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에 맞서는 수많은 발키리를 양성해낸 성 프레이야 학원,


그 무엇보다 엄숙해야 할 소녀들의 복도를 누군가 거칠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새하얀 은발과 반대로 건강미 넘치는 피부를 지닌 소녀. 캐롤 페퍼는 전속력으로 질주하다가 무언가를 보고 갑작스럽게 제동을 걸었다.


스스로의 속도와 힘을 이기지 못한 캐롤의 신체는 앞으로 고꾸라질뻔 했지만 이내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자세를 바로잡는데 성공했다.


그녀를 멈춰세운 것은 눈앞의 집무실에 걸려있는 명패 때문이었다.


-라이덴 메이-


캐롤은 거친 숨을 가다듬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있는 힘껏 문을 두드리기 위해 주먹을 뒤로 뻗었다.


"그래, 캐롤. 들어와도 돼."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미성에 캐롤은 멋쩍은듯이 뒷머리를 긁고 조심스레 문손잡이를 돌렸다.


방의 주인에 성품에 맞게 잘 손질된 경첩은 어떤 소음조차 내지 않은채 부드럽게 밀렸다.


문을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보라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여성, 캐롤이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


붕괴에 맞서 인류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자 천명 대붕괴 제3소대의 대장.


라이덴 메이가 책상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헤헤, 저인줄 어떻게 아신거에요? 대장?"



"그거야 이 성 프레이야 학원에서 그렇게 복도를 쿵쿵 울리며 달려오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니."



메이는 웃으면서 캐롤의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넘겨받았다.


책상 근처에 있던 안경을 집어들며 메이는 갱신된 캐롤의 평가서류를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작전 수행 능력, 대붕괴 저항 수치, 운동 능력....음, 확실히 전보다도 훨씬 나아졌네. 캐롤."



"그럼? 다음부터는 나도 실전에?"



"아직은 안 돼."



기쁜 듯이 얼굴을 들이미는 캐롤의 앞에 메이는 단호하게 손을 펼치며 거절의 의사를 내보였다.



"흐아앙~대장은 맨날 안된다고 만 해~"



"전보다 나아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 실전에 투입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좀 더 정진하도록, 캐롤 대원."



사실, 단순 수치로만 보자면 이미 실전에 투입되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메이로써는 확실하게 그녀가 한명의 발키리로써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을 능력을 지닐 때까지 그녀를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간의 그녀의 성장을 보건데, 아마 다음 갱신때는 3소대의 유일한 남성 대원인 아담과 자신을 전적으로 지원만 해준다는 제한적인 조건 아래 실전에 내보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메이의 생각과 별개로, 캐롤은 울상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슬픈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캐롤의 눈에 무엇인가 들어왔다.


방의 주인에 깔끔한 성격에 맞게 한톨의 먼지없이 정리정돈된 사무적인 가구들. 그것들 사이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현대적인 단색의 가구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내뿜는 그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장식장이었다.


캐롤은 그 기묘한 장식장에 한발짝 다가섰다. 장식장 안의 내용물들은 더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그곳에 들어있는 것들은 장식품이었다.


라이덴 메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통일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오브제들.


귀걸이, 반지, 조화, 공연 포스터, 수정꽃, 인형, 가면, 찌그러진 동전, 술잔 등등...


갖가지 색과 형태를 지닌 오브제들은 자신만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장식장를 보는 캐롤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메이가 입을 열었다.



"아, 신경쓰이나 보구나? 원래는 내 숙소에 있던 물건들이야. 요즘은 숙소보다 이 집무실에서 지내는 일이 많아져서 말이지."



"흠, 대장이 굳이 일만 하는 장소인 이곳까지 이 무거운 걸 옮긴걸 보면....대장에게 엄청 중요한 물건들인가 보네?"



라이덴 메이가 이끄는 3소대의 예비 대원 다운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메이는 미소를 지었다.



"응. 매우 소중한 추억들이 실린 물건들이야. 예를 들면....'영웅'?"



"영, 영웅이라면 혹시 대장과 함께 붕괴와 맞서 싸웠던...!"



캐롤의 머리 속에 스쳐지나가는 것은 언젠가 성프레이야 학원에서 스쳐지나가듯이 봤던 2소대의 젊은 대장, 그리고 현재 천명의 주교직을 맡고있는 한 소녀 등의 얼굴이었다.


메이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들도 물론 영웅이긴 하지만... 내가 말하는 영웅은 좀더 과거의 영웅들이야."



"엑..... 그러면 설마, 역사 공부에 들어가는거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인데...."



"캐롤. 발키리라면 붕괴와 맞서싸운 역사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지. 그런 태도가 감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윽...."



캐롤은 얼굴을 찌푸리며 메이에게서 서류들을 다시 받아들었다.

캐롤은 잠시 고민하다가 갑작스레 손을 머리로 치켜올려 경례자세를 취했다.


"그렇다면 3소대 예비대원 캐롤! 역사공부로 깎여도 다른 분야에서 득점을 노릴 수 있게 열심히 훈련하고 오겠습니다!"



"후후, 응원할게, 캐롤."



지루한 역사 이야기가 이어질거라 생각했는지 캐롤은 서둘러 메이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달려나가다 실수로 서류를 몇 장 흘려 급하게 돌아와 주섬주섬 챙겨간 것은 덤이다.



"캐롤. 문은 닫고 가야지."



메이가 캐롤을 불렀지만 이미 캐롤은 복도 저 너머로 달려 사라진 뒤였다. 메이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역사, 역사라...."



미안하지만, 캐롤. 내가 말하려 했던 역사는 역사책에서도, 인터넷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오직 나만이 아는 이야기야.


메이는 문을 닫은 뒤 천천히 장식장으로 다가섰다.


장식장 안에 있는 오브제들은 메이에게 있어 잊고 싶지 않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매개체들이었다.


메이는 품에서 고양이발 장식이 달린 열쇠를 꺼내 천천히 장식장의 자물쇠에 밀어넣었다.


고풍스러운 나무문이 천천히 열리고, 유리 너머에 존재하던 장식품들은 다시 한번 메이와 같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니, 다시 한번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기 있는 물건들은 전부 위조품이니까.


장식장 안에 있는 물건들은 증표였다.


메이가 과거의 낙원 안에서 영웅들의 인정을 받고, 그들의 유지를 이어받았다는 증표.


그러나 모든 것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기억에서 건져낸 것들은 다시 기억 저 편으로.


낙원이 사라지면서 메이가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들과의 추억 뿐이었다.


여기 있는 물건들은 - 손에 들고있는 열쇠를 포함해서-  메이가 그때의 기억을 어떻게든 되살려 주문제작한 가품들이었다.


메이에게 남은 것은 바래가는 기억과,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짜들.


인간의 기억이 최대한 아름다웠던 순간만 기억하려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고도, 이 물건들은 낙원에 있을때가 훨씬 아름답고 의미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래, 예를들면. 이 황금의 술잔은 이런 싸구려 도금이 아니었다. 이름도 모를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된채 황금으로 빛나는 술잔은 그 주인이 누구인지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이 수정꽃도. 이 수정꽃은 이런 인공 수정 사이로 싸구려 led빛을 내뿜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녀가 웃으며 핑크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릴때면 그에 맞춰 이 수정꽃도 아름다운 반사광을 흩뿌렸었다.


이 단추도 그렇다. 모양을 대충 흉내내서 불로 그슬렸을 뿐인 이 물건에는 원 주인이 살아온 길의 무게와는 단 1도 상관이 없다.


이 꽃도 그렇다.


부러진 칼도, 붓도, 반지도, 시계도, 실험관도, 동전도, 하모니카도,


그리고 이 가면도.


메이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그것을 꺼내들었다. 플라스틱으로 모양을 만들고 페인트로 도색한 이 가면은 살짝 색이 바랬을지언정 흠집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만들어진 뒤 내내 장식장에 쳐박아놓기만 했으니까.


메이는 가면을 바라보았다.


세월도, 역사도 느껴지지 않는 모조품이건만 메이는 가면 너머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항상 그랬다. 이 가면의 주인은 항상 그런 시선만을 자신에게 보냈다.


-----------------------------------------------------------------------------------------------------


"호오, 율자라고?"



모든게 불타는 뜨거운 대지 위에 그 남자는 서 있었다.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메이는 지금까지 몇명의 융합전사를 만나왔었다.


메이를 대하는 태도는 제각각 달랐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후계자가 낙원의 비밀을 탐구하는 것에 대해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다르다.


메이가 낙원의 적들을 상대하며 느낀 것은 그것들이 아무리 현실의 붕괴수나 망자를 모방할지언정 결국 프로그래밍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메이가 그것들을 상대할때 느껴지는 것은 적의라기보다는 장애물을 배제하겠다는 명령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다르다.


대기를 달구고 메이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흐르게 만드는 것은 이 남자가 내뿜는 열기 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확실한 감정이였다. 적의를 넘어선 살의.


메이가 낙원에 들어오고나서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메이는 입술을 깨물며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라이덴 메이라고 합니다."



"너의 이름따위 중요하지 않다, 율자."



대기가 끓는다, 대지가 요동친다. 남자의 힘을 버티지 못한 낙원이 비명을 지르고있엇다.



"나는, 죽을 녀석의 이름따위 기억하지 않아."



그리고, 불기둥이 라이덴 메이를 덮쳤다.


메이는 이를 악물며 검을 꺼내들었다.


불꽃의 뱀을 낙뢰의 용이 가른다.


불을 쫓는 13인의 영웅, 서열 6위.


[오멸]의 폭왕. 칼파스.


그와의 만남은 단언컨데 모든 13인의 영웅중 최악이었다.


---------------------------------------------------------------------------------


"그 남자는 대체 뭐가 문제죠?"



"응?"



메이는 낙원의 거울 앞에서 몸을 한바퀴 돌렸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시꺼멓게 그슬리고 반파된 견갑이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갑옷이 상한건 문제없다. 율자의 권능이라면 며칠 안가서 깔끔하게 복구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처 그 자체였다.


율자의 일부와도 같은 이 갑옷에, 쉽게 사라지지 않는 상흔을 남긴 일격.


'시험'의 범주를 벗어난 명백하게 살의가 담긴 일격이었다.



"아아, 칼파스를 말하는 거구나?"



아름다운 소녀의 향기와 함께 핑크머리의 요정이 메이의 곁에 다가왔다.


자신이 이곳에서 처음 만난 영웅,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하는 소녀.


엘리시아가 그곳에 있었다.


불합리함을 넘어서 일종의 악의조차 느껴지는 칼파스의 '시험'에 대해서 항의하려던 메이는 자신의 안에서 불타오르던 분노가 조금 사그라든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이 자리에서 미소짓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메이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모든 영웅에게 환대를 받을 거라고 생각한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 남자는...."



메이는 자신의 견갑을 슬쩍 바라보았다.


만약, 스스로를 과신해서 그때 수세를 취하지 않고 공세를 취했더라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엘리시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아직도 견갑에 남아있는 열기는 그 답변을 말해주고 있었다.



"...칼파스는, 도가 지나쳐요."



"후후, 칼파스가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는 조금 내성적이긴 해."



내성적? 그게? 그럼 외향적인건 대체 뭘까. 조우하자마자 '반갑오멸~'같은 대사를 외치면서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기라도 하는걸까.


사실 자신이 당한일과 별 차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메이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시아는 그저 싱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칼파스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게 없어. 메이. 그저 조금 민감하고, 연약한 것 뿐이랄까?"



'조금? 그게 조금이라고?'



"칼파스가 저렇게 거칠고 적대적으로 보여도, 한번 마음을 열면 잘해주는 스타일이야. 푸훗. 전에는 다같이 영화를 찍은 적도 있다니까?"



"...영화요?"



자신이 잘못 들었나싶어 메이는 멍하니 되물었다.


엘리시아는 즐거운듯이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낙원의 13영웅 모두가 모여서 영화를 찍었거든. 여름휴가로 우연히 놀러간 섬에서 펼쳐지는 미스테리액션코미디로맨틱스릴러서바이벌 다큐멘터리! 아아, 정말 즐거웠는데~"



13영웅? 설마 자신이 아는 케빈도 거기 들어갔단 말인가? 그 '케빈'이?


전 인류에게 성흔을 이식하려는 극악무도한 계획을 진행하는 그 남자가?


피도 눈물도 없는 난공불략의 얼음성같은 그 남자가?


칼파스와 케빈을 포함한 13영웅 전부라는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뒤에 장르가 몇개나 붙어있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 말이 나왔으니까 메이한테도 정말 보여주고싶다~. 분명히 빌브이의 창고나 필리스의 상점 구석 어딘가에 있을텐데 말이지. 글쎄, 메이는 상상도 못할걸? 칼파스가 거기서 무슨 배역을 맡았냐면~."



"엘리시아."



그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얼어붙은 것은 분위기였다.


공기는 얼어붙기는 커녕 낙원의 로비가 왜곡되어 보일정도로 열기를 내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그 남자가 있었다.


방금전까지 이야기하던 주제의 장본인인, 칼파스가.



"말하면, 죽여버리겠다."



잔뜩 긴장한 채 천극의 열쇠에 손을 올린 메이를 뒤로, 


단 두 마디를 남긴 채, 칼파스는 낙원 구석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 사라졌다.



"후훗, 칼파스도 부끄러워한다니까. 정말."



엘리시아는 그저 칼파스가 사라진곳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하긴, 메이는 아직 만나보지도, 이름을 듣지도 못한 영웅들이 많은데. 벌써 알려주기엔 좀 일렀나 싶어. 스포일러를 당하면 재미없잖아? 아, 여기서는 반대로 영화의 스포일러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현실의 등장인물들을 스포일러 당하는거지만....아니지, 낙원은 현실이 아니니까 가상의 등장인물일지도..."



평소처럼 재잘재잘 떠드는 엘리시아의 모습에 메이는 한숨을 내쉬며 검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아, 그래도 말이지. 메이."



엘리시아는 갑작스레 메이에게 다가와 귀에 한마디를 속삭였다.



"영화에 나오는 내 수영복, 정말 이쁘다?"



저도 정말 보고 싶네요, 엘리시아의 수영복. 그 말을 메이는 간신히 목구멍에서 삼킬 수 있었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간신히 엘리시아에게 어색한 미소를 짓는게 메이의 최선이었다.


이미 칼파스가 영화에서 무슨 연기를 했는지에 대한 호기심은 우선순위 저편으로 날라간 뒤였다.


--------------------------------------------------------------------------------------------------------------


메이는 천천히 종이를 넘겼다.


낙원에는 영웅들의 기억이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기억체 본인, 혹은 일기, 영상, 보고서 등의 여러가지 형태로 낙원에 들어온 '후계자'들은 그들의 기억을 엿볼 수 있었다.


[무한]의 서펜트 로드. 뫼비우스의 계획을 막은지도 어느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건만, 과거의 낙원에 대한 메이의 조사는 여전히 소강상태였다.


나머지 5명의 영웅은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메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염없이 낙원을 내려가며 8명의 슈퍼솔져들의 과거를 탐구하는 것 의외에는 없었다.


메이는 몇 장 채 넘기지 않은 보고서를 던져버렸다.


이번에도 별 소득은 없었다.


영웅들의 과거를 들춰보면서, 메이는 그들의 과거를, 그들이 걸어온 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해와 공감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겠지만, 적어도 메이에게는 처음 칼파스를 만났던 순간과 같은 적대감은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그건 메이의 입장이었고. 칼파스는 여전히 메이에게 적대감을 표하고 있었다.


이곳, 영세낙토에서 칼파스가 메이에게 제공해 준 것은 단 3개 뿐이었다.


첫째, 스스로를 불태우는 [오멸]의 각인.


둘째, 메이와 낙원의 괴물들을 잿더미로 만들지 못해 안달난 간헐적인 불기둥.


셋째, 지금 바 테이블 위에 올라서서 자신을 노려보고있는 저 적대적인 시선.


메이는 한숨을 쉬며 칼파스에게 다가갔다.



"매번 사람들이 술마시는 곳에 그렇게 올라가서 째려보는 것도 힘들지 않나요? 아니면 그게 엘리시아가 정해준, 당신만의 특별석 같은 건가요?"



그러면 대답이 들려올 것이다.


이 자리가 어째서 자신의 것인지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칼파스만의 대답이.



"꺼져라. 율자.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예, 뭐....그렇겠죠."



기대도 하지 않았다. 메이는 뚫어질 듯한 칼파스의 시선을 뒤로한채 발걸음을 옮겼다.


칼파스가 보이지 않는 복도로 들어서고 나서야 메이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 숨이 가빠진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린다.


자신이 구원받을 바에야, 끝없는 죄책감과 사명감만으로 스스로를 불태우는 남자.


이상한 일이었다. 칼파스의 기록을, 그의 삶을 엿본 이후부터 그를 볼 때마다 메이의 심장은 미친듯이 고동쳤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 


그 동안 느껴보지 못한 감정.




어째서 칼파스만 보면 이러는 것일까.


어쩌면, 뒤늦게 나타난 이성에 대한 동경?


아니다.


그런 감정른 절대 아닐 것이다.


메이는 복도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머, 메이?"



귀를 녹이는듯한 감미로운 목소리에 메이는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와인빛 머리카락과 그녀가 맡은 각인에 어울리는 황금빛의 눈동자.


[황금]의 가희, 에덴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메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어디 아픈거야? 낙원에서 얻은 상처는 빠져나올 때 다시 원래대로 복구될텐데...."



"아뇨, 그런게 아니에요. 단지...."



메이는 잠시 망설였다. 에덴에게 말해도 될까.


아니다. 오히려 에덴이기에 말할 수 있다.


에덴에게 어떤 대답을 들어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 메이는 입을 열었다.



"에덴....'사랑'이란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머나."



에덴은 메이의 입에서 그런 주제가 나올줄은 몰랐다는듯 놀란듯이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슬쩍 보인 그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랑 고민이라. 메이에게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어. 그런데 왜?"



"그냥....제가 누군가한테 느끼는 감정이 있는데, 이게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르겠어요."



에덴은 고민하는듯이 눈을 감고 손을 턱 밑으로 가져갔다.



"음... 사랑이라. 어려운 문제네. 나는 메이를 포함해서 낙원에 있는 모두를 사랑하지만, 메이가 원하는 것은 다른 답변이겠지?"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생각해 봐. 메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 행복을 나눠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아니면 가장 슬펐던 순간, 그 슬픔을 덜어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 모두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함께 있어줬으면 하는 단 한 사람. 혹시 그런 사람이 메이에겐 있니?



메이는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렸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세상이 끝나는 순간 옆에 있어줬으면 하는 단 한사람.


어둠 속에서 메이의 눈앞에 떠오른것은 은발이었다. 가면뒤에서 새하얗게 불탄 잿빛 머리가 아닌, 목을타고 흘러내리는 아름답게 빛나는 은발.


키아나 카스라나.


나의 친구,


나의 가족,


나의-



"어머. 정답을 벌써 찾은 모양이네."



에덴의 목소리가 메이를 현실로 이끌었다.


메이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노을로 물든 호수같은 황금빛 눈이 초승달을 그리고 있었다.



"후훗, 메이의 그런 표정, 처음 봤어. 메이도 역시 사랑을 하는 소녀였구나. 상대는 누구? 남자? 아니면...여자?"



"크흠, 에덴. 그러는 에덴에게도 그런 상대가 있나요?"



"나?"



에덴은 놀란듯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입을 턱에 대고 잠시 고민하던 에덴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글쎄...어떨까? 메이?"



복도 너머에서부터, 향긋한 꽃향기와 함께 느껴져오는 인기척에 메이와 에덴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메이는 보았다.


아나, 내가 저런 표정이었구나.


뺨은 붉게 상기되고 동공이 커진다. 입가의 근육은 자연스레 풀어지고 눈은 자연스러운 호를 그리게 된다.


심장은 미친듯이 뛰고 숨은 점점 가빠진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안녕, 나의 에덴. 그리고 메이."



"안녕, 친애하는 나의 친구, 엘리시아."



주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아름다운 수정의 꽃이 피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소녀, 엘리시아가 있었다.


아아,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예상했었다. 


13인의 영웅중 에덴을 제일 잘 이해하고 서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답은 정해져있었다.



"여기서 미소녀 둘이 무슨 밀회를 즐기고 있었으려나, 아핫. 혹시 그렇고 그런...."



"후훗, 아니야, 엘리. 단지 우리의 후계자의 개인적인 고민을 들어주고 있었을 뿐이었어."



"다행이네~ 메이가 아까 칼파스와 말다툼하고 사라지길래, 혹시나 섬세한 메이가 상처입었을까봐 걱정했지 뭐야."



"엘리시아, 저는 그 정도로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칼파스. 그 이름을 다시듣자 메이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러나 방금 전과 같은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오직 키아나 카스라나 뿐이라는 것을 에덴 덕분에 확인할 수 있었다.


칼파스를 향한 감정이 사랑이나 애정같은 것이 아니라면 됐다.


그 감정이 무엇이든 간에, 더 이상 거기에 자신이 휘둘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메이. 메이는 칼파스를 무서워하잖아. 그래서 나는 혹시 메이가 겁먹어서 몰래...."



"잠깐만요. 엘리시아. 뭐라고요?"



"응? 겁먹었다는 표현은 좀 그랬나? 하긴, 메이도 가녀린 미소녀기도 하지만 붕괴에 맞서싸우는 전사이기도 하니, 이런 부분은 어쩌면 자존심에 조금 스크래치가 가는 표현....."



"아니요. 그 전에. 제가 칼파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고요?"



무서워한다고? 내가? 칼파스를?


엘리시아는 메이의 반응에 당황한듯이 고개를 돌려 에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에덴도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채 엘리시아를 마주 볼 뿐이었다.



"하지만 메이, 메이는 항상 칼파스를 만날때, 떨고있었잖아."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린다.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 


숨이 가빠진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린다.


동공이 확장되고 몸은 차갑게 식어간다.


그제서야 메이는 자신의 감정을 똑똑히 인지할 수 있었다.


라이덴 메이는, 칼파스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


두려움을 느낀다고? 내가?


죽음에 대한 공포는 지금까지 몇번이고 느껴왔다.


키아나와 함께 천궁시에서 살아남을 때부터, 거대한 붕괴수와 수많은 망자들.


웬디와 브로냐, 그리고 공간의 율자.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순간 자신의 옆에는 항상 키아나가 존재해왔었다.


키아나가 없다는 이유로, 이제 와서 자신이 공포를 느낀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 정도로 꺾일 마음이었으면, 애초에 그녀의 마음을 찢어놓으면서까지 코어를 탈취해 요르문간드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아니었다. 아니, 같은가? 아니, 다른게 맞나?


라이덴 메이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칼파스의 그 압도적인 폭력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그의 무엇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라이덴 메이는 그 답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찾게 된다.


라이덴 메이가 낙원을 잠시 빠져나왔던 그 날, 그녀는 양자의 바다에서 키아나 카스라나를 마주쳤다.


천명의 전 대주교, 오토 아포칼립스의 계획을 막기위한 코로스텐에서의 싸움이 막바지로 치닫던 그 날. 


두 소녀는 다시 만났다. 그날, 천궁시에서처럼.


그녀가 안전하다는 것을, 그녀의 운명을 함께 짊어 줄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 무엇보다도 기뻐하며 환희했지만, 이내 그것들은 단 하나의 감정에 잡아먹혀 사라졌다.


자신과 그녀의 옛 스승, 히메코를 닮은 대검에서 모든 적을 불태울 신염이 뻗어져 나오는 순간 메이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정답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오멸]이었다.


죄책감과 사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불태우며 지옥으로 걸어들어가는 [오멸]의 불꽃.


라이덴 메이가 두려워 한것은 칼파스의 힘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려워 한것은 칼파스의 '삶' 그 자체였다.


자신의 연인이 똑같이 걸어갈, 그 지옥길의 삶을.


----------------------------------------------------------------------------------------------------------


아포니아의 예언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메이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머리속이 수많은 생각으로 터질것만 같았다.


칼파스, 키아나, 죽음, 낙원, 예언, 아포니아, 칼파스, 키아나, 죽음, 엘리시아, 배신자, 성흔계획, 케빈, 그리고 또다시 칼파스, 키아나, 죽음.


5만년의 세월을 넘어, 그 어떤 접점도, 공통점도 없는 두 명. 그러나 메이는 그 폭왕에게서 자신의 연인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녀의 연인, 키아나 카스라나는 언젠가 스스로를 희생해 번제의 어린 양처럼 스스로를 불태울 것이다.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그녀를 지지해주건,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그럴 것이란 근거도, 증명도 없었다. 그러나 메이는 알 수 있었다.


그저, 그럴 운명이었다.


문득, 메이의 머리 속에 한가지의 생각이 번뜩였다.


나는, 과거에서 답을 찾아 미래를, 운명을 바꾸기 위해 낙원으로 온거야.


키아나가 죽을 수 밖에 없는 미래라면 자신이 바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메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앞에 그 남자의 등이 보였다.


스스로를 불태울 생각밖에 하지 않는, 증오스러운 남자가. 그래, 마치 키아나처럼.


아포니아는 10일 뒤에 자신이 죽는다고 예언했다. 예언을 깨는 방법? 간단하다.


11일 째의 아침을 맞기 위해 발버둥 칠 필요 없어. 


지금 당장 목에 칼을 쑤셔박고 최후의 숨결을 내뱉으며 쓰러지면, 그것만으로 그녀의 예언은 깨진다.


그러나 그러고싶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었다.


키아나는 절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저 남자처럼.


멀지 않은 미래, 키아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녀의 운명을 바꿀 힘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다시 한번, 그녀의 의지를 깨부수는 일이 있더라도.


그걸 위해서, 나는 먼저 저 남자를 쓰러뜨리고 그의 삶을 부정할 것이다. 그가 걸어온 길은 잘못되었다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키아나의 삶 또한 바꿀 수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그래. 이건 그걸 위한 초석이야. 칼파스.



"칼파스."



칼파스가 고개를 돌려 메이를 쳐다보았다. 메이는 언제나처럼 가면 너머 그의 증오가 섞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제와서 갑자기 죄책감들게 호의 어린 반응을 보여주면 어쩌나 싶었어.


다행이야. 칼파스.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당신의 그 가증스러운 자기희생으로 넘쳐나는 삶도, 단 한번도 나에게 보여주지 않은 호의도, 당신의 모든 것이 증오스러워.


나는 당신이 싫어. 그러니까,



"튀어와. 당장."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


뜨겁다.


피가 끓는것만 같았다.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혈액이 정말 끓어오르고 있었다.



"우욱...읍!"



메이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것들을 토해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위액이 아니라 새빨갛게 익어 연기를 내뿜는 체조직과 끓어오르고 있는 그녀의 혈액이었다.



"으윽....큭."



뭐가 운명을 깨부순다는 거냐.


율자를 혼자서 토벌했다는 칼파스의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직격을 피했는데, 거기서 발생한 열기를 들이마신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도가 모두타고 폐가 익어버릴 정도다.


메이는 고통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흐려져가는 시야 사이로, 이글거리는 대지 위에 서있는 불꽃의 거인과 언뜻 비치는 나비 날개가 보였다.


마지막 순간, 공격의 궤도를 바꿔준 것은 아포니아였다.


솔직히, 예언을 깨뜨리려 시도하면 그녀가 나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지 않았던건 아니었다.


하지만 영웅의 진정한 힘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생각한것도 사실이었다.


어떻게든 흩어져가는 정신을 가다듬어, 메이는 손날을 세워 전류를 흘려보냈다.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보라색 전기장의 칼날이 그녀의 손을 타고 만들어졌다.


한번의 심호흡 뒤, 메이는 이를 악물고 손을 자신의 심장에 박아넣었다.



"크으윽..!!! 아악..!!!"



미칠듯이 고통스러웠지만 참아야만 했다. 점점 박동이 사라져가는 심장을 헤집어 메이의 손 끝이 원하던 것을 찾아내었다.


정복의 보석.


메이의 번개의 율자로써의 힘의 원천.


메이는 마지막 힘을 다해 번개를 보석에 흘려넣었다.


번개의 힘을 건네받은 보석은 심장을 대신해 요동치며 붕괴 에너지를 메이의 몸 곳곳으로 흘려넣었다.


붕괴에너지는 상처입은 메이의 몸으로 스며들며 그녀의 가슴의 상처도, 완전히 타버린 호흡기관도 빠르게 복구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었어도 그녀의 율자로써의 권능은 천천히 그녀의 육체를 수복시켰을 테지만 메이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직 자신이 정신이 남아있을 때, 지금 이순간, 칼파스가 떠나기 전 말해야 할 것이 있었다.



"다음은 없다, 율자."



불꽃의 거인은 이내 가면을 쓴 남자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아포니아와 라이덴 메이를 번갈아 노려보던 칼파스는 이내 몸을 돌려 낙원의 출구로 향했다.



"칼파스!"



메이는 있는 힘껏 소리질렀다. 채 재생이 완료되지 않았는지 목을 칼로 후벼파는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말해야만 했다.



"당신은, 내가 율자라서 나를 증오하는게 아니야!"



멈춰선 칼파스의 등을 향해 메이가 소리쳤다.


예상은 했었다.


칼파스가 라이덴 메이에게 보여주는 증오는 붕괴를 향한 증오가 아니었다.


다른 영웅들은 모두 번개의 율자가 아닌 라이덴 메이라는 인간을, 붕괴에 맞서싸우는 발키리를 인정해주었고, 그것은 같은 영웅인 칼파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였기에, 율자가 아닌, 라이덴 메이라는 인간 자체에서 칼파스는 증오를 느꼈다.


정확히 무엇을 느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라이덴 메이는 알고 싶었다. 


키아나와 갈 길을 먼저 걸었던 남자가 자신을 증오하는 이유를 안다면, 키아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당신은.... 당신은 대체..."



그저 등을 돌린채 가만히 서 있었을 터인 칼파스가 메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 어디에 구멍이 있는지도 모르겠던 칼파스의 가면이지만 메이는 그 순간 그의 눈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너에게."



그것은 메이가 생각했던 것처럼 증오로 불타는 붉은 눈이 아니었다. 절망으로 가득찬, 피로에 찌든 황량한 잿빛의 눈.



" 알려줄 것이 없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덧붙이려던 칼파스는 이내 포기하고 다시 등을 돌렸다.


어쩌면 마지막에 율자를 덧붙이지 않은 이유는 그가 증오 속에 숨기고자 했던 치부를 파악했기 때문은 아닐까,


메이는 마침내 바닥에 쓰러졌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옆에서 아포니아가 뭐라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실패했다.


라이덴 메이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낙원이 무너지기 전까지 칼파스와 라이덴 메이가 직접적으로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


메이는 눈을 떴다. 


그곳은, 달이었다. 저 멀리 푸른 지구가 보이는, 황량하고 차가운 회색빛 암석의 대지.


주위는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이 이곳저곳 거대한 크레이터와 이름모를 파괴된 무기들만이 주인을 잃어버린채로 꽂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삭제된 엘리시아를 다시 모두의 기억을 통해서 다시 데려오고, 자신이 낙원에서 찾고자 하던 답도 찾을 수 있었다.


침식의 율자가 아직 마음에 걸리지만, 엘리시아가 웃으면서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이제 남은건.



"이봐요. "



메이는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칼파스가 고개를 들어 메이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메이도 가면너머 그의 눈동자를 확실하게 마주볼 수 있었다.



"그때 이후로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마주보고 대화하는건."



"있잖아요, 당신이 침식의 율자에게 먹혔다고 들었을때는 놀랐어요. 한편으로는 수긍했죠. 당신이 그때까지 살아있었다면 낙원을 전부 부수고 불태우고 있었을테니까. 관람차에서 보는 광경이 그렇게 조용할리 없었거든요."



"한적한 해변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조용히 일상을 보내고 싶다는거, 정말 당신의 소망인가요? 아니면 율자가 보여준 환상?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당신에게서는 정말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거든요."



"그때는 미안했어요. 이런 사과가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아포니아의 예언을 깨기 위해서 그런게 아니었어요.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조차 지켜줄 수 없었던 나약한 제가 싫어서 그런거였어요. 더 이상은 그런식으로 도망치지 않을 거에요. 어떤 결과가 그 앞에 있든, 그녀와 함께 운명을 짊어지고 싸우겠어요."



"...이봐요, 우리 사이가 계속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마지막이잖아요. 정말로, 정말로 아무것도 해줄 말이 없는거에요? 그 정도로 절 증오했나요?"


칼파스는 아무런 말없이 라이덴 메이를 응시했다.


메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결국, 이게 끝인가. 이 남자와는 최후까지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메이가 마침내 몸을 돌리고 다음 영웅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자신이 잘못 들은것인가 싶어 메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의 입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던 단어.


메이는 칼파스를 바라보았지만 칼파스는 더 이상 어떤 단어도 꺼내지 않았다.


이번에는 메이도 몸을 돌려 팔짱을 끼고 칼파스를 노려보았다.


잠시간의 눈싸움 뒤, 결국 먼저 입을 다시 연 것은 칼파스였다.



"이제 됐다. 가라."



"잠깐만요. 정말, 그게 다에요. 지금까지 있었던 그 모든일에 대한 대답이 '미안하다' 단 한마디라고요?"



"하? 설마 그럼 나한테 감동적인 말이라도 바랬던 거냐?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하아, 기대했던 내 잘못이지, 그래요. 그정도 사과라도 해줘서 고맙네요. 잘 있어요."



메이는 한숨을 내뱉으며  이번에야말로 다음 서열의 영웅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름은 기억했다..... 잘가라."


칼파스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그녀가, 오멸의 폭왕에게서 듣고싶었던 단 한 마디. 그 한 마디를 말해주기 위해서.


"...라이덴 메이."



그 순간, 메이는 발걸음을 멈췄다.


마지막.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두 사람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늦었다, 정말로, 너무나도 늦어버렸다.


이 순간이 지나가기 전에 메이는 마지막으로 칼파스에게 들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그날, 미쳐 물어보지 못한 질문의 대답을.



"칼파스."


당신은-, 


메이는 그 다음의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로 이게 마지막이라면, 그저 자기위안 정도밖에 되지 않을 추악한 이기심을 위해 영웅의 마지막 안식을 빼앗을 권리가 있을까?


그 대답은-.



"....잘 있어요. 안녕."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메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이별을 고할 영웅은 많이 남아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

.

.

.

.

.

.

.

.

.

.

.

.

.

.

.

.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기억에서 건져올린 것들은 다시 기억 속으로.


소녀는 영웅들이 전해준 소중한 것들을 마음 속에 간직한채 다시 여정을 떠났습니다.


영웅들이 남겨준 것들은 언제까지나 그녀의 안에서 살아 숨쉬며 그녀의 여정을 축복할 것이었습니다-.




라는 동화같은 이야기였다면 , 엘리시아. 당신은 너무나도 로맨틱한 이야기라며 좋아했었겠죠?


하지만 엘리시아, 당신이 틀렸어요. 


영웅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인류의 편에 서서 붕괴에 맞서는 율자는 제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케빈. 당신이 맞았어요.


제 2의 엘리시아 같은건 없었어. 그날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은 그냥 키아나였어요.


키아나.


키아나 카스라나.


나의 영웅.


나의 우상.


나의 친구.


나의 가족.


나의 연인.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

-------------------------------------------------------------------------------------------------

눈을 뜨자마자 보인것은 낯선 천장이 아니었다.


자신을 둘러싼채로,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채로 지켜보고 있는 자신의 동료들. 


테레사 학원장님, 화, 아니 후카 반장. 브로냐. 그리고,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단 한명.


그래, 우리는 종언의 율자를 물리치고 붕괴와의 싸움을 마무리 짓기위해 달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키아나는.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머리가 아팠다. 머리를 감싸쥐려고 팔을 움직였지만 이내 고통이 메이를 덮쳤다.


"윽!?"


어떻게든 가누기 힘든 목을 움직이니, 메이의 팔은 아직도 피가 배어나오는 붕대가 묶여있는채로 수갑에 연결되어 침대에 고정되어있었다.


아아, 그렇다. 나는-.



"브로냐. 테레사 학원장님. 후카."



메이가 입을 열자 그들은 깜짝 놀란듯이 메이를 바라보았다.


"메이, 아직 움직이면 안됩니다."



"맞습니다, 메이 언니. 아직 상처가 채 낫지 않았습니다. 지금 움직이면...."



"괜찮아."



브로냐가 말을 멈추고 메이를 바라보았다. 



"괜찮으니까 이제 풀어줘."



깊이를 알 수없는 메이의 호수같은 푸른색 눈은 아직 슬픔으로 가득차 있었다.



테레사는 메이를 보며 한숨을 쉬고 치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들었다.


부드러운 찰칵 소리와 함께 메이의 양팔에서 수갑이 떨어져나갔다.



자신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메이는 조심스레 링겔이 꽂힌 팔을 움직였다.



"윽...."



메이가 신음소리를 내자 놀란 동료들이 달려들지만 메이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치켜들었다.



이제 와서 보니 팔만 다친게 아니었다. 목도 상처가 잔뜩 나있는지 따끔따끔 거렸고, 눈도 어디가 부었는지 시야가 불편했다.



"메이, 이제 정말 괜찮은게 맞아? 혹시..."



"아니요, 학원장님. 정말 괜찮아요."



메이는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테레사에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전부, 전부 기억나요."



그래, 우리는 달로 올라갔다. 그리고,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종언은 문자 그대로 종언이었다. 


구문명의 영웅들이 그렇게 맥없이 쓸려나간 이유를 ,케빈이 그토록 경고한 이유를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힘이 세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도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종언의 율자는 그런 존재였다.


종언의 손짓 한방에 지구에서 꾸린 대부분의 정예부대들이 전멸했다. 남은 이들은 생존자들을 데리고 퇴각하기에 급급했고 소수의 힘을 지닌 발키리들과 율자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이들만이 종언에 겨우 맡섰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한계를 고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 키아나는 결심했다. 스스로를 불태워서라도 종언을, 붕괴를 달에 영원히 붙잡아놓겠다고.


그리고 키아나는-,


"윽."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메이는 어떻게든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녀의 마지막을 기억해내야만 했다.


그래, 키아나는-


고통을 이겨내고 메이의 머리 속에 마침내 그 순간의 풍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량한 달의 대지, 파괴된 채로 곳곳에 흩뿌려진 이름 모를 무기들. 그리고 그 중앙에 서있는 한 남자-.


아니야, 이건 키아나가 아니야. 이건 우리가 봤던 그 때의 달이 아니야. 키아나는 어디갔지?


메이는 몇번이고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러나 마치 카메라의 필름이 바꿔치기 된것처럼, 키아나가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결심한 그순간.


자신의 기억은 키아나가 아닌 칼파스의 마지막 장면만을 재생할 뿐이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쥔 메이에게 후카가 입을 열었다.



"메이, 그 때, 그 순간 이후로....네, 키아나가 사라진 그 이후로. 우리는 모두 슬픔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제일 슬픔에 잠긴 것은 당신이였습니다."



"달에서 돌아온 뒤, 당신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저 하루종일 키아나의 물건들을 바라보며 울고 웃기만을 반복했습니다. 보다못한 테레사 학원장이 당신의 방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때 저희가 본 것은, 칼로 자신의 팔과 목을 난도질한뒤, 키아나의 사진을 끌어안고 미친듯이 웃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미안해요. 메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당신이 그런 모습으로 지내는 건 누구보다도, 키아나가 제일 바라지 않았을겁니다. 그래서....의식의 율자의 힘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아, 그랬던거였나. 메이는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후카는, 히페리온의 모두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제일 충격적인 장면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라이덴 메이는 그것을 잊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라이덴 메이가 라이덴 메이로 있을 수 없게 만든다 해도, 잊고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장면을 대체시켰다. 제일 비슷한, 라이덴 메이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기억으로.



"하, 하하....하하하하하!"



메이는 입에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이게 우리의 결말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입히고, 운명을 바꾸기 위해 영웅들의 무덤까지 불태운 대가가 이것이란 말인가. 정말로, 정말로 완벽한 결말이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흑,흐윽...."



웃음소리는 사그러들며 이내 새어나오는 오열로 바뀌어간다.


메이는 자신의 어깨에 느껴지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브로냐가 눈물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감정의 변화없는 얼굴로 키아나를 놀려먹던 브로냐가 눈물이 잔뜩 맺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울고 있었다.


브로냐 뿐만이 아니었다. 테레사도, 후카도. 전부 어떻게든 울음을 참으려하고 있었지만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메이는 문득, 자신의 옆 탁자에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사진이었다.


오래 전, 창공시에서 붕괴수와 망자들을 피해 키아나와 함께 생활할 때, 우연히 작동하는 스티커 부스를 찾아 둘이 함께 장난스레 찍었던 사진.


그것을 보는 순간, 메이는 그제서야 케빈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케빈이 5만년이 지나는동안에도 망가지지 않았는지.


케빈은 망가지지 않은게 아니다. 망가지지 못했고, 망가질 수 없었던 것 뿐이었다.


메이는 사진을 집어들었다.


메이를 끌어안고 장난스레 머리뒤에 v자로 귀를 만들며 웃는 키아나의 사진.


사진 속의 키아나가 어느샌가 뛰쳐나와 '메이 선배'를 외칠 것만 같았다.


메이는 그저 말없이 브로냐를 끌어안았다.


브로냐는 놀란듯이 눈을 치켜떳으나 이내 메이를 같이 꼭 끌어안았다.


테레사도, 후카도 그런 둘을 함께 끌어안았다.


키아나, 고마워요. 키아나가 있어서 언제나 행복했어요. 그리고, 사랑해요.


떠나간 이들의 소망을 담아, 남겨진 이들의 희망을 위해.


------------------------------------------------------------------------------------

메이는 히페리온의, 아니 천명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빠르게 일상생활을 다시 누릴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했다.


전과 다름없이 밝게 웃으며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에 모두들 메이가 돌아왔다면 기뻐했지만, 성 프레이야 학원에서부터 메이와 함께 해왔던 이들은 메이가 전과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메이에게 구태여 그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라이덴 메이의 남은 조각마저 부셔져 사라져버릴것만 같아서.


메이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택배상자의 케이스를 천천히 뜯었다.


그 안에는 완충제로 쌓여진 갖가지 장식품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슬픈 기억을 잊기 위해서, 낙원에서 있었던 즐거운 기억들을 떠올리며 그것들을 재현해줄 사람을 찾아 열심히 헤메던 물건들, 그것들 중 일부가 메이에게 배송되어 왔다.


메이는 완충제에 겹겹히 쌓여있는 물건들을 풀어헤쳤다.


불을 쫓는 나방의 엠블럼이 각인된 메달. 무엇이 잘못 전달되었는지 나방 보다는 벌새나 막대기를 든 아기천사에 가까웠다.


독특한 모양의 회중시계. 이 시계의 원주인은 평범한 회중시계를 몇번이고, 몇번이고 고쳐내 원래 형태는 기억도 나지않는 시계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현문명에는 그녀가 없다. 여기 있는 것은 그저 모양을 어설프게 흉내낸 모조품일뿐. 바늘이 굴러간다는 것조차 어떤 의미로는 기적이었다.


찌그러진 은화. 분명히 총으로 한번 쏴서 찌그러뜨려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아무리 봐도 망치로 대충 두들긴 것 같았다.


반지, 수첩, 깨진 수정꽃, 그외 어설픈 잡동사니들을 늘여놓다가, 마침내 메이의 손에 그것이 잡혔다.


검은색과 노란색의 플라스틱 가면. 메이는 조심스레 완충제를 벗겨내어 얼굴에 써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그때 눈을 마주쳤을 때는 이 쯤에 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써보니 그 구멍으로는 눈이 보이지도 않았다.


메이는 한숨을 쉬며 가면을 벗었다.


그날, 자신은 칼파스에게 마지막 질문을 하지 못했었다.


과연 그 대답을 들었었더라면 운명이 바뀌었을까?


칼파스가 자신을 적대했던 이유.


자신은 칼파스에게서 키아나를 보았다. 


칼파스의 과거에서 키아나의 미래를 보았기에 그를 쓰러뜨림으로써 키아나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칼파스는? 


키아나는 마지막 순간 자신을 떨쳐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녀는 웃으며 스스로를 불태웠다.


칼파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낙원에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그가 달로 올라가서 스스로를 불태우며 싸웠던 단 하나의 이유.


칼파스는 라이덴 메이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낙원이 무너지던 날, 던지지 못했던 마지막 질문.



"칼파스, 당신은...."


--------------------------------------------------------------------------------------------


"당신은, 저에게서 대체 누구를 보았나요?"



메이는 가면을 노려보지만 설령 칼파스 본인이 이 자리에 있었어도 대답해주지 않았을 답변을 모조품인 플라스틱 가면 따위가 말해줄 리가 없었다.


메이는 한숨을 쉬며 가면을 원래 자리하던 곳에 돌려놓았다.


메이가 방이 어두워졌음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는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환히 빛나는 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달.


메이는 문을 다시 닫고 고양이 장식 열쇠로 장식장을 걸어잠궜다.


아직 학원장에게 제출할 서류가 남아있었다.


메이는 서류를 챙겨 조심스레 자신의 집무실의 문을 열어 복도로 나섰다.


과거는 그저 지나가버린 과거일 뿐,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저 내일을 준비할 뿐이다.


떠나간 이들의 소망을 담아, 남겨진 이들의 희망을 위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방, 달빛만이 거짓된 추억들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








라이덴 메이는 가끔씩 꿈을 꾼다.



그것은 악몽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연속된 이미지의 형상들 뿐.



차갑고 황량한 암석으로 가득찬 회색의 대지를 시뻘건 화염이 집어삼키는 꿈이었다.



그 불꽃이 달의 대지에서 지금도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을 자신의 옛 친구의 것인지, 

아니면 5만년 전에 하늘에서 내려왔던 한 남자의 최후의 불꽃인지 라이덴 메이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너무나도 슬픈 스스로를 불태우는 화염.


[오멸]의 불꽃이었다.




칼보탐(칼파스가 보여준 자학(自虐) 탐색)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