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공산주의, 소련이나 현 벨라루스 정권을 찬양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히며, 소련군의 전쟁범죄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임을 알립니다.

*본 스토리는 현실과 관련이 없습니다.



(1910년경, 러시아제국 민스크 오데사호텔)

20세기 초, 나는 러시아제국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 부모님은 소작농이었다. 봉건제는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여전히 모든 땅은 귀족과 왕족들의 소유였고, 농민들은 그들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농노와 크게 다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우리 누나는 12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했는데, 하루에 잠을 자는 시간 이외에는 계속 기계를 돌렸지만, 월급은 쥐꼬리만했다.
거기에 제국 정부는 우리 가족조차 먹을 양이 나오지 않는 밭에서 절반 이상을 세금으로 걷었다. 명분은 수출이었다. 수확물들을 수출해야만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될 것이라는 선전을 계속했다.



(1917, 러시아공화국 민스크)

굶주림에 지친 우리 부모님, 강도 높은 노동과 적은 임금에 분노한 우리 누나, 독일과의 전쟁에 강제로 징집되게 생긴 우리 형 모두 혁명에 동참했다. 사회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 자유주의자들, 보수주의자들 등 부패한 제국 정부에 반대한 모든 세력이 임금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신도, 황제도 없으며, 니콜라이 2세는 12년 전 인민들을 죽인 학살자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성공적이었으며, 새로운 정부가 세워졌다. 도시마다 생긴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는 각 마을의 농부들과 노동자들을 대변해 도시를 꾸려나갔고, 중앙정부에 의견을 전달했다.
하지만, 나라 곳곳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임시정부가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는 소문이었다. 계속되는 전쟁에 피폐해진 우리는 반전시위를 계속했다. 오직 공산주의자들만이 전쟁을 그만하겠다고 공약했고, 공산당은 전쟁 반대 연설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를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우리는 환호했다. 이제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행복하고, 늘 당해만 왔던 우리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각지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우리 가족은 공산당을 지지해왔기 때문에,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적군의 편이었다. 우리 형은 자원해서 적군에 입대했다. 민스크가 백군에 넘어가게 될 위기에 처하자, 우리 가족은 모스크바로 피난갔다. 다행히 적군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형은 다리에 부상만 입었을 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세계 최초로 모든 인민이 주인이 되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세워질 수 있었다.


(1921, 소련 벨로루시SSR 민스크)

우리 누나나 형과는 달리, 이제 노동자 농민 계급도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여성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오히려 공산당 정부는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해 교육을 권장했다. 우리 부모님은 누나와 형 때와는 상황이 다르니 모스크바로 대학을 갈 것을 조언하셨다. 민스크 중심가에 있는 쉬콜라(한국의 초/중/고등학교)를 전교 3등으로 졸업한 나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 당당하게 입학했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것도 그곳에서이다. 우크라이나 하리코프에서 태어난 내 첫번째 아내는 정말 이뻤다. 첫눈에 반한 나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고, 구애한지 200일만에 그녀는 나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대학교 4학년때, 아내는 오랜만에 고향에 가겠다며 기차를 타고 떠났다. 그러나, 돌아온 건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녀가 애초에 갑자기 고향에 간 이유는 대기근 때문이었다. 농업 집단화로 인해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기근이 일어났고, 그녀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가족들을 다른 공화국이나 유럽으로 옮겨 굶어죽는 일을 막기 위해 애썼다. 가족들과 함께 루마니아 왕국으로 넘어가려던 그녀는 부모님만 루마니아에 건너간 채 국경에서 2살 먹은 동생과 함께 경비병의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한참을 울고 있던 나는 곧 공포에 시달렸다. 망명자의 사위인 이상, 우리 가족과 나 모두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스탈린을 욕한 내 친구는 재수없게도 비밀경찰에게 잡혀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젠 서유럽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부모님을 고향과 가까운 한적한 숲 속 집으로 모셔둔 채 마지막 안부 인사를 전하고, 형과 나, 누나는 저 멀리 동쪽으로 넘어갔다.

(1933?, 투바인민공화국, 정확한 장소는 알려지지 않음)

위조한 여권을 들고 도착한 곳은 동방의 어느 이름 모를 나라였다. 중국인처럼 생긴 자들이 사는 이 작은 나라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우리가 몰래 탔던 기차가 도착한 곳이 이 나라였다. 처음엔 역 앞의 스탈린 초상화를 보고 기겁했지만, 몇 안되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여기는 소련이 아니라고 하는 확답에 안심할 수 있었다. 일본어를 아는 나는 일본어와 얼추 비슷한? 이 미지의 나라 언어를 여섯달 만에 깨우쳤고, 현지인들처럼 초원에서 말을 타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나는 그곳에서 나보다 12살이나 어린 두번째 아내를 만났고, 첫번째 아들을 낳았다.

(1940, 독소전쟁에 징집된 투바인민군 기병대)

그러던 중, 조국이 나를 불렀다. 첫째 아들을 낳자마자 아내와 생이별했다. 말을 탈 줄 아는 젊은 남성들은 모두 징집되어 서쪽으로 넘어갔다. 노보시비르스크를 지나고, 스베들롭스크를 지나고, 모스크바를 지나고, 민스크로 들어갔다. 몇년 만의 고향 땅이었다. 하지만, 고향 땅은 예전같지 않았다. 익숙한 그 건물들은 모두 쓰러져 있었다. 내 모교도, 내가 자주 갔던 상점도, 흔적밖에 남지 않았다. 용맹한 우리 군대는 끝없는 공격 속에 적들을 우리 고향 땅에서 물리쳤다.
익숙한 집이 보였다. 내가 살던 집이었다. 나는 잠시 그 곳으로 뛰어갔다. 집은 지붕이 없었고, 건물은 재가 되어 있었다. 적들이 수류탄을 던진 것 같았다. 마당에 시신이 2구 있었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손에 낀 작은 반지가 그것이 우리 어머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도망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넋이 나간채로 울었다.

(1945, 나치독일 베를린)

이성을 잃은 나는 베를린까지 진격하라는 상관을 명령에 분노에 넘친 채로 응했다. 나의 말은 용맹했고, 적들처럼 생긴 자들은 모두 쏘아 죽였다. 베를린까지 진격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나에게 감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승리했다는 기쁨은 잠시였다. 나는 길에서 보이는 남성들은 흉기로 다치게 했고, 여성들은 뒷골목으로 끌고 가 강간했다. 나의 상관도 별 경고를 주지 않았다. 물론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고, 나의 동료들 모두 그랬다. 우리는 그것을 쾌락이 아니라 보복이라고 여겼다. 아니, 어쩌면 쾌락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나의 그것이 그들의 그것 속으로 들어갔을 때 짜릿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레닌그라드에서 배관 수리공을 하며 살던 나는 1947년 다시 기차를 타고 이젠 우리나라가 된 투바로 돌아가 아내와 재회하고, 형과 누나를 만났다. 형과 누나, 그리고 나는 밤새도록 울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 둘째 아이가 생겼다.
첫째 아이는 벌써 쉬콜라에 들어갔다. 어릴때부터 투바어와 러시아어를 동시에 배워서 그런지 아들의 투바어 실력은 나보다도 좋았다. 아이는 4살때부터 말을 탔다고 한다. 벨라루스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이곳 투바에서는 흔한 일이다. 말 없으면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몇 년이 흘렀을까, 크즐의 길가에 있던 스탈린 사진은 찢어지고, 동상은 무너졌다. 겉으로 내색하긴 힘들었지만, 우리 남매들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이제 우리는 본명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허가 없이도 벨라루스에 왔다갔다 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투바보다는 큰 도시에 가야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민스크로 향했다.


(1966, 소련 벨로루시SSR 민스크)

1961년, 거의 20년만에 돌아온 고향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었다. 시 정부는 고향에 돌아온 우리들을 환영하며 공짜로 아파트를 주었다. 첫째 아들이 레닌그라드 대학교에 입학했을때쯤, 셋째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계속 배관공으로 일했다. 시내에는 스탈린 사진 대신 가가린의 사진이 붙여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질은 높아졌다. 비록 저 빌어먹을 공산당 서기장놈을 우리 손으로 뽑진 못했지만, 집집마다 TV가 들어왔고, 시간은 좀 오래 걸리지만 차도 마련했고, 나라에서 별장도 줘서 마누라, 그리고 아들딸들과 소풍을 갔다.
내가 성인이 된 자식들에게 조언한 것이 있다. 바로 술과 담배를 절제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술과 담배를 아예 안하는 것은 병신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이 해서 좋을 건 없다. 나는 흰 머리가 난 이후부터 술과 담배를 완전히 끊었다.
그러던 중 형이 세상을 떠났고, 싼 비행기 표값 덕분에 누나도 자주 볼 수 있었다.


(1986, 소련 러시아SFSR 고르키주 제르진스크에서 바라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은퇴 후 집에서 편안한 시간을 지내던 어느 날 새벽,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밝아졌다. 곧 원전이 폭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민스크는 안전하다는 소식이 곧 들려왔다. 우리는 안심하고 다시 행복한 생활을 이어갔다. 손자가 갑상선암으로 죽었지만, 그건 원전과 관련없는 일이다.


(1990, 소련 벨로루시SSR 민스크)

세상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었다. 손녀는 빅토르 최의 광팬이여서 키노를 보기 위해 아예 레닌그라드로 거처를 옮겼고, 증손자는 마이크 나우몐코의 팬이었는데 레닌그라드에서 핀란드를 통해 영국의 퀸 음반을 밀수하다가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사실 나도 젊을 적에 롤링 스톤 노래를 종종 듣곤 했다. 미국과 유럽의 물건들이 소련으로 계속해서 들어왔다. 물론 불법도 많았다. 왠진 모르겠지만 물건들에 에스토니아어 비스무리한 언어, 독일어, 터키어, 세르비아어 등등이 적혀있었다. 불평등도 심각해졌다. 공산당 간부들은 서독제 차를 타고 다녔고, 사치를 부렸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소리가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창밖에서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이들은 옛날 벨라루스 삼색기를 들고 자유를 외치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막으려 애썼지만, 수많은 인파에 밀려 역부족이었다.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오자, 인민들은 탱크 위에 올라타 군인들을 차에서 강제로 끌어내리고, 무기를 탈취해 총구를 군인들을 향해 돌렸다.


(1991, 소련 카자흐SSR 알마-아타, 알마-아타 선언)

그러던 중,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대인민담화가 TV에서 나왔다. 소련 해체 소식이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도, 나의 아내도, 가족들도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직 증손자만이 희미하게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길거리에 있던 레닌 동상은 쓰러졌고, 깃발은 삼색기로 바뀌었고, 선전구호는 폭파되고 불에 탔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체제변화는 혼란만 가져다 주었다. 순식간에 화폐가치가 하락해 아들은 전재산을 날렸고, 그나마 있던 다차에 얹혀살게 되었다. 다행히 공장의 관리자로 일해던 딸이 공장을 불하받게 되어 아들이 은퇴하기 전까지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도로에서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골목에서는 러시아에서 넘어온 마피아들과 벨라루스에서 생긴 마피아들이 총으로 서로를 위협하였다.
곧 투바에 남은 조카들에게서 편지가 왔다.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갈 수 없었다. 이젠 외국이 되었을 뿐더러 비행기 표값이 너무나도 비싸졌기 때문이었다.


(1994, 벨라루스 민스크, 알렉산드르 루카셴카 대통령 당선자 기자회견)

이제 벨라루스 최초의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나는 소련 시절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3년동안 벨라루스는 극심한 경제난과 혼란이 시달렸으며, 러시아는 너무나도 추락했고, 인민들의 삶은 제국시절만도 못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괴담까지 들린다. 나는 슈쉬케비치나 케비치같은 소련을 헤체시킨 도둑놈들을 심판하고 소련 해체에 반대하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루카셴카에게 한 표를 줄 것이다.
역시나, 케비치는 17%, 슈쉬케비치는 10%밖에 받지 못했고 루카셴카는 45%를 받았다. 곧 이어진 결선투표에서, 루카셴카는 80%를 득표하여 벨라루스의 첫 선출직 대통령이 되었다.
루카셴카는 국기를 소련 시절의 그것으로 바꾸고 민영화된 기업들을 국유화시키고, 복지제도를 소련 시절의 그것으로 리셋시켰다. 물론 정치도 소련 시절의 그것으로 리셋시켰다. 레닌 동상은 다시 세워졌고, 선전문구도 다시 세워졌다. 하지만, 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다. 어차피 난 평생동안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고, 연금 받으면서 여생을 편안하게 마무리하면 그만이다. 인간이란 건, 굶주린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를 선호한다. 국경 너머 우크라이나의 인민들이 굶주린 소크라테스라면, 우리는 배부른 돼지란 말이다. 어쨌든, 적어도 이곳에서는,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