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게 음각된 스페이드7의 카드가 마술사의 모자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사라져들어갔다.


마술사가 과장된 표정으로 의아하단듯이 모자를 얼굴에대고 흔들자, 마치 폭죽처럼 카드더미들이 모자에서 뿜어져나와 놀랐단듯이 눈을 크게 뜬 마술사의 머리 위로 흩날렸다.


관객들의 환호성과 함께 흩뿌려지는 트럼프카드들이 태양빛 속에서 빛났다. 마술사는 익살스럽게 고개를 숙여 그 환호에 답했다.



"와, 메이! 방금 봤어? 대단하지 않아?"



자신의 손을 붙잡고 반짝이는 푸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인의 모습에 메이는 헛웃음을 지으며 키아나에게 머리를 기대었다.



"응. 멋진 마술이네."



'글쎄, 나는 네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키아나.'



공간도, 시간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붕괴의 신이 고작 모자에서 튀어나오는 카드마술 따위에 열광하는 모습이라니. 뭐,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긴 했다.


달에서의 힘겨웠던 전투가 끝난지도 어느새 십여년.


영원히 달에 있을것만 같았던 우리의 종언의 율자도 아무 일 없단듯이 지구에 내려왔고, 메이는 덕분에 최근들어 최고로 보람찬 일상을 살고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뒤에는 어떻게든 키아나와의 시간이 방해받지 않게 자신들의 스케쥴을 조각내서라도 휴가를 낼 수 있게 도와준 천명의 옛 친구들이 있었으니, 메이는 아마도 자신을 대신해서 지금쯤 서류와 씨름하고있을 그들을 위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


비둘기가 날아오르고,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나며, 웃음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고작 이런 길거리 마술에도 앞니를 활짝 드러내며 웃는 자신의 연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메이도 살짝 미소를 띄었다.



"행복해? 키아나?"


"응."


"그래. 나도."



메이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키아나의 흰 손을 힘을 주어 쥐었다.


자잘한 흉터와 거친 굳은 살 아래에 숨은, 그날 폐허가 된 도시에서 함께 떠돌던 한 소녀의 손을.


키아나는 말없이 메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키아나의 숨을 내쉴때마다 그녀의 심장박동이 작은 온기가 되어 메이의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것만 같았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 열화와도 같은 성원에 정말로 어쩔 줄을 모르겠군요!"



마술사가 관객들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듯이 가늘게 치뜬 눈으로 관중을 훑던 마술사는 미소를 지었다.



"자, 여러분. 여러분들과의 즐거웠던 여정도 이제 슬슬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안타깝다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마술사는 그런 반응에 만족한다는듯이 미소지었다.


"하하, 모든 만남에는 끝이 있는 법이죠. 그렇다면, 이제 제 궁극의 마술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마술사는 구석에 세워놨던 자신의 트렁크에 손을 뻗었다. 묵직한 가죽 트렁크를 들었다가 바닥에 떨구듯이 내려놓는 그 일련의 동작으로도 관객들을 붙잡아놓는 우아한 마력이 있었다.


"여러분. 마술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진실로 거짓을 만들며, 의미도, 상식도 뒤엎으며, 미지에서 기적을 행하는 것."



잠깐. 전에도 이런 일을 겪었던 것 같은데. 메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하여 관객들을 사로잡는 것. 여러분, 여러분은 절대 오늘을 잊지 못할 겁니다. 자, 보여드리겠습니다. 저의 궁극의 마술."



그래. 분명히 그때였다. 십여년전, 내가 아직 그곳, 영웅들의 낙원에 있을 때.



"바로, 시간 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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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덴 메이는 '그게 뭔 개소리에요?'라며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러나 빌브이는 그 시선을 다른 의미로 착각했는지 눈을 반짝였다.



"그치? 흥미가 가지? 우리 조수양도 그렇지?"



"아니요. 전혀."



메이는 빌브이의 반짝이는 시선을 무시한 채 그대로 등을 돌려 방을 나서려했다.



"우와앗! 이봐, 왜 그러는거야? 이야기라도 들어봐!"



"왜 그러냐고요? 당신이 저번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아예 기억도 안나나요?"



"아니, 나야 기억 못하지! '다른 나'가 한 짓일수도 있잖아!"



"아니요. 확실히 기억해요. 바로 당신이었어요. [마술사]."



[마술사] 빌브이는 멋쩍은듯이 뒷머리를 긁었다.



"하하하...혹시 아포니아 날개에 모기 소리를 내는 스피커를 장착한거?"



"아니요... 솔직히, 그거 정말 짜증났어요. 당신 때문에 아포니아가 울면서 틀어박혀서 며칠동안 계율 각인은 보지도 못했다고요."



"그럼, 뫼비우스가 변신할 때 녹색 뱀괴물이 아니라 핑크마법소녀처럼 보이도록 홀로그램을 그녀가 있는 층에 설치한거?"



"그것도 당신이 한거였나요? 엘리시아가 한 줄 알았는데."



"엘리시아는 번거롭게 홀로그램 같은거 안쓰지. 그냥 강제로 벗긴다음 입혀버릴걸."



"그것도 그렇네요."



"하하. 그렇지? 하하하!"



빌브이가 어색하게 웃기 시작하자 메이도 따라 웃었다.


어떻게든 넘어가나 싶어 미소를 지었던 빌브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메이가 아무런 음정의 변화 없이 하,하,하,만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기억 못한단거죠?"



"그, 그게 말이지. 너무 많이 저질러서.."



메이는 한숨을 내쉬더니 빌브이를 노려보았다.



"대케빈 무장 69호."



"....아."



대케빈 무장 69호.


케빈을 물리적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는?


라는, 한바퀴 돌아버린 바보같은 계획을 구현한 도구.


여기에 당한 대상자는 그 즉시 모든 의복이 분해되며, 그와 동시에 특수한 암시에 걸려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채로 밖을 거닐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죽어버리는 극악의 무기, 였을 터였지만....



"잠깐만! 미리 말해두는거지만, 메이 너도 동의한 거였잖아!"



"난 몰랐어요! 당신이 케빈이 당황하는 꼴을 보여준다길래 호기심에 알겠다고 한건데,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 았으면 안했을 거에요!"



메이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애초에, 케빈이 당한것도 아니었잖아요....."



메이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하필, 칼파스가..."



메이는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다.


전라로 로비에 나타난 칼파스에 천하의 그 엘리시아마저 얼어붙은 그 순간.


메이는 보고 만 것이다.


 도저히 인간의 형태도, 크기도 아닌 칼파스의 그것보다도,


가면너머로 바라보는, 타오르는 폭염같은 분노가 아닌 북극해보다 더더욱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시선을.



"당신이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그 이후로 칼파스가 나를 만날때마다 진심으로 죽이려고 한거?"



어느새 자신의 멱살을 쥐어잡고 벽으로 모는 메이의 모습에 빌브이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 조수, 아니 메이! 너의 말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어!"



"...뭐죠?"



"애초에 칼파스가 너를 진심으로 죽이려하지 않은 적이 있었어?"



....어라? 그런가?


메이의 손에서 살짝 힘이 풀린 순간, 간신히 몸을 빼낸 빌브이가 켁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내 계획은 완벽했어! 애초에 내가 계산한 동선대로라면 케빈이 당할 예정이었다고! 혹시 메이 네가 설치한 위치를 임의를 바꾼거 아냐?"



"무, 무슨 소리를...!"



"....잠깐만."



빌브이는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듯이, 그리고 경악하며 메이를 바라보았다.



"너 설마 애초에 케빈한테 쓰려던게 아니라 다른사람에게...."



붉은 눈 화장과 대비되게 창백하게 질린 새하얀 메이의 얼굴.

빌브이의 명석한 두뇌가 머리속에서 빠르게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마침내 그 결론이 핑크머리의 엘프 소녀로 향하기 직전-, 메이가 그보다 더 빠르게 외쳤다.



"음! 흥미롭네요. 시간마술! 한번 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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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시간 마술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마술이 아니야. 실험이지."



빌브이는 회중시계를 만지작 거렸다. 


투명한 유리창 아래 커다란 톱니바퀴가 인상적인, 그녀를 그대로 본딴듯한 황동빛의 회중시계.


메이는 그 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시계. 그냥 장식품인 줄 알았는데."



"하하. 제 용도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으니 장식품이란 말도 틀린건 아니지."



빌브이는 체인끝에 매달려 진자마냥 왕복운동을 하는 시계를 보았다.


잘 닦인 유리표면에는 빌브이의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반사되고있었다.


저 유리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빌브이는 누구일까. 지휘자? 마술사? 그것도 아니라면.



"메이. 시계는 뭐라고 생각해?"



"시간을 재는 도구 아닌가요?"



"정답이야. 그럼 시간은 뭘까?"



"시간이요?"



시간.


時間. 시의 간격.


시각과 시각의 사이.


어쩌면 메이가 과학잡지에서 어쭙잖게 주워들은 상대성이론과 관련된 수박겉핡기 같은 지식을 자랑스럽게 말할수도 있었으나, 다행히도 그녀는 시간을 물리학적으로 정확하게 정의 할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는 않았으나, 그 사실을 5만년 전 인류 최고의 학자 앞에서 떠벌릴만큼 멍청하지도 않았다.


메이가 선뜻 답을 못한채 입가에 가져댄 손만 만지작거리자, 빌브이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그 MEI조차도 시간과 공간을 제대로 정의하지는 못했어. 그냥 네가 머리 속으로 어렴풋이 생각하는 그정도의 개념이면 돼."



빌브이는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는듯 입가를 매만졌다.



"글쎄. 이렇게 생각하는건 어떨까. 시간은 하나의 거대한 강이야.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세상만물 모든 것이 이 법칙에 영향을 받는거지."



"그럼 상대성 이론은요? 우주 저 멀리 몇광년 이상 떨어져 있는 사람들끼리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하잖아요."



"강이 있으면 느리게 흐르는곳도 있고 빠르게 흐르는곳도 있지 않겠어?"



"......인류 최고의 학자 치고는 너무 추상적이네요. 근거도 없고요."



"학자로써는 그러면 안되겠지만, 마술사에겐 그정도로 낭만적인게 딱 어울리지."



빌브이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느 날 , 나는 생각했지. 시간이 하나의 강이라면, 강을 이루는 수많은 물줄기가 있겠지. 그렇다면, 그 수많은 물줄기중 오직 나의 시간만을 찾아내고 제어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는 마침내 이걸 만들었지."



쩔그렁. 체인 끝의 황동빛 시계가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녀의 손 끝에서 천천히 흔들리고있었다.



"소개합니다. 형이상학적이며 실재론적인 절대적 시간 측정기를."



잠시 고민하던 빌브이는 작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빌브이의 시간 한정."



"결국 시계에 말장난을 덧붙였을 뿐 아닌가요?"



"노,노,노. 절대 아니지. 일반적인 시계는 대부분의 생물이 절대적으로 체감하고 있는 시간만을 표시해. 하루는 24시간, 1년은 365일. 이건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시간이지. 하지만 이건? 오직 나만의 시간이야."



"하지만....멈춰있잖아요."



"사실, 그게 제일 큰 문제인데...봐봐."



빌브이는 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딸깍. 가벼운 소리와 함께 시침이 살짝 움찔거리는듯 싶었다.


그러나 이내 아무런 미동도 없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뭐가 바뀐거죠?"



"지금 내 기준으로 시간을 살짝 뒤로 돌렸어. 내 계산대로라면 아마 오차 30분 정도?"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는거 같은데요."



"그래! 그게 문제라고!"



빌브이는 신경질적으로 체인을 어디 던져버릴듯이 빙글빙글 돌렸다.



"생각해봐, 메이. 비디오 안의 사람이 우연히 비디오플레이어의 존재를 안거야. 그리고 그는 천재적인 사람이어서 화면 밖의 재생버튼을 인지하고 조작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마침내 뭔지모를 되감기 버튼을 눌렀지.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되돌아갔겠죠."



"그래! 기억도, 경험도, 시간도 전부!"



빌브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수많은 '나'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기계야. 이게 시간을 조작할 수 있다는건 내가 확신해. 그런데 문제는...나는 그걸 인지할 수 없다는거야! 시계를 앞뒤로 한 1억년정도 돌려봐도, 망치로 내려쳐도 나는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단 1도 알 수 없어!"



"1억년이요?"



"그래. 그리세오랑 공룡 다큐멘터리보다가 티라노가 보고싶어서 아무생각없이 돌렸는데, 여전히 난 소파위에서 그리세오랑 같이 콜라나 마시고 있더라고."



"하...좋아요. 이걸 돌리는 본인은 느낄수 없다라. 근데 왜 하필 저죠? 다른 사람들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



문득 메이는, 이 낙원에 있는 사람들중에 이 유사 타임머신(빌브이에 따르면)을 맡겨도 될만한 사람들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시아나 칼파스 같은 사람들은 당연하고, 케빈, 사쿠라, 수 등 이성적이라 생각되는 사람들마저 솔직히 어딘가 인격적으로 구멍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메이의 생각을 모르는지 빌브이는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 그거 해봤어."



"해봤다고요??"



"응. 엘리시아에게 설명해주니까 신나서 그자리에서 10바퀴정도 앞뒤로 돌렸는데 아무 일도 안일어나더라."



"아니, 큰일날뻔한거 아닌가요? 그보다 왜 안된거죠?"



"그때는 낙원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 실험을 시도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랑 엘리시아 둘다 현실의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줄기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싶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빌브이는 손을 활짝 펼쳐 천장을 가리켰다.



"여긴 낙원이야. 의사 데이터로 만들어진 시뮬레이션 공간. 현실과 전혀 다른 시간흐름을 만들어내는 것 쯤이야 일도 아니지."



"그럼 더더욱 제게 맡길 이유가 없지 않나요?"



"이봐, 마술사의 말을 끝까지 들어야 되는 법이야. 결국 여기 있는 존재들은 낙원의 일부. 현실과 동떨어진 낙원이지만 낙원 자체의 시간과 분리될 수는 없어. 하지만 넌 다르지."



빌브이는 메이를 가리켰다.



"낙원에 온 첫번째 율자. 낙원의 존재들과 같은 시간 흐름 속을 살고있음에도, 너는 현실의 시간을 지니고 있어. 이번에는 확실히 다를거야. [마술사]로써의 직감이라고."



"왜 하필 [마술사]죠? [지휘자]나 [전문가]의 직감이 아닌 논리에 기반한 팩트같은건 없는건가요?"



"세세한 건 신경쓰지마~. 자꾸그러면 69호를 사실 엘리시아에게 쓸려고 했던거 일러바친다? 그러면 며칠간 뿔 만지는걸로는 안 끝날걸?"



"하....좋아요. 그럼 뭘하면 되는거죠?"



"먼저, 메이. 이곳 낙원에 오고나서 혹시 또 다른 자신을 만난 경험이 있어?"



" 아니요. 없어요."



"좋아. 그럼 일단 과거로 갔다는 거는 아니니까, 시침을 앞으로 돌리는 것부터 시작할까?"



"너무 비약이 심한거 아닌가요? 성공할 것을 전제로 하는 것 자체가 오만한 걸 넘어서 바보같아보이기까지 하는데요?"



"마술은 원래 임기응변이야. 성공도, 실패도 전부 하나의 엔터테인먼트고 철저하게 계획된 예술이지."



"계획된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메이는 고개를 저었다.



"잘 들어. 메이. 이건 내 시간을 돌리는 장치야. 나는 1분뒤, 이 탁자 위로 올라가서 춤을 출거야. 나는 시간을 인지 못하고 천천히 탁자위로 올라갈거지만, 만약 내 계획대로라면 시침을 돌린 순간 네 눈에는 내가 갑자기 탁자위로 순간이동한 것처럼 보일거야. 알겠어?"



"네네, 알겠어요."



빌브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였다. 시간을 돌리는 장치같은건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그런 물건을 만들어볼려고 시도해본 적은 있지만, 결국 빌브이의 결론은 '시간을 조작해도 시간의 흐름 속의 존재는 어차피 그것을 인지못하기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였다.

지금 이것은 낙원이 데이터로 이루어졌다는 특이성을 이용한 간단한 트릭. 

메이가 시침을 돌리는 순간, 빌브이가 몰래 설치해둔 장치로 빌브이의 몸은 데이터 단위로 분해되었다가 탁자 위에서 다시 재조립될터였다.


무엇인가 잘못되면 이 낙원에서 영영 자신의 데이터를 잃어버릴지도 모르지만,  스스로를 이미 몇십개의 인격으로 나눈 광기의 마술사에게는 그것은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트릭이 성공하면 메이는 시간조작을 정말 성공한 줄 알 것이고, 그걸로 또 며칠간 메이를 놀려먹을 생각을 하면 벌써 웃음이 새어나오는듯 하였다.



"자, 그럼 할게요. 하나, 둘...."



인격을 조각내는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렇다면 데이터 단위로 조각났다가 다시 합쳐지는건 어떤 느낌일까? 빌브이는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을 느끼며 메이가 든 시계를 바라보았다.



"셋."



딸깍,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빌브이는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어떤 자세를 취할까? 빌브이는 웃으며 오래전 엘리시아가 알려줬던 우스꽝스러운 변신포즈를 취했다.


자, 어때? 라이덴 메이? 어서 너의 반응을 보여달라고.


그러나 아무런 반응, 숨을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자 빌브이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어라?"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장치도 발동하지 않았는지, 빌브이는 탁자가 아니라 의자옆에서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라? 어라라??"



빌브이는 황급하게 몸을 숙이며 탁자아래를 살펴보았다. 설마, 장치가 잘못 발동해서 메이를 분해해버렸나? 농담도 이런 재미없는 농담이 없다. 

빌브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엘리시아의 유일한 희망을 이런 말도 안되는 마술사고로 잃는다고???



"메이?? 라이덴 메이!! 진짜 먼지가 된거야?? 제발 대답해!! 내가 잘못했어!!"



빌브이는 소리지르며 구석구석을 뒤져봤지만 메이의 흔적이라곤 다 식어가는 의자의 온기말고는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방문이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다.


설마, 엘리시아가 소리를 듣고 온건가?



"에, 엘리시아! 아무 일도 없어! 메이는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이야!"



고개를 들어올려 갑작스레 방문한 내방객을 확인하던 빌브이는 흠칫 놀랐다.


그것은 흥분한듯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라이덴 메이였다.


메이가 바닥을 울릴정도로 큰 보폭으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빌브이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어, 라이덴 메이. 화난건 알겠지만 진정해. 물론 몸이 분해되는게 유쾌한 일은 아니겠지만..."



"빌브이!"



메이가 소리치며 빌브이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비명소리가 나오려는걸 빌브이는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자, 잠깐만. 우리 대화로..."



"빌브이. 잘 들어요.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절대 놀라지 말아요."



"에? 에?"



메이는 아무 말 없이 탁자로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춤에 단단히 매여있던 자신의 무기, 천극지경을 거세게 내려놓았다. 1개, 그리고 또 다시 1개. 총  2개를.


엥? 2개?


빌브이가 당황한 눈으로 탁자위에 놓인 2개의 천극지경을 바라볼 동안, 열린 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빌브이? 이거 뭔가 좀 이상해요. 시침을 돌리니까 갑자기..."



빌브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것은 라이덴 메이였다. 지금 자신의 바로 옆에 서 있는 라이덴 메이와 단 한점의 차이조차 없는 진짜 라이덴 메이.


새롭게 들어온 두번째 라이덴 메이는 두리번 거리듯이 주위를 살피다가 봐버리고 말았다. 빌브이와 함께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어라? 이게 무슨..."



멍하니 풀려있던 2번째 메이의 눈이 날카롭게 변하고, 손이 허리춤에 달려있는 천극지경으로 향한다. 그러나 1번째 메이의 동작이 더 빨랐다.


갑작스럽게 날라온 탁자 위의 2번째 천극지경. 2번째 메이는 당황하며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뒤늦게 확인한 메이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천극지경과 손에 들린 천극지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 어?"



커진 눈으로 완전히 동일한 2개의 태도를 보던 메이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또 다른 자신을 보았다.



"그 칼 가지고 다시 1분전으로 돌려요. 저랑 똑같이 하면 되요."



"...아!"



2번째 메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침을 돌렸다.


그 순간,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2개의 천극지경과 메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깐동안의 정적 뒤, 빌브이가 떨리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이, 이거 설마...."



"빌브이. 이건 당신의 시간을 돌리는 기계가 아니에요!"



메이가 한껏 상기된 얼굴을 빌브이에게 들이밀었다.



"이건, 당신을 기준으로 주위 시간을 돌리는 기계에요! 진짜 타임머신이라고요!"



눈 깜짝할 사이에 빌브이에게 들어닥친 수많은 정보들, 환희와 당혹감, 수많은 감정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빌브이는 그 순간 절대 꺼내서는 안될 말을 하고 말았다.



"....이게 진짜 되네?"



멍한 표정으로 그게 무슨 뜻인지 잠시 곰씹던 메이의 얼굴이 뒤늦게 악귀처럼 일그러지고, 문자 그대로 번개같은 주먹을 빌브이의 얼굴에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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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가 한 손에는 흙을, 한손에는 씨앗을 쥐고 두손을 모아 힘껏 비비기 시작했다.


마술사의 두 손 사이에서 흙더미가 조금씩 떨어지나 싶더니, 이내 손틈에서 천천히 장미 봉오리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오오...!!"



키아나가 두 눈을 빛내며 장미다발이 마술사의 손 안에서 피어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진짜로 씨앗이 손 안에서 꽃을 피운 것은 아닐터였다. 소매 어딘가에 장미가 숨겨져 있었을터고, 그것을 솜씨좋게 씨앗에서 피어난 것처럼 속인 것일 뿐.


그것이 마술이란 행위의 본질이였다.


진실로 거짓을 만들고, 미지로 기적을 행하라.


규모는 전혀 달랐지만 나선의 소녀가 행한 것과, 이 길거리 마술사의 마술은 다를 바가 없다.



"하하, 어떠셨나요? 여러분?"



대답대신 환호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여러분의 반응이 이렇게 좋으니 저도 어쩔줄을 모르겠네요."



마술사는 웃으며 손안의 흙을 털어낸 뒤, 장미다발을 공중으로 던졌다.



하늘 높이 떠오른 장미다발을 잡으려는 관객들로 인해 작은 소란이 일었으나, 마술사는 전혀 개의치않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있을겁니다. 몰래 숨겨놨던 장미를 제가 시야의 사각에서 몰래 꺼냈다고. 물론 그것도 진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요?"



마술사는 몸을 굽혀 케이스 안에서 검은색 플라스틱 합판을 꺼냈다. 마술사가 합판을 이리저리 구부리자, 허벅지까지 오던 크기의 합판은 펼쳐지며 사람한명이 들어갈만한 크기의 상자가 되었다.



"여러분.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남자는 상자를 열고 내부를 보여주었다. 사람 한명이 간신히 앉을 정도의 공간밖에 없는 텅빈 상자 안을.



"슈뢰딩거의 상자 안에는 우리 두마리의 불쌍한 고양이가 있습니다.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죠. 여러분이 상자를 열기 전까지, 안에 고양이가 어떤 상태로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술사는 조심스레 상자 안으로 들어가 걸터앉았다. 좁은 사각형의 시야로 보이는 숨죽인 관중들의 모습을 보며 남자는 미소지었다.



"여러분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사기꾼과 시간 마술사중. 어느 쪽이 상자에서 걸어나올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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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 메이! 잠깐 기다리라니까!"



라이덴 메이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한채 발걸음을 옮겼다.



"69호! 69호에 대해서 전부 까발려도 이럴거야??"



"마음대로 하세요. 빌브이. 애초에 69호도 따져보면 전부 당신 장난에서 시작된거죠."



"잠깐만,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잠깐만 이야기를 들어줘."



메이는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빌브이는 재빠르게 메이를 앞질러 막아세웠다.



"아무리 화났다지만 일주일이나 안 만나주는건 그렇지 않아? 낙원 안에서도 일부러 내 각인만 피하고 있잖아!"



빌브이가 왼눈 전체를 가리는 모노클로 메이를 바라보았다.


메이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뒤틀어올렸다.



"잘 어울리네요. 그 모노클."



빌브이는 이를 갈며 모노클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드러난것은 새파랗게 멍이들어 우스꽝스러울정도로 부어오른 왼눈이었다.



"정말 너무하네. 이렇게 다짜고짜 공격하는게 말이 돼? 그리세오가 이게 뭐냐면서 벗길려고 하는데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글쎄요. 시간을 갖고 논 대가로 왼눈에 멍이 드는 정도면 완전 차고 넘치는 거래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야기 끝났으면 갈게요. 메이는 그렇게 덧붙이며 빌브이를 가로질러가려고했다.


그러자 빌브이는 황급히 몸을 틀어 메이를 붙잡았다.



"메이. 부탁이야. 한번만 더 도와줘."



"흠, 혹시 지금 누가 나와있는거죠? [마술사]?"



"그럼. 당연히 나지."



그리고 즉시 날라오는 주먹에 빌브이는 곧 그 대답을 후회했다. 



"흐아악!"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주먹이 빌브이의 머리카락-정확히는 그녀가 융합전사 특유의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오른눈이 위치해 있었을 자리- 를 스쳤다.



"뭐하는 짓이야! 죽을뻔 했잖아!"



"죽어도 정신 못 차릴거 같아서 날린거에요. 어차피 진짜 맞았어도 안죽잖아요? 기껏해봤자 오른눈도 시퍼렇게 부어오르는 정도겠죠."



"대체 왜 그러는거야? 그때는 너도 좋아했잖아!"



"그때야 당연히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니까 막연히 좋아했죠. 그런데 좀 냉정해지고 보니까 엄청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뭐가 위험한데?"



"타임 패러독스요!"



빌브이가 모르겠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메이는 답답한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제가 2명이나 있었잖아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둘다 현명해서 대처해서 다행이지..."



"왜 굳이 자신이 현명하다는걸 강조해서 말하는거야?"



"닥쳐요. 빌브이!"



빌브이는 입을 삐쭉 내밀며 마치 입가의 지퍼를 채우듯이 손을 끌어당겼다.



"아무튼, 엄청 위험한 상황이었잖아요!"



"왜 위험한데?"



"왜냐뇨! 왜 위험하냐면...."



메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왜 막연히 위험하다고 생각했지?



" 그...무한루프에 빠질수도 있었잖아요, 아니면 둘이 서로 접촉하면 몸이 멩거스펀지처럼 조각나면서 사라진다거나...."



"하하하! 의외로 감수성이 뛰어나구나? 메이."



메이는 무언가 반박하려는듯이 입을 우물거리다가 포기했다.



"좋아요. 그럼 왜 위험하지 않은지 설명해봐요."



"좋아. 답은 간단해.타임 패러독스는 거짓이야."



"거짓이라고요? 하지만 영화에서...."



메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냥 영화일 뿐이다. 그 사람들이 시간여행을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는가?



"생각해봐. 메이. 손자가 모종의 이유로 과거로 넘어가서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였어. 그럼 손자는 어떻게 될까?"



"음....존재할 수가 없게 됐으니 그 즉시 존재가 사라진다?"



"아니, 틀렸어. 정답은 그대로 있다가 경찰에 체포된다야."



"후자는 그렇다치고, 전자는 왜죠?"



"시각을 넓게 보는거야. 메이."



빌브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호주머니에서 매직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메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복도 벽에  커다란 평행선 2개를 쭉 그어버렸다.



"자, 잠깐만요. 함부로 벽에 이런 낙서를 해도 되는건가요?"



"괜찮아. 그리세오가 했다고 하면 되니까."



"대체 당신은 어떻게 영웅이 된건가요?"



빌브이는 메이의 한숨소리를 무시한채 2개의 평행선에 각각 A,B를 적었다.



"어렵게 생각할것 없어. A시간대의 손자가 B시간대의 할아버지를 죽였을 뿐. A시간대의 할아버지는 그대로 살아있는거잖아?"



"그럼 B시간대의 손자는요?"



"애초에 태어난 적도 없고 태어날 예정도 없는거지. 처음부터 그런 시간대인거야."



"그럼 무한루프는요?"



"그것도 쉽지. 이걸 봐."



빌브이는 벽에 스프링 모양의 원기둥을 그렸다.



"자, 메이. 이게 뭐라고 생각하지?"



"스프링이요."



"그럼 이 스프링에는 시작과 끝이 있을까?"



"당연하죠. 지금 당신이 시작과 끝을 그려놨잖아요."



"좋아, 그럼 이건 어때?"



빌브이는 스프링의 바로옆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이건 뭘로 보여?"



"고리요."



"그럼 이 고리에는 처음과 끝이 있을까?"



"당신이 따로 표시하지 않았으니 없다고 보는게 맞겠죠?"



"그렇다면 이렇게 보는건 어떨까? 가령..."



빌브이는 씨익 웃으며 화살표로 스프링에서 고리를 가리켰다.



"이 고리가, 스프링을 위에서 본 모습이라고 하면?"



"...아!"



"이 스프링이 일주일전 우리가 겪었던 흥미로운 사건의 타임라인이라고 해보자고. 단순히 네가 시간여행을 시도했던 그 시간대에서만 한정해서 보면, 이건 빠져나올 구멍이 없는 무한루프야. 미래의 너가 과거의 너에게 칼을 주고, 그 너는 다시 미래가 되어 과거에게 칼을 주고... 이 고리마냥 루프에 갇혀서 영원히 이도류로 끝나지않는 저글링을 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실제론 어떻지? 여기 이 자리에 멀쩡히 서있잖아."



"그러니까, 무한루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모든 것엔 시작과 끝이 있어. 무한루프같은건 증명되지 않은 헛소리야."



빌브이는 의아하단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런데 멩거스펀지는 무슨 소리야? 멩거스펀지랑 시간여행이 무슨 관계가 있어?"



"무, 무시하세요."



메이는 무안함을 덮으려는듯이 헛기침했다.



"아무튼, 우리가 시간여행을 해서 무슨 일을 벌이든 현재의 우리에게 오는 영향은 없다, 이말이야. 어때? 이제는 마음놓고 이 인류 최고의 발명품을 즐길 계획이 생겼어?"



메이는 잠시 고민했다. 


시간여행.  누구나 꿈꿔봤을 소망. 이 얼마나 가슴에 와닿는 울림인가.


누구든 과거를 바꾸고 싶고, 미래를 엿보고 싶을 터이다.


그리고 라이덴 메이도, 아주 예외는 아니었다.


설령 전처럼 이게 빌브이의 사기극이라 할지라도, 저 시계의 성능이 입증된 지금 시간여행은 꽤나 매혹적인 울림이었다.



"좋아요. 시간대를 과하게 흐트리지 않는다는 선에서, 한번 해보죠."



"역시, 그럴줄 알았다니까!"


빌브이는 해냈다는 듯이 두손을 모으고 팔짝 뛰었다.


메이는 그제서야 속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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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을 실시하는 장소는 동일했다. 전과 같은 응접실, 혹여나 시간여행을 실시하는 장소로도 사소한 오차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메이의 불안감 때문이었다.



"먼저 정리해두죠. 이 시간여행은 낙원 안에서만 가능하고, 현재 시간선이 바뀌지는 않지만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절대 위험한 짓은 하지 말것. 맞나요?"



"그래. 사실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차피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것도 메이뿐이잖아?"



"만약에, 만약에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나서 이 순간을 복구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죠?"



"응? 걱정마. 백업이라도 해놓으면 되지."



"...그게 가능한가요?"



"뭐, 낙원 전체를 날리는 자폭버튼도 있는데 백업이라고 없겠어?"



"자폭이요?!"



"아, 이런. 못들은 걸로 해줘.:




메이가 조용히 째려보자 빌브이는 시선을 피하듯 휘파람을 불었다.



"하...좋아요. 그럼...일단 과거부터 시작해볼까요?"



"과거 좋지! 언제로 갈래? 엘리랑 막 친해졌을때로 가서 뿔4개를 서로 맞대는 끈적한 플레이?"



"그런 짓 안해요!"

 


메이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자 빌브이는 웃으며 몸을 뒤로 뺐다.



"일단, 제가 있던 시간대로는 가지 않을거에요. 저는 저를 만난 기억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낙원 멤버들도 저를 만난 기억이 없으니 마주치는것도 최대한 삼가할 거구요."



"혹시, 마주친게 아니라 기억을 못하는거 아니야?"



"글쎄요. 칼파스야 그렇다쳐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멍청할것 같지 않은데요..."



"멍청한게 아니라 무려 5만년동안이야. 그동안 이곳에 온 내방자들을 우리가 전부 기억하고 있을거 같아? 의외로 금방 잊을걸?"



메이는 잠시 고민했다. 아예 정보도 없는 몇천, 몇만년 전으로 시침을 돌릴까? 아니면 적당히 몇년 전으로?



"어때? 결정했어?"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오래된 시간대로 갈수록 낙원의 영웅들이 자신을 기억못할거라는 메리트를 차지하고서라도, 자신이 율자라는 점은 뼈아픈 패널티였다.


솔직하게, 율자를 막아내기 위해 만든 이 장소에 율자가 침입한다면 자신이라도 5만년은 넘게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최대한 디메리트가 없는 최근은 어떨까? 그래, 예를 들면 자신 이전에 내방자가 왔던 시점이라던가.



"결정했어요."



"좋아. 그럼 다시 돌아올때 증명할 기념품 같은거 몰래 가져오는거 잊지말고! 자, 센다?"



메이는 시침의 태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 각도로 조금만 돌리면 대략 5년 전으로 건너 뛸 것이다.


"하나, 둘~"



빌브이가 셋을 외칠려는 순간이었다.



"멈춰!!"



어찌나 큰 소리 였는지 메이는 깜짝 놀라 손을 뗐고 빌브이도 놀라서 움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 있는 것은 메이였다.


메이와 빌브이가 전혀 본 기억이 없는 이국의 의복과 갑옷을 걸쳤지만, 그 날카로운 눈매와 보라빛이 연하게 도는 남색의 포니테일 만으로도 그녀가 라이덴 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하, 다행이다.... 백업을 찾지 못했더라면...! 빌브이, 그리고 과거의 나. 잘 들어요. 절대 지금 그 시간대로 돌리면 안돼요!!"



"왜, 왜죠?"



또다른 메이는 머리가 어지럽단듯이 이마를 짚었다.



"전부 제 실수였어요. 저는, 그러니까 지금의 당신은 아마 레이븐이 낙원에 왔을때로 향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터고, 낙원의 시스템이 레이븐에게 주목이 쏠려있는 사이 빠르게 둘러보고 나오려고 생각했겠죠. 맞나요?"



현재의 메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간건 좋았어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몰래 낙원의 심층까지 간것도 괜찮았죠. 근데..."



또다른 메이는 분하단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큭....거기 하필 칼파스가 있었을 줄이야..."



"자, 잠깐. 칼파스를 만났다고요?"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제쪽에서 목격한거지만요. 마침 레이븐이 칼파스를 발견하고 바로 등돌려 도망치던 상황이었고, 칼파스는 뒤에 제가 숨어있는것도 모른채 '크하하하하!' 거리면서 웃고있었죠."



"잠깐만요. 그러면 당신도 그냥 도망가면 됐던거 아닌가요?"



"그랬죠. 하지만 그 짜증나는 뒤통수를 보는 순간 화가 확 치밀어올라서..."



또 다른 메이는 시선을 피했다.



"돌 던지고 도망쳤어요...."



아. 어지러웠다. 


메이와 빌브이는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 그래서? 칼파스한테 바로 들켰을거 아냐? 어떻게 도망친거야?"



"돌을 던지는 순간 갑자기 큰일났다는 생각이들어서 맞는걸 보기도 전에 시침을 돌려서 다시 현재로 왔죠. 그러니까...."



또다른 메이는 슬픈듯이 고개를 떨궜다.



"칼파스가...죽어있었어요."



아니, 뭐라는거야. 이 미친년은.



"무, 무슨 소리야? 칼파스가 왜 죽어? 걔가 돌멩이 같은거에 죽을리가 없잖아?"



"아, 돌멩이가 아니라 이 의자보다 좀 더 큰 바위였는데...."



"처음부터 니가 죽일 생각으로 던진거잖아!!"



빌브이는 비명지르듯이 소리치며 탁자를 내려쳤다.



"아니, 몰랐어요! 맨날 자기가 케빈 다음으로 쎈 히든보스인것마냥 말하더니, 꼴에 불속성이라고 바위에 한방에 갈줄은..."



"속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정도 바위면 케빈빼고 누구라도 죽어! 이 미친년아!!"



메이는 분노하는 빌브이를 가까스로 멈춰세웠다.




"자, 잠깐만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제가 돌아왔을때는 이미 다들 검은 상복을 입고 칼파스를 애도하고 있었죠. 그 시점에서 저는 칼파스의 희생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서 칼파스의 복수를 위해 낙원의 영웅들을 도와주고 있던걸로 되어있었고요."



케빈이 울면 얼음덩어리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또다른 메이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빌브이는 질렸다는 표정을 보였다.

이건 블랙코미디조차 아니다. 그냥 블랙이다. 자신을 죽인 장본인이 자신을 애도하고 있다니.



"잠깐. 복수라니? 누구에게?"



"당연히 칼파스를 죽인 악당을 말하는거죠."



"아니, 너잖아! 그게 아니라, 네가 여기 있다는 건 그 사실을 안 들켰다는 건데. 그럼 누구에게 복수를 한다는거야?"



"아, 그거요?"



또다른 메이는 별거 아니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에는, 영웅들은 붕괴가 마침내 낙원에 그 마수를 뻗친거라고 생각했죠, 칼파스 정도의 영웅을 아무에게도 목격당하지 않고 몰래 암살할 수 있는 율자라면 '공간의 율자'가 유일할 거라고."



의자가 거칠게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브이가 고개를 돌리자, 현재의 메이가 핏줄조차 비칠 정도로 완전히 창백해진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있었다.



"서, 설마 키아나를 그딴 오해로....!"



그 모습을 본 또다른 메이는 미소지었다.



"걱정마세요. 또 다른 나. 키아나는 저에게 있어 제일 소중한 사람입니다. 제가 키아나에게 악의의 화살이 돌려지는걸 보고만 있었을 것 같나요?"



"네가 쏘아올린 화살이잖아....!"



또다른 메이는 헛기침을 한뒤 말을 이었다.



"저는 역설했죠. 먼 과거에, 아직 영웅들이 융합전사수술을 받기 전에도 쓰러뜨린 공간의 율자 따위에 칼파스가 당했을리 없다고. 전혀 다른 차원의 제 3의 세력에게 당한거라고."



"그, 그런 바보같은 거짓말에 우리가 넘어갔다고?"



"아. 그게 제 3의 세력이 진짜로 있었거든요."



또다른 메이는 멋쩍은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천리'라고..."



천리가 누군데!!


빌브이와 메이는 그렇게 소리지를뻔 한 것을 겨우 참았다. 지금까지도 큰 소음을 일으켰는데 더 시끄럽게 만들면 진짜로 누군가 올지도 모른다.


그런 타들어가는 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다른 메이는 빠르게 점멸하는 팔목의 신호기를 보았다.



"이런. 각청씨의 연락이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곧 있으면 일곱 집정관의 연합군이 심연에 총공격을 시작할 거에요."



"자, 잠깐만!! 각청은 또 누군데! 일곱 집정관은 뭐고? 대체 그 시간대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건데!!"



"잘 들어요. 또 다른 나.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하지만 누구나 선택의 기회는 있어야 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어떻게든 이 시간대로 돌아와서 경고를 해주러 온거에요."



"아니, 후회를 하라고!! 칼파스를 죽여서 상황을 개판으로 만든건 너잖아!!"



"그럼 안녕히. 별과 심연을 향해!"



빌브이와 메이가 뭐라 더 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을 끝내버린 이국적인 옷을 입은 메이는 익숙한 시계를 꺼내더니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소란이 지나가고 남은 잠깐의 정적 뒤, 빌브이가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절대 위험한 짓은 하지 말것'? 그거 몇 분전에 네 입으로 직접 말한 거 아니야?"



"어, 어쩔 수 없잖아요! 사고였다고 하잖아요."



"사고가 아니잖아! 몇 시간 뒤의 네가 명백하게 살의를 담아서 던졌잖아!"



"그, 그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이걸로 우리는 어설프게 가까운 과거로는 가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저런 대형 사고가 일어났어도 우리의 시간선은 여전히 아무 영향없다는 것도요."



"칼파스를 죽인건 끝까지 후회안하는구나...."



빌브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메이를 보았다. 어쩌다 이런 정서적으로 구멍뚫린 정신나간 년에게 각인 13개를 전부 다 맡긴거지?



"그럼 과거는 안된다 치고, 미래는?"



"사, 상관없지 않을까요? 애초에 과거로 간 것부터가 문제였어요. 과거에는 제가 방문한 사실이 없는데 제가 방문함으로써 다른 시간대로 분기된거잖아요? 하지만 미래는 애초에 제가 방문하기로 결정했으니 다른 시간대로 분기될리가 없죠."



"그래, 그렇다치고. 이번에는 어느 정도로 건너뛸건데?"



"적당히 3,4 개월 정도로 할까요? 이미 다른 사람들도 저를 전부 알고 있고, 당신이 제가 시간여행이 가능하단 사실을 알고있으니 혹여나 저를 동시에 2명을 목격해도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겠죠."



"알겠어. 만약에 3개월 뒤에 너를 2명이나 만나면 도와줄게. 그럼 너한테는 30분 뒤겠지만, 나는 3개월 뒤인가?"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빌브이도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메이가 쥔 시계를 바라보았다.



"좋아, 그럼 다시 간다. 하나, 둘-"



"아니, 가지마!!!"



이번에도 가까스로 메이는 시침을 돌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에 나타난 것도 또다른 메이였다. 묘하게 미래스러우면서도, 아직 현대의 캐쥬얼함이 남아있는 의상을 입은 메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문가에 기대어있었다.



"절대, 절대 미래로 가면 안돼요!!!"



빌브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미래의 메이를 바라보았다.



"왜. 너도 칼파스 죽였니?"



"아, 아뇨! 과거의 저는 명백히 살의를 담고 그런거지만, 저는 아군오사였어요! 명백하게 달라요!"



결국 너도 죽였구만.


빌브이는 시선을 현재의 메이에게 향했다. 메이는 차마 빌브이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절대로 그 시계를 가지고 미래로 가면 안돼요!!"



"왜? 이번에도 케빈이 공간의 율자를 죽이겠대?"



"아니, 키아나가 아니라 침식의 율자가..."



빌브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뭔소리야? 갑자기 침식의 율자는 또 뭔데?"



"침식의 율자가 그 시계를 먹어치우고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다른 우주를 침식하는 방법을 알아냈어요!! 젠장, 그것때문에 모든 에이언즈의 이목이 이 우주로 몰렸다고요!"



"아니, 에이언즈가 뭔데?? 설명을 해!!"



"종언의 율자는 '따위'로 만들만큼 강대한 자들이요! 으윽, 이럴 시간 없어요! 곧 있으면 벨로보그에서 엘리시아가 최후의 방어선을 펼칠거에요!"



"스케일이 갑자기 왜 이렇게 확 뛰는건데! 벨로보그는 또 어디야? 엘리시아는 어떻게 낙원을 나간거고??"



"설명할 시간 없어요!! 그것만 기억해요! 절대! 절대로 그 시계를 미래로 가지고가지 말아요! 아니, 제가 가면 그냥 없애버려요! 그게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분기점이에요!"



갑작스럽게 미래의 메이는 말을 멈추고 손목에 달린 신호기를 보았다.



"내가 너무 빨리 왔나? 아니, 딱 맞게 온거 같았는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래 메이도 과거의 메이마냥 단말마만을 남긴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단듯이 사라졌다.



소란이 사라지고, 그저 정적만이 남은 방.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먼저 움직인 것은 메이였다.


메이는 잽싸게 탁자 위에 놓인 시계를 잡아채 높이 치켜들었고, 그걸 본 빌브이가 황급히 메이에게 달려들어 팔을 붙잡았다.



"자, 잠깐만! 메이! 기다려!!"



"이거 놔요! 빌브이! 이딴 건 박살내버려야 해!!"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의자가 천천히 뒤로 기울다가 그대로 나동그라졌고. 얽혀버린 두사람은 서로 시계를 빼앗으려 격한 몸부림을 벌였다.



"이건 [내]가 걸작품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물건이야! 이렇게 무작정 부술수는 없다고!"



"걸작품은 무슨, 제가 여기 올 때까지는 그냥 고장난 고물 시계였잖아요!"



"뭐?"



"아직도 모르겠어요? 빌브이? 그냥 시간여행 자체가 문제에요. 우리가 감히 우주의 법칙을 비웃고 시간으로 장난질한 대가가 저것들이라고요!!"



"아니, 두 개 다 네가 칼파스를 죽여서 그런거잖아!"



"저, 전자는 그렇지만 후자는 아니거든요? 그냥 이 시계 자체가 문제였잖아요!"



"문제는 바로 너거든!"



붕괴의 화신인 율자, 인류가 그런 율자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낸 융합전사. 그야말로 대척점에 있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을 건 혈투는 서로를 어설프게 배려한 나머지 그나이 여고생들의 꼴사나운 몸싸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큭...놓으세요. 빌브이...!"



"너야말로 슬슬 내놔....!"



그야말로 용호상박, 어느쪽도 물러나지 않는 교착상태. 그 순간, 메이의 머리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이순간, 자신이 미래로 날라가서 이 시계를 박살낸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박살낸다면 돌아올 방법이 없지만, 미래라면?


내가 지금 결정한 미래이기에 시간대가 갈라지지도 않는다. 


3개월이나 뛰어서 시간대를 바꿀 필요는 없다. 적당히 3분정도로 뛴 뒤 시계를 박살낸뒤 비웃으며 이 방으로 다시 들어서면 된다.


메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손으로 어떻게든 시침을 돌리려했다.



"어딜!"



"큭!"



빌브이가 재빠르게 메이의 손목을 쳐냈다.


다행히 시계를 놓치지는 않았지만 그 반동으로 시침이 확 돌아가버렸다.


이런. 얼마나 돌아간거지? 메이는 황급히 시계를 보았다. 뒤로 돌린건 알겠으나 어느정도나 돌아갔는지 가늠이 전혀 안갔다.

시침을 자세히 살펴보려는 순간 관절에 빌브이의 거센 압박이 들어와 손목을 돌릴수 밖에 없었다.



'젠장. 이러면 안돼는데...!'



과거, 그것도 얼마나 시침이 돌아가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간여행을 하는것은 위험하다. 


일단 빌브이는 이 시계를 파괴할 생각이 없어보이니 지금은 넘겨주더라도 나중에 되찾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메이는 항복의 의사를 표하기 위해 고개를 틀어 빌브이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생각을 읽은 듯, 승리했다는 듯한 의기양양한 비웃음.


그 순간 메이는 냉철한 이성보다도, 뜨거운 휘발성의 감정-주로 분노와 짜증-이 자신을 가득 메우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될대로 되라지.'


그리고 메이는 버튼을 눌렀다.


딸깍.


태엽이 가볍게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세계가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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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라이덴 메이를 깨운것은 중력과 차가운 원목바닥이었다.



'얼마나 과거로 날라온거지?'




메이는 얼얼한 어깨를 추스르며 시계를 보았고, 이내 탄식을 흘렸다.


떨어지면서 어딘가 잘못 부딪혔는지, 흠집하나 없던 매끈한 유리는 이리저리 금이 가있었다.


시험삼아 시침을 살짝 돌려봤더니 역시나 부품도 어딘가 걸린건지 틱,틱 소리를 내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메이는 혀를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아까와 다를바 없는 낙원의 방.


차이점이 있다면 넘어진 의자와 탁자도 그대로 있었고, 빌브이도 사라져있었단 것이다.


메이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일단 정리해보자.'



과거로 날라온 것은 확실하다.


시침이 반대로 돌아갔기도 하고, 미래에서 온 자신의 말대로라면 미래로 자신이 간 즉시 이 시계를 침식의 율자에게 탈취당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얼마나 과거로 돌아왔냐는 것.


그리고,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여기 누구 있나요? 이상하다. 지금은 나만 있..."



아무도 없어야 할 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문을 열고 들어온 투톤 헤어의 소녀, 빌브이를 보고 메이는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빌브이? 다행이네요. 지금이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도움이 필요해요. 제가..."



속사포마냥 말하던 메이는 말을 멈췄다. 자신을 바라보는 빌브이의 시선이 이상했기에.


메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시계가 고장난 지금, 시계를 다시 고쳐줄 수 있는 것은 빌브이 뿐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빌브이를 만나기 훨씬 전으로 돌아왔다면?


만약, 빌브이에게 자신은 그저 낙원을 침범한 침입자라면? 



"어...빌브이. 혹시 제가 누군지 모르나요?"



"흠, 글쎄? 어떻게 생각해?"



빌브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메이의 주위를 천천히 한바퀴 돌았다. 마치 먹이를 가늠하는 상어처럼.



"이토록 강렬한 붕괴에너지를 간직한 존재는 율자밖에 없지."



빌브이는 호주머니에서 정체모를 계기판이 달린 측정기를 꺼내 메이를 향해 겨누었다. 그러자 계기판의 바늘이 미친듯이 움직이며 시끄러운 경고음을 내뿜어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이정도의 전자기장을 주위에 흩뿌리고 다니는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지."



빌브이가 메이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 지 모를, 잿빛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렇지? 번개의 율자."



마치 생쥐를 잡은 고양이처럼, 회심의 미소를 짓던 빌브이는 무엇인가 이상하단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내가 아는 번개의 율자는 토벌된지 오래인데 말이야. 너와 생긴 것도 다르고."



점점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다가오는 빌브이에, 메이는 당황하며 조금씩 몸을 뒤로 뺄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등이 벽에 닿고나서야, 이제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는, 대체 누구야?"



메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등 뒤에 숨긴 것을 꺼내들었다.


금이 가서 시간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황동빛 회중시계.



"....이건."



"빌브이. 당신이 나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알아요. 하지만 내가 이걸 가지고 있다는게 무슨 뜻인지, 당신이라면 잘 알거라 생각해요."



빌브이는 그것을 받아들고, 주머니에서  또다른 회중시계를 꺼내들었다. 금이가고 살짝 찌그러진 메이의 시계와는 다르게 조금 손때가 탔지만 여전히 제 기능을 간직한 회중시계.



"그렇지 않나요? [나선]의 영웅."



빌브이는 조심스레 2개의 시계를 들어올렸다.


마치 나사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볼듯이 보고나서야 빌브이가 입을 열었다.



"너, 설마 미래의 나를 죽이고...!"



"아뇨, 정신 나갔어요?"



메이가 참지못하고 소리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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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리해보자고."



빌브이가 눈앞에 펼쳐진 홀로그램 모니터를 두드렸다.


과거의 낙원, 로비 상층에 위치한 빌브이의 공방. 빌브이는 메이가 가져온 망가진 시계를 어지러이 나열된 전선에 연결한 뒤 메이로써는 용도조차 알 수 없는 버튼들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너는 케빈이 이곳으로 데려온 율자고,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나와 알게되는 사이다?"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케빈인가.

빌브이가 굳은 얼굴로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메이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쓸어내리느라 그것을 듣지 못했다.



"네. 그리고 미래의 당신이 그 이상한 시계로 괜히 시간마술을 해보겠다고 설레발치다가 제가 여기까지 와버렸고요."



"그나저나 이게 진짜 작동한다니. 이건 나한테는 맥거핀 같은거였는데 말이야."



"맥거핀이요?"



"몰라? 스코틀랜드에서 사자를 잡을때 쓰는 물건이야."



"스코틀랜드에 사자가 살았어요?"



"그래. 바로 그거야."



"....?"



메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래의 당신은 좀 다른 비유를 하던데요."



"무슨 비유?"



"음, 비디오플레이어의 존재를 알게 된 비디오 안의 등장인물?"



"하하하, [마술사]다운 비유네."



"그럼 당신은 [마술사]가 아닌가요?"



"글쎄. 우리 번개의 율자씨가 보기엔 내가 무슨 인격으로 보여?"



메이는 턱가에 손을 가져갔다.


[마술사]라기엔 너무 소극적이다.


[전문가]라기엔 너무 감정이 풍부하다.


[진미]라기엔 너무 적극적이다.


[학자]라기엔 활기가 넘친다.


제일 비슷한 인격은 [지휘자]지만 메이는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아직 보여주지 않은 인격인가?



"음... [대케빈 무장 5호?]"



빌브이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미래의 내가 그것까지 알려줬어? 상당히 친한 사이였나 보네?"



"친한지는 모르겠지만, 좀 많은 일이 있긴 했죠."



"아쉽게도 땡. [대케빈무장 5호]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정도로 느리게 이야기해. 아마 쇼츠 영상을 0.1배속으로 끝없이 늘려서 보는 느낌일걸?"



메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요. 항복. 도저히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지금이 언제쯤이죠?"



"글쎄. 나도 모르겠는걸. 이 안에서 시간이란 개념은 크게 의미없잖아. 너도 잘 알텐데."



"하긴 그렇네요..."



초조함에 난간에 기대서 손가락만 두드리던 메이는 한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빌브이.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요?"



"각자 구역에 있을걸. 아직 나올 때가 아니니까."



나올 때? 그 단어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딱히 의문을 표하지는 않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은 낙원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많은 특례를 부여받았고, 다른 내방자들이 있을 적에는 전혀 별개의 규칙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흠, 이거 안되겠는걸."



"네?"



"오히려 외장이 멀쩡한게 의문일 정도야. 내부 부품들이 완전히 우그러졌는데?"



적당히 뚜껑을 열고 유리랑 태엽 몇개 교체하면 될 줄 알았던 메이로써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말도 안돼요! 당신 걸작품이라면서요! 그게 그렇게 쉽게 망가져요?"



"그건 내가 묻고싶은 말이야. 탱크 바퀴에 끼우고 국토일주를 해도 이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을텐데.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무슨 짓을 했냐고요? 율자와 융합전사가 모든 힘을 근력에 집중한채로 시계를 와플메이커마냥 양쪽에서 온몸으로 짓눌렀죠.


메이는 식은 땀을 몰래 훔쳤다.


"그럼, 고칠 수는 없나요?"



"당연히 내가 만든건데 고칠 수야 있지."



"다행이네요. 얼마 정도 걸리나요?"



"반년?"



"네? 그렇게 오래 걸리나요!"



"시간을 다루는 기계가 철물점이나 중고거래로 사온 부품들로 만들어질리가 없잖아, 하나하나가 내가 직접 설계하고 정밀하게 세공한 부품들로만 이루어져있다고. 오직 나만이 만들 수 있어."



"...그런."



메이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허탈함이 새어나왔다.



"전 그렇게 오래 있을 수는 없어요. 돌아가야만 한다고요."



"왜?"



"왜냐뇨, 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제가 필요한 장소가 있어요.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좋아. 질문을 바꿀게."



빌브이는 모니터를 두드리는 것을 멈추고 메이를 향해 돌아섰다.



"만약에,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면?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발버둥을 치든 결말은 정해져있다면?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을텐데. 어째서 싸우는거지?"



메이는 잠시 고민하는듯 입가를 매만졌다.



"이거 일종의 테스트인가요?"



"비슷해. 미래의 케빈이 널 데려왔다지만, 나는 아직 잘 모르겠거든. 일단 넌 율자고, 붕괴가 인류 최고의 천재인 나를 암살하러 보낸 걸수도 있잖아."



"하지만 당신 시계를 가지고 왔잖아요!"



"어쩌면 다른 율자가 내 기억 속에서 그 시계에 대한 걸 읽고 말도 안되는 환각을 써서 보여주는 걸 수도 있지. 솔직히 생각해봐. 미래에서 갑자기 율자가 시계를 고쳐달라며 찾아오는 것과, 지금 내가 율자의 공격에 당해서 환각 속을 헤메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좀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음....후자...겠죠...."



스스로 생각해봐도 말이 안된다.


메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그래도 저는 계속 싸울거에요."



빌브이가 의아하다는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빌브이의 잿빛 눈이 메이를 향했다.



"정론을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끝이 오더라도, 우리가 끝까지 맞서 싸움으로써 후세의 사람들이 과거를 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알려준다....마치 이 낙원처럼요. 맞죠?"



빌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메이는 그녀가 '낙원'을 언급했을때 빌브이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는것을보지 못했다.



"교과서적인 대답이야. 입구에 교훈마냥 걸어놔도 되겠어.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닌데."



"그럼 제 다른 대답은...."



만약, 내가 낸 대답이 빌브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설령 영원히 이 시간에 갇히게 된다해도, 메이는 말해야만 했다.



"저는....싸우고 싶지 않아요."



"이곳까지 오게 된 율자치고는 정말 의외인 대답인데."



메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은 잔혹하기 짝이 없어요. 항상 제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기만 했죠. 집, 가족,친구...."



어머니는 어릴때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남들에 비하면 풍족한 삶이라면서, 스스로에게 건 암시도 아버지가 잡혀가고 나서 전부 깨져버렸다. 친구라 생각했던 이들은 전부 내게서 떨어지는 고기를 주워먹으러 온 까마귀들이었고, 내가 몰락하자 거짓말같이 나를 버리고 떠나가버렸다.


살아있을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을텐데.



"...하지만, 제게 세상이 이토록 잔혹할지라도 아직 아름답다는걸 알려준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를 만났다.


키아나 카스라나.


누구보다도 밝게 빛나며 모두를 비추는 태양같은 소녀.


그리고 이 세상은 그녀마저 내게서 빼앗아가려고 했다.



"제가 이 낙원에 온 이유는 과거의 도움을 받아 미래를 열겠다, 그런 거창한 목표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낙원에 가기 전까지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질문했다.


내가 요르문간드로 온 것은 정말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죽어가는 그녀의 마지막을 직시할 자신이 없어서 도망친걸까?


그리고 그녀는 그 질문에 대신 응답해주었다.


무엇보다 밝게 타오르는 신염의 대검으로.


그리고 메이는, 도망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저는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정말로 우리가 미래를 바꿀 수없다면, 적어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사랑하는 사람 옆을 지키고 싶어요."



빌브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전선들에 어지러이 연결된 깨진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사람들은 왜 시간여행을 하고 싶어할까. 과거를 바꾸기 위해? 아니면 확정된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어느 쪽이든, 그럼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바꾸고 싶었겠지."



빌브이는 메이의 시계를 내려놓은 뒤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전선에 연결된 메이의 깨져버린 시계하고는 다른, 손때가 탄 시계를.



"내가 이 시계를 만든 이유는 좀더 직접적이었어. 과거나 미래를 바꾸기보다는, 오직 나의 시간만을 다시 되돌리고 싶었지. 그 결과가 이꼴이지만 말이야."



끼릭거리며 시계를 조작하던 빌브이는 갑작스레 메이를 보았다.



"근데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 무슨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지?"



"아...네. 솔직히요."



"그래? 그럼 이것도 뭔지 모르겠네."



빌브이는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옅은 회색빛으로 빛나는, 흑수정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수정의 꽃.



"....아름다워요. 엘리시아가 선물해준건가요?"



"쉿. 스포일러."



빌브이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수정꽃을 다시 품안으로 집어넣었다.



"내가 왜 이 시계를 만들었는지 알고 싶으면, 미래의 내가 저 수정꽃에 대해 알려줄 때 물어봐. 자, 받아."



빌브이는 방금전까지 조작하던 시계를 메이에게 던졌다.


메이는 떨어질까 황급히 시계를 받아들었다.


빌브이의 체온이 아직 금속 몸체를 타고 시계 속에 잠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이건...하지만 이건 당신 시간대의 시계잖아요. 제가 조작해도 당신의 미래로 날라갈 뿐, 제 시간대로는 돌아갈 수 없을텐데요?"



"요점은 네 시계를 고쳐서 원래 시간대로 가지고가기만 하면 된다는거 아니야? 잘 생각해봐. 시계를 고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면, 우리한테 그 시간조차 재료로 쓸 수가 있네?"



"아....!"



그랬다.


중요한 것은 시계를 고친 뒤 받아서 원래 시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시계를 고치는 시간동안 굳이 메이가 이 장소, 이 시간에서 기다릴 필요는 없던 것이다.


빌브이는 메이의 감탄한 표정을 보며 의기양양한 듯이 두 손을 허리에 짚었다.



"이미 이동할 시간대는 적당하게 맞춰놨어. 네가 버튼을 누르면 내가 시계를 고친 후의 이 장소로 다시 이동할거고, 그 때 네 시계랑 내 시계를 다시 교환해서 원래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



"세상에...빌브이! 당신은 진짜 천재에요!"



"하하, 당연하지."



빌브이는 팔짱을 끼며 으쓱였다.



"이 몸은 [대마술사] 빌브이니까."



"정말 고마워요. 빌브이. 이제야 전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겠네요."



"그런데 만약... 제가 이곳으로 돌아왔을때 당신이 없으면 어떡하죠?"



시계를 들고 웃음짓던 메이의 얼굴에서 갑작스레 미소가 사라졌다.


빌브이는 그 모습을 보며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별걸 다 걱정하는구나? 그 시계는 내게도 소중한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쪽에서 꼭 찾으러 갈테니 걱정말라고."



"후, 알겠어요. 그럼."



메이는 시계를 손에 쥐고 심호흡했다.


만약, 무엇인가 잘못되어서 시간이 더 꼬이면 어떡하지? 과거랑 미래에서 온 메이들 마냥 감당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면?


메이는 빌브이를 보았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잿빛의 눈이었지만, 메이는 그녀를 믿기로 했다.


그녀가 영웅이라서가 아니었다. 


아직 미래의 빌브이도 이야기해주지 않은 과거의 편린을 처음보는 자신에게 말해주었기 때문에, 메이는 그녀를 믿기로 했다.



"그럼, 이따가 봐요. 빌브이."



"나중에 보자. 번개의 율자."



싱긋 웃으면 손을 흔들어주는 빌브이를 보며 메이는 버튼을 눌렀고, 그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단듯이 사라졌다.


눈 앞이 핑도는 느낌과 함깨, 라이덴 메이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잃지 않고 착지할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아까 전과 다를 바 없는 빌브이의 공방이었다. 하지만 빌브이는 어디로 간건지 보이지않았다.



"빌브이? 약속대로 시계를 가지고 왔어요. 제 시계는 수리됐나요?"



그러나 아무런 응답도 없이, 메이의 목소리만이 텅빈 공방에 울릴 뿐이었다.



"빌브이? 여기 아무도 없나요?"



그 질문에 대답하듯이, 누군가가 공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화난듯한 커다란 보폭소리.


메이는 황급히 기계 뒤로 숨었다.



'만약, 칼파스가 오면 어떡하지?' 



혹여나 다른 시간대의 칼파스를 만나서 죽이게되면, 시간대가 또다시 걷잡을 수 없게 꼬여버리는거 아닐까?


칼파스를 만나자마자 일단 죽일 생각부터 하는 자신이 비정상이라는 생각은 미쳐 떠올리지 못한 채, 메이는 조용히 공방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보폭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입구 아래에서부터 인영이 드러났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톱니바퀴가 장식된 중절모.


멀리서부터 메이의 소리를 듣고 달려왔는지 빌브이는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몸을 숙이고 거친 숨을 몰아내쉬었다.



"빌브이!"



메이는 반색하며 빌브이에게 달려나갔다.



"다행이네요. 빌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먼저와서. 만약 칼파스였다면..."



헥헥거리며 거칠게 숨을 내뱉는 빌브이의 어깨를 부축해 일으켜세우던 메이는 얼어붙었다.


자신을 화난 눈으로 바라보는 빌브이의 눈가에 푸른 멍이 있었기에.



"왜? 칼파스가 먼저 왔으면 어쩔려고? 또 뒤통수에 돌 던지게??"



"아니, 이게. 이게 무슨."



"이게 무슨은 이게 무슨!"



빌브이는 메이가 당황한 사이 잽싸게 손에서 시계를 낚아채었다.



"휴. 다행이네. 분명히 뭔가 박살나는것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새것마냥 완전 멀쩡하잖아?"



"내놔요! 돌려줘야 할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메이가 황급히 달려들었지만 빌브이는 몸을 살짝 돌리는 것으로 간단하게 메이의 손길을 피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주인이 여기 있는데 내놓고 다시 돌려주겠다는게 대체 무슨 헛소리야?"



"이익...! 설명하기 복잡해요. 일단 내놔요!"



빌브이는 계속해서 메이를 가벼운 발놀림으로 피하며 조롱했다.



"흐흥, 그래. 이상한 시간대에 날라갔다가 다시 돌아오니까 차마 부수지는 못하겠지? 이제 이 [대마술사] 빌브이님의 시간마술의 위대함을 알겠어?"



"됐으니까 빨리 내놔요!"



"워워, 성난 황소마냥 달려들지마. 조수 양. 그러다가 잘못 달려들면 이렇게 실수로 눌러버릴지도..."



장난삼아 시계의 버튼을 딸깍거리던 빌브이의 표정이 급변했다.


어라라?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의 시계를 바라보며 멈춰선 빌브이.


그리고 메이는 그녀가 멈출 것을 미쳐 예상못했는지 제동에 실패하고 그대로 그녀와 부딪혔다.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메이와 빌브이가 다시한번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뒹굴었다.


메이가 급하게 빌브이의 손에서 시계를 빼앗으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시간 전, 몸싸움을 벌이던 그때와는 비교조차 되지않는 악력이었다.


장난기 한점 없는 굳은 얼굴로 빌브이가 입을 열었다.



"너....이거 어디서 난 거야?"



지금까지 보지 못한 빌브이의 모습에 메이는 어쩔 수 없이 시계를 놓을 수 밖에 없었다.


메이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까스로 빌브이를 밟지 않고 그녀 위에서 내려 올 수 있었다.



".....원래 제가 가지고 있던 당신의 시계는 고장났어요. 그래서 다른 시간대 빌브이의 시계를 잠시 빌렸어요,"



"다른 빌브이라고? 말이 안되잖아!"



"네. 알아요. 그 빌브이가 있는 시간대로 이동할 수만 있죠. 저도 어떻게 여기로 돌아온건지 모르겠어요."



"아니야! 내가 말하는건 그런게 아니야!"



빌브이는 떨리는 손으로 메이의 눈 앞에 시계를 들이대었다.


또 다른 빌브이가 준 시계의 기스하나없는 매끈한 유리.


마치 이 순간을 비웃듯이 V자로 교차한 바늘 위로 겁먹은 메이의 얼굴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다.



"이건 데이터로 이루어진 시계가 아니야! 이건 실체가 있는 진짜 시계라고! 너처럼!"



메이는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실체가 있는 물건이라고? 그럼 내가 만난 건.



"라이덴 메이. 너...대체, 누구를 만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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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브이는 조심스레 금간 시계를 집어들었다.






빌브이는 시계에 연결된 홀로그램 모니터를 보았다.


어지러이 갱신되는 수많은 그래프들 중앙에서도, 크게 강조된 문장.


[시간축 이동: 최소 50000년 이상 추정.]



"'나중에 보자'라. 글쎄, 그때가 언제일까?"



빌브이는 케이블을 뜯어버릴듯이 뽑아버렸다.


금간 액정에 비춰지는 왜곡되어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은 빌브이 스스로도 도저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내 그녀는 그것을 품안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원래 시계가 있었어야 할 그 자리에.


모든 기계를 종료하고 전등조차 꺼버린 빌브이가 거칠게 문을 닫아버리자, 공방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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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덴 메이는 조심스레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들었다.


처음으로 이 시계를 보았던 때보다 손때도 더 많이타고, 자잘한 흠집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그때와 다를 바 없는 황동빛의 회중시계를.



"메이. 아직도 그 시계 가지고 다니네?"



"응. 내겐 잊을 수 없는 물건이거든. 왜? 안 어울리니?"



"메이는 은색이나 푸른색 계열이 좀더 잘 어울린다고 보는데."



키아나는 볼을 부풀렸다.



"그리고 그 시계, 너무 낡았잖아. 빈티지스러운게아니라 그냥 골동품 같아."



메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골동품 같은게 아니라 실제도로 골동품이었다.


몇만년의 시간을 뛰어넘었을지 모를, 시대를 넘은 골동품.


아니, 그쯤이면 일종의 유물이라 해도 되겠지.



"자, 그러면 여러분! 먼저, 저희가 상자에 무언가 속임수를 쓰지는 않았는지, 여러분 중에 조수를 뽑아보도록 할까요?"



저요! 저요!


이리저리 손을 든 관객들 사이를 이동하는 마술사의 시선.


그리고 그의 눈이 메이와 마주쳤다.



"좋아요! 거기 친구와 함께 오신 미녀 아가씨!"



메이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자신들 주위에 여성 2인조는 보이지 않았다.



"네! 바로 당신입니다! 에이, 시선피하지 마시고요. 네네, 백발 옆에 남색 장발 분. 바로 당신 맞습니다. 앞으로 나오시죠!"


"전 손 든 기억이 없는데..."


메이가 고개를 저으며 한발짝 뒤로 물러나려 할 때, 갑작스레 누군가 메이를 앞으로 밀쳐냈다.


메이가 깜짝 놀라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을때, 그녀는 이미 관중 사이를 빠져나와 마술사를 대면하고있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키아나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살짝 내밀며 V자를 보여주었다.



'하...돌아가면 뭐라 한마디 해야겠네.'



메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반갑습니다! 이런 미녀 분을 오늘 조수로 맞이하게 되어서 영광이군요. 저기, 혹시 같이 오신분은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지?"



메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애인이요."



키아나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인파에서는 휘파람과 환호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그렇다면 더더욱 저희가 두분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드려야겠군요. 자,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메이는 마술사의 손길에 이끌려 상자로 향했다.


메이는 조심스레 허리를 굽혀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허리를 굽힌 메이가 아슬아슬하게 천장과 부딪히지 않을 정도의 크기, 내부에는 사람이 걸터앉을 수 있는 상자와 일체화된 구조물이 있었다.



"자, 어떻습니까? 마음껏 만지고, 두드리며 살펴보시죠. 그다음, 아무런 속임수도 없음을 증명해주시면 됩니다!"



'진짜로 마음껏 두드리면 이 상자가 날라갈텐데 말이지...'



좁은 사각형의 시야 너머로 키아나가 인파 사이에서 손을 흔드는게 보였다. 메이도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어 준뒤 상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뭔가 갈라지는 이음새....없고,'



조금 두꺼운 플라스틱 합판 하나가 접히고 쪼개지고 다시 합쳐진것만으로 사람이 들어갈만한 이런 상자가 만들어졌다.


이 상자에 어떤 기술력이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메이가 유심히 살펴봐도 눈에띄는 이음새 따위는 없어보였다.


메이는 조심스레 귀를 대고 상자 벽을 두드려보았다.


뭔가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났지만 그것이 정말로 상자 안에 다른 공간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합판이 얇을 뿐인지, 메이로써는 알 방법이 없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메이가 상자에서 나오려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메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녀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좋았을까.


그러나 발키리로써, 율자로써 일반인보다 훨씬 강화된 시력은 그것을 찾아내고 말았다.


상자의 천장 구석에 작게 음각된 문양.


절대 잊을 수가 없는 시계바늘과 톱니로 이루어진 심장 모양의 나선.



"자, 자. 이제 보셨으면 나와보시죠."



'나선'의 문양이 메이를 추억 속으로 끌고가려던 순간,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술사가 메이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어때요? 뭔가 이상한 점은 찾으셨나요?"



"....네. 아니, 네니요. 없는 것 같네요."



"하하하! 얼마나 마술이 기대되셨으면 말을 더듬으실까!"



마술사의 말에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메이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메이는 눈 앞의 마술사를 보았다.


그나마 인상적인 부분을 뽑으라면 살짝 기른 구렛나루와 턱수염 밖에 없는, 어디에나 있을 것같은 인상좋아보이는 청년.


이 남자는 어째서 빌브이의 문양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애초에 아무도 알 사람이 없는 그 문양이 여기, 바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인가.



"자, 그럼. 우리 조수 양께서 상자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장해주셨으니, 모두 조수 양이 자리로 돌아갈 때 환호로 맞이해주시길 바랍니다!"



메이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소란스러운 관중들을 지나 키아나에게 돌아왔다.


여전히 웃고 있던 키아나도 메이의 표정을 보자 걱정스러운지 웃음을 멈췄다.



"괜찮아? 메이?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메이는 고개를 들어 상자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마술사를 보았다,


저 남자가 빌브이와 무슨 관계인지, 무엇을 꾸미고 있기에 자신과 키아나 앞에 나타났는지. 그것은 지켜보면 될 뿐이다.



"자, 그럼 보여드리겠습니다! 저의 궁극의 마술!"



그녀가 말한, 시간마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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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이 불타오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불타올랐다. 남은 것은 천천히 잿더미로 변해가는 낙원의 잔재들.


메이와 빌브이는 역설적이게도, 끝이 없는 우주공간 그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 끝 지점부터 천천히 타오르며 사라지는 것을 달 위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니까....자폭 버튼이 농담이 아니었군요."



빌브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엘리시아가 스스로 자폭버튼이 되는 셈이니 자폭 엘리, 엘리 버튼. 둘 중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불러."



"재미없어요."



"재미있으라고 한 거 아니야. 농담도 아니었고."



빌브이는 중절모를 벗고 짜증내듯이 머리를 헝클였다.



"나는 666을 진짜 작동시킬 일이 있다는 것보다, 침식의 율자가 진짜로 있었던게 더 농담같은데 말이야. 이게 말이 돼? 무슨 신종 감기나, 빈대 같은걸 달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율자 하나를 통째로 달고 들어온다고?"



"당신이 지금 단계에서 발견하지 못했다면 더 큰일이 났을거라면서요!"



"그래! 아예 발견 안했다면 더 좋았겠지!"



메이와 빌브이는 서로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돌린 채 한숨을 쉬었다.



"너, [극악]이랑 싸울때는 그렇게 감동적인 분위기로 끝냈는데, 왜 이제와서 이런 신경전을 벌이는거야?"



"그건 당신이 아니라 [나선] 빌브이였죠. 그녀는 당신같이 무례하고 몰상식한 사람하고는 전혀 다르잖아요."



"너무하네! 애초에 너랑 다툰 [마술사]는 [악인]에게 죽었잖아! 나는 다시 만들어진 인격이라고!"



빌브이는 다시 메이를 째려보다가 질렸다는듯이 고개를 돌렸다.



"좋아.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뭐야?"



"대답을 들으러 왔어요."



메이는 잠시 생각하듯이 눈을 감았다.



"그날, 우리가 겪었던 시간 마술의 실체를요."



그 날, 라이덴 메이가 다른 시간대의 빌브이를 만나고 돌아온 날. 메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빌브이의 미래가 아닌, 자신이 원래 있던 시간대로 돌아와 버렸다.


다시 돌아온 메이와 빌브이가 시계의 출처를 두고 검을 뽑아들기 일보직전, 갑작스럽게 소강상태를 마무리 지은 것은 엘리시아였다.



"어머! 두 사람 서로 뜨겁게 뭐하고 있는거야? 정말이지. 나도 끼워주면 안돼?"



엘리시아의 말에 서로가 어떤 자세로 뒤엉켜있었는지를 뒤늦게 확인한 둘은 황급히 서로를 밀쳐내듯이 물러났다.


굳은 얼굴로 시계와 메이를 번갈아보던 빌브이는 이내 입술을 깨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흐음, 메이. 우리 빌브이가 저렇게 화내는건 처음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던거야?"


엘리시아는 철제 난간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계단 아래쪽으로 사라져가는 빌브이를 보며 물었다.


메이는 텅 빈 자신의 손을 보았다.


아직까지도 손을 움켜쥐면 그 시계가 잡힐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겠어요. 엘리시아."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사건 이후, 한참 뒤에 다시 만난 빌브이는 이미 침식과 손을 잡고 다른 인격들을 전부 파괴한 [악인] 빌브이였고, 그녀에게 질문 따위를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숨겨져있던 빌브이의 최초의 인격 [나선] 빌브이를 만나고, 엘리시아를 다시 부활시키고 이별하는 그 순간까지도 메이는 질문을 꺼내지 못했다.



"굳이 지금 질문을 해야겠어? 그냥 감동적인 작별인사하고 끝내면 안돼?"



"아니요. 그랬다간 평생 후회할 것 같아요."



메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나중에 보자'라고 웃으며 말해줬던 또 다른 빌브이.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녀에 대해서 알아내지 못하면 자신은 평생 후회하겠지.


호기심때문이 아니라, 죄책감 때문에.



"괜찮겠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아. 다른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는것만으로도 벅찰텐데."



"아, 걱정마세요. 그래서 칼파스의 방은 바로 지나치고 여기로 왔어요."



"너 칼파스를 얼마나 싫어하는거야...."



빌브이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다시 평소같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좋아. 뭐부터 시작할까."



"일단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죠."



메이는 저 멀리 천천히 타오르며 다가오는 우주공간을 보았다. 끝이 보이지않는 검은 우주가 불타오르고, 그 너머에서 보이는것은 똑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새하얀 무(無).



"....미래에서 온 메이는 침식의 율자가 시계를 얻으면 큰일이 일어난다고 했었죠. 물론 결국 큰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녀가 말한 에이언즈 같은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왜일까요."



"아, 그거? 간단해."



빌브이는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시계를 꺼냈다.


메이가 과거에서 가져온 그 시계를.


빌브이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메이에게 던졌다.



"돌려봐."



메이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채 그대로 시침을 돌리고, 버튼을 눌렀다.


딸깍. 딸깍, 딸깍.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의심도 안하고 일단 눌러보고 생각하는거야?"



"글쎄요. 당신의 가장 큰 비밀을 제게 털어놨잖아요? 이제 와서 저한테 이런 장난을 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메이가 입꼬리를 올리자 빌브이도 거기세 미소로 응답했다.



"그래. 일단 이유부터 말하자면, 이건 전에도 말했지만 현실의 시계야. 현실에서 온 너와 침식의 율자는 이 시계와 같은 시간축에 있기에 이걸로는 시간을 조작할 수가 없어."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그래서 [악인]이 이 시계의 존재를 알고도 침식의 율자에게 주지 않았던 거로군요. 애초에 쓸모가 없으니까."



"그렇지. 아니면 또다른 가설이 있어."



"뭔데요?"



"사실, 침식의 율자가 시계를 침식하는건 의외로 별로 중요한 분기가 아니었단거지. 의외로 다른 분기점 때문에 그 시간대가 망가진 걸수 도 있어."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어떤 미친년이 아군오사인 척 칼파스를 죽인다거나...."



두 사람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


"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까?"



"그, 그러죠."



메이는 시계를 보았다. 매끄럽게 빛나는 유리에는 비춰진 라이덴 메이가 메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현실의 시계라고 한건 역시...."



"그래, 메이. 네가 만난 건 낙원의 내가 아니야."



빌브이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마치 이 사실을 말할지, 그러지 않을지를 고민하는듯.


그러나 메이의 시선에, 빌브이는 입을 열었다.



"네가 만난 건, 현실의 진짜 빌브이야. 50000년 전, 살아있었던."



메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직감으로는 예상하고있었지만, 직접 사실을 들으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그걸로는 설명되지 않는 게 많아요. 왜 지금은 시계를 돌려도 이동할 수 없는데, 그때는 가능했던거죠? 그리고 어떻게 제가 그녀의 시간대가 아니라 원래 시간대로 돌아올 수 있던 거죠?"



"첫번째로, 그게 가능했던건 너와 그 빌브이가 서로 다른 시간축이었기 때문이야."



"다른 시간축?"



"그래. 둘 다 같은 현실의 존재지만, 그녀는 과거의 사람이고, 너는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간 사람이잖아. 시계가 속한 시간과는 다른 시간축의 존재가 시계를 돌려야만 시간조작이 가능해. 그 빌브이도 아마 네 설명을 듣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아챘겠지."



"그럼 더더욱 말이 안되잖아요! 제가 그 시계로 시간여행을 한건 그렇다쳐요! 과거의 빌브이가 저한테 시계를 줄 때 뭔가를 조작해놨으니까 50000년 후로 온거겠죠. 하지만...어떻게 그게 제 시간대의 50000년 뒤인데요? 그리고 왜 다시 과거로 못돌아가는건데요?"



"라이덴 메이."



메이는 빌브이의 두눈을 보았다.


잿빛으로 빛나는 두 눈, 그리고 그 중앙에서 홍옥처럼 밝게 빛나는 동공. 그 안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있었다.



"넌 이미 답을 알잖아."



"아니요. 그럴 리 없어요. 이건 말이 안된다고요."



이미 그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듯 잠겨있었다.



"그녀가...내 시간대의 진짜 빌브이였다고요? 말이 안되잖아요, 이런 건...."



메이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듯 물기가 맺혀있었다.



"그녀가 진짜 빌브이였다면, 그녀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당신은 왜 저를 기억못하는 거죠? 설마 이것도 전부 [사기꾼]의 거짓말인가요?"



"아니야. 메이. 낙원의 기억은 원본이 백업을 해야만 갱신되는걸 알잖아. 나는 그 기억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아."



"하지만 그 말은...."



원본을 백업하지 못했다는 말은 즉.



"그녀는 저랑 만난 이후에 죽었단거잖아요....!"



메이는 주저앉았다.



"당신들이 제게 말했잖아요, 낙원은 최후의 최후를 위한 보험이었다고. 만약, 인류가 승리한다면 가동될 일이 없었을 백업. 하지만...."



메이는 빌브이를 올려보았다. 메이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다.



"제가...제가 그녀에게 말해버렸어요. 제가 미래의 낙원에서 온 율자라고....제가 당신들은 패배하고, 예정대로 낙원이 가동될 거라고 알려줘린 거잖아요!"



메이는 얼굴을 감싸쥐고 흐느꼈다.


감싸쥔 두 손 사이로 눈물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라이덴 메이는 죄인이었다.


이곳에 처음 올때와 다를 바 없는, 사랑조차 배신하고, 종국에는 시간마저 배신한 죄인.



"제가, 당신의 죽음을 확정지었어요. 빌브이..."



빌브이는 흐느끼는 메이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메이에게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메이. 내가 이 시계를 왜 만들었는지 이야기해줬나?"



메이는 고개를 들었다.


빌브이는 메이의 얼굴을 보면서 히죽였다.



"하하하! 메이! 너 지금 엄청 웃긴거 알아? 눈이 완전 시뻘겋게 부어올라서 눈화장이랑 전혀 구별이 안가."



"...시끄러워요."



빌브이는 불타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희끄무레한 점처럼 보이던 무(無)는 어느새 이 공간을 불태우며 어느새 어지간한 가구크기만큼 커져있었다. 


아니, 커질뿐만 아니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메이. 그거 알아? 사실 나는 진짜 빌브이가 아니야."



"....네?"



"정확히는, 진짜 빌브이가 만들어낸 가장 빌브이다운 빌브이지."



빌브이가 꺼낸 말은, 메이의 눈물조차 그칠만큼 충격적이었다.



"전... 전 이해를 못하겠어요."



"음,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그래. 내 최초의 인격, 우리의 사기꾼, [나선]빌브이를 만나봤겠지?"



"네."



[악인]을 물리치고, 엘리시아를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만났던 빌브이 최후이자 최초의 인격.


 묘하게 소심하고 자존감 떨어지는 모습은 자신이 만났던 50000년 전 빌브이를 떠올리게 만들었으나 어딘가 다른 점이 있었다.



"사실, 그 빌브이는 최초의 빌브이가 아니냐, 정확히는 '살아남은' 빌브이지."



빌브이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머리 위에 보이는것은 언제나와 다름없는 푸르디 푸른 지구였다.


오래 전 진짜 빌브이도 이 광경을 달에서 보았을까.



"내 기억을 봤었지? '불을 쫓는 나방'은 구속의 율자와 싸울 때 많은 희생을 치뤘어. 나도 예외는 아니었지."



"그녀가 말해줬어요. 살아남은건 자신뿐이고 다른 모든 인격들이 그때 죽음을 맞이했다고."



"맞아. 그 사건이 있기 전 나의, 그러니까 빌브이의 인격들은 지금처럼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어. 기억도 경험도 공유하지 않는 지금과 달리, 인격 모두가 같은 기억과 경험을 공유했고, 변검극에서 가면을 바꾸듯이 수많은 인격을 필요에따라 겉으로 내보이면서 살아갔어.



빌브이는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거야. 제일 먼저 일어난 '나'는 주위가 너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리고 깨달아버린거야. 그들이 전부 없어져버렸다는 걸."



자신의 병실 침대를 둘러싼 의료진들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선명하게 들리는데, 자신의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고독'이라는 감정을.



"나는 태어나면서부터의 기억도, 경험도 전부 가지고있지만 그게 정말 내 기억인지 몰라. 그것이 빌브이가 가지고 있던 기억인지, 아니면 나라는 [사기꾼]의 인격이 가지고있던 기억인지.



빌브이는 헛웃음을 지었다.



"메이. 상상이나 가? 다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때 흔히 '영혼이 뜯겨져나가는 것만 같다' 라고 하지. 하지만 나는 비유가 아니었어. 나늩 정말로 영혼의 일부가 뜯겨져 나간거야.



그것은 지옥이었다.



절대 지워지지 않을, 그녀가 죽을때까지 치유되지 않을 상흔.



"난 그 구멍을 메꿀려고 노력했어. 저번과는 다르게, 기억도 경험도 공유하지 않는, 하나의 자아로써 완전히 나와 분리된 인격들을 만들어냈지. 그리고 텅 비어버린 나를 채우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빌브이는 고개를 저었다.



"잘 안되더라고. 얼마나 많은 인격을 만들어서 그 구멍에 쑤셔넣든, 그 구멍은 그대로였어. 오히려 내가 인격을 만들면 만들수록 점점 내 안에서 그 구멍이 커지는걸 느껴만갔어. 그러다 어느 날, 거울을 봤지."



그 곳에 있는 것은 빌브이지만 빌브이가 아니었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다 죽어가는 불행한 소녀가 빌브이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어. 돌아가고 싶다고. 이런 끔찍한 상처따위 모르던 과거로 내 영혼을 되돌리고 싶다고."



"...그래서 이 시계를 만들었군요."



빌브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이에게서 시계를 건네받았다.


얇은 체인에 매달려 진자처럼 흔들리는 시계에는 빌브이의 슬픈 지, 피곤한지 모를 알 수 없는 표정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래. 과거를 바꾸고 싶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과거로 되돌리고 싶어서. 정말이지, 내 인생에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무엇인가에 매달린 적이 있었을까. 수많은 자료를 찾고, 수많은 실험과 이론으로 검증하고, 마침내 완성되었을 때는 정말 내 상처가 치유되는 것만 같았는데 말이야. 그런데...."



빌브이는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딸깍, 딸깍, 딸깍.


시계에서는 가볍게 부품이 걸린 소리만 날 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봐. 이꼴이야. 시간여행을 하려면 시간여행을 한 사람이 필요하다니. 이런 말도 안되는게 어디있어?"



빌브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망할 시계가 실패하고 나서, 나는 다른 계획을 세웠어. 이 상처가 빌브이를 빌브이로 있을 수 없게 만든다면, 그럼 내가 상처가 없는 진정한 빌브이를 새로 만들면 된다고."



"그게 당신이군요."



"그래. 고생했다고. 백업할때 다른 사람들마냥 복붙 버튼만 누르면 그만인것을, 나는 트럼프카드 탑을 만들듯이 내 인격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다시 기억체 안에 조심스럽게 쌓아놓았지."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을 분해하라.


빌브이는 자조했다.


그 문자 그대로 이루어 질 줄이야.



"그럼 지금의 당신은 그 기억이 없는건가요?"



"아니. 기억은 있지. 하지만 그게 매우 고통스러웠다는 기억만 있을 뿐, 어떻게 고통스러웠는지는 기억이 안나. 아니, 애초에 상상조차 안가. 영혼이 뜯겨져나가는 고통이라니. 누가 알고 싶을까."



메이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빌브이."



"응?"



"제가 그녀를 만났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이 의미없어진 건 아닐까요? 무슨 일을 해도 결과를 바꿀 수 없는, 헛된 몸부림으로 만들어버린건 아닐까요?"



"메이."



메이는 빌브이를 보았다.


그녀는 웃고있었다. 평소같은 장난기 섞인 웃음이 아닌, 너무나도 슬프고, 너무나도 애절해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웃음.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있어?"



메이의 머리속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누구보다 밝게 타오르는 신염의 불꽃.


그리고 그 불꽃을 그녀에게 물려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자신의 은사를.



"....네."



"나도 그래. 나중에는 '아, 죽었네'하고 무감각해질 정도로 수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고통스러운 이별이 2개나 있었어."



"누구였죠?"



"하나는 '나'를 잃었을 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빌브이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의 아이가 우리에게 내려오고, 우리에게서 다시 떠나갔던 그 푸른 별을.



"엘리시아가 떠나갔을 때."



빌브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상해. 낙원의 엘리시아는 항상 내 옆에 있어주는데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이토록 가슴이 미어질것처럼 아파와. 그런데 현실의 나는 이 고통을 지워주지 않았어. 그렇다면, '나'를 잃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기에 그런걸까?"



우는 것인지, 웃는것인지 모를 뒤틀린 그녀의 표정에서는 메이는 빌브이의 어떤 생각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리고 현실의 나는 그 고통을 전부 겪었지."



"전...상상조차 가지 않아요. 그게 어떤 감정인지."



"나조차 상상할 수 없는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겠어. 목숨조차 그녀의 것이 아니었을거야. 그저 엘리시아의 유언을 따르기 위해, 최후의 날이 다가올때까지 죽지 못해 살 뿐."



그것은 저주였다.


엘리시아가 남긴 꽃은 속박이 되어 빌브이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도 계속되는 속박.


정말로 존재하는지 모를 엘리시아의 후계자만을 기다리며.


이 거짓된 낙원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



"그런데 네가 그녀 앞에 나타난 거야."



라이덴 메이. 


인간성을 지닌 율자.


영웅들의 후계자.


엘리시아의 증인.



"너는 증거야. 엘리시아가, 우리가, 그리고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 너는 내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려줬어."



빌브이는 체인의 끝을 잡고 시계를 빙글빙글 돌렸다.



"의미없는 헛된 몸부림? 아니야. 정반대지. 너는 그녀에게, 나에게 의미를 불어넣어준거야. 엘리시아의 약속은 이루어질 거라고,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빙글빙글 돌던 시계가 어느 순간 하늘로 높이 던져졌고, 빌브이는 떨어지는 시계를 근사한 동작으로 잡아채었다.


"자, 이제는 네가 알려줄 차례야. 현실의 엘리시아에게, 나에게...그녀들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 말해줘."



메이는 빌브이의 손에서 조심스레 시계를 건네받았다.


아직 빌브이의 체온이 남아있는 따뜻한 시계.


메이는 그것을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빌브이...제가 이걸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뭐? 무슨 소리야? 애초에 내가 너에게 준거라고. 아니아니, 지금 여기있는 '나' 말고 현실의 나."



"하지만 저는...."



"에이, 헛소리하지 말고 가져가. 아니면 이것도 그냥 삭제당하게 놔둘거야?"



빌브이가 저 멀리서부터 공간을 불태우며 다가오는 무(無)를 가리켰다.


어둠조차 집어삼키는 그 하얀 공백은 어느덧 어지간한 건물보다 더 커져있었다. 이제 2명이 있는 달까지 닿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메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그녀에게 돌려주기로 했었는데, 그 약속은 결국 못지키겠네요."



"아, 그것도 말인데. 내가 생각해놓은게 있어."



메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 시간동안 이 시계가지고 장난질 치면서 깨달은 게 있어. 나는 그 MEI조차 뛰어넘는 인류 최고의 천재지만, 아직 시간이란 법칙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전혀 아는 게 없다는거야."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뭐, 이런거지. 시간 마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빌브이는 웃었다.


메이도 그저 따라 웃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메이가 빌브이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럽게 달려든 메이에게 껴안긴 빌브이는 당황했지만, 이내 그녀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지금 당신은 누구죠? [마술사]? [개발자]?"



"빌브이. 그냥 [빌브이]야."



"빌브이. 전...저는 절대 당신들을 잊지 못할거에요."



"나도 그래. 우리가 널 어떻게 잊겠어. 절대 못 잊을거야. 설령 5만년이 지나도...."



긴 포옹이 끝나고, 마침내 하나가 되었던 두 사람이 떨어졌다.


빌브이가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손을 휘젓자 아무것도 없는 달의 대지에 벽도, 문틀도 없는 문이 홀로 나타났다.



"이제 가. 라이덴 메이. 진실로 거짓을 만들고, 미지에서 기적을 만들어 내. 이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전부야."



메이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빌브이. 잘있어요. 낙원의 대마술사."



"그래. 안녕. 라이덴 메이. 우리에게 와줘서 고마웠어."



메이는 등을 돌려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끝없는 계단이 이어져있었다.


이 끝에는 또다른 영웅과의 작별인사가 기다리고있겠지.



"아, 칼파스에게 사과하는 거 잊지말고!"



메이는 소리내며 웃었다.


등 뒤에서 빌브이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둘 사이에 더 이상의 작별인사는 필요없었다.


메이는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문을 닫았고, 달의 대지에는 언제 그랬다는듯이 황량한 암석들과 빌브이 밖에 남지 않았다.



"아아, 이게 마지막인가. 뭐, 모든 공연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니까."



마침내 지구마저 집어삼킨 하얀 공백은 달마저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빌브이는 천천히 자신의 몸이 발끝부터 새하얗게 사라져가는것을 보았다.


어떤 고통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래도, 나쁘지 않았지? 엘리시아."



그리고 모든게, 새하얀 순백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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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 메이!"



메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키아나가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메이? 아까 마술보고나서부터 좀 이상해."



마술? 그래. 그 마술사가 펼친 시간마술.


마술은 간단했다.


마술사가 상자에 들어가고, 관객들이 숫자를 세자 저절로 상자가 열렸다.


당연하게도 상자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관객들이 웅성거릴 무렵, 갑자기 관중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런. 제가 너무 일찍 왔나요?"



그 자는 노인이었다. 새하얗게 센 턱수염과, 낡아버린 마술복장을 걸친 노인. 그리고 소름끼치도록 마술사와 똑같은 얼굴을 지닌 노인.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간 늙어버린 마술사는 익살스럽게, 그리고 정중하게 모자를 벗었다.


모자를 벗고 관중들을 향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어준 늙은 마술사는 다시 한번 상자로 들어갔고, 이번에는 숫자를 세기도 전에 곧바로 젊은 마술사가 상자에서 빠져나왔다.


"즐거우셨나요, 여러분? 지금은 이렇게 길거리 공연이지만. 언젠가는 저를 브로드웨이에서 보게 될 날을 기대해주세요! 그럼 저의 공연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충격에 빠진 메이가 그를 붙잡으려했으나, 메이가 박수치는 관중들 사이에 둘러쌓인 사이 그는 자신의 소품들을 이미 전부 정리하고 트럭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잠깐만요, 잠깐!"



메이의 절실한 외침을 듣지 못한 채, 트럭은 그대로 거리를 빠져나갔고, 메이는 그렇게 하염없이 키아나와 함께 다시 마술사를 찾아 거리를 돌 수 밖에 없었다.



"미안. 키아나. 오랜만에 데이트인데...."



"으응, 괜찮아. 메이에게도 중요한 일인거지? 메이는 언제나 날 도와주기만 했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메이의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



적당한 도로의 난간에 걸터기댄 키아나를 보며, 메이는 할 말이 없단 듯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내 욕심 때문에 괜히..."



"에이, 사과하지 말라니까?"



활짝 웃는 키아나를 보며 메이는 더더욱 죄책감이 머리 속을 가득 채우는 것만 같았다.


그래. 전부 착각일 것이다.


상자에 새겨져있던 그 각인도.


마술사가 노화했다가 다시 돌아온 것도.


전부 나의 착각일 뿐이다.


빌브이도 말하지 않았나.


마술사는 거짓으로 진실을 만들고, 미지에서 기적을 행하는 직업이라고.



"음...정 미안하다면 말이지, 나 배고프니까 간식이라도 사줘. 달에서는 인스턴트랑 냉동만 배터지게 먹었다고. 클라인은 요리를 무조건 정량만 해서 배가 차지를 않아."



볼을 뾰루퉁하게 부풀린 키아나를 보며 메이는 어쩔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알겠어. 뭘로 사올까?"



"저기 블록을 돌면 유명한 핫도그집이 있대. 나는 여기서 기다릴테니까 얼른 가서 사가지고 와줘."



"네, 네. 알겠습니다. 공주님."



그래. 이제는 놓아줄 때다.


낙원도, 영웅도, 빌브이도. 


이제 싸움은 끝났고, 그들이 바라던 이 아름다운 세상을 즐길 때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생각하며 메이는 코너를 돌았다.


키아나가 유명하다고 말한건 허언이 아니었는지, 이 멀리서도 사람들이 어느정도 줄을 선게 보였다.


핫도그 2개를 시킬려면 몇 분정도 걸릴까. 대기줄을 훑어보던 메이의 시선이 어딘가에서 멈추었다.


어라?


메이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대기줄에 다가갔다.



"저기요."



"아, 예. 저희도 사려고 기다리는거 맞아요. 제 뒤에....엥?"



메이가 어깨를 톡톡 건드리자, 고개를 돌린 남자는 메이를 알아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뭐야, 무슨 일인데?"



남자의 뒤에서 그와 똑같이 생긴 한 또다른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 눈에 띄는 턱수염도, 구렛나루도 없었지만 그 얼굴은 분명히 거리에서 공연을 하던 마술사의 얼굴이었다.



"그러니까....이게 시간 마술의 비밀이었군요."



"아...그게 말이죠..."



"뭐야, 이사람 아까 나와서 공연 도와주시던 그 분 아니야?"



상황을 아직 파악 못했는지 멍청하게 자기 정체를 실토한 쌍둥이 형제의 말에 마술사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러나 이내 포기한듯이 한숨을 쉬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네....이게 저희 시간 마술의 정체에요. 그냥 저희 형제가 분장한 거에요."



메이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게 진실이었다.


시간마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노인과 젊은이로 분장한 쌍둥이가 서로의 위치를 바꾸는 트릭이었을 뿐.


매우 단순하지만, 처음부터 1인마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했을 트릭.



"하지만 상자트릭은 절대 말 못해줘요. 이건 저희 사업 기밀이에요. 만약 당신이 그걸 인터넷에 올리기라도 한다면..."



남자의 눈이 험악해지는 것을 깨달은 메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상자 트릭에는 관심없어요. 인터넷에 올리지도 않을거고요. 단지..."



"단지?"



"그 상자를 만든 사람이 궁금해서요."



마술사는 의아하다는듯이 메이를 바라보았다.



"왜죠? 혹시 당신도 동종업자인가요?"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단지 아까 그 상자에 들어갔을때 구석에서 어떤 로고를 발견했는데, 저랑 제 친구만 알던 로고였거든요."



그 말에 마술사 형과 동생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야. 그러면 이 사람이 정말 그사람 맞는가보다."



"아니, 그게 진짜였다고?"



"저, 죄송한데요.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설명좀 해 주실래요?"



"어, 죄송합니다. 그러면 일단 이것부터 이야기해드려야겠네요. 저희같은 길거리 마술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익명 커뮤니티가 있어요. 서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새로운 마술을 창조해내는 그런 곳이죠."



형은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이.



"그런데, 거기에 정말 특이한 사람이 있어요. 정말 천재적인 사람이죠. 그냥 가끔 올때마다 툭툭 던지듯이 아이디어를 내뱉는데, 그 중 하나만 실현가능해도 바로 브로드웨이 만석은 이미 따놓은 당상일겁니다."



".....그래서요?"



"어쩌다가 그 사람이랑 개인메시지로 이야기하게 됐는데, 저희가 술마시면서 떠올린 시간 마술에 대해서 대충 아이디어만 던져줬더니, 갑자기 재밌겠다면서 자기 조건을 들어준다면, 마술도구랑 연출이랑 전부 자기 돈을 대고 만들어주겠다고 하더군요. "



"난 그때 그 사람 그냥 허언증 환자인 줄 알았어."



"그래. 근데 며칠 있다가 우리 주소로 저 상자가 날라왔잖아. 알려준적도 없는데!"



"잠깐만요. 무슨 조건이었는데요?"



"별거 아니었어요. 음...잠시만요."



마술사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자, 한달전에...아, 여기있다.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가 있는데, 대충 어느 거리에 사는지는 알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그 친구에게 다시 한번 내 마술을 보여주고 싶다. 만약 당신들이 그 곳에 가서 이 마술도구로 공연을 해준다면 대금은 그걸로 치룬것으로 해주겠다.....' 잠깐만. 뭐라고 더 덧붙인게 있었는데."



마술사는 글씨가 잘 안보이는듯이 액정을 얼굴 가까이 들이댔다.



"'추신, 그 친구는 어디에서든지 눈에 띄는 아름다운 남색 머리카락을 지닌 미인이다. 만약 만나게 된다면 억지로라도 마술에 참여시켜줄 것...' 라고 되어있네요." 



메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설마.



"그, 그사람의 이름이 뭔데요?"



"우리도 몰라요. 익명 커뮤니티라니까요. 사실 한 사람인지도 모르겠어요. 게시판에 나타날때마다 매번 다른 말투, 성격으로 색다른 컨셉을 잡고 나타나니까요."



"아, 그래도 그사람이라고 알 수 있는 증거가 있어요. 맨날 게시글 끝에 그 사람만 쓰는 슬로건을 붙이거든요. 음, 뭐였더라...아, 그거다!"



그리고 두 형제가 동시에 말한 그 문장을 들은 순간, 메이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내, 메이는 이를 꽉 악물며 뒤돌아서 있는 힘껏 뛰었다.


뒤에서 마술사 쌍둥이가 당황하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진실로 거짓을 만들고.'



왜 몰랐을까. 빌브이가 말했던 '시간 마술은 끝나지 않았다.'


그 의미를 왜 이제서야 알아챘을까,



'의미도, 상식도 뒤엎으며,'



빌브이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속한 존재만이 시계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내가 현재로 돌아왔을때는 시계를 돌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빌브이가 빌브이의 시간을 돌리는 건 어떨까?



'미지에서 기적을 행하라.'



만약, 만약 과거의 빌브이가 내가 준 시계를 아슬아슬하게 수리에 성공했다면.


종언의 율자와 싸우기 전 그것을 돌릴 기회가 있었다면.


그렇다면-.


멀리서 신호등의 신호가 바뀌고, 저 너머 횡단보도에서 수많은 인파가 메이를 향해 길을 건너왔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네, 실례합니다!"



메이는 그들의 투덜거림을 들으면서도 인파를 어떻게든 헤치며 나아갔다.


인파를 겨우 빠져나오고 계속해서 달리던 메이는 마침내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허리를 굽혔다.


그렇다면, 빌브이는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걸까.


상념에서 메이를 깨운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메이!"



메이는 고개를 들었다. 멀리에서부터 키아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키아나..? 왜 여기에?"



"왜냐니, 핫도그 사러간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안돌아오잖아. 그리고..."



키아나는 핸드백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더니 무엇인가를 꺼냈다.



"이것도 있고."



지금 메이의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있어야할, 절대로 잊을리 없는, 익숙한 황동빛의 회중시계.


메이는 황급하게 재킷을 더듬거렸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떨어뜨렸었나? 언제? 아까 인파를 지날때? 아니다. 이건 떨어뜨린것이 아니다.



"아까 누가 이 시계를 들고 왔었어. 메이가 이걸 떨어뜨린걸 봤는데 너무 급하게 달려나가느라 잡을 틈이 없었다고. 우리 둘이 같이 있던걸 보고 전해주러 왔대."



메이는 떨리는 손으로 키아나에게서 회중시계를 건네받았다.


시계를 뒤집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어떡해...메이가 아끼던건데, 떨어뜨리면서 금갔나봐."



절대로 잊을리 없는, 금간 액정.



"아니야. 떨어뜨린게 아니야... 원래 이랬어."



금간 유리 사이로 반사되는 일그러진 메이의 얼굴이 메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후의 거리는 바삐 어딘가로 움직이는 직장인들과 학생, 연인들과 시민으로 가득할 뿐, 그 사이에서 메이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키아나. 혹시 이 시계 돌려준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



"응? 아니. 시계만 주고 가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어."



키아나가 걱정스러운듯이 메이를 올려보았다.



"왜? 아는 사람이야?"



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응."



지하철이 정차했는지, 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파가 다시 몰려나오고,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사람들이 몰려 역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끝없는 나선처럼.



그 인파 사이에서, 언젠가 들어본 장난기 섞인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는 사람이면 좋겠어."


메이는 그저,  어디있는지 모를 마술사를 좇아 끊임없는 나선처럼 이어지는 사람들의 인파를 하염없이 지켜만 보고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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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눈 의미가 없는거 같아서 다시 통합해서 올렸음 ㅈ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