평화만큼이나 어리석다"라는 문구가 떠돌았고

영국은 하노버의 취약성을 들어냈으나 그렇다고 양측다 확실한

이익이나 손해는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목표를 이뤘다고 만족할수 있는건 아니였다

프로이센을 제외한 다른 국가는 한거에 비해 보상이 적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일어난 얽히고 얽힌 관계

몇 년 뒤 동맹을 새롭게 역전하게 만드는데......?









오랫만에 복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