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동화가 싫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만 오려서 모아놓은 것 같은 이야기들은, 매일 문자 그대로 사람이 갈려나가는 이 참혹한 현실에서 어떻게든 눈을 돌리기 위해 만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가식으로 가득찬 이야기들보다 더 싫었던 것은, 어느새인가 그것들을 펼쳐서 읽고 있는 자신이었다.


똑-, 똑-.


짧은 두 번의 노크소리는 그녀를 비련의 인어공주에서 다시 히페리온의 생물학 전문 박사이자 카운슬러로 돌려놓았다.


그녀는 황급히 인어공주를 덮어 휴게실 책꽂이에 대충 쑤셔넣었다.


대체 누가 이런 유치한 어린이 동화책들을 여기에 가져다놓은걸까. 평균 연령이 20대를 훨씬 넘어 30을 바라보는 곳인데.


문득 이 히페리온의 온갖 곳을 쏘다니며 있는 장난, 없는 장난을 모조리 치고 다니는 적,청의 쌍둥이 자매가 떠올랐지만 그녀들이 이런 동화책을 읽는 것보다 누군가를 골탕먹이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똑, 똑.


"박사님, 들어가도 돼요?"


다시 한번 울려퍼지는 노크 소리에 그녀는 황급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어디 이상한 곳은 없겠지, 몇 번이고 휴게실 벽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그녀는 문 너머에 있을 소녀를 향해 말했다.


"네, 들어오세요. 키아나양."


기계식 미닫이 문이 부드럽게 밀려나고, 그녀가 들어왔다.


밤하늘 같은 푸른 눈동자 위로 별빛을 녹여낸듯한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빛나며 흘러내렸다.


키아나 카스라나. 또 다른 이름은 시린, 혹은 K-423.


한때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던 공간의 율자.


그리고-


"안녕하세요.박사님."



"오랜만이에요. 키아나 양."


박사라는 호칭으로 불린 그녀는 그저 조용히 웃으며 서류철을 꺼내들었다.


"우울증, 분리불안, 신경성 질환....음, 전부 전보다 많이 안정됐네요."


"정말로?"


"네, 물론이죠. 솔직히 말하자면....이 상담이 더 이상 필요할까 싶을 정도에요."


"그, 그럼...앞으로는 박사님을 못 만나는 건가요?"


불안한 듯이 흔들리는 키아나의 눈동자에 박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뇨. 발키리 분들의 멘탈 케어, 특히 키아나 양은 최중요 인물이니까. 딱히 이상 징후가 보이지 않아도 이런 상담은 필수에요."


"그, 그런가요. 다행이네....헤헤..."


키아나는 멋쩍은듯이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키아나 양의 상태가 이렇게 안정된건 동료분 들의 덕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키아나 양 본인이 나아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했기에 가능한 거에요."


박사는 팔을 벌려 테이블 너머의 키아나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키아나는 당황한듯 몸을 빼려했지만 이내 박사의 부드러운 손길에 조용히 몸을 기대었다.


"정말 잘했어요. 키아나."


마치 어머니가 딸에게 그러하듯이 등을 쓰다듬는 박사의 손길에 키아나는 몸에서 힘을 빼고 그저 그녀의 가슴에 기대어있을 뿐이었다.


마치 그러지 못했던 자신의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는듯이.


"...고마워요. 클라인 박사님."


클라인이라는 이름의 박사는 그저 아무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내가 더 고맙지.


물결치는 그녀의 녹색 머리카락 사이에서, 뱀과도 같은 눈이 요사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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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속 왕자나 공주들은 저주에 걸려서 본모습을 잃는다. 누군가는 짐승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영원한 잠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 혹은 그녀들을 다시 깨우는 것은 아름다운 이성의 키스였다.


그러나 뫼비우스를 기억의 바다 너머에서 끌고 온것은 백마를 탄 왕자님도,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공주도 아니었다.


그것은 텔레비전 모니터 너머의 불타는 도시였다.


1953년, 베를린. 


율자가 현문명에 다시 강림한 날.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건물들은 화염에 집어삼켜지며 건축자가 바라던 것 이상의 예술을 세상에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무참히 박살내며 짓밟는 것으로 붕괴수는 예술에 대한 감상을 대신했다.


도시를 불태우며 전진하던 붕괴수와 카메라맨의 눈이 렌즈 너머로 마주치고, 비명소리와 함께 내동댕이쳐진 카메라는 불타는 도시를 활보하는 붕괴수들을 비추며 자신의 마지막 영상을 세상에 송출했다.


뫼비우스는 영상이 꺼진 검은 화면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보았다.


원래의 녹색은 찾아볼 수 도 없는 아무렇게나 염색한 머리.


인류 최고의 지성이라곤 남지 않은 공포에 질린 눈.


그저 얼굴의 형태에서만 간신히 [무한]의 뱀을 찾아볼 수 있었던 보잘것 없는 여성.


그리고 화면 너머의 그녀가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지금까지 뭘  한거지?"



5만년 전, 찬란한 과거를 현재에 전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기억의 방주.


과거의 낙원.


그곳에서 진짜를 뛰어넘는 진짜 '뫼비우스'가 되고싶었던 기억체는 자신이 유일무이한 뫼비우스가 되기위해 한가지 계획을 세웠다.


낙원 바깥의 자신을 죽이는 계획.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무한]한 부활의 힘을 지닌 융합 전사.


설령 '씨앗'이 제대로 심어져 그녀가 스스로 삶에 대한 의지를 잃게 한들, 종언이 그녀를 제대로 죽일 수 있을까?


-아니, [무한]의 육체는 죽지 않아도 상관없다. 


오히려 살아서 이 세상을 활보하게 만드는 편이 나중에 자신이 이 낙원을 빠져나갈 때 요긴하게 쓸 수도 있겠지.


죽는 건 '뫼비우스'면 충분하다.


단순히 삶에 대한 의지를 없애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죽음-정확히는 능력의 발동을 트리거로 하는 그녀의 씨앗은 삶의 의지를 없애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부활의 순간, 그녀의 자아를 의식 속 가장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가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그녀를 양분으로 씨앗은 천천히 자라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곳에는 뫼비우스라는 영웅은 더 이상 남지 않는다.


기억을 잃은 채, 새롭게 시작한 인간 사회에 녹아들어가 '살아가라'라는 명령 하나만으로 끝없는 세월을 주위에 치여 살며 그녀의 기억체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톱니바퀴만이 남을 뿐.


그녀는 소리 높여 웃었다.


구문명이 모두 먼지로 되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낙원에 기억체를 동기화시킨 그 순간.


뫼비우스의 기억체는 뫼비우스에게 '씨앗'을 심었다.


언젠가 거대하게 자라나 자신이 자리잡은 대지를, 별을 먹어치울 바오밥나무의 씨앗을.




'뫼비우스 였던 것' 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자신은 대체 이 5만년간 무엇을 한거지??


'항사'는 어떻게 됐지?


수는 해답을 아직도 찾지 못한건가?


'방주'는? 


아아, 불쌍한 그리세오. 그녀는 지금 우주의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불씨' 는 어디까지 진행된거지?


5만년이란 세월동안 겨우 이정도의 문명 수준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케빈과 화는 지금 이 계획을 제어할 수 있는 상태인가?


그리고 만약, 이 모든게 실패했디면. '성흔' 계획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모니터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뱀의 허물이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야. 아직 늦지 않았어. 


나머지 영웅들이 전부 실패했다면, 남아있는 모든 걸 끌어모아서라도 '성흔' 계획을 가동시켜야만 했다.


그러니까 돌아가야해.


.....어디로?


구 파이어모스의 기지. 그 곳에 가면 아직 계획들을 지원하기 위한 구문명의 유산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낙원에서 자신의 기억체를 역동기화함으로써 다시 예전의 뫼비우스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곳의 좌표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성흔' 계획은 정확히 뭐였지?


자신은, 뫼비우스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여기에 매달리고 있었던 거지?


머리속에 누군가 떠올랐다. 항상 밝게 웃으며 모두에게, 심지어 자신에게도 미소와 사랑을 건네주었던 핑크빛의 그녀.


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안 돼, 제발...."


어떻게 5만년 동안이나 이 모든걸 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걸까.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 걸까.


이럴 거라면 차라리 기억을 되찾지 않는게 나았을텐데.


이럴 거라면 차라리,


죽어버리는게 나았을텐데-.



창틀을 넘어 자신을 비추는 달빛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는지, 어느새 세상은 어둠에 가라앉아 창문 너머 드문드문 세워진 가로등과 달만이 내던져진 옷가지와 물건들로 가득한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하, 하하..."


한때, 뫼비우스라 불리었던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만약에. 만약에 자신이 돌아간다 한들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구문명의 유산들로 어떻게든 붕괴에 맞설 수 있는 것은 13영웅의 일원, [무한]의 뫼비우스였었다.


이렇게 누더기마냥 기억이 뜯겨져나간 그녀의 허물이 아니라.


허물.


그녀는 이제서야 누가 자신에게 이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구 파이어모스의 기지 지하, 낙원에 잠들어있을 또다른 그녀의 허물.


아니, 그녀는 허물이 아니었다.


그녀야말로 진짜 뱀이었다. 나약해빠진 허물을 벗어던진 진정한 뫼비우스.


만약, 그녀와 자신이 뒤바뀐다고 한들 자신도 그녀와 같은 일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 있는 자신도, 낙원에 잠들어 있는 그녀도 똑같이 뫼비우스였으니까.


세상에 단 한명뿐이면 족한, 두 명이나 필요없는 위대한 뫼비우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는데 모든 기운을 다 써버렸는지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잃지 않고 일어날 수 있었다.


존재할 가치도, 살아갈 목적도 모두 잊어버린 그녀는 이제 어떤 길을 가야할까.


힘없이 흐트러진 옷가지와 가재도구들을 쓸어담던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엉망진창으로 내동댕이 쳐진 잡동사니들 사이에서도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것은 수정으로 만들어진 꽃장식이었다.


옛날의 그녀처럼, 아름다운 녹색 빛을 내뿜는 투명한 수정의 꽃.


대체 언제부터 지니고 있었던 걸까.


오래 전 뫼비우스의 기억 속에조차 없는 처음 보는 물건.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시아."


그래, 이제서야 기억이 났다. 


낙원에서 따온 그녀의 이름도.


그 끔찍한 시대에서도 인간성은 아직 살아있다는걸 증명하는 듯한 그녀의 미소도.


그리고, 그녀가 전해주고자 했던 [진아]도-.


그녀는 수정꽃을 품 속에 그러안았다.


차가움밖에 느껴지지 않을 석영재질의 장식품에서는 누군가의 온기가 새어나왔다.


자신은 이것을 그녀에게서 받은 기억이 없다.


그래, 아마 옛 친구를 두고볼 수 없었던 그녀가 떠나기 전날 밤 몰래 들어와 머리맡에 조용히 놔두고 갔을지도.


잠든 자신을 머리맡에서 조용히 웃으며 지켜봤을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억을 잃어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조차 처음 본 순간 소중하게 간직했을 에메랄드빛 수정의 꽃.


"그래."


뫼비우스는 가슴에 수정꽃을 품은채로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렸다.


마치, 한쪽만 남은 유리구두를 소중하게 간직했을 신데렐라처럼.


"이래서 내가 널 싫어하는거야. 엘리시아."


오래 전, 인류에게 지혜의 과실을 전해 준 것으로 뱀이 해야 할 일은 끝났다.


낙원에서 추방당한 뱀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녀가 남긴 과실이 어떤 꽃을 맺을지 인류와 함께 지켜보는 것뿐.


날이 밝고, 해가 다시 세상을 비추었을때는, 방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흐트러진 옷가지도, 어질러진 가구들도, 스스로를 잃어버린 뱀의 허물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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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넘버: 블랑카, 19시 13분 퇴실 확인.]


신성 의약의 연구원 블랑카, 아니, 뫼비우스는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작은 슈트케이스와 함께 신성 의약의 거대한 자동문을 나섰다.


1차 붕괴가 일어난지도 어느새 60년.


허물을 벗는 뱀처럼 여러 신분을 갈아타며 그녀가 본 세상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는 현 문명의 성장 속도.


계속해서 빈도도, 규모도 늘어나는 붕괴현상.


이 모든 게 구 문명에서 봤던 재앙의 전조를 다시 한번 지켜보는 것만 같아서 불쾌했다.


그러나 제일 실망스러웠던 것은 율자들이었다.


1차 붕괴로 수많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 사라진 1율자, 학살을 벌인 뒤 토벌되었나 싶었지만 다시 부활한  2율자, 그리고 창공시에서의 목격담 이후 행적이 묘연한 3 율자.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이후로 몇 명의 율자가 더 나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구문명의 율자코어로 만든 신의 열쇠들. 그리고 계속해서 소유권이 바뀌는 현문명의 율자코어들. 이 모든게 엮여 상황을 한치 앞조차 보이지 않는 진흙탕으로 더더욱 끌어내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5만년을 넘어서 전해질 유산들을 만든 자신들의 두뇌가 저주스러웠다.


정말 엘리시아가 계획했던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던 거였나?


블랑카는 발걸음을 멈췄다.


소란스러운 거리, 불길하게 가라앉은 공기.


그리고 낮게 울려퍼지는 그르렁거리는 붕괴수의 소리.


신성 의약에 들어오게 된 것은 천명과 협업하는 민간 제약기업이라 천명에 대한 정보를 많이 빼돌릴 수 있을 줄 알고 들어온 것이었는데, 왠걸.


오히려 천명보다 신성 의약, 아니 정확히는 요르문간드와 이곳에서 접촉할 줄은 몰랐다.


세계를 먹어치우는 뱀, 요르문간드. 


그 이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몇 개월 전 우연히 스쳐지나간 자신의 창조물, '그레이 서펜트'를 보기만 해도 명백했다.


하, 그 자칼이라는 건방지게 자신을 하대하던 박사는 그녀의 진짜 상관이 누군지 알고 있었을까?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붕괴수의 목격담과 신성 의약에서 이를 악물고 통제하는 EOS호를 둘러싼 천명 발키리 와의 교전.


이 전조들이 시사하는 것은 명백했다. 이 도시가 곧 누군가의 음모에 따라 불길에 휩싸여 사라질것이라는 것.


이 일련의 사건들을 막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그저 방관자일 뿐.


당장 전 인류가 연합하여 제 2의 파이어모스를 설립해 붕괴에 대항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테러의 수단으로 쓰는 것을 보면 그저 기가 찰 따름이었다.


아아, 엘리시아. 정말 너는, 우리는 옳은 선택을 한 걸까?


율자들은 인류를 선택하지 않았어.


사람들은 5만년 전으로부터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


우리는-


흔들리는 도로가 블랑카를 상념에서 깨웠다.


전차형 붕괴수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감정없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블랑카는, 아니, 뫼비우스는 낮게 웃었다.


오늘 밤, 블랑카 박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이 '사고'로 죽을 것이다.


붕괴수한테 짓밟히든, 테러에 휘말려 잿더미가 되든.


블랑카는 죽고, 그녀는 날이 밝기 전에 도시를 벗어나 허물을 벗고 새로운 뱀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글쎄, 이름이랑 신분은 나중에 정해도 되겠지. 그러니까-


"비켜, 실험쥐만도 못한 것."


그녀의 그림자가 불길한 녹색빛을 내뿜으며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0.27 초 뒤, 그녀의 그림자에서 뻗어나온 손톱은 붕괴수를 흔적도 없이 갈기갈기 찢어 먹어치울 터였다.


그래,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비켜-!"


고함소리와 함께 목제 야구방망이가 붕괴수의 머리를 뭉개뜨렸다.


에.


방금 그 멍청한 소리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건가? 

블랑카는 자신에게 되물었지만 이내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를 보고 답을 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흩날리는 은발 사이에서 보이는 호수같은 푸른 눈. 


그녀에게서, 자신의 너무나도 오랜 동료의 모습을 보았기에.


"...케빈?"


은발의 소녀가 그제서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뫼비우스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어디 다친데는 없어?"


다친데는 없냐고? 글쎄, 온통 찢어진 발키리 슈트위에 누더기 같은 후드를 걸치고 자잘한 상처로 가득한 몸을 이끈채 몇십미터 상공에서 뛰어내려 붕괴수를 처치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소녀는 블랑카가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가 갑작스런 습격에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붕괴수의 잔해 위에서 뛰어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뫼비우스는 그제서야 소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래, 케빈이랑 닮았다고 생각한게 당연하다. 


그녀야말로 케빈 카스라나의 피를 이어받은 후계자,


수백만명을 학살하고 대붕괴를 일으켜 천명에게 수배당한 공간의 율자.


키아나 카스라나.


"여긴 위험하니까 최대한 도시 외곽으로 도망쳐. 빨리!"


블랑카에게 상처 하나 없다는 걸 확인한 키아나는 다시 도시의 중심부에 설치된 폭탄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키아나를 블랑카가 멈춰세웠다.


"잠깐만. 너....수배서에서 본 적 있어. 몇백만명을 죽인 율자. 맞지?"


키아나의 얼굴이 그늘로 뒤덮였다.


이미 그녀가 누구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저 지금까지와 같은 생활을 이어나간다면 이대로 고맙다고 인사를 한뒤에 그녀를 모른채 걸어나가면 될 뿐이다.


그걸로 좋다. 이 이후 천궁시에서 일어나는 일은 여기서 죽는 블랑카 박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일테니.


그러나 그래선 안됐다. 블랑카는 확인해야만 했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던 키아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맞아.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공간의 율자야."


"그렇다면 이제 와서 왜 사람들을 붕괴로부터 구하는 거지? 그게 너의 기만 계획인가? 아니면, 위선?"


"위선이더라도!"


키아나가 소리질렀다.


블랑카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푸른 호수와도 같은 눈에서는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붕괴에 사로잡혀 증오로 가득찬 노예가 아닌, 언젠가 그녀의 친구와 같았던 [진아]의 의지가.


"설령 위선이더라도, 내가 저지른 일에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어, 내 의지로, 내 선택으로 맞서 싸울거야!"


"그래야만, 이 불완전한 세계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


키아나는 저 멀리 높이 솟은 송신탑을 바라보았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었다.


"....도시 중심부에 폭탄이 설치됐어. 내가 어떻게든 막을거지만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외곽으로 도망가."


그녀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었다.


"...안녕."


키아나는 몇번의 도약만으로 높은 빌딩 벽을 타고 올라갔다. 


밤의 거리에서도 밝게 빛나던 그녀의 신형은 곧 빌딩 높이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뫼비우스는 그저 가로등의 불빛 아래에서 그녀의 등을 멍하니 쫓고 있을 뿐이었다.


"엘리시아..."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고 온몸에 피가 돌며 현기증이 났다.


저 멀리, 송신탑에서부터 보라색의 유성이 중력을 거슬러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뫼비우스는 그것이 유성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것은 꽃이었다.


엘리시아가 뿌렸던, 5만년을 넘어서야 마침내 봉오리를 피워낸 작은 꽃씨.


하늘 높이 날아가던 유성은 마침내 대기권을 돌파했다.


그 순간, 눈이 멀 듯한 태양과도 같은 섬광이 도시를 뒤덮었다.


이내 섬광이 걷히고 농축되어있던 붕괴능이 오로라의 형태로 대기권 밖애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오로라의 아래에서, 뫼비우스는 무엇인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아주 오래전, 이미 사라져버린줄 알았던 눈물이.


"너는....우리는, 틀리지 않았어."


엘리시아의 계획은 성공했다.


공간의 율자는, 키아나 카스라나는 스스로의 의지로 붕괴에 맞서고 인류의 편에 서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 엘리시아처럼.


오로라가 걷히고 도시가 다시 어둠 속에 가라앉았을 때, 블랑카 박사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어둠에 뒤덮힌 거리를 걸었다.


처음에 그녀가 가려고했던 반대 방향, 키아나가 달려간 곳으로.


이미 높은 수치의 붕괴능 몇개가 그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감지했다.


자신이 지금 그곳으로 가봤자 이미 모든 상황은 끝나있겠지.


그래도 보고싶었다.


엘리시아가 옳았다는 증거를 다시 한번 보고싶었다.


뫼비우스는 빌딩의 옥상위에 올라섰다.


뫼비우스는 시야 아래 거대하게 자란 나무와 그곳에 뉘여진 키아나, 그리고 그녀를 두고 싸우고 있는 두개의 인영을 보았다.


뫼비우스는 문득 그 중 1명이 가진 무기를 볼 수 있었다.


거대한 흑백의 창.


'백화흑연'.


한때 엘리시아의 소유였던, 그러나 귀엽지 않다는 이유로 내던져버렸던 신의 열쇠. 아마도 저 나무도 백화흑연의 능력으로 만든 것이겠지.


저 백화흑연을 능숙하게 다루는 걸 보니 아마 저 금발의 발키리도 상당한 실력자일 것이다.


싸우고 있는 두명에 대한 평가는 그것이 끝이었다.


그 두명은 더 이상 뫼비우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뫼비우스는 고개를 돌려 키아나를 보았다.


그녀는 나무 사이에서 상처입은 몸으로 조용히 잠들어있었다.


엘리시아가 5만년을 넘어 마침내 피워낸 꽃.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도 연약했다.


꽃이 핀 것만으로는 부족해. 엘리시아는 그 이상을 바랬을 것이다.


그녀의 희생을 헛되게 해선 안 돼.


그녀에게 보여줄 것은 이런 나약한 꽃 한송이가 이니다.


지평선을 가득 메꿀 정도로 흐트러지게 핀 꽃의 낙원.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를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두 발키리의 싸움의 결착이 나려하고 있었다.


백화흑연 이전에, 두 명의 기량이 너무나 차이가 났다.


지금 당장 저 곳에 난입해서 그녀를 데려오는 것은 무리다.


현문명과 구문명의 차이가 크다 해도, 백화흑연의 주인은 장난으로 얻은 자격이 아닐테니까.


데려온다 한 들 저런 외골수 성격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물러난다. 더 좋은 계획이 있으니까.


뫼비우스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은채 등을 돌려 옥상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미안하지만 키아나. 엘리시아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녀가 원한 꽃이 되어줘야겠어.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뭐, 내가 그 꽃이 되는것도 괜찮을지도."


[무한]의 뱀은 녹색 동공을 반짝이며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그저 웃음소리만을 남긴 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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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 박사. 여기가 당신의 방이야."


펜실베니아 대학 출신의 신경생리학, 심리학 전공의 떠오르는 신예, 클라인 박사.


붕괴에 맞서기 위해, 더 나아가 세상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천명이 아닌 네겐트로피, 히페리온에 승선하기로 하다-.


당연히, 클라인은 뫼비우스가 준비한 수많은 신분 중 하나였다.


신분을 버릴때마다 즉시 신분을 새로 만드는 금방 꼬리 잡힐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모든 신분들은 십 수년 전부터 철저하게 계획되어 천천히 만들어졌다.


마치, 실제로 인생을 살아가듯이.


아무도 클라인 박사를 본 적은 없지만, 클라인 박사는 기록 속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다.


클라인, 아니 뫼비우스 박사는 녹색의 머리를 가볍게 뒤로 쓸어넘기며 방 안에 들어섰다.


미적감각이라곤 1도 느껴지지 않는, 편의성과 실용성만을 중시한 연구자의 방.


그러나 오히려 그 점이 그녀에 마음에 들었다.


"짐은 적당히 놔두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과 인사하면 될거야. 그리고...."


푸른색의 머리를 뒤로 넘겨올린 히페리온의 과학고문, 아인슈타인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정말 이상하지. 안 그래? 안 그래도 인력이 부족한 마당에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가 원하던 분야의 인재가 딱 나타나다니 말이야."


"그런가요? 저로써도 의외였는걸요. 최근 천명에 안그래도 뒤숭숭한 소문이 돌고있는데. 딱 맞춰서 천명의 음모를 파헤치고 붕괴에 맞선다는 조직이 제 앞에 나타날 줄이야."


싱긋 웃으면서 미소를 내보이는 클라인에게 아인슈타인은 그저 혀를 찰 뿐이었다.


대외적으로, 클라인 박사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서류상으로도, 그녀의 과학적 소양도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더더욱 의심스러웠다.


라이덴 메이가 사라진 뒤 혼란스러운 히페리온에 마치 준비되었다는 듯이 나타난 여자.


기계만 잘다루지 인간관계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 테슬라는 그저 연구진들의 부담을 덜어줄 새 인력이 온다는 말에 두 팔 벌려 환영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아니었다.


"수상한게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일단은 넘어가주겠어. 클라인 박사. 하지만 되도록이면 나와 테슬라 박사의 지시에 따라주길 바래."


"물론이죠. 아인슈타인 박사님."


아인슈타인은, 그순간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뱀을 마주친 작은 실험쥐처럼.


"같은 박사라도, 급이 다르잖아요?"


여전히 사람좋은 미소로 아인슈타인을 대하는 클라인의 미소에서, 아인슈타인은 세로로 갈라진 뱀의 눈동자를 본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흠, 그 말에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클라인 박사."


"글쎄요. 저는 사실을 말한것 뿐인데."


구문명과 현문명의 최고 두뇌가 서로를 향해 내보내는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누군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둘의 시선 가운데서 스파크가 일어났다고 착각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


결국 의미없는 기싸움에서 고개를 돌린 것은 아인슈타인 박사였다.


"뭐, 됐어. 이유가 뭐든, 결국은 붕괴에 맞서기위해 이곳에 온거잖아. 별 것도 아닌 일로 같은 배에 승선한 동료와 서로 감정 상할일은 하고싶지 않아."


"저는 감정 상할 일 따위 하지 않았는데요."


"하, 끝까지.....됐어. 스스로가 얼마나 뛰어난지 시비를 걸고 싶은거라면 나한테만 해달라고. 애꿎은 다른 연구원들한테는 화풀이하지말고."


아인슈타인은 마지막으로 클라인을 보았다.


웃는 가면 뒤에 맹독을 숨기고 있는 독사.


그것이 클라인 박사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평가였다.


적어도 지금은, 그 독니가 우리에게 향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할까.


"그럼."


아인슈타인이 나가며 인식키를 가져다대자 문이 닫히며 뫼비우스는 홀로 삭막한 방 안에 남겨졌다.


클라인 무늬하나 없는 순백의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사실, 그녀가 맞았다.


이곳, 히페리온에 섞여 들어갈려면 자신을 낮추고 지식을 숨겨 이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 먼저였다.


그런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


도움이라고는 하등 될 게 없는, 구문명이 현문명보다 뛰어나다는 오직 자기 위안을 위한 쓸모없는 기싸움.


이제는 좀 쉬고 싶었다.


클라인이 다시 눈을 떴을때는 시계는 이미 저녁을 넘어 밤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았다.


애초에 융합전사가 된 이후로는 공복감을 느껴본 적도 손에 꼽았다.


자신이 지금 쓰고있는 이름의 옛 주인 몰래 컵라면과 커피를 흡입하던 것도 공복감이나 각성 보다는 오랫동안 연구를 하다가 만들어진 일종의 습관에 가까웠다.


커피.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잠을 깨울 정도로 적당히 씁쓸하면서도 전두엽의 갈증을 달래줄만큼 달달함도 가지고 있었던 커피.


그런 훌륭한 커피를 만들 줄 알았던 조수가 곁에 있었던 것은 5만년도, 아니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다.


휴게실에 가면 아마 인스턴트 커피믹스라도 몇개 정도는 구비되어있을 것이다.


클라인은 방문을 나섰다.


조명만이 덩그러니 켜진 통로에는 낮과는 다르게 분주히 움직이던 승무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휴게실은 방에서 나가서 저쪽으로 돌면 됐던가.


아인슈타인에게 건네받은 ID카드를 들이밀자 단조로운 전자음과 함께 휴게실의 문이 열렸다.


사람 하나 없는 휴게실은 적막에 쌓여있었다.


아니, 사람은 없었지만 율자는 한 명 있었다.


키아나 카스라나. 공간의 율자.


그녀는 휴게실 창 밖으로 비치는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클라인은 조용히 찬장에서 머그컵 2개를 꺼내들었다.


뱀같은 녹색 덩굴이 그려진 머그컵과 이름 모를 핑크색 꽃 무늬가 도배된 머그컵.


클라인은 누구 취향인지 참 고약한 무늬라며 속으로 읆조렸다.


클라인은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머그컵을 키아나 앞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키아나는 클라인을 바라보았다.


천궁시에서 봤을 때하고는 전혀 다른, 초점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늪같은 눈.


"안녕하세요. 키아나양. 이번에 히페리온에 새로 배속된 클라인 박사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클라인 박사님."


클라인의 미소에 답하듯이 그녀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금방이라도 부셔져 사라질듯한, 언제나 자신넘치던 엘리시아와는 전혀 다른 연약한 미소.


아아, 엘리시아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그런 절망적인 표정은 짓지 않았는데.


역시 너는 엘리시아와는 다르구나.


"잠이 안오나요? 키아냐 양? 벌써 다들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인데...."


"....네. 고민할게 좀 있어서...."


"실례가 안된다면 무슨 고민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키아나는 망설였다. 메이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떠났다.


마음속에 커다란 상흔을 남긴 채.


이 상처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거절의 의사를 표하려 키아나가 입을 움직인 순간, 그녀는 클라인의 녹색 눈을 보았다.


빠져들것 같은 녹색의 눈. 그녀는 그 안에서 세로로 갈라진 뱀의 동공을 본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은 방금 전까지 그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저한테 소중한 사람들이 절 떠났어요. 왜 그렇게 됐는지 알아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잘못이 저한테 있다는 것도. 하지만...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할지, 어디로 나아갈지 모르겠어요."


울먹이는 어조조차 없었다. 어둠속에 가라앉은 그저 우울하고 무거운 목소리.


소중한 사람. 클라인은 천명을 해킹한 파일에서 보았던 키아나의 정보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작전 중 사망, 아버지는 현재 행방불명.


소중한 멘토도 양자의 바다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아마 연인, 혹은 그 비슷한 관계였을 '번개의 율자'의 힘을 지닌 소녀는 얼마 전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녀를 위해서.


할 말은 정해져있었다.


이미 그녀를 만나기도 전에 분석한 그녀의 심리 상태,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환경에 따른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 심리학 전문 상담가 클라인으로써의 수많은 답변은 이미 준비해뒀었다.


어느 상담가들이 그렇듯이 가식을 섞어서 적당한 심리학 지식 배경과 함께 위로해주는 그럴듯한 말을 해주면 끝이다.


그러면 끝일터인데, 왜일까.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그녀의 모습이 자신과 겹쳐서였을까, 아니면 키아나 뒤편의 책장에 꽂혀있던 동화책들이 우연히 눈에 들어와서였을까.


클라인의 입은 뫼비우스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키아나 양. 혹시 '어린 왕자'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나요?"


적당한 위로의 안부인사라도 되돌아올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에 키아나는 의아한듯이 되물었다.


"....아뇨. 읽어본적 없어요."


자신의 아버지, 지크프리트와의 얼마 안되는 추억. 말광량이던 자신은 매번 밖으로 쏘다니기만 했을뿐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클라인은 책장으로 다가가 어린왕자를 꺼내들었다. 오래 전 구문명에서도 읽었던 책은 5만년이 넘는 세월에도 그때와 다름없는 삽화와 함께 그녀를 반겨주었다.


자신의 옛 동료들은 이런 동화도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해주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한 자신과는 다르게.


"어린 왕자의 주인공은 산책만으로 가볍게 한바퀴를 돌 수 있는 작은 소행성에 사는 인간을 닮은 외계인이에요. 그는 장미와 함께 그 소행성에 살고 있었죠."


"장미요?"


"네. 말하는 장미요."


자신의 속마음도 제대로 말 못하는 멍청한 꽃.


뫼비우스는 속으로 덧붙였다.


엘리시아도 말하는 꽃이었다. 어떤 장미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


"장미와 어린 왕자는 서로를 사랑했어요. 하지만 둘은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데 서툴렀죠. 그래서 어린 왕자는 장미를 떠났어요."


엘리시아는 전혀 반대였다. 마음을 전하는데 서투르긴 커녕, 만나는 모두에게 무한한 아가페를 여기저기 흩뿌리고 다녔다.


"그래서요? 어린 왕자는 어디로 떠났죠? 남겨진 꽃은?"


"글쎄요..."


클라인은 미소지으며 책장에서 꺼내들은 어린왕자를 내밀었다.


"그 다음은, 직접 읽어보시는건 어때요?"


키아나는 말없이 책을 받아들었다. 책의 표지에는 금발의 소년이 작은 장미꽃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날, 자신이 메이에게 좀 더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금방이라도 불면 사라질듯한 허세와 기만에 가까운 희생정신으로 스스로를 숨기지 않고, 그녀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마지막까지 옆에 있어달라고 울부짖으며 부탁했더라면 달라졌을까?


"왜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죠?"


"뭐, 이런 뜬구름잡는 동화 이야기보다는 보다 객관적인 사견이 들어간 심리학, 신경생리학 전문가의 정신적 감정이 필요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클라인은 허리를 숙여 키아나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사실은, 그런건 전혀 필요 없잖아요?"


흔들리는 녹색의 머리카락 사이, 컬러렌즈 너머에서 빛나는 뱀의 눈동자.


세로로 갈라진 동공과 마주치는 순간 키아나는 깨달았다.


"....네. 맞아요."


무엇을 해야할지는 알고 있었다.


키아나 카스라나의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우울하던 순간. 금방이라도 총구를 입안에 쑤셔넣고 방아쇠를 당기고 싶던 천궁시에서의 나날들.


라이덴 메이는 기적처럼 키아나의 앞에 나타나줬다.


내심, 자신은 그때처럼 메이가 돌아와 다시 한번 안아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기적은 1번밖에 일어나지 않기에 기적이다.


이렇게 혼자 주저앉아 얼굴을 파묻고 울고있어도 메이는 다시 오지 않는다.


언제까지 울고 있을수는 없었다. 


그저 미치도록 외롭고 비참해서, 누군가 알아줬으면 했을 뿐.


"....책, 고맙습니다. 감사히 잘 읽을게요."


"하하, 애초에 여기 비치되어있던 책인걸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고개를 숙이는 키아나에게 클라인은 아무일 아니라는듯이 고개를 저었다.


"혹시 뭔가 이야기하고 싶은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이건 제 명함이에요."


"...같은 함선에 탔는데, 굳이 명함이 필요한가요?"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언제든지 제 방문을 두드려주세요."


키아나는 거기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린왕자의 표지만을 뚫어져라 보고있을 뿐이었다.


그 침묵에 슬슬 클라인이 대화를 마무리지어야겠다 싶은 찰나, 하염없이 책의 겉표지만을 만지작 거리던 키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어린왕자 인가요?"


"네?"


"아뇨, 그냥 다른 책도 있었는데...왜 하필 이 책인가 싶어서요."


그저 단순히 궁금하다는 키아나의 의문에 뫼비우스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러게, 왜 내가 어린 왕자를 골랐더라?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그녀의 이야기에서 어린 왕자가 떠올라서?


아니면, 내 이야기였나?


서로에게 쌀쌀맞았던 어린왕자와 장미하고는 다르다.


누구에게나 독니를 드러내고 꺼지라고 하던 자신과 다르게, 누구에게나 활짝 웃어주었던 그녀.


자석의 극처럼, 한쪽에서 다가갈수록 한쪽은 멀어지려는 관계.


차라리 네가 나를 조금 더 험하게 대했더라면, 다른 이들에게 그러했듯이 평등한 사랑이 아니라 너가 나를 미워했더라도 오직 뫼비우스만을 위한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면.


정원에 핀 수많은 장미꽃들이 아니라  B-612소행성에 핀 단 하나의 장미처럼.


오직 엘리시아만의 특별한 뫼비우스가 될 수 있었다면.


우리의 결말이 조금은 바뀔 수 있었을까?


"....뭐,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딱히 그 책을 고른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어린 왕자가 아니었어야 했을 이유도 없지 않겠어요?"


키아나는 수긍했다는 듯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인은 손목을 걷어 시계를 보았다. 


분침은 어느새 한바퀴를 돌아 1시간 전 자신의 자리를 찾아 되돌아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키아나 양. 늦지 않게 들어가서 자도록 해요."


클라인은 녹색 머그컵을 집어들었다. 커피는 어느새 온기를 거의 잃고 미지근해져 있었다.


잔을 기울이자 옅은 황갈색의 카페인이 입술을 타고 온몸에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평가는, 정말이지 맛이 없었다. 단순히 인스턴트 커피믹스를 설명서대로 탔을 뿐인데 쓰고 달고를 떠나서 밍밍해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클라인은 인스턴트와 설탕만으로도 훨씬 그럴듯한 커피를 만들어냈었는데.


클라인의 찡그린 표정을 지켜보던 키아나도 다 식어버린 분홍색 머그컵을 들어올렸다.


클라인이 채 말리기도 전에 식어버린 커피가 그녀의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아나가 잔에서 입을 뗀 것은 머그잔 가득 차있던 황갈색의 카페인 호수가 바닥을 드러낸 뒤였다.


"....메이 선배가 해준 코코아보다는 맛없어요."


입가에 커피 얼룩을 잔뜩 묻힌 채 얼굴을 찡그린 키아나의 모습에 클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터지는걸 막을 수 없었다.


키아나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메이가, 히메코가 떠난 이후로 정말로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어보는 것 같았다.


점점 깊어져가는 밤, 이미 사라져버린 커피의 온기를 대신해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휴게실을 가득 채웠다.


다음날, 테레사 아포칼립스는 며칠 째 방안에 틀어박혀 끼니도 거르던 자신의 조카를 걱정하며 식당으로 발을 디뎠다.


매 식사마다 방문 앞에 식사를 놔두고 가지만 그녀가 그걸 먹는 모습을 보지도 못한채 다음 날 빈 식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니지만 그녀의 몇 안남은 혈육으로써 그녀가 망가지는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오늘은 무슨일이 있어도 문을 열고 그녀를 마주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테레사는 식판에 키아나가 먹을 메뉴를 담기 시작했다.


"음. 이모. 혼자서 그렇게 많이 먹는거야?"


"내가 이 많은 양을 혼자서 먹을리가 있겠니? 당연히 키아나 너가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으니...."


테레사는 문득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자신의 조카 키아나 카스라나가 입안에 잔뜩 음식을 우겨넣은채 우물거리고 있었다.


멍하니 입을 벌린 테레사의 손에서 플라스틱 식판이 힘없이 떨어졌다.


"이, 이모!"


키아나가 당황한듯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왔다.


"괜찮아? 어디 아픈거 아니야?"


"괜찮냐고? 어디 아프지 않냐고?"


테레사는 화난듯이 키아나에게 다가갔다.


키아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걸 느꼈는지 다가오는 테레사를 보며 침을 삼켰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테레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사람들을 매번 걱정시키기만 하고, 너는 정말로...."


울먹이던 테레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키아나를 껴안았다.


당황하던 키아나는 이내 떨고있는 테레사의 몸을 느끼며 그녀를 마주 껴안았다.


"....걱정끼쳐서 미안해. 테레사 이모."


테레사는 말없이 키아나를 껴안은 팔에 힘을 줄 뿐이었다.


키아나는 테레사가 얼굴을 파묻은 가슴팍이 젖어가는걸 느끼며 똑같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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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 박사가 히페리온에 온지도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뫼비우스가 창조해낸 클라인이라는 인격은 특유의 사교적인 성격으로 히페리온의 연구원들 사이에도 무리없이 섞여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친절하게 웃고있는 신경생리학 전문가 클라인 박사의 허물 아래에, 이 함선에 있는 율자를 전부 다 합친 것보다 위험한 존재가 또아리를 틀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까?


저 너머에서 지긋이 자신을 노려보는 아인슈타인에게 클라인은 그저 미소를 지어준 뒤 모니터 너머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히페리온 내 전투 인원들의 멘탈 케어를 위한 보고서.


클라인은 마우스를 움직여 보고서들을 천천히 넘겼다.


이 함선에는 그 율자들이 무려 3명이나 있었다.


지금은 이곳에 없는 라이덴 메이를 포함한다면 총 4명의 율자가 인간의 편에 선 셈이다.


구문명에서는 막을 수 없는 재앙 그 자체였던 율자들이, 현문명에서는 스스로의 의지로 붕괴에 맞서고 있다.


엘리시아. 정말로 우리가 성공한거야.


클라인은 율자들에 대해 정리해놓은 목차를 클릭했다.


브로냐 자이칙, 이치의 율자.


율자로써의 능력은 사물의 구조를 보는것만으로 완벽히 분석해 붕괴능으로써 복제해 구현하는 것.


읽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느껴지는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힘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율자코어의 전대 계승자인 웰트 요하임만큼 코어를 잘 다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요하임은 현재 율자코어를 다시 돌려받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


어쩌면 브로냐 본인의 문제보다는 붕괴에게 직접 선택받은 율자가 아닌, 일종의 편법을 이용해서 코어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뫼비우스는 그날 브라운관 모니터 너머로 보았던, 불타는 베를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잊고 있었던 뫼비우스로써의 기억을 다시 되살렸던, 구문명을 보는듯한 광경.


다음.



키아나 카스라나, 공간의 율자.


사제 관계였던 무라타 히메코를 잃은 뒤, 그녀는 천궁시에 도착해 블랑카라는 신분을 쓰고 있던 뫼비우스와 만났다.


그때는 겉보기에는 괜찮아보였지만, 생각해보면 다친 상처를 가리고 남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병들고 상처입은 그녀의 마음은 라이덴 메이를 떠나보내고 한계에 이르렀다.


지금은 정신적으로 많이 회복된 나아진것 같지만, 그 악명높은 공간의 율자로써의 힘은 스스로가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전투시 필요한 최소한의 힘만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라이덴 메이, 번개의 율자.


이곳에는 없을 뿐더러, 뫼비우스가 직접 그녀를 보았던 것은 천궁시에서 멀찍이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 일밖에 없다.


상대가 그 유명한 S급 발키리기도 했고, 뫼비우스가 보기에는 그녀는 율자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천명에서 빼돌린 파일들을 보면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산호섬의 감시카메라에 잡힌 별다른 피해없이 코어 2개분의 힘을 지닌 얼음의 율자를 가볍게 제압하는 모습.


모든걸 찢어발기는 뇌전과 번개와도 같은 속도의 일섬.


어쩌면 단순한 전투력으로는 이 중에 제일가는 율자일지도 모른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불을 쫓는 13영웅들과도 무리 없이 맞대결을 할 수 있을 정도.


문제라면, 이 모든 힘을 히페리온을 떠나면서 발현했다는 것. 


아무리 강하더라도 지금은 전력 외다.  



그리고, 의식의 율자.


후카, 아니-화.


의식의 율자와 얽힌 사건이 끝나고, 사라진 동료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 뫼비우스의 심장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뛰었었다.


그녀는 나를 기억할까?


이 허물 아래 숨겨진 [무한]의 뱀을, 5만년전의 동료를 알아볼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클라인 박사님. 처음 뵙겠습니다. 후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후카 양. 반가워요."


뫼비우스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촌스러운 빨간 안경 뒤에는, 5만년전과 다를게 없는 미숙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하는 [부생]의 전사가 있었다.


"박사님. 혹시, 전에 저희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가슴이 미친듯이 뛰었다.


설마, 아직 나를 기억해주고 있니? 5만년전, 우리들의 이야기를 아직도 잊지 않고 간직해주고 있니?


후카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호흡이랑 기를 읽었습니다. 박사님의 반응이 꼭 지인을 만난것 같은 반응이시더군요."


뫼비우스는 심장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최대한 가다듬으면서, 그녀는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뇨. 단순히 후카 양의 인적사항이 적힌 보고서를 미리 읽어봤을 뿐이에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후카는 고개를 숙인 뒤 클라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지 등 뒤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녀가 돌아온것을 축하하는 다른 멤버들의 열렬한 환영인사를 받느라 관심을 돌렸다.


뫼비우스는 멍하니 서서 다른 승무원들에게 둘러싸인채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단 한순간도 클라인에게서 뫼비우스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우도진이 미래를 짊어지기에는 과거가 너무나도 무거워서 떨쳐버린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완전히 바뀌어버린 클라인에게서 옛 동료의 모습을 단 한순간도 찾지 못한 탓일까.


그래. 어쩌면 이게 더 나은 결말일지도 몰랐다.


자신은 그녀의 안에서 5만년전에 떠나간 사람으로 남는게 앞으로의 일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클라인은 상념을 멈추고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중요한건 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화의 육체에 깃들었던 의식의 율자.


의식의 율자는 현재 행방불명인 상태다. 코어 자체는 화가 지니고 있는 모양이나 능력은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


클라인은 한숨을 쉬며 의자를 뒤로 밀어냈다.


앞으로 몇명의 율자가 남았지?


약하다. 너무나도 약하다.


그녀들은 엘리시아가 원한대로 인간성을 간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성의 대가였을까. 그녀들은 전 문명의 율자들에 비해 다룰 수 있는 힘이 너무 제한적이었다.


이대로는 종언에 이기지 못해.


운명의 날, 달에서 본 광경은 아직도 뫼비우스의 뇌리 깊숙히 박혀있었다.


그 '칼파스'가 종언의 손짓 한번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었다.


파르도도, 코스마도, 빌브이도.


그들은 시간벌이조차 되지 못했다.


유일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단 한명.


뫼비우스가 에덴, 화와 함께 급하게 퇴각하면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거대한 종언의 율자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쓸쓸히 남아있던 한 남자의 등이었다.


어떤 힘도, 종언 앞에서는 무력했다.


어떤 지식도, 종언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그 어떤 것도.



"클라인 박사님?"


뫼비우스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은발을 땋아내린 소녀. 키아나가 놀란 듯한 얼굴로 서류철을 든 채 서 있었다.


"괜찮아요? 클라인 박사님?"


꽉 쥔 주먹은 어느새 식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클라인은 괜찮다는 듯이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밤을 새웠더니 조금 피곤한가 보네요. 그건 테슬라 박사님이 부탁한 거겠죠?"


키아나는 끄덕이며 서류철을 내밀었다.


클라인은 서류철을 받아넘겼다.


서류에는 테슬라가 건네준 지배의 율자의 숙주가 됐던 사람들의 인적사항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지배의 율자는 정서적으로 구멍이 나있는 심리적 약자들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들의 약점을 휘어잡아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다.


정확히 어떤식으로 그들에게 접근하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지금, 히페리온 내부에도 지배의 율자의 숙주가 생겨날 수 있다.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을 타겟으로 정할 지 밝히면 충분히 대처가 가능할 것이다- 라는게 테슬라와 아인슈타인 박사의 결론이었다.


딱히 틀린 이론은 아니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이미 숙주가 만들어진 뒤였다는 거지.


뫼비우스는 조심스레 연구복의 안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주머니 속의 율자 코어는 뫼비우스의 손길을 두려워하듯 작게 움찔거렸다.


살려주세요, 제발. 잘못했어요. 다시는...


주머니를 감싸쥔 손에 힘을 주자 코어를 타고 뫼비우스의 머리속에 울려퍼지던 목소리는 작은 비명소리와 함께 멈췄다.


전문명의 지배율자는 패배를 인식하고 목숨구걸을 할 정도의 풍부한 인지능력같은건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어쩌면 이것도 엘리시아가 율자들에게 남겨준 '인간성'의 부작용일까.


지배의 율자가 보여준 인간성,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엘리시아, 그리고 자신이 지금 쓰고있는 이름의 원 주인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짜증이 솟구친 뫼비우스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정말이지, 내가 숙주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어.


뫼비우스의 눈에 땋아내린 은발이 들어왔다.


언제나 활발하고, 누군가의 웃음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소녀는 방향성은 좀 다를 지언정 그녀가 알고 있던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버텨오며 담금질된 그녀의 고귀한 영혼은 오래 전 [진아]의 이름을 가졌던 소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인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힘은?


너무나도 약했다.


화에게서 배운 태허검신 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건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태허검신만으로 종언을 이길 수 있었더라면 애초에 엘리시아가 우리를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도 모자랄 마당에, 그녀는 공간의 율자의 힘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것의 위험성을 알고 거부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또다른 인격을 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그녀가 그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 박사님. 박사님이 추천하셨던 왕자와 거지도 재밌게 읽었어요."


왕자와 거지. 운명이 바뀐 두 사람.


그 키워드는 뫼비우스의 머리속에서 오래전에 생각했었던 한 계획을 다시 이끌어냈다.


엘리시아의 뜻을 잇는 율자가 굳이 현문명의 존재일 필요가 있나?


그녀의 계획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녀의 뜻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존재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율자 코어를 계승해도 인격에 별다른 이상이 오지 않는다는건 이미 제 1율자를 통해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만약 자신이라면?


"이거, 로잘리아가 준 사탕이에요. 박사님도 괜찮다면..."


"키아나양."


키아나가 말을 멈추었다. 클라인의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에, 키아나 양의 몸에서 율자 코어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하면 어떤가요?"


"하하! 그건 불가능해요. 클라인 박사님. 테슬라 박사님과 아인슈타인 박사님이...."


키아나는 클라인 박사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저 키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히, 불가능하다고 했었는데."


"글쎄요? 그냥 물어보는거에요. 키아나양. 만약 불가능했다고 생각했던 일이 가능하다면?"


"...이건 항상 하던 심리 검사 같은건가요?"


클라인은 아무 말 없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박사님이 말하시는건, 제 몸에서 코어를 전부 제거한다는 가정인가요? 공간의 율자 코어 뿐만이 아니라 다른 보석도요?"


"네."


"아무런 부작용 없이요? 저에게서 코어를 분리하는 순간, 주위에 붕괴능이 쏟아져나와 모두 피폭된다거나, 도시 단위로 통째로 날라간다거나 하는 일 없이요?"


"물론이죠."


그녀는 이런 가정에서조차 자신의 몸보다는 주위에 피해가 끼치는걸 걱정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점조차 엘리시아를 닮았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남겨진 사람이 어떨지는 생각도 안하고, 자신보다 남을 더 챙기는 모습이.


그런 엘리시아가 실패했기에, 그녀와 닮은 키아나는 더더욱 엘리시아의 계획에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키아나는 입술을 깨물고 바닥만을 바라봤다.


만약 그녀가 동의한다면, 뫼비우스는 그녀를 데리고 히페리온에서 도망쳐 코어를 적출하고 자신의 몸에 재이식하는 수술을 할 계획이었다.


이미 수많은 융합전사 수술을 집도해왔고, 율자들의 시체에서 코어를 적출하는 일도 적지 않은 경험이 있다.


살아있는 율자의 몸에서 코어를 적출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이미 그녀의 머리 속에는 수술 시 일어날 모든 변수를 통제할 방법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엘리시아의 유지를 스스로가 직접 이어나갈 수 있을거고, 키아나는 율자의 인격과 붕괴능의 위협에서 해방된 몸이 될 수 있다.


아니지. 왜 내가 남의 동의를 구하려 하고 있지? 내가 행한 그 모든 것들을 남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랐던가?


자신에게도 그녀에게도 득이 되는 이야기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


뫼비우스의 그림자가 천천히 약동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둔한 녹색빛의 그림자는 몸을 늘려 키아나의 그림자를 덮었다.


뫼비우스의 가벼운 신호만으로도 그림자는 그녀를 [무한]의 공간 안에 가두고, 그 다음은 누군가 알아채기도 전에 이곳, 솔트레이크 기지에서 거짓말같이 사라질 것이다.


"결정했어요."


녹색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수축해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그래도 기회는 언제든지 있으니까.


"그래요? 만약 가능하다면 역시 키아나 양도...."


"안 할래요."


클라인 박사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방금, 뭐라고?


"키아나 양, 오해한 것 같은데. 실제로 되냐 안되냐의 여부를 물은게 아니에요. 그냥 아무 문제없이 율자 코어의 제거가 가능한 기술이 있다고 가정하고 묻는 거에요."


"그래도 안 할거에요."


"대체...왜?"


뫼비우스로써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로써는 아무런 실이 없는 제안이었다. 어째서 거절한단 말인가.


"키아나. 지금까지 그 율자 코어때문에 고통받아 왔잖아요. 당신도, 당신 주변 사람들도."


키아나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지금 머리 속으로 누구를 생각했을것인가? 히페리온의 멤버들? 무라타 히메코? 라이덴 메이? 아니면, 그들 전부?


"더 이상 거기에 고통 받을 필요 없어요. 더이상 책임을 질 필요도 없어요. 당신이 한 일이 아니니 율자 코어만 제거하면...."


"아니에요."


뫼비우스의 눈이 키아나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와 똑같은 눈이다.


누가 와도,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의지를 지닌 눈.


그날, 그녀가 연회의 초대장을 건네주러 온 날도 저런 눈이었다.


"전부 제가 한 일이에요. 제게 소중한 사람들을 상처입힌 것도, 붕괴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것도....전부 제 의지로 직접 한 일이에요. 설령 율자코어를 떼어낸다 한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뫼비우스는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고 질문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해가 안 되네요, 키아나. 전부 당신의 율자코어에 있는 인격이 한 짓이에요. 그녀의 기억을 물려받았다 해서 그렇게끼지 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어요."


"단순한 기억이 아니에요. 클라인 박사님. 그녀는....시린은 스스로 저지른 일들을 후회했기에 저를 만들었어요. 제가 있기에 그녀가 있는게 아니에요. 그녀가 있기에 제가 있는거에요."


뫼비우스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왜 그렇게까지 그 율자 코어에 집착하는 거지? 단 한마디. '네'라는 단 한마디의 긍정의 말이면 너는 모든 책임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냥 그 빌어먹을 보석을 누군가한테 줘버리고 네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단 말이야! 널 떠나간 라이덴 메이도 다시 돌아올거고, 사람들에게서 배척받지도 않을거야. 심지어 네가 원한다면 일선에서 네 잘난 동료들과 함께 붕괴와 계속 싸울 수도 있겠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뫼비우스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클라인 박사로써 만들어온 말투를 사용하는 것도 잊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대체....대체 왜?"


이미 그것은 키아나를 향한 질문이 아니었다. 5만년 전의 엘리시아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도 저니까요."


키아나는 평온한 어조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뫼비우스는 그녀의 눈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볼 수 있었다.


"저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에요. 클라인 박사님.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받아들일거에요. 아니,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을 맞이할 때까지 싸울거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키아나와 반대로, 뫼비우스는 힘없이 그 말을 읆조렸다.


"이 불완전한 세상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때까지."


잠시동안 정적이 내려앉았다.


뫼비우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이런 별것도 아닌 문답에 흥분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뻔 했다.


엘리시아가 준비해 놓은 이 무대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제와서 모든 걸 망칠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 키아나 양. 학자로써 너무 무례했네요. 방금 전까지의 문답은 단순한 호기심이었으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뫼비우스는 키아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황급하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뫼비우스는 복도에서 아무것도 모른채 즐거운듯이 떠드는 승무원들을 지나쳐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생각해보면 굳이 그녀에게 이럴 필요는 없었다.


이미 안정성이 보장된 이치의 율자의 코어도 있었고, 제대로 기억할지는 의문이지만 과거의 자신과 친분이 있는 화의 의식의 율자의 코어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녀에게 그런걸까.


'불완전한 세상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때까지.'


뫼비우스는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조심스레 가슴팍 주머니에 넣어놓은 것을 꺼냈다.


녹색으로 빛나는 수정의 꽃.


원래대로라면 연회에 가지 못한 자신은 받을 자격이 없었던 물건.


내가 원하는 모습의 세상.


엘리시아, 이게 너가 원하던 세상이야?


내가 원하던 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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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뫼비우스 박사도 인정해야 될 지 몰랐다.


키아나 카스라나는 이미 그녀의 안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어버렸단 것을.


누구에게나 미소와 빛을 건네주던 꽃과 같은 엘리시아와는 다르다.


키아나 카스라나는 횃불이었다.


아무리 먼 곳이어도, 아무리 어두운 곳이어도 뒤를 돌아보면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환하게 스스로를 불태우는 불꽃.


그렇기에 자신이 집착한 걸지도 모르겠다.


엘리시아가 안배한 사람이 정말 그녀라면, 그녀가 엘리시아와 같은 길을 걷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5만년 전처럼 엘리시아의 가시나무 관을 누군가 써야만 한다면 그게 차라리 그녀가 아니라 나였으면 하였기에.


그렇기에 더더욱 그 때 강행했어야만 했다.


그랬다면 이런 꼴은 보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솔트레이크 기지의 사령실, 벽 한면을 가득 채운 모니터에 비춰지는 것은 처참한 광경이었다.


브로냐 자이칙과 후카는 이미 율자의 능력을 거의 강탈당한채로 만신창이로 잔해들 사이에 널부러져 있었다.


싸울 수 있는 것은 단 한명, 키아나 카스라나만이 부러진 대검을 들고 화면을 가득 메운 인형들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녀는 엘리시아와 달랐다. 똑같이 강인한 의지를 지녔어도 그녀의 힘은 엘리시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만약 자신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저런 벌레들은 융합전사로써의 본모습을 꺼내지 않고도 처리가 가능했을 것이다.


"지배 극장 송신 좌표 31번 발견, 즉시 연결하겠습니다!....실패했습니다!"


"일일히 보고하지마! 멍청이들아! 연결되는 좌표 발견하는 즉시 닥치는대로 연결 실시해! 이대로 저 애들이 죽게 놔둘 거야?"


붉은 트윈테일의 소녀, 테슬라가 갈갈이 날뛰면서 분노했다.


그러나 그녀도 알고 있다. 이미 지배극장에 들어설 방법은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건 그저 마지막 불꽃이 천천히 꺼져가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아니, 방법은 하나 있었다.


뫼비우스는 주머니 속의 율자 코어를 만지작거렸다.


작은 흐느끼는 소리가 머리속으로 전해져왔다.


이 율자코어의 인격은 지배의 율자들에 네트워크에서 분리되어 뫼비우스에게 완전히 굴복했다.


이것을 이용한다면 통로 정도야 간단하게 열 수 있다.


히페리온이 지나갈 정도로 큰 통로는 필요없다. 자신만 지나가면 된다.


모니터에서는 수많은 인형들이 키아나를 구속하고 달려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뫼비우스는 소란스러운 사령실을 뒤로 한채 복도로 향했다.


제레라는 아이가 썼던 좌표 계산장치는 어디였더라.


뫼비우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푸른 머리의 소녀였다.


"....아인슈타인 박사."


"클라인 박사. 어딜 가는거지? 자리를 지키는게 좋지 않겠나?"


"글쎄요. 계속 보고있자니 마음이 아파서요? 아인슈타인 박사님이야 말로 여기서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가서 테슬라 박사님의 부담을 덜어주셔야 하는거 아닌가요?"


뫼비우스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으며 아인슈타인을 지나치려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 자리에서 못박힌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클라인 박사. 내가 정말로 모를거라 생각했나?"


"하하, 뭐를요?"


"지배의 율자 코어."


클라인,아니 뫼비우스의 입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승무원중에 숙주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놈들의 반응을 볼 생각으로 나만 알고 있었지. 500체를 한번에 토벌했을 때 그 중에 적당히 섞여서 사라진 줄 알았더니....역시 자네가 가지고 있었군."


"어머, 아인슈타인 박사님도 참. 방구석 약골 연구원인 제가 어떻게 저 인형들을 쓰러뜨린단 말인가요."


"....클라인. 아니,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 그냥 돌아가줘. 제발."


클라인이 만들어낸 신분이란 것도 들켰나.


그렇다면 더 이상 이런 바보같은 말투를 쓸 필요도 없었다.


"내가, 왜?"


역시. 그날 자신이 클라인 박사와의 첫 대면 때 느꼈던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그녀의 눈에 똑똑히 드러난 뱀의 동공을 보며 침을 삼켰다.


그녀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오토의 수하? 아니면 요르문간드? 그것도 아니라면 또다른 제 4의 세력?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말해야만 했다.


"당신은 지금 저 지배극장에 들어가서 뭘 하려는거지?"


"뭘 하냐니. 당연히 지배의 율자를 죽이고 다른 율자 코어를 전부 회수해야지."


"처음부터 그게 당신이 여기 온 목적이었나? 율자코어를 전부 탈취하기 위해서?"


평소라면 당연한거 아니냐면서 비웃었을 텐데, 뫼비우스는 어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기대 이하였어. 고작 지배의 율자 따위에 이렇게 고전할 거라면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게 나아."


"기대 이하라고?"


아인슈타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무려 3명의 율자가 이렇게 인류의 편에 서서 싸우고 있잖아! 나는 80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이런 기적같은 일이 올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제발 그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어줘."


"80년?"


뫼비우스가 고개를 들어 아인슈타인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5만 년을 기다렸어, 아인슈타인! 이보다 더 낮은 확률에 모든 걸 걸고! 이제는 너희가 말하는 기적이나 가능성 따위로 그녀가, 우리가 만든 기회가 날라가게 두지는 않을거야!"


뫼비우스의 그림자에서 날카로운 녹색의 손톱이 뻗어져나왔다.


"내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지 마. 아인슈타인."


그림자에서 뻗어나온 촉수가 아인슈타인의 목을 휘감았다.


그녀의 작은 몸집이 공중으로 떠오르자 호흡이 힘들어진 아인슈타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5만년....그랬군. 그런거였어. 당신들이 이 모든 걸 우리에게 넘겨줬던거야..."


뫼비우스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아인슈타인을 노려보았다.


"당신들이 넘겨준 유산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그러니까 부탁이야. 제발 조금만 더 지켜봐줘. 그녀들은 해낼 수 있어."


"너희는 우리가 어떤 희생을 치뤘는지 몰라."


"맞아. 우리는 모르지. 알 방법도 없어."


"그럼 내가 무엇을 믿고 너희들을 언제까지 지켜만 봐야하지?"


아인슈타인의 목을 휘감은 촉수에 힘이 들어갔다.


아인슈타인은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당신이야. 클라인 박사."


"...나라고?"


"그날, 히페리온에 당신이 처음 온 날. 당신의 힘이라면 그 자리에서 율자 코어를 전부 탈취하고 달아날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시야가 점점 흐려져간다. 그래도 말해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야. 왜 굳이 귀찮게 남들과 교류해야하는 심리학 계열의 연구원으로 여기 왔을까? 잠입할려면 기억에 남지도 않을 다른 공학계열의 과학자로써 이곳에 오는게 훨씬 나았을텐데."


"당신도 직접 보고싶었던 거야. 그녀의 가능성을. 그걸 위해서 오늘까지 여기 남아있었던 거잖아."


이제는 정말 무리였다. 아인슈타인은 마지막 힘을 다해 말을 내뱉었다.


"키아나를 믿어줘. 제발...."


목에 감긴 촉수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 여기서 끝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인슈타인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충격과 함께 신선한  공기가 아인슈타인의 호흡기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아인슈타인은 거친 기침만을 내뿜으며 숨을 들이마쉴 수 밖에 없었다.


호흡을 겨우 가다듬고 아인슈타인은 클라인을 올려다보았다.


클라인은 더 이상 아인슈타인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그녀가 떠나온 사령실을 지켜보고 있었다. 복도를 가득 채우는 환호성이 들려오는 사령실을.


"....내가 믿어달라고 말했잖아. 클라인 박사."


아인슈타인은 붉게 자국이 남은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뫼비우스는 아인슈타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령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환호성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녀가 사령실에 발을 들이밀었을때,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오래 전, 그녀를 떠올리게 만드는 순백의 예복을 걸친 키아나의 모습.


그러나 그녀가 손에 쥔 것은 [진아]의 수정활이 아니었다.


그것은 붉은색의 대검이었다.


너무나도 밝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신염(薪炎)]의 불꽃을 내뿜는 대검.


뫼비우스를 따라 뒤늦게 들어온 아인슈타인마저 그 광경을 보고 그저 짧은 감탄만을 내뱉었다.


"어때. 지켜볼 가치가 있었지?"


뫼비우스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오직 모니터를 가득 채운 키아나의 신염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바로....나와 모두의...집으로 가는 길이야!-


검에서 폭발하듯이 터져나온 신염이 지배의 율자를 집어삼키고 화면을 온통 새하얗게 물들였다.


집.


엘리시아가 원했던 세계.


있잖아. 엘리시아. 꼭 너가 바라던 세상이 아니어도 좋을것 같아.


왜냐하면 저 아이는 그 이상이야.


우리가 원하던 세상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바꿔줄 테니까.


뫼비우스는 사령실의 입구에서 아인슈타인과 함께 키아나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지배 극장의 좌표가 열리고, 히페리온의 승무원들이 영웅의 귀환을 축하하러 몰려나갔을 때에도, 그녀는 그저 우두커니 입구에 서서 이제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검은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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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옷가지를 캐리어에 쑤셔넣자 방은 처음 그녀가 이곳에 왔을 때처럼 허전하고 황량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원래 쓸데없는 짐은 들고다니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 정리가 빨리 끝날줄이야.


뫼비우스는 턱을 매만졌다.


"그래서. 정말로 나가는건가?"


뫼비우스가 고개를 돌리자 아인슈타인이 방의 입구에 기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의 상처는 채 낫지 않았는지 어색할정도로 바짝 끌어올린 칼라가 희끗하게 보이는 붉은 자국들을 가려주고 있었다.


"지배의 율자가 우리 승무원 중에 있었다니. 제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이 일은 위험해요. 더 이상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싫으니 저는 여기까지 하겠어요."


"라는게 클라인 박사의 표면적인 대답. 그렇다면, 진짜 당신의 대답은?"


뫼비우스는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사람좋은 클라인 박사의 거짓된 미소가 아닌, 얼마만에 짓는지 모를 뫼비우스의 뒤틀린 미소였다.


"더 이상 내가 필요 없으니까. 단지 그것 뿐이야."


엘리시아가 바라던 꽃은, 그녀가 바라던 모습 이상으로 훌륭하게 그 봉오리를 꽃피워냈다.


자신이 지금까지 그 꽃을 보살핀다고 했던 행위는 오히려 독이 될 뿐이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자를 열고 고양이를 관측하면 고양이는 무조건 죽는다.


뫼비우스가 하려던 행위도 다를 바 없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아름다운 장미꽃이 상자를 뚫고 고개를 내밀 그 순간까지.


"솔직히, 키아나 양에 대한 건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잘났다면 여기 남아서 우리를 도와주는 것도 괜찮을텐데 말이지."


"하, 말도 마. 우리가 남겨준 그 모든 유산을 사용하고도 이정도 수준밖에 안되다니. 더군다나...."


뫼비우스는 고개를 돌려 벽을 보았다. 수많은 벽과 통로를 넘어, 뫼비우스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격납고에서 다시 날아오를 때 만을 기다리는 히페리온이 있을 것이다.


"그 월광 왕좌를, 이렇게 열화시켜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거야? 이걸 설계했던 사람이 이걸 본다면 그야말로 오열하며 땅을 쳤을거야."


"글쎄. 이런 대단한 물건은 좀더 섬세하게 포장해서 전해주지 못한 당신들 잘못이 아닐까?"


뫼비우스는 아인슈타인을 노려보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응대할 뿐이었다.


"그렇게 부아가 치밀면 직접 수리하는건 어때? 나름 구문명의 과학자 아니신가?"


"아쉽게도, 기계공학은 내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아, 물론 이런 비전문적인 분야의 지식조차 너희들보다 훨씬 월등하게 앞서있다는 것은 분명해."


"네,네.  물론그러시겠죠."


뫼비우스는 지난 세월간 자신이 본 것들을 떠올렸다. 5만년동안 자아를 되찾지 못한 인형으로써 그저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고, 그리고 뫼비우스로써 다시 태어나 보았던 채 100년이 안되는 기억들.


영웅들은 구문명이 남긴 것들을 잊지않고 이 세상에 퍼뜨렸고, 인류는 그것을 받아들여 이렇게 훌륭하게 원래의 모습을, 아니.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이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이네."


뫼비우스는 미소지으며 아인슈타인을 바라보았다.


아인슈타인도 뫼비우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채 그저 웃으며 그녀의 뱀의 동공을 똑바로 응시했다.


"기차가 떠날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네. 아직 인사할 사람도 많은데 말이지. 되도록이면 여유있게 가고싶은데 말이야."


"인사할 사람들에 키아나 양도 포함되나?"


뫼비우스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도 구태여 그것에 대해 되묻지는 않았다.


"뭐, 그렇다면....이제 정말로 작별이로군."


아인슈타인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뫼비우스도 오른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서 말인데, 클라인이 가짜 이름이라면 진짜 이름은 뭐지? 마지막까지 이름도 모른채로 끝내긴 싫은데."


"글쎄. 아인슈타인 박사. 어차피 앞으로 내가 살면서 그 이름을 두 번 다시 사용할 일은 없을텐데, 알아봤자 의미가 있을까? 지난 몇개월 간 이 히페리온에 있다가 조용히 사라진 클라인 박사처럼, 당신도 머릿속에서 그 이야기는 빨리 지워버리도록 해."


"좋아. 그렇다면 여기서는 낭만있게 가자고."


아인슈타인은 심호흡을 한번 한뒤, 뫼비우스의 눈을 마주보았다.


세로로 갈라진 뱀의 눈동자. 그녀의 눈에는 무슨 역사가 담겨 있을까. 5만년의 세월을 넘어서, 과거의 유산들과 함께 이곳에 오기까지 그녀가 겪은 이야기들.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헤어질 때였다.


"안녕히. 구문명의 과학자. 그동안 고마웠어."


"이쪽도 고마웠어. 현문명의 과학자. 그럼 안녕히."


악수가 끝나고, 뫼비우스는 캐리어를 끌고 방문을 넘어 복도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캐리어가 끌리는 소리가 복도 저 너머로 사라져가자, 아인슈타인도 전 주인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방을 힐끗 훑어본 뒤 뫼비우스가 사라진 복도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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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 박사로써의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알고지내던 다른 승무원들과도 작별인사를 보냈다.


몇몇 연구원들은 자신의 모습이 가식이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눈물까지 흘리며 잘가라고 자신을 껴안았다.


테슬라 박사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코 끝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테레사 아포칼립스는 걱정하는 듯한 눈으로 키아나에게 인사는 했냐며 물어보았다.


물론, 클라인은 그들에게 그저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미소로 응대했을 뿐이다.


날씨가 쌀쌀했는지 역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공원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뫼비우스는 겉옷을 여민채 앞으로 나아갔다.


키아나를 포함한 젊은 발키리들에게는 일부러 인사하지 않았다.


일부러 키아나가 브로냐들과 함께 시내로 나들이를 나가기로 한 오늘, 그녀에게 알리지 않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다시 만나면 스스로도 키아나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으니까.


이걸로 된거다. 그녀의 안에서 자신은 그냥 좀 특이했던 지나가던 연구원으로 기억되다가 사라질 것이다.


애초에 자신이 없었어도 그녀는 이 결말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래. 이걸로 된거야.


외롭게 승강장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를 익숙한 목소리가 멈춰세웠다.


"클라인 박사님!"


뫼비우스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는 몸을 굽힌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키아나가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땀으로 젖은 그녀의 몸에서는 아직도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키아나 양. 어째서..."


"아인슈타인 박사님이 전화로 이야기해주셨어요. 클라인 박사님이 오늘 히페리온을 떠나기로 했으니, 지금 당장 달려가면 역에 도착하기 전에 만날 수 있을거라고....."


젠장, 그 망할 둥지머리가.


뫼비우스는 머리 속에서 푸른 색의 둥지머리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혀를 내민채 자신이 이겼다며 약올리는 모습이 떠오르는 듯 했다.


"박사님. 왜 떠나시는 건가요.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거라면...."


"그래. 바로 너 때문이야. 키아나."


키아나는 놀란듯이 클라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친절한 클라인 박사가 아닌, 그날의 문답 때 언뜻 보았던 자신이 모르는 클라인 박사가 있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키아나. 내가 그렇게 힌트를 줬잖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박사님."


"난 처음부터 네 율자코어를 노리고 온거야. 마치 지금까지 전혀 예상 못했다는 듯한 멍청한 표정은 짓지 말라고."


"그럼 왜 지금까지 기다린건가요?"


"아쉽게도, 친애하는 키아나 양. 그때는 네가 너무나도 약해서 회수할 가치를 못 느꼈지. 힘들게 코어를 탈취했는데 갈망의 보석마냥 제 힘을 못내면 의미가 없잖아?"


뫼비우스는 비웃는듯이 눈꼬리를 올렸다.


키아나는 그저 담담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뫼비우스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전 이렇게 무방비하게 서 있어요."


"하하하! 날 꾀어내려하지마. 키아나. 그때의 너는 약했지만, 코어 4개분량의 힘을 지닌 지금은 너무 강력하거든. 이미 지배의 율자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증명한 사실이잖아?"


"그게 내가 너를 떠나는 이유야. 전에는 너무 약해서 손에 넣을 가치가 없었고, 지금은 너무 강해서 손에 넣을 수가 없으니, 내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어. 하, 웃기는 일이지...."


뫼비우스는 키아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등을 돌렸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눈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안녕. 키아나. 다시는 날 만날 일 없을거야."


"클라인 박사님."


키아나가 그녀를 불렀지만 뫼비우스는 신경쓰지 않은채 걸어나갔다.


이걸로 이제 끝내자. 키아나. 너는 그냥 나를 자기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하찮은 스파이로 기억하면 돼. 그걸로 된거야.


"박사님. 저희, 천궁시에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하마터면 뫼비우스는 균형을 잃고 슈트케이스와 함께 나동그라질 뻔 했다.


그런 뫼비우스의 손을 붙잡은 것은 키아나였다.


공간의 율자의 힘으로 순식간에 그녀에게 접근한 키아나는 넘어질뻔한 뫼비우스를 안아들어 일으켜세웠다.


키아나의 푸른 눈에 비친 자신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나서야 뫼비우스는 이런 반응을 보이면 안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박사님이 맞았네요."


"대체...어떻게... 그때랑은 외모도, 목소리도 달랐을텐데."


"눈이요. 그때랑 똑같은 눈이었거든요."


눈.


뫼비우스는 자신의 눈가를 매만졌다. 융합전사 수술의 부작용으로 뱀과 같은 형태를 지니게 된 자신의 눈. 설마 이것때문에.


아니다. 자신이 그런 기본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다. 그때도 지금도, 약품과 렌즈를 사용해 눈의 형태를 속이고 있었다.


"눈의 색깔 같은 걸 말하는게 아니에요. 박사님. 저랑 같은 눈이라서 기억하고 있어요."


"같은 눈이라고?"


"네.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고, 희망 하나에만 매달려서 한치 앞도 안보이는 미래를 헤쳐나가는 눈이요."


내가,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고?


뫼비우스는 키아나가 품에 안고 있는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어린왕자의 책이었다. 키아나와 클라인 박사로써 처음 만난 날 건네줬던 책.


"....이건 비품일텐데. 키아나."


"글쎄요. 어차피 읽는 사람도 없지 않을까요?"


키아나는 품속에 소중히 안고 달려왔던 어린 왕자를 뫼비우스에게 건넸다.


책에서는 아직도 키아나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 날, 박사님이 저한테 어린 왕자를 주셨던 이유를 생각해봤어요. 어쩌면 어디선가 메이 선배와 제 관계를 어줍짢게 보고 저희 관계를 빗대서 추천한 책일수도 있겠다 싶었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키아나의 푸른 호수같은 눈이 뫼비우스를 응시했다.


뫼비우스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수 없었다.


"어린왕자와 장미꽃의 이야기....이건, 저와 메이 선배가 아니라 박사님의 이야기 아닌가요?"


그 순간, 클라인으로써의 가면은 산산조각나버렸다.


가면 뒤에는 그저 5만년동안 장미꽃을 찾아 헤멘 미아가 있을 뿐.


"저는 언젠가 메이 선배가 저에게 다시 돌아올거라 믿어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제가 메이 선배를 찾아 나서야죠. 하지만 박사님은요? 박사님에게도 돌아갈 별과 장미가 있나요?"


뫼비우스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키아나. 바오밥나무 이야기 기억해?"


"네."


제때 싹을 뽑지 못하면 별을 부셔버릴 정도로 크게 자라나는 바오밥나무. 어린 왕자는 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별이 바오밥나무에 먹힐까봐 걱정했었다.


"나의 세상은 이미 모든게 늦어버린 세상이었어.. 바오밥나무가 이미 별을 전부 먹어치우고 바스러져 우주의 먼지가 될 일만 기다리는 세상이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별이 아니라 바오밥나무 위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키아나는 뫼비우스의 눈을 보았다. 그때와 같은 눈이었다. 모든걸 잃고 사라져버린 과거에 이끌려 그저 앞으로 나아갈수 밖에 없는 삶을 사는 이들의 눈.


키아나는 돌아갈 곳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세상이 무너지는것만 기다리다가, 그녀를 만났어. 땅이라고 부르기도 우스운, 바오밥나무 뿌리사이의 작은 흙먼지 사이에서 자라난 장미꽃을."


어두운 세상에서 희망을 전해주었던 아름다운 수정의 장미꽃. 그리고 그녀를 따라 불씨를 쫓았던 나방들.


"....그녀는 지금 어디 있나요?"


"돌아갔어. 처음 그녀가 왔던 곳으로."


뫼비우스는 힘없이 가슴팍에서 녹색의 수정꽃을 꺼내들었다.


수정꽃은 처음 발견했던 그날과 다를 바 없이 짙은 에메랄드 빛을 주위로 흩뿌렸다.


마지막 날, 연회에 참여한 이들만이 받을 수 있었던 엘리시아의 친애의 증표.


그녀의 초대를 거부한 자신은 받을 자격이 없었던 물건.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에게서 받은 기억도 없는 물건이 이제는 그녀를 기억하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내 세상은 그 때 끝났어. 키아나. 바오밥나무가 마침내 별을 부수던 때가 아니라, 유일한 장미꽃이 지던 순간."


키아나는 잠깐의 정적 뒤, 입을 열었다.


"박사님이 저에게 집착하신 이유도 그 때문인가요?"


뫼비우스는 수정꽃을 들어올려 키아나를 비추었다.


녹색의 수정체 속에서 자신과 그녀의 슬픈얼굴이 잃어버린 꿈의 조각마냥 여러 방향으로 조각나 비춰지고 있었다.


"우리는 양이 필요했어. 바오밥나무가 다시는 자라나지 못하게 막을 상자 속의  양. 상자 속의 양이 어떤 모습일지, 언제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 단지 그게 바오밥 싹을 먹어치울 수 있을거라 믿을 뿐. 우리는 그걸 믿고 상자를 그려 너희에게 실어보냈지."


"그게 저희였군요."


뫼비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성'을 지닌 율자들. 그래. 인류가 가진 제일 하찮은 것. 동시에 가장 위대한 것. 그걸 대단하시기 짝이 없는 붕괴 의지에 새겨넣기 위해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건지..."


뫼비우스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키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너에게 접근한거야. 키아나 카스라나. 상자 속의 양이자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확인하고 싶어서. 하지만 그러면 안됐어."


"어째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관측되는 순간 죽어버려. 나를 봐, 만약  너를 처음 만난 순간 나의 오만한 판단으로 너의 코어를 뜯어냈더라면? 아니면 그날, 너를 감언이설로 속여 너에게서 '네'라는 대답을 이끌어냈다면? 그뿐만이 아니야. 너가 코어 4개의 힘을 전부 이끌어 냈던 그 날, 나는 지배의 극장에 들어갈 수도 있었어. 그대로 난입해서 그 코어들을 전부 다 빼았아갔더라면? 지금의 너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어?"


키아나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으로 뫼비우스를 바라보았을 뿐.


그 사실이 뫼비우스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내가 없었어도 너는 이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을거야. 키아나 카스라나. 너는 그녀가 피워낸 꽃이니까."


뫼비우스는 수정꽃을 든 손을 힘없이 떨궜다.


더 이상은 이 장소에 있고 싶지 않았다.


돌아갈 소행성도, 자신을 기억해 줄 꽃도 없는 비참한 별의 생존자. 그것이 지금의 뫼비우스였다.


뫼비우스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무거운 한발짝을 떼기도 전에-


키아나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아니야! 이런건 당신들이 원했던 결말 같은게 아니야! 이건 과정이라고!"


뫼비우스는 키아나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한번도 보지못했던 그녀의 눈물. 


라이덴 메이가 떠날때조차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겨우 이게 당신들이 원했던 결말이야? 고작 인간의 편에 서서 코어 4개를 온전히 다루는 율자가 탄생하는게? 아니잖아! 당신들이 원했던건 더 대단한 거였을 거 아냐!"


"....그걸로 충분해. 너는 내게 엘리시아도 보여주지 못한 가능성을 보여줬어. 너라면 우리가 바랐던 결말에 도달할 수 있어."


"그렇다면 도망치지 마! 내 옆에서 그걸 지켜봐! 내가 붕괴를 남김없이 불태우는 걸 똑똑히 보고있으라고!" 


키아나가 뫼비우스를 끌어안았다.


"절대 당신을 혼자 두지 않을거야! 내가 느낀 고통을, 그 고독을 당신이 더 이상 느끼게 두지 않겠어!"


마치 도망치게 놔두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는 온 몸으로 뫼비우스를 붙잡았다.


"내가 약속할게! 이 완벽하지 않은 이야기를 내가, 히메코가, 그리고 당신이 원하던 세계로 바꾸겠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뫼비우스는 키아나의 회한이 그녀의 뺨을 타고 내려와 자신의 어깨를 적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쌀쌀한 날씨에도 아직 따뜻하게 느껴졌다.


"떠나지 말아주세요. 제발...."


키아나는 뫼비우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이 소녀는 변하지 않았다. 그날 히페리온의 휴게실에서 만날 때부터, 아니, 천궁시에서 마주친 그날부터.


언제나 강인한 척 자신을 숨기지만 누구보다 연약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였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길 바라지 않아서 가시를 기르지만 곁에 있는 사람이 떠나가면 누구보다 외로워하는 소행성의 작은 장미처럼.


그래. 5만년 전부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뫼비우스처럼.


뫼비우스는 고개를 숙여 키아나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키아나는 놀랐는지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뫼비우스를 쳐다보았다.


뫼비우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돌아가지는 않을거야. 왜냐하면 이미 예약한 표를 취소하기엔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거든."


"...정말 그런 이유로?"


키아나는 시뻘겋게 부은 눈으로 코를 훌쩍이며 묻는 키아나에게 뫼비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 곳은 있어요?"


"뭐, 내 능력은 이 시대에서는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하니 어디를 가든 날 필요로 하는 곳은 있겠지. 없으면 내가 만들어도 되고."


"아는 사람은?"


"....1,2명 정도는 어딘가에 살아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나를 죽은 사람으로 기억할테니 별 다를 바 없어."


"정말 이게 최선이에요? 기억해주는 사람도, 기억하는 사람도 없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새 삶을 사는게?"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뫼비우스는 그녀에게 손 안에 간직하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녹색으로 빛나는 수정의 꽃. 엘리시아가 그녀에게 남겨준 유일한 물건.


"네가 있잖아. 키아나 카스라나."


"이건....박사님에게 소중한거 아닌가요?"


"맞아, 키아나. 내가 말한 장미꽃이 준 선물이야. 나한테 있어서의 가치는....글쎄, 네가 지배의 극장에서 가져온 그 부러진 대검 정도?"


"그런 건....그런 중요한건 받을 수 없어요."


"주는게 아니야. 담보로 맡기는 거야."


애초에 자신은 받을 자격조차 없는 물건이었다. 

초대를 거부했는데 어떻게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는가.

뫼비우스의 소유품 중 그녀가 직접적으로 남긴 유일한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뫼비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키아나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왜냐하면 엘리시아가 자신에게 남긴 진정한 선물이 뫼비우스의 눈앞에서 훌쩍이고 있었으니까.


"약속해 줘. 키아나 카스라나. 우리가 맞이할 수 없었던 미래를 만들어가. 네가 그 미래에 도달하면... 그 때 나를 다시 찾아줘."


키아나는 녹색의 수정꽃을 그러쥐었다. 옅은 색으로 빛나는 수정꽃의 온기가 전해진 순간, 키아나는 뫼비우스의 등 뒤에서 문득 핑크색의 그림자를 본 것만 같았다.


"약속할게요. 클라인 박사님. 무슨일이 있어도 이 꽃을 돌려주겠다고."


뫼비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5만년간 자신을 얽매던 쇠사슬에서 풀려난, 과거의 뫼비우스를 아는 이들이 보았다면 놀랄 밝은 미소를.


"내 본명은 클라인이 아니야. 그건 나한테 소중했던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린거지."


"그럼 진짜 이름은...."


"뫼비우스."


그녀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그 단어를 내뱉었다.


다시는 과거에서 끄집어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이름을.


"나는 [무한]의 뫼비우스. 오래전, 붕괴에 맞섰던 불을 쫓는 나방의 일원이자 서열 10위의 융합전사, 그리고 구 문명의 마지막 과학자."


뫼비우스.


키아나는 그 단어를 되뇌었다.


"나는 키아나 카스라나. 당신들의 유지를 이어 붕괴에 맞설 '신염'의 율자. 그리고 자랑스러운 성 프레이야 학원의 발키리야."


키아나도 말라붙은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래. 이걸로 충분했다. 마침내 뫼비우스는 키아나에게서 몸을 돌려 슈트케이스를 끌며 나아갔다.


손에는 수정꽃 대신 키아나가 건네준 어린 왕자가 들려있었다.


"뫼비우스!"


뒤에서 키아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약속할게! 이 불완전한 세계를,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바꾸겠다고! 그리고 다시 찾아갈게! 뫼비우스!"


뫼비우스는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지금 울고 있는걸까, 아니면 웃고있는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둘 다?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이 벅찬 감정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싶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에 그대로 고정되어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약속해! 꼭!"


울먹이는 키아나의 고함소리가 점점 그녀의 등 뒤로 멀어져갔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채 손을 흔들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그녀는 속삭였다.


"그래. 이것도 약속이야. 엘리시아."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사이로, 문득 오래전에 들어봤던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지나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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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네가 원하던 꽃은 이토록 아름답게 피어났어.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더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피워냈지.


하지만 내가 원하던 꽃은? 그 꽃은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지?


꽃은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서 존재한다.


씨앗을 대지에 퍼뜨리고 나면 꽃은 대지를 뚫고 자라나 언젠가 드넓은 꽃밭을 이룰 또다른 꽃들을 기다리며 스러진다.


5만년의 겨울을 넘긴 엘리시아의 꽃이 그러했고, 키아나 카스라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라이덴 메이의 그러쥔 손 안에는 녹색의 수정꽃이 있었다.


볼품없게 깨져나가고 금이 가있어 마지막으로 보았을때의 아름다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녹색의 수정꽃이.


키아나 카스라나도 그녀의 선조, 케빈 카스라나처럼 달로 올라가 최후까지 남아있었다.


차이점은 하나였다.


케빈은 미래의 인류를 위해 돌아왔다.


키아나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돌아오지 않았다.


"....이게, 키아나가 클라인 박사님에게 전해달라고 한 물건이에요."


한때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보석이 라이덴 메이에게서 다시 원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정말로, 뫼비우스 본인도 놀랄 정도로 어떤 떨림도 없었다.


슬프다는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전해줄건 이게 다인가?"


"네?"


믿을 수 없었다.


키아나는 고작 이런 사람을 위해서 그 수정꽃을 들고 있었단 말인가.


차갑기 짝이 없는 클라인에게 분노를 내뱉으려던 메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슬픔도, 분노도, 기쁨도. 그저 텅 비어버린 도자기 인형 같았다.


"이제 볼일이 없으면 돌아가. 라이덴 메이. 붕괴에 맞선 위대한 영웅에게 고작 이런 잡동사니를 위해서 먼 길을 오게 해서 미안하군."


"정말....정말 할 말이 그것밖에 없나요? 키아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에게 이걸 전해줘야한다고 했어요. 키아나는 당신을, 우리들을 위해서 달에 남았다고요."


"글쎄. 나는 그런 부탁한 적 없어."


진심으로, 나는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불완전한 세계를 우리가 바라던 이야기로 바꿔나가.-


키아나. 나는 네가 웃으면서 직접 이 수정의 꽃을 돌려주러 왔으면 했어.


혼자 왔어도 좋았겠지만, 네가 늘 말하던 사랑하는 메이 선배와 함께 나를 맞이해주었으면 했어.


나는, 이런 이야기따위 바라지 않았어.


뫼비우스는 라이덴 메이에게 등을 돌렸다. 


더 이상 그녀와 나눌 이야기 따위는 없었다.


라이덴 메이는 그저 입술을 깨문채 뫼비우스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은 그저 뫼비우스의 외로운 등만을 쫓고 있을 뿐이었다.


".....클라인 박사. 저는 그 수정꽃에 대해 알고있어요. 색은 다르지만, 완전히 똑같이 생긴 수정꽃들을요. 그걸 지닌 사람들을 알고있었어요."


뫼비우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저는 그들과 가까웠던 '클라인'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도 알고있죠. 클라인 박사. 당신은 혹시...."


"라이덴 메이."


뫼비우스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는, 심연에 잠겨버린 낮은 목소리.


"그래봤자, 그 모든게 이제와서 무슨 의미가 있지?"


라이덴 메이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회한이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맞아요.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네요."


라이덴 메이는 그렇게 등을 돌려 떠났다. 인사 따위는 없었다.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뫼비우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누워있고 싶었다.


뫼비우스는 낡아빠진 싱글사이즈 침대에 천천히 몸을 뉘었다.


언제나 보던 얼룩진 천장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뫼비우스는 라이덴 메이에게 건네받은 수정꽃을 낡은 형광등에 비추었다.


금간 수정꽃 사이로 형광등의 빛이 어지러이 산란되었다.


그순간, 더 이상 뫼비우스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던 수정꽃을 거칠게 집어던졌다.


베게솜이 눈처럼 흩날리고, 찢겨진 옷가지들이 나부낀다.


깨진 접시조각들이 박살난 가구 위에서 꽃처럼 피어나고, 시대가 이해하지 못했던 연구보고서들은 갈기갈기 찢겨져 정말로 시대가 지나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종이쪼가리가 되어버렸다.


인류의 미래를 바꿀 아이디어들이 들어있던 노트북은 이미 설계자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접혀져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뫼비우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책장으로 다가갔다.


수많은 명사들의 세상을 바꿀 위대한 생각들을 담은 책과 논문들. 


무슨 의미가 있지? 너희들보다 훨씬 우월한 내가 실패했는데, 나보다 열등한 너희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단건데.


책들을 펼쳐 정성스럽게 한장 한장 찢어 등 뒤로 내던졌다. 페이지가 모두 날라간채 질긴 가죽커버와 허전한 뼈대만을 남긴 책도 힘을 줘서 반으로 갈라버렸다.


그렇게 하나하나 책들을 파괴하고, 다음 책에 손을 가져간 순간이었다.


뫼비우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책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론을 적은 책이나 이미 자신이 증명하여 볼 가치도 없는 논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금발의 소년과 장미가 그려진 동화책이었다.


키아나 카스라나에게  건네주고, 그녀가 다시 돌려주었던 어린 왕자.


뫼비우스는 조심스레 어린왕자를 끄집어내었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종이의 무덤 중앙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책을 펼쳐들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자와도 같은 뱀이 그려진 삽화와 함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여섯 살이 될 무렵, 나는 책에서 그림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맹수를 집어삼킨 보아뱀의 그림이었다.....-


뫼비우스가 책을 덮은 것은 이미 어두워진 창 사이로 달빛이 내리쬘 무렵이었다.


잡동사니와 쓰레기의 산 사이에서 뫼비우스를 비추는 달빛.


그래. 그 날도 이랬었다.


자신이 뫼비우스를 다시 되찾은 날.


뫼비우스는 어린왕자를 내려놓고 찢겨진 종이들 사이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은색의 달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언제나처럼 세상을 은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그래. 그녀의 땋아내린 머리카락처럼.


뫼비우스는 창밖의 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키아나, 거기에 있는거니?


손을 뻗고 달을 향해 다가가던 뫼비우스의 발치에 무엇인가 걸렸다.


그것은 심하게 금이 가 원래의 빛은 찾아볼수도 없는 수정꽃이었다.


뫼비우스는 허리를 굽혀 수정꽃을 집어들었다.


내부까지 완전히 금이 간 수정꽃은 이제 아무런 빛도 통과시키지 못했다. 


달을 비추어보아도 보이는것은 가시덩쿨같은 녹색의 잔금들 뿐.


달, 그리고 수정꽃. 두 개를 일직선상에 놓고 번갈아보던 뫼비우스는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엘리시아. 그러고보니 너는 나를 배신했었지."


뫼비우스의 그림자가 요동친다. 광원에 영향을 받지않는 그림자는 둔한 녹색빛을 흩뿌리며 천천히 어지럽혀진 방안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받아들였을 텐데, 너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정체를 숨겼지. 정말로 바보같기 짝이 없어."


꽉 쥔 수정꽃에 점점 금이가기 시작한다. 이미 꽃을 좀먹고 있던 수많은 실선들이 늘어나며 꽃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니까 나도 돌려줄게. 네가 나의 기대를 배신했듯이. 나도 너의 기대를 배신해주겠어."


마침내 수정꽃이 뫼비우스의 손 안에서 산산조각 나 원래의 형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손톱이 뻗어져나와 뫼비우스를 꿰뚫었다.


뫼비우스를 꿰뚫은 손톱은 순식간에 그녀를 그림자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뫼비우스를 먹어치운 그림자는 마치 살아있는 고치처럼 달빛을 받으며 맥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치를 찢고 녹색의 손톱이 튀어나왔다.


마치 호수에서 요정이 걸어나오듯, 그것은 천천히 그림자의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것은 소녀였다. 그림자에 끌려가기 전 성숙한 성인 여성이었던 그녀와는 다르게, 키아나보다도 더 어려보이는 작은 체구의 소녀는 검은 왕관과 흑백의  예복을 걸치고 그림자 위에 서있었다.


이 순간, 뫼비우스는 진정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약하기 그지없었던 허물을 이제서야 벗어던지고, 그녀는 진정한 [무한]의 뱀의 여왕으로써 돌아올 수 있었다.


키아나. 우리는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했었지. 나는 별의 아이도, 장미꽃도 아니었어. 나는 뱀이야. 낙원에서 추방당한 원죄의 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것들이 그러하듯이, 뫼비우스는 천천히 차가운 밤공기가 기분좋게 폐를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 숨을 내뱉고 뫼비우스는 발 밑의 한때 수정꽃이었던 석영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것들에서 고개를 돌린채 다시 그림자 속으로 빠져들었다.


뫼비우스를 받아들인 그림자는 천천히 면적을 줄이며, 이내 아무것도 없단듯이 어지럽혀진 방을 놔둔채 사라졌다.


온갖 잡동사니로 어지럽혀진 방의 중앙에는 5만년동안의 과거의 조각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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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색의 뇌전을 두른 검이 흑과 녹의 괴물을 문자 그대로 번개처럼 꿰뚫었다.


그러나 괴물은 꿰뚫린 그대로 검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비켜!"


라이덴 메이의 눈에 율자의 힘을 상징하는 자주빛 문양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검은 자색의 번개를 더욱 세차게 흩뿌리며 피조물을 잿더미조차 남지않게 불태워버렸다.


라이덴 메이는 숨을 가다듬었다.


이녀석들은 자신을 쓰러뜨리는게 목적이 아니다. 명백하게 시간을 끌려하고있다.


히페리온의 컨트롤 룸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 흑색과 녹색이 섞인 각양각색의 생명체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습격했다.


현재 가용 가능한 전투인원들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상황에서 히페리온의 제어권을 누군가에게 탈취당했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것은 라이덴 메이였다.


급하게 잠입해들어간 히페리온은 이미 이 생명체들의 둥지나 다름없었다.


'역시, 그때 말했어야 했어.'


다시 한번 뇌전이 괴물을 반으로 갈랐다. 이번에는 뇌전이 시체를 제대로 태우지 못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컨트롤 룸으로 다가갈수록, 이 녀석들은 라이덴 메이의 뇌전에 점점 내성을 갖춰가고있었다.


또 다시 복도 너머에서 괴물들이 나타났다. 뱀을 닮은 것이 둘. 인간을 닮은 것이 하나.


라이덴 메이는 다시한번 율자의 권능을 끌어올렸다. 뱀을 닮은 괴물들이 그녀의 움직임을 구속하려 달려들었지만 그녀의 검이 더 빨랐다.


뱀들을 일섬에 베고 마지막 남은 괴물을 향해 달려든 순간이었다.


라이덴 메이는 괴물의 무기질적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녀석은, 내 속도를 쫓고있다.


괴성과 함께 괴물의 팔이 변형되며 메이를 쫓아왔다.


그래서 뭐 어쨌단거냐. 따라잡혔다면, 더더욱 빠르게 움직이면 돼.


한계까지 힘을 끌어올린다, 일섬으로 보이지만, 실은 눈에 보이지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린 5번의 참격.


괴물은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 인지초차 하지 못한채 무너져 내렸다.


메이는 더이상 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뒤 아무도 없는 복도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한번도 본적 없는 괴물들이지만 메이는 비슷한 피조물들을 전에 본 기억이 있다.


오래전, 답을 찾아 과거의 낙원으로 향했을 때, 그녀는 그 곳에서 뱀을 만났다.


[무한]의 각인을 지닌 영웅. 뫼비우스를.


비록 그 방식이 다른 영웅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을지언정, 그녀도 진심으로 인류가 붕괴에 맞서서 승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현실의 그녀는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인가. 


메이는 그날 만났던 클라인 박사를 떠올렸다.


키아나에게서 클라인이라는 이름을 처음들었을때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살아있을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키아나가 녹색의 수정꽃을 꺼내들었을 때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엘리시아에 따르면, 뫼비우스는 그 수정꽃을 받는걸 거부했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었든, 그 꽃은 5만년의 세월을 넘어 키아나에게로 넘어와있었다.


그렇기에 기대했었다. 비록 자신에 대한 기억은 없을지라도, 영웅들을 기억해 줄 다른 사람이 있다는것에.


그리고, 키아나를 잃은 슬픔을 그녀로 덜 수 있다는 것에.


그러나 그녀가 만난 것은 누구보다 오만하고 자신만만했던 낙원 속 [무한]의 뱀이 아니었다.


자신과 다를바 없는,모든 걸 잃어버리고 실패해버린 불쌍한 망령뿐.


그렇기에 그녀를 떠났다. 그녀와 자신이 있으면 상처를 치유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아픈 기억만을 건드릴테니까.


그리고 그 선택은 이렇게 후회가 되어 돌아왔다.


메이는 있는 힘을 다해 컨트롤 룸의 두꺼운 차폐문을 베어넘겼다.


"뫼비우스!"


메이는 고함과 함께 잘려나간 차폐문의 잔해를 걷어찼다.


그러나 메이의 상상과는 다르게, 컨트롤 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무슨..."


메이가 컨트롤 룸으로 발을 들이민 순간이었다.


잘려나간 문의 조각에서 검은 세포의 벽이 자라나 순식간에 입구를 틀어막았다.


메이가 당황해서 뇌전의 검격을 날렸지만 세포벽은 역으로 뇌전을 흡수해 더 견고해질 뿐이었다.


함정이었다. 애초에 컨트롤 룸으로 가는 길의 경비를 더 삼엄하게 깔아놔 이곳에 중요한 게 있을것이라 착각하게 만든거였다.


메이는 입술을 깨물며 컨트롤 룸의 패널에 다가갔다.


분명히 이 중에는 히페리온의 감시카메라를 조종하는 패널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곳을 점거했더라면 CCTV의 회선까지 끊어놓는게 맞았지만, 메이는 자신이 알던 그녀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메이는 히페리온을 점거한 괴물들만이 비춰지는 모니터를 빠르게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익숙한 녹색의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멈췄다.


히페리온의 엔진룸. 히페리온의 심장인 월광왕좌가 있는 곳.


메이는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의 스위치를 올렸다.


"...뫼비우스."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세로로 갈라진 뱀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모니터에 비춰졌다. 


오래 전, 낙원에서 보았던 것과 변함없는 예복을 걸친 무한의 뱀이 그곳에 있었다. 


뫼비우스가 카메라를 보며 미소지었다.


"안녕? 실험쥐 씨."


그녀다. 정말로 진짜 뫼비우스는 살아있었다. 5만년이라는 시간을 넘어서.


메이는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주체하며 말을 이어나가려 노력했다.


"뫼비우스. 지금 본인이 무슨 짓을 하고있는지 아는건가요?"


"이것봐. 아인슈타인이 내 충고를 받아들였네. 이 정도의 출력이라면 5만년 전에 썼던 월광왕좌와 동급.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어."


뫼비우스는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메이의 목소리를 무시한채 다시 월광왕좌를 매만졌다.


"뫼비우스!"


"아아, 그렇게 소리 안질러도 충분히 들려. 실험쥐 씨."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거죠? 이미 붕괴는 완전히 종식되었어요. 우리들의 목적은 이미 이루어졌다고요!"


"붕괴는 끝나지 않았어. 너희는 그냥 너희가 감당 못할것들을 저 달에다가 쑤셔넣고 상자를 잠궈버렸을 뿐이지. 한 소녀와 함께."


메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키아나 카스라나.


누구보다도 매력적인 밝게 빛나는 소녀.


그녀는 5만년전 영웅의 마음속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남겨놓았다.


"그래서 이게 그 대답인가요? 키아나가 없는 세상따위 원하지 않으니까 전세계를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는게? 키아나가 이런걸 바랄 것 같아요?"


"라이덴 메이. 너는 착각하고 있어. 내 목적은 테러 같은게 아니야. 나는 키아나가 바라던 이야기를 만들어갈 뿐이야."


불완전한 세계를 우리가 원하던 이야기로 바꾸어나가.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스승을 죽이고, 키아나를 홀리고 스스로를 불태우게 만든 그 말은 이제는 5만년전의 망령조차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뭘 할건데요? 그 망할 이야기를 위해 이 히페리온을 탈취해서 월광왕좌로 달에 자폭돌격이라도 할 셈인가요?"


뫼비우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피커를 통해 이어지는 정적에 라이덴 메이는 깨달았다.


뫼비우스는 정말로 저지를 생각이다.


"젠장, 뫼비우스!"


메이는 다시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뇌전을 날려대도 입구를 틀어막은 세포의 벽은 요동조차 하지 않았다.


"뭐, 절반만 맞췄어.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런 무식한 짓은 하지 않아. 그런 걸로 해결될 일이었으면 오래전에 구문명이 멸망할 일도 없었겠지."


모니터 너머의 뫼비우스 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월광왕좌는 MEI박사가 만들어낸 걸작이야. 붕괴능을 열에너지로 변환해 방출하는 경이적인 시스템. 우리는 이 대단한걸 사용하고도 승리하지 못했어. 뭐, 너희도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던 모양이지만."


메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뫼비우스 박사는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분석했다. 다른 동료가 오지 않는 이상은 어쩔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녀들은 지금쯤  뫼비우스의 피조물들과 대항해 싸우고 있을 것이다.


즉, 구조는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괜히 힘빼지 말고 생각해봐. 실험쥐 씨. 역으로 열에너지를 붕괴능으로 바꾼다면? 그 막대한 붕괴능을 달을 향해 쏘아낸다면?"


메이는 결국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다시 모니터 앞에 섰다.


더 이상 힘을 빼는 것은 그녀의 말대로 낭비였다.


"월광왕좌는 가동에 율자코어 4개분의 에너지를 필요로 했어요. 그럼 당신은 역으로 그만한 붕괴능으로 전환할만큼의 에너지를 어디서 끌어올 셈이죠? 설마 히페리온의 동력을 사용해서? 턱없이 부족할텐데?"


"하하. 실험쥐씨. 내가 그것도 생각안했을거 같아?"


뫼비우스는 낮게 웃었다.


"동력원이라면 여기 있잖아. 5만년동안 스스로의 붕괴에너지를 전환하며 살아온 적합한 연료가."


카메라 너머의 뫼비우스는 자신을 가리켰다.


"그럼 당신은 죽을거에요."


"나는 이미 5만년 전에 죽었던 사람이야. 그녀가 나에게 다시 살아갈 의미를 줫으니 되돌려주는게 맞겠지."


뫼비우스는 고개를 올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 천장으 닫혀진 해치 너머에는 그녀가 잠들어있는 달이 있겠지.


"생각해봐. 라이덴 메이. 그 막대한 붕괴능을 달로 쏘아보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달의 봉인이 풀리겠죠, 달 안에 압축된 붕괴에너지는 그 즉시 폭발하듯이 방출되어 지구로 향할거에요."


"그리고 키아나는 자유를 얻겠지."


카메라 너머로 뫼비우스가 광기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에는 지금 무엇이 비치고 있는걸까.


메이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하지만 인류는 다시 붕괴에 고통받겠죠! 그 수많은 희생들을, 오직 키아나를 살리기 위해서....!"


메이는 목이 메여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이런 광기어린 짓에 더 이상 달에 잠든 자신의 연인을 말려들게 하고싶지 않았다.


"키아나는 절대 그런 짓을 바라지 않을거에요! 절대로!"


그 순간, 라이덴 메이의 통신기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괴생명체 진압 완료. 현재 전원 집합 중. 준비되는 즉시 히페리온으로 진입하겠음.-


동료들이었다.


그녀들이 온다면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그녀들이 올때까지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키아나 뿐만이 아니에요. 당신은 그녀가 정말 이걸 바랄거라고 생각하나요?....엘리시아가?"


엘리시아.


뫼비우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단어를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는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역시, 그곳에 다녀온건 너였구나. '과거의 낙원'에."


"네. 그곳에서 저는 13인의 영웅들을 만났죠. 엘리시아도. 그리고 과거의 당신도."


메이의 안에서, 그 순간들은 절대로 잊어버릴래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들. 


라이덴 메이는 그 순간들을 모두 기억했다.


그렇기에 믿고 싶었다. 모니터 안의 소녀가 아직 5만년전과 똑같이 자신의 사명을, 그리고 미소를 흩뿌리던 핑크빛 소녀를 잊지 않았다고.


뫼비우스는 슬픈 눈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착각하고 있는게 2가지 있어. 라이덴 메이. 첫째는 나는 엘리시아를 잊은 적이 없어. 단 한순간도."


"그렇다면 대체 왜...!"


"왜냐하면 이게 내가 생각한 붕괴에 맞서는 궁극적인 방법이기 때문이야."


오래 전, 그녀는 한가지 계획을 생각해냈었다.


인류가 붕괴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서, 인류의 정의를 조금 느슨하게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라는 발상에서 생각된 계획.


그렇다면 역으로. 인류가 붕괴에 승리하기만 한다면, 그 승리의 기준이 조금 넓어져도 되지 않겠는가?


그저 봉인하는것만으로는 안돼. 완전히 이 세상에서 붕괴를 소멸시켜야만 한다.


설령, 이 지옥같은 싸움을 몇 번이고, 몇번이고 반복하더라도 결국 최후에 승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너희야말로 엘리시아의 증명이야! 그러니까 너희들은 몇번이고 다시 붕괴에 맞서 싸울 수 있어! 이 세상에서 저 빌어먹을 붕괴가 마지막 한 조각마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뫼비우스의 광기어린 웃음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컨트롤 룸에 울려퍼졌다.


메이의 통신기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투가능 인원 전부 준비 완료. 신호 시 진입하겠음.-


"그래, 나는 이 무한한 승리의 가능성을 창조해냈어! 나의, 엘리시아의, 그리고 너희들의 승리를 향한 이 선택이 바로 나의 [무한]이야!"


옛날, 과거의 낙원에서 현재의 뫼비우스가 과거의 뫼비우스에게 보냈던 메시지. 그러나 그 의미는 이제 완전히 변질되었다.


광소하는 모니터 너머의 뫼비우스를 향해 메이는 소리쳤다.


"키아나가, 엘리시아가 바랬던 미래를 당신이 이대로 망치게 두진 않겠어!"


-바로 지금.-


메이가 메시지를 보낸 순간, 히페리온의 외벽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세포벽이 박살나며 그곳에서 메이에게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메이 언니!"


"브로냐! 당장 엔진룸으로 향해야 해요! 안그러면..."


"아, 그리고 두번째 착각을 말해주는걸 깜빡했네."


뫼비우스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작고 낡은 하나의 책이었다.


"너만 시간끌고 있던거 아니거든. 라이덴 메이."


히페리온의 해치가 천천히 열리고 거대한 함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해치가 개방되는 진동을 느끼고 당황한 메이와 브로냐의 귓가에 뫼비우스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내가 왜 삼류악당도 아니고 내 계획을 일일히 다 너에게 알려주고 있었겠어? 왜냐하면 이미 전부 다 끝났기 때문이야. 라이덴 메이."


함포는 천천히 그 강철의 거체를 회전해 달을 조준했다. 


이제는 열린 해치를 통해 뫼비우스도 하늘 높이 그녀들을 비추는 달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제발...뫼비우스, 이런 일은 아무도 바라지 않을거에요. 키아나도, 엘리시아도...."


뫼비우스는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흐느낌에 가까운 메이의 부탁에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알아. 내가 바라는 일이야."


월광왕좌, 가동.


"그리고, 별의 아이를 고향별로 데려가는건 뱀이 해야만하는 일이니까."


마침내 주포에서 선홍빛 광선이 발사되었다.


뫼비우스의 생명을 대가로 발사된 재앙의 신호탄은 달을 향해 일직전으로 날라갔다.


뫼비우스는 몸에서 힘이 천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5만년동안, 심지어 종언이 강림했을때조차 느끼지 못한 기분.


아아, 이것이 죽는다는거구나.


뫼비우스는 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불완전한 세계를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바꿀 때까지.


어때, 키아나. 정말 이게 네가 원하는 결말이었니?


나는 아니었어.


그러니까 다시 한번 내려와서 기회를 줘.


오래 전, 하늘에서 내려온 별의 아이가 그랬듯이.


다시한번, 우리를-.


라이덴 메이는 히페리온의 해치 밖에서 브로냐와 함께 달을 보고 있었다.


이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마침내 목표에 다다른 선홍빛 광선이 달을 뒤덮었다.


핏빛으로 물든 달은 짙은 붉은 색과 옅은 선분홍색으로 번갈아 변해가며 살아있는 생물처럼 고동치고 있었다.


고치 안의 생명이 천천히 형태를 갖추듯 달의 색이 점점 짙어져만 갔다.


짙은 감색의 밤하늘 아래, 달의 색이 모든 빛을 흡수하는 완전한 검은 색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이미 달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늘에 뚫린 구멍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어두운 심연속의 존재들을 가두고 있던 구멍.


마침내 구멍이 뚫리고 모든 빛을 먹어치우는 암흑이 지구를 향해 쏟아져내렸다.


어두운 도시를 밝히던 불들이 하나 둘씩 꺼지고 비명소리와 절규가 세상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세상이 전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에 먹혔을 때, 그 어둠속에서 비명소리와 절규마저 잦아들었을 때,


어둠을 가르고, 한줄기의 붉은 신염(薪炎)이-


뫼보탐(뫼비우스가 보내준 동화 탐구)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