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은 소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려 노력하며 냉기가 피어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기획은 허가할 수 없다."


뾰족한 엘프귀를 가진 핑크머리 소녀의 뾰루퉁한 표정을 피해 자꾸만 옆으로 도망치는 시선을 억지로 붙잡아 소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케빈은 더욱 엄격한 표정을 지어냈다.


"엘리시아, 설마 진지하게 이 기획이 통과 될 거라고 믿은 건 아니겠지."


"케빈, 시도도 노력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건 너답지 않잖아."


엘리시아의 대꾸에 케빈은 고개를 저었다. 케빈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책상에 올라온 두터운 기획서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제목 부분을 탁탁 두드리자 엘리시아가 기획서를 쳐다보았다.


'불을 쫒는 나방 13영웅의 여름 바캉스 영화 기획서'


제목부터 이미 어처구니 없는 실소가 나온다. 하지만 진짜는 그 내용이다. 


불을 쫒는 나방의 13영웅을 모아 바다로 가 미스테리액션로맨스코미디스릴러서바이벌바캉스 영화를 찍자는 내용부터 더 이상 어딘가로 떠나갈 정신조차 없지만 그 배역의 배정엔 기가 차다는 말조차 부족했다. 


충실하게 대본까지 꽉꽉 채워둔 이 기획서는 어떤 의미로는 대단할 지경이었다.


기획서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양식과 성의만을 지킨 이 어처구니 없는 내용의 기획서가 제출 단계에서 쓰레기통에 처박히지 않고 케빈과 메이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던 이유는 오로지 이 기획서의 제출자가 엘리시아였기 때문이다. 


케빈은 다시 엘리시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지금 우리에게 이런 장난을 칠 여유는 없다는 걸. 애초에 기획의 실현은커녕 준비 전 단계부터 불가능해."


그의 머리 속에 무심코 영웅들의 배역과 그 연기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알로하 티셔츠를 입고 바캉스를 즐기는 수, 얼음 의자에 붙어버린 옴싹달싹 못 하는 자신, 그리고... 호텔의 요리사 역할을 수행하는 칼파스?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캐스팅이라면 문제없어. 에덴은 기꺼이 나서서 도와줄테고 빌브이랑 뫼비우스는 오히려 제발 자신이 돕게 해 달라고 애원할거야. 다른 사람들도 조금만 부탁하면 다들 협조해 줄 꺼야 아, 설마 자기 배역에 불만이 있는 거야?" 


말이 길어지려는 기분이 들었다. 케빈은 손을 들어 그 말을 끊었다.


"엘리시아, 너의 부탁은 가능한 모두가 이뤄주려 하는 건 알아. 나 또한 마찬가지야.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지만.. 지금은 불가능해."


케빈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엘리시아는 항변하기 위해 나선 발을 거두었다. 케빈의 말이 이어졌다.


"제약의 참극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숙이 새겨져 공포와 불안을 부추기고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음 율자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사기와 의지야. 아포니아는 이미 병사들에게 계율을 사용하고 있어. 빌브이와 뫼비우스, 메이는 연구실에서 매일 밤을 지새고 있고 다른 전사들도.."


"알아, 케빈. 그리고 나는 아포니아의 계율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사람들에게 그런 강제적인 정신 억압으로 일으킨 희망은 아포니아 본인에게도, 사람들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꺼야."


자신의 말을 끊고 들어온 엘리시아를 바라보는 케빈의 눈은 지쳐있었다. 케빈의 말은 바깥의 일반 병사들만을 가르키는 말이 아니었다. 제약의 참극은 불을 쫒는 나방의 가장 강력한 전사에게도 깊은 상흔을 새겼다.


엘리시아가 가까이 다가와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책상에 얹어둔 손에 얇고 부드러운 손이 내려앉았다. 좋은 향기. 케빈은 언제나 자신의 가슴을 묵직하게 잡아내리는 불안이 잠시 그 손을 놓아주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누구라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다. 


"케빈,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필요해 모두에게 다시 웃음과 희망을 주고 싶어. 불을 쫒는 나방의 영웅들이 붕괴수와 융합한 괴물이 아니라 사람임을, 그리고 사람과 함께 붕괴에 맞서 싸울거라는 희망을..."


"엘리시아."


케빈은 자신의 손등에 얹어진 따듯한 손을 조심스레 밀어냈다 저항은 없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 얇고 작은 손의 아주 작은 저항이라도 있었다면, 케빈은 감히 그 손을 밀어내지 못 했을 것이다.


케빈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엘리시아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체온보다 차가운 침묵이 방을 메웠다. 잠시 후 케빈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 기획서는 허락하지 않아. 이것이 불을 쫒는 나방 1위의 결정이다. 불만이 있다면 정식으로 건의서를 올려 전달하도록."


물론 이번엔 단지 엘리시아가 제출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까지 그 건의서가 올라올 일은 없을 것이다.


케빈은 가만히 서서 자신의 기획서를 내려다보는 핑크머리 소녀를 지나쳤다. 문고리를 돌리고 반 쯤 문을 연 케빈은 깜빡 잊었던 말이 있었다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엘리시아."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네가 말한대로 그 기획서의 목적이 누군가에게 미소와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면.. 너는 성공했다. 이미 누군가는 그 기획을 보고 웃었으니까."


그리고 즉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문 뒤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와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기관총처럼 문을 뚫고 쏘아졌다.


'케빈!! 케빈!! 그게 누군데? 어? 빨리 말해줘!!'


방 안의 소녀가 바깥으로 뛰쳐나오기 전, 그는 빠른 걸음으로 이미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마지막 표정을 보지 못 한 것에 안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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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의 구석을 걸었다. 지하실의 복도는 이미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그는 마치 어둡고 텅 빈 광장에서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사람처럼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은 그를 피해 마구 옆으로 지나쳐갔다. 필사적으로 머리 속을 이미 지시한 일, 지시할 일, 해야 할 일로 억지로 채워나가는 그에게 자신 외의 사람은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에겐 이미 만물휴면의 가동을 지시했다. 화에겐 상처가 낫는 즉시 만물휴면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 뫼비우스 박사에게도 찾아가야 해. 지금 그녀의 위치는... 아니야. 지금 최우선으로 찾아가야 할 것은 그리세오다. 그녀는 현 방주 계획의 책임자야. 다시 한번 그녀의 임무를 상기시키고 방주의 조작과 통신에 대해 확인해야 해. 빌브이가 없더라도 방주의 출항은...'


필사적으로 머리 속에 끌어올리던 생각이 멈췄다. 동시에 구역질이 올라와 그는 배를 부여잡고 허리를 숙였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온 신물이 목과 입 안을 태웠다.


꾹 닫힌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신물은 순식간에 얼음 결정이 되어 바닥에서 산산히 부서졌다. 하지만 그의 시선 끝에 보이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빌브이, 불을 쫒는 나방의 5위, 천재 공학자이자 마술사, 사기꾼, 방주계획의 총책임자.


그의 머리 속에 그녀의 온갖 정보가 마구잡이로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그의 시야 속에 그녀의 온갖 모습들이 마구잡이로 채워지고 지워졌다.


그의 귀에 그녀의 수백, 수천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말하는 것이 들렸다.


아니, 다시 생각하니 그녀의 정보만이 아니었다. 파르도 필리스, 코스마, 칼파스, 사쿠라의 정보가 있었다.


다시 보니 그녀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파르도 필리스, 코스마, 칼파스, 사쿠라의 모습이 있었다.


다시 들어보니 그녀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파르도 필리스, 코스마, 칼파스, 사쿠라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들의 정보가, 모습이, 목소리가 그의 내장을 비틀고 잡아뜯었다. 더욱 격해진 구역질이 무릎조차 무너트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신물을 토하고 있었지만 토할것만 같았다.


그는 패배했고 지키지 못 했고 도망쳤고 비참했다.


남은 것은 뼛속까지 새겨진 무력감과 죽어도 죽지 못 할 사명 뿐이다.


"케빈, 괜찮아?"


온화한 목소리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


정신없이 마구 도는 머리를 들어올리자 붉은 와인같은 머리카락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 사이에 피로와 먼지에 쩔은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케빈은 무릎을 짚고 다시 일어섰다.


"그래."


타 들어 간 목소리로 대답한 그에게 그제서야 주위가 보였다.


지나치는 연구원은 있었지만 이젠 많지 않았다. 이미 대부분은 자신의 임무를 위해 달려가 다음 계획의 준비와 시동을 확인하고 있을 것 이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에덴. 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에덴, 너도 불씨 계획을..."


"케빈,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아. 잠시 쉬다 가는게 어때?"


그가 부정의 말을 뭐라 웅얼거리기도 전에 그녀가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 작은 힘에 케빈은 마치 종이 인형처럼 비척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가까운 방에 들어가 에덴이 이끄는 대로 의자에 그는 앉는 것처럼 쓰러졌다.


에덴도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바깥에선 가끔 다급한 발소리만이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케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덴."


"응?"


그녀의 얼굴에 짙게 뭍어난 피로감과 먼지는 그녀의 외모를 퇴색시키지 못 했다. 오히려 진흙 속에 피어난 연꽃처럼, 피로와 먼지는 그 아름다운 미소를 더욱 빛나게 할 뿐 이다.


"...웃고 있군."


"미안해. 이런 상황에서... 기분 나쁘지."


"아니, 오히려 안심이 돼.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우리는 붕괴를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거지?" 


"후후.. 미안해, 케빈.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아니야."


"그럼?"


"엘리시아를 생각하고 있었어."


"아..."


그 이름이 또 다시 시야와 귀를 정보와 모습과 목소리로 가득 메웠다. 이상한 일이다. 이번엔 어지럽지 않았다.


몰려드는 정보에 멍해진 머리에 에덴의 노래하는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시아가 어느 날 내 방에 찾아와 잔뜩 신난 채로 침대에 앉아 영화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았지. 나는 술을 마시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어. 후훗, 마치 아름다운 노래소리 같아서."


"..."


"그녀는 나에게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고 화를 냈고, 나는 토라진 엘리시아에게 사과하며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녀는 아이디어를 냈고 내가 기획서를 썼지. 엘리시아는 그런 건 잘 못 했거든"


"그랬군."


"응?"


"그녀를 도와준게 너였어, 에덴."


이젠 색바라고 부숴진 기억이 다시 모습을 갖추고 색을 채워나갔다. 그 추억은 틀림없이 아름다운 분홍색이었다.


"난 그녀의 기획을 거절했었지."


"그래, 그 날 엘리시아가 찾아와 나에게 안겨서 한참을 투덜거렸지. 그것조차도.. 음악 같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녀가 옳았을지도 모르겠군. 웃음과 희망이라..."


케빈의 말을 끝으로 다시 방 안은 조용해졌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짧았다. 케빈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다시 일어선 그는 불을 쫒는 나방의 1인자이며 인류 최강의 전사였다.


"에덴. 나는 다시 한 번 이후의 계획을 확인하기 위해 가야겠어. 달까지 왕복하느라 힘들었을테니 더 쉬고 늦지 않게 만물휴면으로 들어가." 


"...알겠어."


에덴의 미소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위화감에 케빈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하지만 정말로 시간이 없다. 종언의 율자의 손아귀는 당장이라도 인류를 벌레처럼 찍어누르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문고리를 잡고 문 밖으로 나섰다.


우리는 붕괴에게 승리한다 어떤 희생을 치뤄서라도!!


=====


과거의 낙원에 소란은 드물지 않다. 영웅들은 자신의 특별한 개성을 숨기지 않고 뽐냈고, 강렬한 영웅들의 개성은 부딪칠 때마다 낙원에 소란을 일으킨다. 대부분의 소란은 별 일 없는 그 날 하루의 해프닝으로 끝나지만 케빈은 지금 이 휴게실에서의 소란이 도무지 조용히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기 어려웠다.


차가운 얼굴로 앞을 응시하던 그는 슬쩍 자신의 옆에 앉은 오랜 친우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수의 평온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깊이 쌓아올린 시간의 우정으로 그는 그 표정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케빈은 다시 시선을 돌려 가면의 남자와 핑크 머리 소녀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다. 그녀가 칼파스에게 결코 지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엘리시아의 다짐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순간, 언제든 뛰쳐나가 그 사이를 가로막을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분노한 짐승의 울음처럼 칼파스가 탁자에 종이뭉치를 내려치며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지금 이 말도 안되는 대본을 정말 진심으로 보라고 가져온거냐? 어? 내가 이 따위 엉터리 영화에 출연할 거라고 생각하고?"


"응!! 분명히 즐거울 꺼야. 칼파스를 위해서 특 별 히 준비한 배역이니 칼파스도 신나게 즐길 수 있을걸. 장담해도 좋아."


케빈의 차가운 표정이 엘리시아의 대답에 약간 일그러졌다. 소녀의 표정과 말투는 사나운 위협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천진난만 했다. 그의 머리 속에 조금 전, 그녀와 둘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케빈, 수. 칼파스는 분명히 이 영화를 마음에 들어할 거야. 아, 그리고 약속대로 칼파스가 이 영화에 출연한다고 하면 케빈, 너도 두 말 안하고 영화 찍는 거다? 수, 너도 마찬가지야 약속했지? 그때 가서 못 찍겠다고 하면 진심으로 화 낼 거야."


"...예, 물론 약속은 지킵니다. 하지만 엘리시아, 저희도 함께 찾아가 설득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론 엘리시아가 낙원 모두의 믿음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건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시아 혼자서 칼파스를 설득하는 것보다 세 명이 함께 설득하는 것이..."


"어휴, 정말이지. 수의 걱정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칼파스는 분명히 대본을 보자마자 자기 배역이 마음에 들어서 바로 촬영에 협조 할거야. 케빈이랑 수랑은 다르게 칼파스는 분명 영화 출연에 욕심이 있다구."


도대체 처음부터 끝까지 믿을 구석이 없는 대답이다. 혼자 가겠다는 엘리시아를 수가 간신히 설득해 말없이 지켜본다는 조건으로 따라오는 것 까지는 성공했지만 둘의 예상대로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가면 틈새 사이로 붉게 타오르는 안광이, 상처 입고, 분노한 짐승과 같은 칼파스의 눈동자가 엘리시아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시아의 표정만이 여전히 생글생글 태평한 미소 그대로였다.


이제 곧 분노한 칼파스의 욕설과 주먹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 것만 같은 분위기에 케빈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설 채비를 갖췄다.


칼파스는 아직까지 엘리시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칼파스는 엘리시아를 향한 자신의 살의를 증명할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영화 출연을 제의한 그녀의 목을 부러트려 그 미소를 지우고 몸을 찢어 그 피를 온 몸에 뒤집어쓰고 크게 광소하며...


"촬영장비는 있나?"


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케빈은 차가운 얼굴 그대로 쇼파에서 일어섰다. 엘리시아는 기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빌브이랑 필리스가 협조했는 걸. 오디오도 카메라도 전부!! 혹시나 해서 말해주지만 뫼비우스랑 클라인이 이미 촬영 장소도 준비하고 있어. 칼파스는 그냥 몸만 오면 끝나는 거야. 아, 당연히 대본은 숙지해야지? 지금 약속한 거야? 영화 촬영 하는 걸로?"


"그만 떠들어라. 시끄럽게 더 이상 쫑알대지 말고. 시간과 장소나 말해라."


"그건 다음에 모두한테 전부 한꺼번에 공지 할 거야. 혹시라도 나중에 잊어버렸다는 핑계는 안 들어." 


"흥,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은 다른 놈들 한테나 경고해라. ...너희는 뭘 하고 있는거지."


엘리시아에게 몸을 돌리던 칼파스의 말에 수와 케빈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파스가 크게 웃었다. 물론 즐거운 웃음은 아니었다.


"한 판 붙어보기라도 하자는거냐? 하! 좋다 지금 당장이라도...!"


"칼파스~ 휴게소에서 싸움은 금지야. 무엇보다도 지금 싸울 시간은 없어. 당장 대본을 외우고 연기 준비를 해야지!!"


엘리시아의 낭랑한 재촉에 칼파스는 머리가 자신의 가슴께에 미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긴장해야 할지, 아니면 자세나 바로 잡을지 판단하기 어려운 이 기이한 광경에 케빈과 수는 실력 없는 조각사가 깎아낸 어색한 조각상처럼 멍청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엘리시아는 칼파스가 방금 집어던진 대본을 주워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곧 콧방귀로 둘을 무시하고 칼파스는 대본을 낚아 채 문을 때려 부술듯한 기세로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어휴, 칼파스는 아직도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속으론 영화에 출현하게 되서 기쁘면서."


지금 이 상황도, 엘리시아의 말도 모두 믿을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케빈과 수에게 엘리시아가 두터운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약속했었지? 대본은 꼭 전부 외우고 와야 돼. 시간하고 장소는 나중에 전부 동시에 알려 줄 테니까 지각은 금지야. 벌써 기대된다! 13 영웅이 다 같이 모여 찍을 영화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치? 기대되지?" 


케빈과 수는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먼저 대답한 건 수였다. 그는 더듬더듬 화사한 꽃처럼 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에게 대답했다.


"물론... 아주 기대가 됩니다. 엘리시아, 정말 기대가 되고 말고요. 그렇죠, 케빈?"


"아아... 당연하지 틀림없이... 사람들에게 희망과 웃음을 주는, 그런 영화일 거다."


케빈은 수에게 시선을 떼고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나? 엘리시아."


엘리시아는 환한 웃음으로 그의 물음에 화답했다. 케빈의 차가운 표정에 아주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잔뜩 흥분하여 떠들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케빈. 출연하기 싫은 척 하더니 벌써 대본 다 봤구나? 에덴이 음악이랑 복장을 준비한다고 약속했어. 에덴이 최고의 음악이랑 복장을 만들어 줄 테니까. 우리도 최고의 연기를 보여줘야 돼. 아, 맞다 뫼비우스랑 클라인이 만든 무대는 끝까지 기대해. 분명히 최고의 무대가 될 거야. 그럼 나는 준비 과정 보러 먼저 갈께. 대본 꼭 외워 알겠지? 그럼 나중에 봐!!"


폭풍처럼 말을 쏟아낸 그녀는 둘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 밖으로 사라졌다. 수와 케빈은 그녀가 뛰쳐나가느라 제대로 닫히지 않고 삐걱이는 문을 바라보았다. 수는 잠시 문을 바라보다 케빈에게 말했다.


"케빈, 그럼 저도 가 볼께요. 그녀와 약속했으니 대본부터 외워야겠죠. 연기가 어떨진 정말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언제 대본을 다 본거죠? 그녀가 먼저 대본을 줬었나요?"


"아... 그래 먼저 받았어. 아마 내가 처음일껄."


"그런가요? 흠.. 아무튼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왕 시작된 거 제대로 해야겠죠."


"그래, 제대로 해야겠지." 


수가 가볍게 목례하고 휴게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휴게실은 다시 언제나와 같은 고요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방금까지의 소란이 모두 거짓인 것 처럼. 케빈은 한숨을 쉬고 휴게실의 푹신한 쇼파에 앉았다.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익숙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불을 쫒는 나방 13영웅의 여름 바캉스 영화 대본'


케빈은 조용히 첫 장을 넘겼다. 그 뒤의 내용은 익숙했다. 종이를 들춰 내용을 살필 때마다 흩어진 추억이 다시 조금씩 그 모양을 갖춰나갔다. 케빈은 무심코 한 마디를 흘렸다


"그래, 엘리시아. 네 말 대로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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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진짜 얼마만에 써본거지


엘리 음해 없으면 중복 참여 된다 해서 같이 했는데 내용이나 중복 참여 문제가 되면 지우고 붕챈 문학만 참여할래


나같은 허접도 참여하는 문학 대회, 갤주는 엘리 대회 많은 관심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