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절검록 비주얼 노블 버전




2-15

태허5제자




불꽃이, 꺼졌다.

하늘 높이 치솟던 불빛, 철과 돌을 녹이던 고온이, 갑자기 형체를 잃었다.


'앗, 왜—'

그 자리를 대신한 고통이, 가슴으로, 어깨로, 머리로 몰려와, 마치 둑을 무너트리는 홍수 같았다.


'내가 어디에—'

그녀에게 대답한 건 날뛰는 통각, 머릿속을 두들기는 소리와, 심장박동이 한데 섞여 잠을 잘 수 없었다.


'시끄러! 시끄럽다고, 알았으니까—'

이소상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낯익은 지붕, 낯익은 집, 곁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조차 익숙했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습관적인 익숙함.


"사...부?"


"그래."

능상이 짧게 대답했다.


"헤헤, 저— 아얏!"

소녀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아파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마비마와 일전에서 얻은 부상은 가볍지 않았고, 지금 움직이는 바람에 온몸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어?'


'마비마?'


"앗!"

소상이 꿈에서 깬 것 같이, 고통도 잊고 황급히 말했다:


"큰일입니다 사부! 사숙께서(師叔) 오셨는데, 그가—"



"뭘 그리 당황해? 여섯째가 뭐가 무섭다고."

능상이 차갑게 말했다,


"누가 너희 둘을 데리고 돌아왔다 생각하느냐? 됐다, 다 추스르면, 사부가 가서 쫓아내 줄 테니."


"아..."

고통이 소녀의 머릿속에서 마구 부딛히는 바람에, 자세히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아— 나찰인은?! 사부, 혹시 그 금발의—"


"네 곁에 있잖느냐."



소상이 말을 듣고 돌아보자, 나찰인이 자기 곁에서 자고 있었다.

의외였다: 알게된 이후로, 그가 눈을 감은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소상의 마음속에서 동정과 슬픔이 떠올랐다:

푹 잠들어있는 금발의 남자는 청신한 것이, 마치 신선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깨어있을 때보다, 더 살아있는 인간 같았다.

숨기는 것도, 피하는 것도, 과거의 번민도, 미래의 집념도 없다.

나찰인의 잠든 모습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같았다.

아마... 이게 원래 그의 모습이었겠지?


...응?

어디 있다고?


"꺄아아아악——"


소녀가 본능적으로 이불을 잡아당기고, 발로 나찰인을 걷어찼다.

금발의 이방인이 둥근 통나무처럼 굴러떨어졌지만, 깨어나지는 않았다.


"어어왜애애, 극그그그그가.... 제 겨, 곁에..."

소상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물방울이 눈가에 그렁그렁해, 쏟아지려 하였다. 그러나 능상은 미동도 않고:


"그럼 침대가 하나인데, 네 곁에 안 두면 어디에 두느냐? 바닥?"


"사, 사부도 그 뭐냐, 그, 침대가 있지 않습니까!"


"—사부와 동침하라고 그를 데려온 것이냐?"


"그, 그게 아니라! 저, 저는, 그..."

소상의 말문이 일순간 막히더니, 오열했다:


"사부— 남녀칠세부동석 모르십니까!"


능상

음...


사부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생각에 잠겼다.

소녀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사부에게 이런 상식을 이해해 달라 하는것이 너무하다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태허 제5제자; 정위진인을 제외하고 지고절학의 [태허검신]을 깨달은 유일한 사람;

2세에 무술을 배우고, 13세의 나이로 태허경계에 진입한, [무상검신, 자재망정]이라 불리는 절세의 검객: (無上神劍,自在忘情)

능상은 일생동안, 37년간 검을 잡았지만, 정작 세상에 발을 들인적이 없었다.

좌절을 겪은 적도, 실패를 겪은 적도 없었으니, 갈망도, 근심도 없었다.

상식, 규칙, 논리, 이성, 정... 범속한 것들은 모두 치워두고, 능상은 신경 쓰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래, 사부가 나빴구나."


이 사람과 친하다면 알게될 사실은...


"이제 이 사부도 네 연령과, 남녀간의 일을 생각해 볼 때로군."


...혼잣말의 내공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 ...뭐라고요!?"



소상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다, 자신도 모르게 나찰인에게 눈을 돌렸다. 능상도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찰인이 이상한 자세로 바닥에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침대에 올려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좀 늙었어."

능상이 뜬금없이 말했다:


"너나 네 모친 둘 다 남자 보는 눈은 영 아니구나."


"예? 아닙니다, 사부, 오해입니다—"

소상이 손사래를 치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저기, 그, 그그... 그의 상처는 어떻습니까?"


"좋지 않지, 너보다 훨씬 심하다."


"그럼 마... 사숙께서 그를 다치게 한 겁니까?"


능상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여섯째는 아닐 거다. 이 자는 기름이 다한 등불이다. 여섯째와 싸울 때, 신체의 모든 진기를 소모했어— 과장이 아니라, 정말 모든 것을. 어떤 사술을 쓴 건지는 모르겠다만, 죽지 않은 건 천운이로군."

사부의 시선이 바닥에 있는 금발 남자로 향했다.


"손 하나는 숯이 되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고. 근골에는 큰 지장이 없으나, 내력의 소모가 극심해 수명이 크게 줄었을 것이다, 10년 정도는 적게 살겠지만 불구는 아니겠어."


"...그는 괜찮을 겁니다."


소상이 나찰인의 검은 팔을 보았는데, 도저히 인간의 혈육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상은 나찰인이 완쾌하리라 믿었고, 뼈와 살을 치유하는 백화흑연을 믿었다.

일찍이 한번 체험을 해, 그 신묘함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진기만 충분하다면...


"사부, 제자가 청이 있사옵니다."


"그래, 말하라."


"제자... 그에게 사부의 진기를 전수해달라 청하고 싶습니다."


"태허검기? 저 나이에는 배우지 못할 것 같구나. 네가 검심결을 알려주고, 스스로 해보라 해라."


"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제가 말한 것은 그에게 내력을... 잠깐, 검심결은 가르쳐도 됩니까?"


"못할게 뭐가 있느냐?


"시, 시조께서 외전을 금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


태허 제5제자가 눈을 감더니, 잠시후 다시 눈을 떴다:


"가르칠 수 없으니, 그에게 마음을 포기하라 전해라."


"전 상관없... 아, 그게 아닙니다!"

"제가 청하고 싶었던 것은 태허검기를 사용해 그의 내력을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겐 대단한 법보가 있어, 진기만 충분하다면 어떠한 상처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아."

능상이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사부가 여섯째를 쫓아내고 나서, 너희의 치료를 돕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사부!"

소상이 눈물을 닦고 웃었다:


"사부가 최고입니다!"


"그래, 너희는 다시 동침하거라."


소상이 멍해지더니, 연신 손을 휘저었다:


이소상

아, 아아아닙니다— 아니라고요!



2-16

인불파



태양빛이 저물고, 노을이 서쪽에 잠긴다.

마비마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


하늘에는 구름과 노을만이 있었으며; 구름도 평소와 같고, 노을도 놀랍지 않았다.

마비마는 매우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바라보냐가 중요한게 아닌, 기다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기다리는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매우 잘하기도 했다.

이 십수년간, 그는 기다림과 항상 함께였으니까.


바스락—


뒤쪽에서 듣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마비마가 몸을 돌리니, 한 여인이 문에 기대어, 그를 향해 인상을 쓰고 있었다:


"여섯째. 왜 그렇게 늙었냐."


"허, 역시 사저는 절 남처럼 여기지 않는군요. 20년이니, 어떻게든 늙고 있습니다."

마비마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이별한지 여러해가 지났지만, 다섯째 사저는 그대로이니 어찌 마음을 열지 않겠는가?


"...겉만 늙고, 속은 덜 자랐군."

능상이 집을 향해 눈길을 주고는, 차갑게 말했다:



"소싯적에는 얌전하더니, 지금은 말썽쟁이가 되었구나."

"내 제자를, 네가 때렸다며?"


마비마가 놀랐다, 다섯째 사저가 제자를 받은건 알았지만, 사제의 정이 그녀에게 있을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에서, 다섯째 사저는 감정이 없었다.


"...그 소저는?"


"일곱째 딸."


"어쩐지 눈에 익다 했더니, 소의의— 뭐라 불러야 합니까?"


"이소상."


"오, 모친의 이름과 닮았군요."


"......"

여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좋습니다, 한담은 이만하지요."

마비마가 웃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돌연 거대한 물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대검으로, 약 5척에, 검신은 적홍색으로, 이소상의 헌원과 어렴풋이 닮아있었다.

태허 5제자가 6제자의 대검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눈빛을 빛냈는데, 매우 많은 말이 숨어있는듯 했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뭐냐? 자랑?"


"하하하, 사저 앞에서 어찌 함부로 검을 자랑하겠습니까?

다섯째 사저가 헌원검이 없더라도, 저는 상대가 못되질 않습니까."

마비마가 폭소하더니, 안색을 바꾸고, 얌전히 여인을 향해 예를 올렸다:


"20년간 보질 못했으니, 사저께 가르침을 청해 제가 얼마나 성장하지 못했는지 보고 싶습니다."


"진짜 늙었군, 예전에는 이런 성질이 아니었는데."


"...예, 사람은 변합니다."


"흥, 변하는건 안좋아."

능상이 뜰로 나와, 가볍게 소매를 털었다.


"해봐라, 내가 허락하지."


"사저는... 병기를 안쓰십니까?"


"필요없어."


"그렇습니까."

마비마가 수중의 대검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건 헌원검입니다, 태허검기의 검은 뽑으면 헛되지 않아야 하니, 사저께서도 너무 방심하면 안됩니다."


"참나, 내가 검출비허를 모를까?(劍出非虛) 그리고 난 [헌원]이 없는데, 무슨 병기를 쓰라는 거냐?"


예상했던 답이 나오지 않자, 마비마가 고개를 저었다.

비무와는 별개로, 그는 그 아가씨의 손에 있던 헌원검의 내력을 알아보려는 생각이었다.


"소상의 그 헌원검, 당신께 아닙니까?"


"그건 [묵염향]이다. 일곱째가 딸에게 준 거지."

능상이 좌우를 둘러보더니, 바닥에 있던 텅 빈 검집을 하나 주었다.



"자자, 네 말대로, 병기가 생겼다."


마비마가 의아해했다,


"사저, 그 나무토막으로 제 [적절영]에 맞선단 말입니까?"


"하, 뭔 적절영이야..."

능상이 차갑게 말했다,


"나무토막을 무시하지 마라, 이것도 이름이 있다, [인불파](刃不破)라 부르지."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하지? 네 그 적절영과 비교해도?"


"......"


"하하하하"

마비마가 웃었다, 정말 후련한 기분이었다.


20년간, 그의 상대가 된 사람은 거의 없었고, 마찮가지로 적절영도 거의 뽑지 못했다.

물론 수많은 파국을 넘으며, 여러번 사선을 넘기도 했지만,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 비무, 이거야 말로 그가 꿈꿔왔던 무도의 싸움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인불파]가 제 수를 깨트릴 수 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절영이 크게 빛나며, 마치 뜰 전체가 물기로 뒤덮인 듯이 어둑해졌다.


"오."

능상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더니, 검지와 중지로 검집을 집었다.


"1합이다, 아낄 생각 말고, 비장의 기술을 사용해라."


"—갑니다!"

고함을 지르자, 마비마의 몸이 갑자기 둘로 나뉘었다.

이것이 바로 태허 6제자의 검의: [적절영]!

진기를 헌원검에 쏟아부어, 태허검의로 빛을 꺾는다.

20여년간 검의를 연마한 마비마는, 이제 자유자재로 빛을 이용해 거울상을 만들수 있었다.

그렇게, 2개가 4개로, 4개가 8개로; 8이 수백으로, 수백이 천만으로, 셀수 없을 정도다.

한낮의 황량한 뜰에, 수많은 [축구검] 마비마—



똑같은 마비마, 똑같은 적절영이었다.

마치 거울 하나가 뜰에 수많은 조각을 떨어트린 것처럼, 한 조각 한 조각이 전부 태허 6제자의 모습이었다.

보이지 않는 대검을 쥔 남자가, 기대감을 가감없이 보이고 있었다.


"비무라더니,"

능상이 시시한듯 말했다.


"어쩌다 수수께끼로 변한거지?"


"허, 그럼 사저께 제가 어디있는지 맞춰보라고 해야겠군요!"

마비마의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아직도 많이 부족해, 수수께끼를 풀어봐야 쓸모도 없는걸, 굳이 맞춰야 할까."

능상이 말하며, 손가락이 하늘을 향하고, 검집이 수직으로 세워졌다.



"받아라!"


맑은 목소리와 함께, 검집 [인불파]를 앞으로 내리쳤다.

검집의 끝이 마치 번개처럼, 대기에서 폭음을 내고 뜰 전체를 뒤흔들었다—

두 사람을 감싼 물기가 갑자기 사라지며, 마치 거울이 깨진것처럼 균열이나 산산이 흩어졌다.


수많은 마비마의 분신도 깨져, 가루가 되었다.

무수한 파편이 반짝이는 가운데, 능상은 태연히 서있었다.


"허허실실, 괜찮네, 역시 넌 사부의 훌륭한 제자군."


"...놀랐습니다, 허... 이 사제는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태허 6제자와 검집 [인불파]와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었다.

높이 들어 올린 적절영이 땅에 떨어지자, 마비마가 고개를 숙이고 대검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사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건 알았지만, 어떻게 한 겁니까? 전 아직도..."


"네 검의에는 세가지 허점이 있다."

능상이 마지못해 평을 말했다:


"첫째는 수경(水鏡). 모든 화신은 네 동작을 본뜨니, 네 위치를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


"둘째는 소리. 전투 중에 내 말을 받아서는 안됐다. 헌원검이 빛은 조작할 수 있겠지만, 소리의 근원은 변화시킬 수 없으니까."


"셋째는 기류, 육안으로 볼 수 없다 해도, 네 동작, 호흡의 흐름이 자연스레 네 위치를 노출시킨다."


"하하... 둘째 사저도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헛소리, 내가 허점을 세가지 찾아냈으니, 둘째는 최소 열가지는 찾아내겠지."


"......"

"하, 빌어먹을, 제 재능이 그렇게 모자랍니까."


"사저에게 지는 건 억울하지 않지만, 태허검의가... 검집에 밀릴 줄은 몰랐습니다."


"스스로를 너무 낮추지 마라, 여섯째, 넌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까.

전에는 꾀만 부리던 것이, 이제는 분신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니, 확실히 검의를 연마하는 게 보이는구나.

둘째와 내가 아니면, 널 쉽게 이기지 못해."


"네가 이 먼 길을 와 나와 비무를 하다니, 널 만족시켜 나도 기쁘군. 교묘한 방법으로 이기면 재미가 없었을테니, 그냥 네 수를 깨버렸다— 그래서 누가 내 제자를 패라고 했지? 뒤에 누가 있는지 생각도 안 했나 본데."


"그리고,"


인불파를 휘둘러 공중에서 꽃을 피웠다.



"이건 평범한 검집이라, 한번 쓰기도 힘들어.

널 패배시킨 수는 검혼이 아니라, 검신이다— 알았냐? 이래도 진 게 억울해?"


"......"


능상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지만, 마비마는 이게 칭찬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무공을 논하자면, 이 세상에는 사부 정위진인에 비할 수 있는 사람이, 능상 말고는 없을 것이다.

시대의 절학 [태허검기]는 오온을 공유하는데: 심, 형, 의, 혼, 신이다. (心, 形, 意, 魂, 神)

혼온에 능숙하다는 것은, 검도에 정통하다는 소리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병기에 검법을 사용할 수 있으며, 온갖 병기를 자신만의 검처럼 쓸 수 있다.

검술에 몰두한 수제자 임조우를 제외하고, 태허의 여섯 제자는 모두 검혼을 터득했다.

하지만 검신은— 정위진인 후 수많은 시간이 지났으나, 터득한 사람은 오직 능상 뿐이었다.


신자란(神者)—

계책 없이 계책을 이기며, 검이 없어도 있는 것과 같으니;

검기에 의지가 있고, 신이 된 검, 이것이 바로 무상자재 검신이다.


"아쉽군요, 적절영에는 아직 몇 가지 사용법이 더 있고, 하나하나 사용하려 했습니다."


"늦었다, 기술 하나 받아주기도 귀찮아. 네가 요즘 싸돌아다닌다는 말만 안 들었어도, 피할 생각은 안 했겠는데, 지금은 널 상대할 기분이 들지 않는구나."


"사저가 제 일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습니다."


"이 작은 지방에서도, 네 업적만은 계속 들려오니까: 누구와 싸웠느니, 누구를 이겼느니, 죽였느니...

정말 궁금하던데, 왜 온 강호가 너만 걸고넘어지는 거냐? 사저들이 다 죽었든?"


태허 6제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20년 만에 봤지만, 여전히 다섯째 사저와 대화하는 게 편하지 않았다:


"...모두 괜찮습니다, 조우는 이제 제 부인이 되었습니다."


"아, 그건 들었지. 태허검파— 역시 큰언니야, 이름 바꿀 생각도 안 하다니. 그래, 난 네가 혼인하자마자 북황으로 달려가, 말 한 마리를 따라 몇백리를 달렸다고 들었는데."


마비마가 코끝을 만지면서, 야혈을 바라보았다. 북황에 들어간 것은 이때문이 아니었지만, 결국 그곳에서 평생의 벗을 사귀었다.


"맛있냐?"


"......"

마비마의 입술에 경련이 일었다.


"...사저, 농이 지나치십니다."


능상이 웃지도 않고:

"왜 그러냐, 여섯째? 소싯적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순하고 얌전해서 사고도 안치고, 우리들 보다 더 여협 같았는데 말이야. 이 십여 년간 네가 한 싸움이, 아마 사부가 몇천 년간 한 것보다 많을 거다."


"그렇게 쌈박질을 해서, 무슨 명성이라도 얻은 거냐? 지금은 중원의 천하제일, 무림지존이겠지?"


"하하, 그런 걸로 싸운 게 아닙니다. 설령 태허검기를 다시 수련한다 해도, 사저들을 이길수는 없지요.

무림지존이라... 사실 그게 뭐가 좋겠습니까? 천하제일이 뭐가 아쉽겠습니까?

사부의 신공도 으뜸이었지만, 그런 결말이어서야..."


"그래, 나도 안다."

능상이 흥 소리를 내며, 오두막으로 향했다,


"방이 좁아, 대접을 하기 어렵구나. 다른 일이 있느냐? 없다면 돌아가마."


"있습니다."

마비마가 한 발짝 나왔다,


"매우 중요한 일로, 둘째 사저가 반드시 제가 직접 전하라 하였습니다."


"왜 진작 말하지 않고?"


"사부와 관계된 것입니다."


태허 5제자의 걸음이 멈췄다.


"뭐?"


2-17

살아라





이소상이 많은 힘을 들여, 혼절한 나찰인을 침대로 옮겼다.

소상의 머리가 아직 어지럽고, 손가락을 까닥할 때마다 온몸이 아팠다. 그럼에도 그녀는 끈기를 가지고 이 위업을 달성했다.

나찰인에게 이불을 덮어준 후, 옆에 앉아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첫째 언니는... 음흠흠..."

해안가에 떠다니는 이파리처럼, 이 곡도 소상의 머리에서 갑자기 떠올랐다.


"둘째 언니는... 언니는..."


아, 언제 이 노래를 들었었는데, 누가 불렀더라?

왠지 모르게, 소상은 어머니 진소의의 모습을 떠올렸다.

단정한 옷을 입은 어머니가 소상 앞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렇게나 어린데, 엄마와 떨어져 무학을 배워야 한다니... 정말 힘들겠구나. 그래도 엄마는 다 잘 될 거라 믿어. 장차 네가 검을 배우고 나면, 세상 그 누구도 우릴 무시하지 못할 거란다."


"엄마도 많은 고충이 있지만, 지금 말해줘도,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 강호에 몸을 담고 있어도, 많은 일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단다. 그러니... 넌 살아야 한다, 소상, 넌 잘 살아야 해. 약속하렴."


소녀의 청아한 노랫소리가 뚝 멈춰다.


"......"


별 이유없이, 이소상은 검심을 운용해, 심호를 거대한 얼음으로 만들었다.

사고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거센 물살처럼 흘렀다.

그 위에 있는 심호는 거울처럼, 만물을 비췄다.

소상은 문득 자신이 미래를 예지할 수 있을거란 느낌이 들었다. 소상은 곧 방문이 열릴거라는걸 알았고, 사부가 이전같이 무심한 표정으로 들어와, 소상을 향해 걸어온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다.


능상이 무거운 걸음으로, 천천히 소상의 곁으로 걸어갔다.

능상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어, 마치 모든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잡히지 않는 그림자를 쫓는 것처럼, 소상은 사부를 보자, 본능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


능상이 멈추더니, 귀찮은 듯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네 어머니가 죽었다."





















돌계단은 길지 않았지만, 굴곡이 심했다. [정위진인]은 계단을 내려오며, 아무 말이 없었다.


"......"


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려한 모습의 소녀가 있었다. 정위를 산들산들 따라다니고 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


소녀도 마찬가지로 말을 하지 않았는데, 소녀의 침묵은 정위하고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이 소녀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사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 그녀의 목소리는 모두 이 세상과는 연관이 없는 것이다.

정위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 고요한 산림 속에서, 정위만이 이 소녀의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부, 보십시오— 산장이 불타고 있습니다."


정위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가느다란 검은 연기가 산림 깊은 곳에서 올라, 흩어지는 것이 마치 활짝 핀 묵화 같았다.


'소의...'


발끝을 조금 움직이니, 어느새 십여 장이나 멀리 있었다.


"...늦었습니다, 사부."

소녀가 작게 말했다.


소녀가 갑자기 앞에 나타나, 정위의 진로를 막았다. 그녀의 위쪽에서, 묵화가 조용히 회전하고 있다.

정위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의는 죽었고, 억검산장 또한 주인을 따라갔습니다."

소녀가 중얼거렸다.


"사부, 돌아가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의 출현은 파멸을 가져왔고, 이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저들은 본래 죽어서는 안됐다."


"그럼 누구는 죽어야 합니까? 변하셨습니다, 사부. 과거라면, 당신은 절대 범인의 죽음의 개의치 않았을 겁니다."


"...그런가?"


"당신이 신경 쓰시던 것은, 오직 [주화입마]였으니까요.

후훗, 범인이 그것과 닿는다면, 곧 죽은 것이겠죠."


소녀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먼 곳의 검은 연기를 보다가 다시 물었다:


"[묵염향]은 어디 있는 겁니까?"


"소의는 아무리 해도 그 행방을 말하지 않더군요. 후, 사람이 죽으면, 이리도 많은 것이 영원히 사라지는 법이니—"

"그래도 사부, 포기하지는 않으시겠죠? 얼마가 걸리더라도, 모든 [제자]를 찾아내, 각 [헌원]을 회수해야 하니까요."



정위가 하늘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전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말이 정위의 마음을 흔들어, 참지 못하고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말았다.

소녀가 정위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고, 그녀의 웃음은 어딘가 수줍어 보였다;

그녀의 말은 간절하고, 존경과 믿음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그녀는 어딘가 친숙했다.

아주 오래전, 그녀와 조석을 함께 했었다...

그녀와 조석을 함께 했었다... 아주 오랫동안.

두근거림이 미간으로 몰려왔고, 정위는 눈을 깜박이며 눈앞에 있는 수려한 소녀를 똑바로 보려 했다.

대략 17세 정도일까, 이상하진 않았다, 시간은 이미 그녀의 세계에서 멈춰있을 테니까.

소녀는 현실이 아니다, 그저 정위의 다친 머리가 만들어낸 수많은 환상중 하나,

환상이 이러저리 다니며, 많은 말을 했고, 많은 이들이 떠나, 남은건 오직 소녀뿐이었다


—자신을 죽인 여자.

자신을 살해한 자를 죽이면,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될까?


"말해라... 난 어떤 사람이지?"


"......"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 소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저는 그저 추억일 뿐입니다. 제가 꺼낸 답으로는 어떠한 의혹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당신 자아의 요약일 수도 있고, 또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자성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무심코 던졌던 말이나, 편지일 수도 있습니다... 제 답은 당신의 기억에 남아있는 인상이지만, 이것이 진실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부, 당신의 모든 고통은, 그저 과거에 대한 집착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망각이란 선물입니다, 과거의 책임을 전부 치워주니까요. 당신은 자유입니다. 천하는 장대하니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자유입니다."


정위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 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걸 알았다. 수천수만년 세월은 그녀의 감정을 죽이지 않고 묻어두었으며, 그녀가 죽고난 이후 권토중래하였다.


"—말하라."


"정말 알고 싶으십니까? 일단... 일단 결정하면, 당신은 다시 정위진인이 되십니다. 과거의 사람이 되어, 과거의 길을 걷고, 같은 결말을 향합니다."


"......"

매우 긴 침묵 같았지만, 정위가 입을 열었을 땐, 매우 짧은듯 했다, 존재하지 않았을 정도로, 주저하지 않았을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럼, 좋습니다."

소녀가 눈을 감았다.



"당신은 정위진인으로, 우리 일곱의 사부이며, 저의 어머니—는 당신의 손에 죽었습니다. 제가 여섯 살 때, 어머니는 주화입마에 빠지셨습니다. 그 이후로, 전 항상 당신을 따랐습니다."


"당신은 매우 강하며, 꿋꿋하십니다. 불로고 장생이며, 무공은 세계 으뜸이니, 세상에서 당신과 비할 자가 없었습니다.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전 당신에게 지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신선의 자태를 지녔으며, 이는 범인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당신께서 산에 돌아오자,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우리 일곱은 모두 고아로, 당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당신의 눈에는 우리가 그저 백 년간 있다 갈 나그네, 쓰고 버릴 바둑알이라는 걸 마음속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끌리지만, 오래 알게 될수록 멀어지고 싶어집니다."


정위는 침묵했다, 슬픔이 여름 비처럼, 거침없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침내, 십여년을 넘게 매달린 의혹에 대해 물었다:


"조우, 넌 왜 날 죽인 것이냐?"


임조우라는 이름의 소녀가 눈을 뜨고, 한숨을 쉬었다:



"사부, 저는 당신과 30년, 꼬박 30년을 함께 했습니다."





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