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붙은 셔츠 안쪽. 피부와 옷이 닿지 않는 작은 틈새로 끈적한 액체가 한 방울 타고 흘러 내린다.


내 체액임이 분명한데도 그것이 너무나 차갑게 느껴져서 찝찝함과 불쾌함에 사로잡혔던 감정이 순식간에 바짝 선 얼음처럼 깨어났다.


얼마나 멀리 달려온 걸까. 한껏 거칠어진 숨과 차가운 새벽 공기에 맺혀 오르는 땀 증기만 보아도 적지 않은 시간을 달렸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진 내 뇌는 그 시간을 찰나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뇌는 힘든 기억은 지워 버린다 했던가. 힘이 들어 포기해 버리면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으니까, 생존을 위해. 더 멀리 달릴 수 있도록 억겁의 고통을 찰나의 순간으로 바꿔 버린걸까.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골목. 밤 하늘 별빛과 주택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빛에 의지해 다시 비적 비적 발걸음을 떼었다.


한참 달릴 때는 그리도 가벼웠던 발걸음이, 지금은 무거운 족쇄를 단 듯 한 걸음 떼기에도 힘에 벅찰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봄이 왔다지만 새벽의 거리는 아직 춥다. 달리느라 체온이 올라가서, 혹은 땀에 젖은 옷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만큼 멀리 도망쳐 왔으면 괜찮겠지.


피로에 눌려 무거워진 몸과는 반대로, 짓누르던 온갖 압력이 사라진 지금. 나의 정신은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그때였다.


분명 불이 켜진 창문 틈 새로 뭔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냐. 예민해 지지 말자. 집에는 당연히 사람이 있겠지. 창문 뒤로 지나가면 당연히 그림자가 보일거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런 시간이라고!? 이런 시간에 잠도 안자고 창가를 서성인다고!?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새벽에 창가를 거니는건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냐. 그냥 이 시간에 일어났을 수도 있고. 그냥 이런 시간까지 잠을 안 자는 사람도 있으니까


가로등 없는 길 위를 밝혀 주는 건 여러 작은 불빛들 이었다. 별빛, 그리고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형광등 빛.


아무 것도 이상한 것은 없다.


...!


오싹한 전류가 등줄기를 타고 오른다. 전류를 따라 감전되듯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눈이 마주쳤다.


아니, 눈이 마주치는 일 따위 일어날 리가 없다. 뜬금 없이 이 새벽에 창문 너머로 날 바라볼 이유가 없다!


그럼 창문 안 그림자는 왜 가만히 서서 날 바라보고 있는 거냐고!


- 딱딱딱딱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한다. 이빨이 부딪힐 뿐인 작은 소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


도망가야 해. 고개를 돌려야 해! 계속 쳐다보면 안돼!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른다.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감을 역으로 눌러간다. 공포를 누르기 위해 발산되는 감정은 하나 뿐.


분노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끓어 올라 공포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머릿속에서 시작된 벌건 용암이 목까지 내려왔을 때에야 나는 겨우 고개를 반대로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지 말아야 했음을 깨달았다.


뜨겁게 머리를 달구던 용암이 순식간에 식었다. 분노라는 이름의 용기는 공포라는 괴물에 처참하게 살해 당해 짓이겨졌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곳은 한 곳 뿐임에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외치면서도, 그 수많은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그것 들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괴하게 비틀린 팔다리. 몸 안쪽에선 벌레 다리 같은 것이 피부를 찢고 나와 꿈틀 거리고, 기다란 털이 잔뜩 자란 눈동자는 한치의 미동 없이 나를 노려본다.


몸은 다른 곳을 향하면서도 목 만은 기괴하게 돌아가 정확히 나를 바라본다.


괴기스러우면서도 두렵고, 동시에 익숙한 형상이었다.


생존을 위해 온갖 성분을 분비해 내는 뇌가, 지금까지의 인생을 영화관 스크린처럼 눈 앞에 띄워 놓는다. 그리고 필름이 돌아가듯 내 인생도 흐르기 시작했다.


기억 속 내 인생에는 언제나 그것들이 따라 다니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화장실 구석, 모니터에 반사된 방의 구석, TV에 비친 거실 가구 위, 못 보고 지나친 엘리베이터의 틈새, 내가 잠든 사이 지하철 옆 좌석.


그것들은 언제나 나를 보고 있었다.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나 만을.


내가 자신들의 존재를 깨닫기 만을 바라면서.


그리고 지금 나는 알아 차려버리고 만 것이다. 극도의 공포심에 각성한 내 뇌가.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그것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지나간 주마등. 아마 1초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에 내가 처한 상황은 많이 바뀌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들이 몸을 돌려 뛰어오기 시작했다.


두 발로, 혹은 네 발로 뛰어 오면서도, 목 위로는 마치 메달아 놓은 구슬마냥 미동도 없이 나를 내쪽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만족한 듯 웃었다. 입을 헤벌쭉 벌리자, 잔털이 잔뜩 자란 곤충의 다리 같은 것들이 꿈틀 꿈틀 기어 나오려 한다.


그 때.


- 빠앙!


자동차 경적이 울리고, 주위가 밝아진다 싶더니, 분홍색 스포츠카 한 대가 그것들 사이를 가르며 등장했다.


"아오쿤! 데리러 왔어!"


짙게 선팅된 창문이 내려가며, 그 안으로 여성이 내게 손짓했다.


소설같이 새하얀 머리칼이 차가운 밤바람에 휘날리고, 그 사이로 태양을 옮겨둔 듯한 환한 미소가 나를 반긴다.


"흐아아아악!"


화이트 브리냥이었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순간적으로 쏟아져 나온 뇌내 분비물이 공포로 질척질척해진 전신의 혈관을 강하게 두들겼다. 그에 반사적으로 튕겨져 나가는 팔과 다리.


사람은 위기에 처하면 본능적으로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 숨는다 했던가.


나는 뛰어 나가 그것들의 등 뒤에 몸을 숨겼다.


그래 이 녀석들이라면 화이트 브리냥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저 눈빛들도 지금은 믿음직한... 어라?


이 녀석들 지금 내 눈을 피하고 있지 않아?


그것들은 하나 둘 내 눈을 피하더니, 이내 고개를 휙 돌려 골목 구석 구석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련하기 까지 한 뒷모습에, 왠지 다시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거란 강한 예감마저 들었다.


"어디... 어디 가는거야! 나도 데려가아아아!"


덥석!


"헤헤 아오쿤 찾았다~! 술래잡기가 하고 싶었구나! 그럼 말을 하지!"


분비되던 뇌내 마약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한다.


빨리! 아까처럼 뭐든 해봐! 뇌야 넌 해낼 수 있어!


'GG요'


"헤에 아오쿤 이게 다 땀이야? 열심히 뛰었나보네! 운동을 했으면 씻어야겠지? 우선 호텔로 돌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