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단 하나. 신이 존재했다.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느낀 신은 자신의 불완전한 부분을 전부 몸 밖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떨어져 나간 불완전함은 흐르는 질서가 되었고, 남아있던 완벽함은 단단하게 굳어 혼돈이 되었다.




어느 날 세상을 내려다 본 질서가 깜짝 놀란다.


아무것도 없던 세상에 새하얀 무언가가 한 점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혼돈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한 마디 덧붙이자 거대한 폭발과 함께 세계가 검은 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한다.


빛이 있으라.


공간이라는 개념의 발현. 둘은 최초로 물질로 이루어진 몸을 가진다.


우주. 새까만 공간 위로 발을 내딛자 처음으로 느껴진 감각은 차가움. 그리고 부유감.


어느새 이에 익숙해져 헤엄치듯 우주 공간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공간이라는 건 참 좋다. 차갑고 뜨겁고. 어둡고 밝고. 부드럽고 단단하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 질서는 생각했다.


정말 재미있는 개념이지만 그것도 겨우 잠시. 결국 모든 것들은 정해진 대로 움직이고 정해진대로 부딪혔다. 보는 것 만으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눈에 훤하니, 이젠 이것도 재미가 없었다.


혼돈이 만들어낸 물질의 몸이 그에 영향을 끼친 걸까. 아니면 애초에 질서조차 불완전한 개념이었던 걸까. 


질서는 변덕을 부렸다. 마치 혼돈처럼.




언제나처럼 멍하니 세상을 바라보던 혼돈이 씨익 웃음을 짓는다. 무언가 재밌는 것이라도 발견한 듯이.


태초의 폭발에서 피어난 먼지들이 뭉치고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뭉치기를 반복. 어느새 스스로를 당겨 유지할 정도의 크기를 가진 먼지들도 몇몇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유난히 크고 어두운 먼지. 그 위에 무언가 꾸물꾸물 기어 움직이는게 보인다.


질서가 이렇게 재밌는 일도 할 줄 알았던가. 진작 알았으면 같이 놀았을텐데.


그리 생각하며 혼돈은 다시 한 가지 개념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보여줬으니 답례로. 


그를 골려주기 위해.


온 우주가 휘어질듯 입꼬리가 올라간다.




자신이 만들어낸 개념. 생명을 여기저기 뿌리며 관찰하던 질서의 표정이 잔뜩 우그러진다.


가장 처음 만들어냈던 생명. 한 쌍의 다리와 날개를 가진 동물의 상태가 무언가 이상했다.


새빨간 깃털이 가득 나있던 피부는 쩍쩍 갈라져 내부를 드러내고, 날개는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두 다리는 이전처럼 힘차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질서는 혼돈이 만들어낸 끔찍한 저주를 알아차린다.


시간.


이 시간이란 개념은 천천히 생명을 괴롭힌다. 뼈를 부수고 살을 부패 시킨다.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생명들이 시간이라는 독기에 침식되어 점점 노쇠해가며 아름다움과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그 동물을 품에 안은 질서는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이들에게 시간이라는 저주를 풀 새로운 축복을 내려준다.


죽음.


검게 썩어가던. 진물로 가득 찬 세상은 처음으로 안식을 얻는다.




영원한 수명을 잃은 생명들은 죽음 뒤에 찾아올 세상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있었다는 증거를 세상에 새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탄생.


스스로 수를 늘릴 수 있게 된 생명들은 기존의 질서의 품을 벗어나 죽음과 탄생. 자연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인간.


가장 겁이 많은 동물.


죽음이 두려워 서로 뭉쳐 집단을 형성하고, 다른 집단을 흡수해 무리를 만들며 방벽을 세운 짐승들.


그들이 만든 문명이라는 단단한 성벽은 죽음조차 쉬이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죽음은 그들의 틈새를 비집고 갈 정도로 작은 수십 수 백의 사신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나 모리 칼리오페.


요즘 인간 놈들 평균 수명이 말도 안되게 올랐단 말이지.


물론 옛날에도 백 년 살 놈들은 다 살았다지만 그래도 평균이라는게 말이야. 이래서 의학 발전의 우상향이 곧 사신 실적의 우하향이란 말이 있는 거구나.


견습 그림리퍼가 된지도 어언 일주일. 채워야 하는 실적은 다섯 건인데 이제 겨우 네 명. 남은 시간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냥 확 하나 잡아다 죽여버려?


"에휴..."


그랬다간 말로 깨지는 정도론 안 끝나겠지.


한숨을 쉬며 터덜터덜 걷고 있자니 근처에서 삐이이 하는 작은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어디 병아리라도 떨어져 있나?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풀들을 이리 저리 헤치며 들어가 보니 그곳엔 다 타고 남은 거대한 잿더미가 하나.


"어... 음. 네가 소리 낸거니?"


라니 무슨 소리래 잿더미가 무슨 소리를 낸다고. 누가 여기서 야영이라도 했나?


실적을 찾아 찾아 달려온 외딴 마을이다. 거기서도 더욱 깊숙히 외지에 있는 숲이니 사람은 커녕 짐승이 다니는 길조차 보이지 않는다. 불을 피우긴 누가 피운단 말인가.


어디 벼락이라도 떨어져서 나무 하나를 통째로 태웠다던가...


"삐이이."


그때 다시 들려오는 작은 울음소리. 분명 잿더미 안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조금씩 들썩들썩. 뭔가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어라?"


무언가 태어났다. 방금. 잿더미 속에서.




"선배님! 선배님!"


차트를 정리하며 느긋이 커피를 젓고 있자니, 우당탕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선배님을 찾는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목소리는 분명 이번에 들어온 신입 사신의 것이고, 그 신입의 교육 담당이 나니까 아마 날 부르는 소리겠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 진동으로 엎어진 머그잔이 차트 위를 검게 물들인다.


"야 이 새끼야 내가 힘 조절 하라고 했어 안했어!"


"앗 죄송 죄송! 아니 그것보다!"


더럽혀진 차트나 망가진 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듯 후배님이 호들갑을 떨며 품 안에 숨기고 있던 한 손을 빼내어 보내준다.


그녀의 작은 손 위에는 그것 보다 더 작은 새 한마리가 얌전히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거! 실적 복사기!"


실적 복사기라고?


"잘 보세요!"


그리 말하며 작은 새의 머리를 콕 찌르는 후배님. 사신의 기운이 몸을 비집고 들어가자 순식간에 숨을 거둬 버린다.


"야 이 미친년아! 사신은 살아있는 생물을 죽이면..."


화르르륵


갑자기 타오르는 새의 시체에 놀라 말문이 막혀버렸다.


유전자 조작으로 새로나온 새인가? 죽으면 구이까지 한 세트야? 아니 좆간놈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윤리적으로...


"아뜨뜨."


점점 거세지는 불길을 바닥에 내려놓는 후배님. 이내 불길이 사그라들고 다 타고남은 잿더미만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 미친년야. 이건 실적 복사기가 아니고 징계 복사기잖아."


"자자 잠자코 보기나 하세요."


"도대체 뭘 보라는..."


삐이이


그때 태어났다. 무언가가. 잿더미 속에서.


들썩들썩 잿더미를 이리저리 파헤치고 나오는 아까보다 좀 더 작은 새.


"봤죠! 죽음을 하나 거둬서 실적 하나 추가. 바로 살아나니 죽인게 걸릴 염려도 없음! 이게 실적 복사기가 아니면 뭐에요!"


가슴을 쭉 펴고 허리에 양 손을 척. 의기양양하게 웃는 후배님.


삐이이!


그리고 그 옆에서 같이 의기양양한 포즈를 취하는 작은 새까지.


분명 실적이 올랐다. 그럼 이 새가 최소한 인간과 동등한 격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 확실히 이건 대단한 발견이야. 진짜 실적 복사기잖아. 


하지만 암만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윤리적으로 좀 그렇지 않냐...?"


"어허! 우리가 윤리를 따질 때가 아니라니까요! 애초에 윤리도 인간이 만든 개념이고! 우리가 이 고생을 하는 것도 인간들 때문이니 윤리를 조금 무시 한다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구요!"


삐이 삐이!


얘는 후배님을 자기 엄마라고 생각하는건가? 왜 자꾸 저 포즈를 따라 하는거야. 임마 너 가둬놓고 계속 죽이겠다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얘 저희 사무실에서 키우죠!"


"아니, 키우는건 상관 없다만. 아무리 그래도 실적 복사기로 쓰는 건 반대다. 만약 한번 더 쓰다가 걸리면 대장님한테 바로 이를 줄 알아."


"크읏! 이럴 줄 알았으면 알려주지 말고 혼자 몰래 쓸 걸! 선배님이라고 배려해 드렸더니!"


얘 봐. 진짜 분한가봐.


어디선가 꺼낸 손수건을 물어 뜯으며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하는 후배님. 아니 진짜 무섭긴 하다. 얘 펀치 한방에 내가 두 동강이 날 수도 있다구요.


삐이이


"그럼 얘 이름은 뭘로 지을까요?"


"네가 주워왔잖냐. 그럼 네가 엄마니까 네가 지어줘라."


그러자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묻는 후배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배님이 아빠니까 선배님이 지어 주셔야죠."


"뭐냐, 네가 엄마고 내가 아빠고 뭐 소꿉놀이라도 하자고? 미안하지만 난 너 같이 폭력적인 아내는..."


"아뇨, 제가 첫째 딸이고, 얘가 둘째 딸이요."


"... 너 같이 폭력적인 딸내미는 필요 없어. 것보다 걔 암컷은 맞냐?"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곤 새를 주워들어 품에 비비는 후배님.


뽀송뽀송한 깃털을 한껏 만끽하며 고민 하기를 한참.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번쩍! 눈을 뜬다.


"삐순이! 삐순이는 어때? 삐이이 하고 우니까."


"뭐냐 잘만 짓는구만. 나름 잘 어울리지 않냐? 나중에 크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 자기소개가 늦었네. 난 타카나시 키아라야."


"다시 생각해보니까 전혀 안 어울린다. 넌 이름 짓는데 재능이 없어 새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