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초의 행방

 

 다온하람


 

 

연기 속으로 그림자의 발자국이 멀어져 간다. 명멸하는 시야 속에 비치는 흐릿한 형체를 노려보며, 루시아는 계속해서 끊기려는 정신을 붙들었다. 그리고 사방에 널브러진 기억의 조각을 주워담았다. 그럴수록 기억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어떻게 되었더라.’

 

달그락, 달그락, 뼈가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뻗는다. 그녀는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내고 해골을 바라보았다. 척추가 절반 정도 날아간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반파된 두개골을 덜걱거리며 그녀를 향해 기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저 아이도 수복시켜야 하는데.’

 

쓰러진 채 눈동자만 힐긋 돌리던 그녀는 갑작스레 얼굴로 밀어닥치는 바람에 눈을 감아야 했다. 머리카락이 날카롭게 볼을 스친다. 그리고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와, 무언가 철퍽대는 소리, 또 덜걱거리는 해골의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한쪽 눈꺼풀이나마 힘겹게 들어 올려, 바람에 휩쓸려 연기가 가신 자리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열린 창문과, 흔들리는 커튼과, 그림자와…… 눈물과 피처럼 떨어지는 검은 액체가 남아 있었다.

 

덜컹, 덜컹, 제멋대로 불어오는 바람에 창문이 벽을 두드려 댔다. 달각, 달각, 꽤 가까이까지 다가온 뼈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그리고 그 모든 소리는 점차 바다 깊숙한 곳의 외침처럼, 한순간.

 

‘그림자.’

 

단말마와 함께 침잠했다.

 

 

-

 

 

“저기 말이야, 루.”

 

해골이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시아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번갈아 두드리고 있었다.

 

“청초라는 건 죽은 걸까?”

 

루의 턱뼈가 덜컥 주저앉았다. 하지만 곧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관절을 제자리에 끼워 맞추고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루시아가 그를 올려다보자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루는 펜과 종이를 당겨와 빠르게 휘갈겼다.

 

‘괴성을 질러대는 그 목만 잘 간수하신다면야 살아 있겠죠?’

 

“죽었다는 소리구나.”

 

루시아는 손을 뻗어 루의 어깨뼈를 분리했다. 졸지에 외팔이가 된 루가 허둥대며 손짓을 시작했지만, 그녀는 이미 그녀의 세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결국 그는 루시아의 손에 따라 흔들거리는 제 팔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또 팔 뺏어가셨어?”

 

시큰한 감각. 루는 흠칫 떨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반투명한 유령이 그의 어깨를 서늘한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루시였다. 그는 그녀를 슬며시 털어 내고 남은 왼손으로 글씨를 써서 내밀었다.

 

루는 오른손잡이였다.

 

“못 알아보겠어. 말로 해줄래?”

 

루는 손가락으로 제 목뼈를 가리키고 콱 움켜쥐었다. 그리고 두개골 채로 몸통에서 떼어냈다가 다시 붙이는 묘기를 보여주곤 턱뼈를 빠르게 덜걱거렸다. 루시는 킬킬대며 웃었다. 늘 그랬듯이.

 

“그래. 넌 성대가 없지. 난 있는데.”

 

루는 그녀의 배를 뚫고 지나감으로써 대답했다. 공중에서 흐느적거리는 그녀를 지나쳐 그가 향한 곳은 냉장고였다. 말이 냉장고였지 사실상 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는 냉장고에 노크를 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유령이 루시아의 곁을 맴도는 사이 그녀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루는 한숨을 쉬는 것처럼 턱뼈를 흔들고선 거대한 좀비, 하루를 올려다보고 루시아의 손을 가리켰다.

 

루시가 뒤로 슬그머니 물러나고, 하루가 루의 팔을 잡으려 할 때였다.

 

“아아!”

 

루시아가 돌연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졸지에 밀려난 의자에 얻어맞은 하루는 눌린 살점을 내려다보았다. 루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루시아의 얼굴을 바라볼 즈음, 그녀는 뭔가를 빠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곧 고함은 터져 나왔다.

 

“하아아악!”

 

루는 기겁하며 땅바닥에 떨어진 제 팔을 주워들고 어깨에 끼워 맞췄다. 뻐근한 오른팔을 돌리면서도 그는 루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의 괴성을 떠올렸다. 분노나 슬픔보다는 환희나 희망에 가까운 듯한 소리.

 

루시아는 루를 스쳐 길다란 테이블로 총총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다시 앉아 두루마리에 뭔가를 적어 내려가더니, 벌떡 일어나 두루마리를 눈앞에 펼치고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하아아아아!”

 

벌써 세 번째 고함이었다. 하루는 생각했다. 꽤 희귀하군. 이어질 반응은 대개 비슷한 양상을 띤다. 그 방에 있는 세 언데드 모두가 아는 내용이었다. 미리 유령이 좀비의 등을 툭툭 밀었다.

 

“얘들아, 얘들아, 봐봐! 이거! 어때, 루시아의 머리!”

 

루시아가 좀비의 등을 퍽퍽 때리며 두루마리를 그들에게 내밀었다. 루시가 스르륵 미끄러져 두루마리를 위아래로 훑고는 말했다.

 

“지능 말씀하시는 거면 꽤 모호한데요. 청초성을 부활시킨다?”

 

“이게.”

 

루시아의 주먹은 효과가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루시가 몸을 뒤집어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개념을 살린다는 걸 진지하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루시아 님의 지능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루시아는 손가락을 한 번 내리긋는 것으로 그녀의 말을 일축했다. 물리적으로. 유령을 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구석에 주저앉아 입이 사라진 답답함을 호소하는 유령. 그리고 그 앞에서 소리 없이 비웃는 해골. 하루는 눈을 돌려 아직도 제 등에 손을 올리고 있는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시는 게.”

 

그의 목소리는 모습에 걸맞게 썩어 있었지만 루시아는 개의치 않았다.

 

“아, 음. 설명이라고 해도 말이야, 요전에 학교 신문에 새로운 사령술이 발견되었다고 한 일주일? 그쯤 그게 막 신문에 뜨고 그랬단 말이야. 일종의 기억을 사령으로 데려오는 거지.”

 

“그래서요?”

 

“생각해 보니까 알고리즘을 조금 건드릴 수 있겠더라?”

 

“괜찮아. 루시아 베테랑이야.”

 

“학교 선생님께 먼저 조언부터 받고 오시는 게.”

 

마침내 입이 돌아온 루시가 말했다. 그 옆에서는 루가 두개골을 격렬하게 끄덕이고 있었다.

 

“괜찮아. 조금만 비틀면 돼. 청초했던 루시아의 기억을 가져와서 화장품처럼 쓰는 거지.”

 

“성공한다 쳐도 새 친구가 생기는 건 아니겠네요.”

 

“새로운 루시아를 맞이할 준비부터 하렴.”

 

 

-

 

 

“루, 7번 경추 있어? 네 거 말고. 31번 통에 한 번 봐봐. 1급으로 가져오고!”

 

“루, 24번 통에 그거, 그, 그거 뭐였지? 어쨌든 그거 가져와 봐! 레시피에 있어!”

 

“루, 레시피에 공동묘지의 흙을 넣는 건지 모래를 넣는 건지 확인해 볼래? 비석 조각? 그럼 그거 좀 갖다 줘!”

 

“루, 혹시 2번 통에…….”

 

“루, 거기…….”

 

“루…….”

 

루가 달릴 때마다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루시는 그 광경을 그네에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청초의 부활? 부활보다는 그냥 소환이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루시는 옆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돌렸다. 하루가 냉장고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슬슬 체온이 올라가면서 접합부가 벌어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루! 진짜 마지막! 17번 통에 있는 그, 뼈 빻은 거 가져와 줘! 입자 크기는 ‘소’자로!”

 

“대중소라는 거 되게 중국집같다.”

 

루시가 중얼거렸다. 루가 재료실에서 봉투를 들고 뼈가 시리도록 달려갔다. 바람이 많이 통하겠네. 그녀는 별 의미 없는 잡생각을 하며 그네의 줄에 머리를 기댔다.

 

루시아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하, 하, 하, 하, 하고 웃는 걸 보니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네에서 내려와 소환실로 다가갔다.

 

“됐어요?”

 

“다 됐어! 하루는?”

 

“시간이 돼서 냉장고에.”

 

“아.”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환실 중심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루시는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제 볼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는 기겁하며 루에게 소리쳤다.

 

“야! 저거 창문 닫아! 저기요, 루시아 님? 좀 있으면 폭풍 온다는데 창문 열어두고 있으시면 어떡해요!”

 

“아아아아, 미안해. 진짜 미안. 근데 어차피 그거 오늘 밤이잖아. 아직 괜찮아.”

 

루가 창문을 닫고 루시를 향해 고개를 적당히 흔들어 보였다. 어차피 괜찮다는 소리였다. 루시는 곧장 끓고 있는 솥 앞으로 다가가 레시피와 내용물을 번갈아 살폈다. 레시피에 나온 완성본과 내용물의 색은 똑같았다.

 

루시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아직 전조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까.

 

루시아는 솥의 내용물에 특수 처리를 한 뼈를 두세 번 담갔다 빼서 바닥의 그림 위에 올려두었다. 뼈는 언제부턴가 반투명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루시는 문지방 근처로 자리를 옮겨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동안 루시아는 마지막 뼈를 그림 위에 올려두고 레시피를 확인했다.

 

“이대로 대상 성격을 떠올리고, 개인의 방식대로 진 위에서 사령술을 시전하면 완성. 오케이. 알고리즘은 제대로 손봤고. 청초라, 떠올리라고 하니까, 음. 사전 있나? 아, 여기 있다. 사전적 정의. 사전적 정의.”

 

그녀는 급기야 청초의 사전적 정의를 되뇌며 진 앞에 섰다. 루가 슬그머니 다가와 아직도 식지 않은 솥을 뒤로 끌어당겼다.

 

루시아가 사령술을 시작하면서 진 위의 뼈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루는 레시피를 확인했다. 이대로 3분.

 

‘근데 저 뼈 생각보다 빨리 녹네.’

 

루는 그렇게 생각하며 근처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엉덩이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건 아주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세상이 혼탁했다. 말 그대로 루의 눈앞은 끔찍하리만치 더러운 연기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하나하나 감각이 돌아오면서 루의 기억을 일깨웠다. 그 속에 든 약간의 공백을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뭐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귓구멍으로 삐, 하는 이명이 들려왔다. 점점 소리가 커지면서 두개골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루는 몸을 뒤집고, 바닥을 긁으면서, 주변을 혼란스러운 눈으로 훑었다.

 

이명이 잦아든다. 잠시 몸을 떠났던 청각이 되돌아오면서 시끄러운 바람 소리가 귓가를 뒤흔들었다. 루는 그제야 자신이 몸을 뒤집고 있었던 게 아니라 몸이 저절로 바닥을 구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세상은 차례대로 돌아온다. 척추 아래로 느껴지는 게 없다. 사방은 연기로 가득하다. 바닥을 두드리는 손끝의 감각이 뭉툭하다. 입에서는 뭔가 쓴맛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면서 소환실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루는 뒤로 날아가 잠시 기절했으며, 아주 잠깐의 공백을 거쳐 정신을 차린 그는 반파된 몸으로 널브러져 있다.

 

‘루시아 님은?’

 

성대가 없다는 게 이리도 아플 줄은. 그는 그녀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루시는 괜찮을까? 내가 이렇게 될 지경인데 둘은 괜찮을까? 생각의 격류가 온몸을 흔들었다.

 

루는 온몸을 바닥에 부딪쳤다. 그럴 때마다 덜걱거리는 소리와 퍽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까지 그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연기의 중심. 폭발이 일어난 곳.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 검은 실루엣이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루시아 님!’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루는 곧 그것이 루시아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야, 루시아는 저렇게 커다란 덩어리가 아니니까.

 

그것이 발을 뗐다. 불길한 걸음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무언가 뭉개지고 바닥에 떨어져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밀려 들어온 바람에 연기가 가시면서 그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불쾌한 덩어리가 인간을 따라하고 있다. 철퍽대는 손끝 발끝을 뭉개 가면서, 그리고 그것을 겨우겨우 인간의 그것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애쓰면서.

 

루는 고개를 돌리고 중앙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덜걱, 덜걱, 척추 없는 움직임은 차라리 수영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팔과 턱으로 땅을 짚고 밀어내기를 반복했다. 연기가 걷힌 자리에 쓰러진 인영이 보였다. 루시아였다.

 

‘루시아 님.’

 

“루아!”

 

루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루시의 목소리였다. 잡음이 낀 듯한 목소리였지만, 아니, 그게 아니라. 해골의 머릿속이 뒤엉켰다. 그가 고개를 홱 돌려 창문 근처의 덩어리를 보았을 때, 덩어리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의 얼굴이 선명하다. 곧 조각나 무너지고 점액 속에 파묻혀 버린 얼굴이지만, 그의 뇌리를 꿰뚫고 지나가버린 그 얼굴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덜걱대는 사이, 덩어리는 창문 너머로 뛰어내렸다. 홀로 남은 창문만이 커튼을 휘감은 채 벽을 두들겨 대고 있었다.

 

‘일단 루시아 님을.’

 

아직도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내린 결론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몸을 비틀며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기절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바닥에 널브러졌다. 더는 움직일 힘도 없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 덩어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것을 되새기는 순간 그의 기억은 저 밑바닥에서 퍼 올린 진흙을 그의 얼굴에 처박았다.

 

‘루아. 루아의 얼굴.’

 

루시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냉장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하루가 도와주려는 모양이군. 그는 불안 속에서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

 

어둠이 찾아왔다.

 

 

-

 

 

루시아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채 그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걸음걸음마다 세상이 공명하는 듯한 울음소리가 사방에 퍼지고, 소리를 크게 지르자 사방에서 부드러운 메아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다시 걸음을 내디딘 순간 세상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어쩌면 세상이 그녀를 두고 도망갔다고 표현하는 게 적합할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그녀는 새로운 세상에 서 있었다. 물결치는 강, 그 위에 세워진 다리.

 

그녀는 허전한 느낌에 제 발밑을 바라보았다. 그림자의 빈자리가 흰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숙이면서 그림자의 빈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루시아?”

 

“하악.”

 

세상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벌벌 떨리는 반투명한 유령의 얼굴과 걱정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 루시아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루?”

 

반파된 해골이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그의 곁에는 천 위에 뼛조각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루시아는 그녀에게 쏟아지는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심호흡을 하고 눈을 다시 떴을 때, 루는 이제 쏟아진다기보다는 무너지는 형태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루, 잠깐, 어떻게 된 거야?”

 

그녀는 미끄러지듯 침대에서 내려와 루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심장 부근이 욱신거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가느다란 손이 싸늘한 해골 위를 쓰다듬는다.

 

“루시가 날 불렀어. 왔을 때는 루시아도 루도 쓰러져 있었고.”

 

“시온.”

 

루시아가 시온을 돌아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온은 무거운 얼굴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고 있었다.

 

루시가 벌벌 떨면서 루시아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싸늘한 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얹고 그 위에 머리를 툭 떨궜다. 시큰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 전에, 루, 루부터.”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가 시온의 곁으로 물러나고, 그녀는 손을 뻗어 루의 두개골을 떼어냈다. 너무 가벼웠다. 반이 부서져 속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탓일까, 유리 조각을 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 손가락에 감고 두개골 속으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녀가 손끝으로 두개골 안쪽을 더듬을 때, 그녀의 어깨가 살짝 흔들릴 때마다 루시의 얼굴색이 계속해서 변했다.

 

곧 루시아가 손가락을 빼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루시를 돌아보았다.

 

“다행이야. 인장은 괜찮아.”

 

“하아아아아아.”

 

루시가 바닥에 쏟아지면서 깊은 숨을 뽑아내었다. 루시아가 뼛조각 사이에서 두개골 조각을 챙길 때쯤, 시온이 바닥에 널브러진 루시에게 물었다.

 

“인장?”

 

“그, 네, 그러니까요, 목숨? 목숨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목줄?”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대답을 듣긴 힘들 듯싶었다. 시온이 어쨌든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릴 무렵 루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몸이랑 영혼의 연결고리야. 문제는 그게 없어지면 영혼이 아예 없어지게 되거든. 다행히 루는 무사해.”

 

“다행이다……. 그런데 복구할 순 있어? 저렇게 부서졌는데?”

 

“응. 할 수 있어.”

 

접착제로 두개골을 대강 붙인 루시아가 침대 위에 도구 몇 개를 내려놓았다. 시온이 보기에는 모두 그냥 나뭇가지 같았지만, 루시는 그 옆에서 늘어지는 목소리로 저건 무엇이고, 이건 무엇이며 차이는 어떠한지를 횡설수설 설명했다. 혼란만 늘어날 뿐이었지만.

 

“루시.”

 

“네? 네. 루시아 님.”

 

“대체 뭐가 일어난 거니?”

 

시온은 루시의 설명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떠올리고 막으려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시는 금방 진정하고 조곤조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했고, 그동안 루시아는 차분히 루의 몸을 수복해 갔다.

 

나뭇가지 다섯 개 중 세 개를 썼을 무렵, 루시의 설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루시아는 다리뼈를 골반 아래에 끼워 맞췄다. 그리고 새로 나뭇가지 하나를 들었을 때, 그녀의 손이 멈췄다.

 

뼛가루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을 거쳐 그녀는 나뭇가지를 뼛가루에 살살 비볐다. 나뭇가지에 뼛가루가 달라붙어 만들어진 것은 겨우 왼쪽 상완골이 전부였다.

 

“양이 맞지 않네요.”

 

루시가 말했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상완골을 루의 어깨에 연결했다. 시온은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면서 루시아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우선, 루아의 팔을 조금 빌리는 걸로 하자.”

 

“안 됩니다!”

 

셋의 뒤에서 찢어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란 시온과 달리 루시아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루가 찢어지려는 살점을 붙잡은 채 서 있었다.

 

“진정해, 하루. 루시아도 알아. 루아가 하루에게 정말 소중한 아이였다는 거.”

 

“아뇨, 저는, 그게…….”

 

곧 하루가 얼굴을 두 손을 덮고 고개를 푹 숙였다. 급기야 그가 무릎까지 꿇자, 루시아는 그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여 주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루시아도 가끔 그러잖아. 막 소리 지르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일단 살이 안 떨어지게 냉장고에라도 들어가 있어. 루아의 팔은…… 빌릴 뿐이야. 조만간 새로운 뼈를 사줄 거니까. 루한테는 쇼핑이 되려나?”

 

농담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각자의 자리로 움직였다. 하루는 냉장고 속으로, 루시아는 하루의 냉장고 옆 냉장고로.

 

그녀가 냉장고에서 꺼낸 것은 작은 단지였다. 그리고 그녀는 방금과 같은 일을 똑같이 행했다. 나뭇가지를 단지에 쑤셔 넣고 살살 돌리자 뼈가 조립되기 시작했다.

 

“사령술이란 건 신기하네.”

 

“루시아가 보기에는 마법이 더 신기하지만 말이야.”

 

팔뼈가 완성되자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루시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팔뼈의 끝자락을 루에게 맞춰 조심스레 갈아냈다. 곧 루의 어깨 아래로 루아의 팔뼈가 이어졌다.

 

그 과정을 루시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반투명한 유령의 몸이 희미하게 흔들거리는 것을 알아챈 시온이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루시아가 축 늘어지며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루시아는 그 자리에 앉아 안도와 혼란 그 사이 어딘가의 감정을 맛보고 있었고, 루시는 루아의 팔뼈를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약간의 침묵이 지나 시온이 손을 슬며시 들었다.

 

“어, 그 전에 말이야. 루아가 누구야? 누구길래 부활한 건데?”

 

“부활이라니!”

 

루시아가 고함을 내질렀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루시였지만 시온은 언데드들만큼 내성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녀는 물어봐선 안 되는 것을 물어봤나 싶은 마음에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꼬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입을 틀어막고 대답했다.

 

“그으러니까, 그, 미안. 루아는 몇 년 전에 죽은 언데드야.”

 

“어, 그런 거 물어봐서 미안.”

 

죽었다가 살아나서 다시 죽는다? 사령의 정의를 생각하면 ‘죽었다가 움직였다가 다시 스러진다’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시온은 루시아가 왜 죽었다고 표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시온의 뒤에 떠 있던 루시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루시아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죄송해요. 좀 들어가 있어도 괜찮을까요.”

 

“아, 응.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좀 쉬고 있어.”

 

루시는 힘없이 공중을 미끄러져 벽 너머로 사라졌다. 시온은 살며시 손을 흔드는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겠지.

 

루시아는 곧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떨궜다.

 

“그, 말하기 힘든 거면 안 말해줘도 괜찮아. 그냥 도와줄게.”

 

“아니야. 오래된 일이라서 이젠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한편 루시아의 얼굴색은 눈에 띄게 어두웠다. 그녀는 어디부터 설명해야 좋을까, 하고 고민하더니 책상에서 사진 몇 장을 집어 왔다. 해골 둘과 좀비 하나, 유령 하나와 루시아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여기 작은 해골 있지? 하루 앞에 있는 아이. 얘가 루아야. 하루랑은 사귀는 사이였지.”

 

하루의 반응을 떠올린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목소리를 낮춰 설명을 이었다.

 

“되게 예쁜 애였어. 하는 일이나 생긴 것이나. 해골 라인이 되게 예쁘게 잘 잡힌 애였거든. 그런 얼굴로 하는 행동마다 이쁜 짓이니 좋아할 수밖에 없는 애였지.”

 

루시아는 맨 위의 사진을 넘기며 두 번째 사진을 보여주었다. 화초에 물을 주는 모습이었다.

 

“거의 아무도 오지 않는 공동묘지 구석에 루아의 묘가 있어. 그 아이가 그곳에서 식물을 키웠거든. 이렇게…… 응.”

 

루시아는 바닥에 내려둔 사진 몇 장을 옆으로 밀어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시온은 혀를 살짝 깨물었다. 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문제는 폭풍이었어. 그러고 보니 오늘 밤에도 사령의 폭풍이 오겠지.”

 

“사령의 폭풍?”

 

마녀 쪽이었던 시온에게는 생소한 단어였다. 루시아는 짤막하게 설명했다.

 

“주기적으로 사령들이 막 날뛰는 거야. 어쨌든, 그게 우리 정신이나 언데드들의 영혼에 많이 부담이 가거든. 물리력도 있고 말야. 그리고 그날의 폭풍은 많이 거셌어. 정말로.”

 

시온은 루시아가 더 이상 보여줄 사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먹먹한 기분으로 그녀는 그저 경청하기로 했다.

 

“그날 루아의 두개골이 날아갔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말이야. 그리고 인장도 두개골 안에 있었지. 어떻게 되었을까, 시온?”

 

“아마 망가지지 않았을까…….”

 

“응. 맞아. 그 뒤로 한참 동안 루아의 두개골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역시 무리였나 보더라구. 보다시피 남은 건 텅 빈 육체가 전부지.”

 

루시아는 루아의 뼛가루가 담긴 단지를 쓰다듬었다. 아직도 미세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문제는 여기부터야.”

 

루시아의 목소리가 푹 가라앉았다.

 

“인장이 망가지면 영혼은 사라져. 하지만 오늘 본 루아는 뭐였을까? 루시가 말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야. 유령의 기억에 거짓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 얼굴은 진짜겠지. 그런데 왜?”

 

“파괴된 영혼을 복구하는 건 힘들지?”

 

“아예 불가능해. 루시아도 도전해 봤지만 전혀.”

 

“그럼 알고 보니 인장이 망가지지 않았다든지?”

 

“마법사에게도 의뢰를 넣어 봤지만 추적이 먹히지 않았어. 무엇보다 루시아가 새긴 인장이야. 루시아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어. 하지만 그때부터 쭉, 지금까지 루아의 신호는 잡히지 않았어.”

 

시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인장은 분명 파괴되었단다. 영혼도 찢어지면 복구할 수 없고. 그녀는 생각을 이어 가다가 한 가지를 물었다.

 

“루시아가 찾을 수 있는 건 영혼이야, 인장이야?”

 

“인장. 감이 왔나 보네, 시온.”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장은 파괴된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하지만 영혼은 어떨까? 어쩌면 그냥 세상을 떠돌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 아닐까?

 

“비슷한 생각을 했나 봐.”

 

“응. 그런 것 같애. 하지만 조금 다를 거야.”

 

루시아가 사진을 하나둘씩 주워 모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사진을 어루만질 때마다 숨길 수 없는 미안함이 묻어 나왔다.

 

“어쩌면 그때, 루아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려면 인장에서 탈출해야 하지. 그리고 루시아는 루아에게 인장을 탈출하는 방법을 알려준 적이 있어.”

 

“그럼?”

 

“정말 그 아이가 이곳에 다시 나타난 게 아닐까…….”

 

루시아는 얼굴 반쪽을 손으로 덮으며 말끝을 흐렸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를 바라보던 시온은 갑자기 두리번거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환실의 문을 열었다. 창문 아래에는 찐득거리는 점액이 질펀하게 퍼져 있었다.

 

“시온?”

 

루시아가 그녀를 돌아보자 시온은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냄새나는 점액을 손끝으로 찍었다.

 

“이건 루아, 그러니까 그 아이로 추정되는 어떤 덩어리? 그 녀석이 떨구고 간 거라고 했지?”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온은 그럼 됐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쓰고 있던 모자를 뒤집어 들었다. 루시아는 그녀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는 약간 망설이는 손짓으로 조심스레 손을 모자 속에 집어넣었다.

 

잠시 뒤적거리는 소리 끝에 그곳에서 튀어나온 건 그녀의 키 만한 빗자루였다. 자루에 시꺼먼 액체가 묻고 만 것을 본 시온이 인상을 찡그렸다.

 

“으으, 나중에 제대로 닦아야겠다. 어쨌든, 그 녀석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니 이만큼 좋은 것도 없지.”

 

그녀는 빗자루를 양손으로 들고 루시아의 앞으로 왔다. 그리고 그녀는 빗자루 끝자락에 새겨진 각인을 문질렀다. 각인이 밝게 빛나면서 그녀의 앞에 자그마한 빛의 구가 생겨났다. 그녀는 그곳에 점액을 문질렀다. 점액은 곧 사라졌다.

 

“직접 잡으러 가자, 루시아. 네 눈으로 보고 루아인지 아니면 잘못 찾아온 영혼인지 판단해 보자구.”

 

시온은 그렇게 말하고선 빗자루를 툭 쳤다. 각인이 한 차례 다시 밝게 빛났다. 조그만했던 빛의 구는 금세 커져 커다란 화면으로 변해 있었다. 둘은 화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곧 노이즈가 가시면서 선명한 영상이 떠올랐다.

 

루아로 추정되는 녀석이 그곳에서 걷고 있었다. 시온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툭 건드렸다. 화면이 반으로 갈라지며 한쪽에는 녀석의 모습이, 한쪽에는 녀석의 위치가 드러났다.

 

“와아, 고마워! 시온! 덕분에 찾으러 갈 수 있겠어.”

 

루시아가 시온을 와락 끌어안다가 잠시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의 몸을 받친 시온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며 빗자루로 바닥을 퉁 두드렸다.

 

“그런 몸이니까 같이 가야겠지?”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루시아와 시온이 사라지고 방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불청객만은 아니었다. 루는 기절했고, 하루는 냉장고에 틀어박혔고, 루시도 이제야 벽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불러온 침묵이었다.

 

루시는 입술이 무거운 것을 느끼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공중에 떠다니기보다는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네보다는 벽에 기대앉는 게 좋겠지. 그녀는 쓰러지듯이 몸을 벽에 기댄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후려치고 사라졌다. 루시는 그렇게 한참 동안 조용히 있었다. 가끔 날아오는 바람이 제 뺨도 같이 후려쳐주기를 기다리면서.

 

냉장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였다. 루시는 무거운 움직임으로 일어나 하루를 바라보았다.

 

‘어디 가려고?’

 

묻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속으로 말을 삼키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하루는 그녀를 힐끔 보고는 냉장고에서 코트를 꺼내 걸쳤다. 좀비를 위해 루시아가 사 둔 특제 코트였다.

 

냉기를 줄줄 흘리면서 하루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흘러가는 시간에 제 의식을 맡겼다. 그래서일까, 작은 소리와 함께 그녀를 방문한 것은 황혼의 시간이었다.

 

달각대는 소리. 루가 침대에 넋 나간 듯이 앉아 있었다.

 

“루.”

 

그가 고개를 홱 들었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온몸의 뼈를 달각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루시는 턱짓으로 그의 옆에 놓인 공책과 펜을 가리켰다. 루는 곧바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리 그의 글씨체는 엉망이었다.

 

‘팔이 이상해. 뭐가 일어난 거야? 루시아 님은?’

 

루시는 루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일단 차례대로 대답하자면, 네 양팔은 루아 거고, 소환 과정에서 뭔가 이상한 게 튀어나왔고, 그게 루아일지도 모르고, 루시아 님은 그 루아일지도 모르는 녀석을 찾으러 나갔고.”

 

‘하나하나 설명해 봐.’

 

루시는 그의 요구대로 천천히, 세세하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루시아가 무사하단 말을 들은 그의 표정이 밝아졌지만, 루아의 일을 듣자 그의 몸은 다시 달그락거렸다.

 

“그렇게 됐어.”

 

‘‘그렇게 됐어’가 아니잖아. 루아야? 그게 루아였다고? 정말?’

 

루는 기절하기 직전에 보았던 그것의 얼굴을 떠올렸다. 조각나 무너지는 얼굴에는 확실히 루아의 얼굴이 묻어 있었다. 선이 예쁜 해골이었으니까.

 

그때 그가 뭔가 생각난 듯 공책에 글씨를 빠르게 휘갈겼다.

 

‘하루는?’

 

“나갔어. 코트까지 챙겨 입고. 아마 공동묘지로 갔겠지.”

 

루시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 공동묘지에 식물을 심기로 한 데에는 이 풍경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었다. 루시가 앉아 있는 곳에선 숲속의 그 공동묘지가 어렴풋이 보였다. 홀로 썰렁한 그곳엔 썩은 해골에 들러붙은 살점처럼 드문드문 검은 묘비가 보이고 있었다.

 

순간 그곳에 폭풍이 일었다. 보라색의 소용돌이가 치솟는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찢어지는 바람소리가 아닌 루아의 비명이었다. 온몸으로 내는 비명.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루시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곳엔 고요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올 폭풍을 떠올린 그녀는 곧 그것도 단순한 고요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날, 루아의 두개골이 폭풍에 휘말려 사라져버린 날, 루시가 널브러진 그녀의 몸뚱이를 내려다보았던 날.

 

“루. 나 말이야.”

 

루시가 입을 열었다. 루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맞지 않았다.

 

“진짜 후회하고 있어. 그날 루아에게 장난친 거.”

 

 

-

 

 

걸음걸음마다 오싹거리는 떨림이 전해져 왔다. 폭풍의 전조였다. 하루는 복잡한 얼굴로 사방을 돌아보며 공동묘지 구석으로 향했다.

 

사방에 널린 부서진 묘비와는 달리 정갈한 분위기의 묘지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묘비를 거쳐 그 뒤에 피어난 수많은 화초를 쳐다보았다. 형형색색의 꽃과 시원스레 잎을 뻗은 화초들이 묘비를 둘러싸고 애도하고 있었다.

 

“루아.”

 

그는 익숙하게 묘비 앞에 앉았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말투에서는 처음의 슬픔 대신 옅어진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는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려고 했다.

 

그의 입에서 정적이 샌다.

 

하루는 문득 눈앞의 묘에 대고 루아라고 부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밟아 온 그녀를 향한 모든 걸음걸이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루는 자리에 앉은 채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손끝에 걸리는 실밥의 감촉이 무디다. 그는 그것을 조심스레 풀어냈다.

 

코트를 벌려 받아낸 살점은 아직도 살아 있는 듯 꿈틀대고 있었다. 가슴의 통증을 무시하며 그는 그곳에 새겨진 인장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루시아가 가르쳐 준 인장을 탈출하는 방법이 떠올랐다. 그 뒤에는 텅 빈 몸뚱이와 인장만이 남는다고 말한 것도.

 

“내가 이 몸을 바친다면.”

 

너는 이곳에 들어와 줄까?

 

 

-

 

 

루는 고개를 숙였다. 루시는 여전히 건조한 얼굴로 공동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가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뻗었지만, 손은 무자비하게 그녀의 외곽선을 짓뭉갤 뿐이었다.

 

“그 손으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무래도 힘들거든. 진짜 그 애가 나한테 그러는 것 같아서.”

 

루는 재빨리 손을 거두고 공책에 글씨를 휘갈겼다.

 

‘그 애는 어쩌면 널 용서했을지도 몰라.’

 

루시는 힐긋 공책을 훑고는 다시 공동묘지를 바라보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사람의 생기가 떠나고 언데드의 한기가 창틀을 싸늘하게 식혔다. 루가 저녁의 바람이 슬슬 차다는 것을 느낄 무렵, 루시는 입을 열었다.

 

첫 번째로 꺼낸 말은 말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혀가 꼬인 듯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지만, 그것도 깨끗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음이었다.

 

“알아. 그 애라면 그럴 거야. 분명히 그렇겠지. 그리고 그런 애를 사지로 몰아넣고 만 게…… 나야. 내가.”

 

루시의 말꼬리가 으스러졌다. 형태를 잃은 말을 삼키기도 힘들었던 그녀는, 곧 그것을 도로 뱉어냈다.

 

“내가 루시를 죽였어.”

 

 

-

 

 

그는 잠시 멍하니 살점을 한 손에 쥔 채 인장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맥동하는 살점에 새겨진 인장은 루시아의 머리색과 같은 밝은 연두색이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보다는 루아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살점을 도로 가슴에 박아 넣고 어느 정도 붙을 때까지 기다렸다. 살이 그나마 조금 붙었을 때쯤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하루는 태엽 멈춘 시계처럼 그 자리에 굳은 채 묘비를 바라보았다. 루아. 우루하 루시아의 사령. 향년 27세. 무미건조한 글자 옆에는 목판에 새겨진 짤막한 편지가 매달려 있었다.

 

하루의 머릿속엔 이미 편지의 내용이 모두 들어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다시 목판의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루시아의 것과 루의 것, 하루의 것, 그리고 다른 지인들의 것.

 

루시는 그곳에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

 

 

-

 

 

 

루가 급히 공책에 휘갈기려는 것을 본 그녀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녀는 공동묘지를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난 어디까지나 그 애의 생일 때 조금 깜짝 선물을 준비해주고 싶었어. 하루 녀석의 살점을 조금씩 모아서 압축한 걸 보석에 박아 넣은 반지였지. 좀비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잖아.”

 

루시의 뇌리로 그날의 폭풍이 스쳤다. 그건 너무 거셌다. 분명 예상 범위 바깥에서 장난을 쳤는데. 그건 안전지대였는데.

 

‘아니야!’

 

루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변명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녀의 속에 담긴 마음이 어떤 것이었든, 그녀의 손에 떨어진 건 너무나도 차가웠다.

 

루시는 부들부들 떨리는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서프라이즈라고 외치면서 주고 싶어서, 장난을 좀 쳤는데. ……아니, 아니야, 그냥 내가 멍청했을 뿐이지.”

 

루시는 고개를 들었다. 초점 맞지 않는 눈은 루아의 묘지를 찾아 허공을 헤멨다.

 

“나는 선을 넘어버린 거야.”

 

 

-

 

 

그날 하루의 눈동자에 박혀 들어온 것은 환상과 현실의 사이 그 어딘가였다. 루아는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편안한 걸음걸이에도 배어든 정갈함으로 그녀는 그에게 다가왔다.

 

‘루아.’ 하루가 그렇게 부르는 순간 그는 현실로 내팽개쳐졌다. 사령의 폭풍으로 엉망이 된 공동묘지를 구르며, 흙투성이가 된 채 바라본 그곳에는 뼈아픈 현실이 있었다.

 

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체의 시체 앞에 유령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그녀는 온몸을 비틀면서 제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루시.”

 

썩은 목소리가 찢어진 살점에서 흘러나온다. 하루는 묘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루아의 묘가 아니었다. 루아는 다른 곳에 있었다. 루시아가 불러온, 그 무너져가는 몸뚱이 속에.

 

그래. 무너져가는 몸뚱이 속에.

 

 

-

 

 

루가 루시의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공책을 내밀면서 글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만해. 네 잘못은 맞지만 그건 오래된 일이야. 그렇게까지 힘들어하지 마.’

 

“그렇게까지 힘들어하지 말라고?”

 

루시는 루에게서 도망치려는 듯 상체를 뒤로 기울이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헤맨 끝에 도달한 시선의 목적지는 결국 루의 얼굴이었다.

 

“하루에게 그 말을 똑같이 해 보시지. 가족을 부수고, 하루를 부수고, 종국에는 나까지 망가뜨렸어. 그런데 내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어?”

 

 

-

 

 

하루는 제 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날 이후로 그의 살점은 몸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더 자주, 그리고 더 아프게 벌어졌다. 코트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도 불구하고 살점은 제멋대로 사방을 향해 쓰러지려고 했다.

 

하루는 묘비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목 부근의 실밥이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자 진 얼굴로 묘비를 등진 채 서 있었다.

 

툭. 투둑. 몸 곳곳에서 실밥이 떨어지고 있었다.

 

 

-

 

 

루와 루시의 시선이 서로를 향하는 듯 하면서도 엇갈린 곳을 바라본다. 루가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을 때, 루시가 공중으로 떠오르며 중얼거렸다.

 

“루시의 몸은 꽤 힘들어 보였어.”

 

 

-

 

 

루시의 몸은 이런 몸보다도 연약했다. 하루는 일부러 주먹을 꽉 쥐어 팔뚝의 실밥이 터져 나가게 했다. 그럴수록 살점이 벌어지는 고통이 그를 쑤셔 댔다.

 

그는 돌연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언가 떠오른 듯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묻어 나왔다.

 

“루시.”

 

 

-

 

 

루시는 공중으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루가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것이 루아의 손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멈칫하고 말았다.

 

루시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 같은 건 사라져야 마땅하겠지.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건 내가 아닌 루아여야 하니까.”

 

 

-

 

 

“루시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뭔데?”

 

시온은 빗자루의 속도를 늦추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겁먹은 듯 시온의 얼굴을 붙잡아 앞으로 돌려놓았다.

 

“영혼이 인장이랑 몸을 뺏을 수도 있는 거야?”

 

“루아 말하는 거구나. 특별한 이유 없으면 그런 일은 없어. 서로 괜찮다고 받아들여야 하거든.”

 

“그렇구나.”

 

시온이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루시아는 고개를 내려 지면을 바라보려다가, 공중에서 대롱거리는 제 발을 보고는 홱 고개를 들었다. 숲의 나무들이 너무 작아 보였다.

 

“루시아, 무섭지 않아?”

 

루시아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풍경에 내성이 없는 그녀로서는 빗자루 비행은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대답을 들은 시온은 침음하더니 말했다.

 

“아니아니, 그거 말고. 루아…… 가 되살아났다면.”

 

“그것만이라면 루시아는 그다지 무섭지 않을 것 같아.”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시온은 어깨 뒤로 루시아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 그녀가 말을 이었다.

 

“루시아가 무서운 건 다른 거야. 루아가 되살아난다면 물론 기쁘겠지만, 그런 충격을 받은 그 애가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너무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루시아는 아직 할 말이 남았던 듯 잠시 생각한 끝에 짤막하게 덧붙였다.

 

“게다가 조금 복잡한 일이 있었거든.”

 

“복잡한 일?”

 

루시아는 침묵했다. 시온이 그 일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루아가 죽은 데에는 루시의 책임이 있어.”

 

시온은 잠자코 들었다. 루시아의 손가락이 빗자루를 톡톡 두들기는 소리가 바람 찢어지는 소리를 뚫고 그녀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알다시피 루시가 장난을 좀 많이 치잖아. 그날은 하루의 생일이었는데, 아니아니, 그러니까 되살린 기념일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날이었어. 동시에 폭풍이 온 날이었고. 루시는 하루랑 루아에게 커플링을 주려고 했지. 그런데 루시는 일부러 루아의 것은 그 식물 근처에 숨겨두고 온 거야.”

 

“그리고 폭풍이 온 거고?”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은 그제야 루시의 표정이 어두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슴 한 켠이 쿡쿡 쑤시는 기분이다.

 

“폭풍이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응…… 하지만 그날 폭풍은 정말 거셌어. 평소 범위의 두 배는 잡아먹을 정도로. 그리고 그 두 배 정도 되는 지점의 경계선 정도에 반지가 있었어.”

 

“그럼 과실치사려나.”

 

“어쩌면.”

 

바람이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휘감아 잡아당겼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덧붙였다.

 

“루시아는 말이야, 그래도 루시가 마냥 밉지는 않아. 너무 어렸고 바보 같은 행동이었지만, 그걸 제일 잘 아는 것은 루시였거든. 하지만 하루나 루아에게는…… 그렇지 않을 거야.”

 

둘은 침묵했다. 바람이 허공을 후려치는 소리가 귓구멍으로 파고들었다. 소란 속의 정적에 시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적절한 대답이 뭐지?

 

다시 눈을 뜬 시온은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구름, 산, 빗자루, 그 위에 새겨 놓은 각인, 모자의 챙, 다시 어둠 속으로.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시온이 고민에 잡아먹힌 사이 루시아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는데. 시온의 등에서부터 이미 난처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녀는 빗자루를 양손으로 붙잡고 고개를 젖혔다. 구름이 낀 하늘이 보였다. 폭풍의 전조인 모양이다.

 

“아, 찾았나 봐.”

 

정적은 얼마 가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시온은 알림을 울려 대는 빗자루 끄트머리를 잡고 각인을 꾹 눌렀다. 그러자 허공에 빛으로 된 화면이 떠오르면서 기호들이 그곳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내비게이션?”

 

“어, 응. 그런 역할.”

 

시온은 화면을 몇 번 두드린 후 빗자루를 꽉 쥐었다. 그리고 아래로 지그시 누르며 속도를 올렸다. 세상이 위로 홱 꺾이면서 지면이 그들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시끄러운 소음이 그들의 귓가를 할퀴고 차디찬 바람이 피부를 스쳐 지나갔다.

 

“우와아아아악!”

 

시온이 루시아의 비명을 알아채고 속도를 낮췄지만 이미 그녀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온의 등에 머리를 폭 떨군 채 온몸으로 빗자루를 끌어안고 있었다.

 

“어, 미안. 괜찮아? 다친 데라든지 없고?”

 

“뭐 하는 거야아…….”

 

앓는 목소리로 비틀대며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게 보이던 나무가 갑자기 가까워져 있었다.

 

“저기 있다.”

 

루시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루시아의 옆얼굴에 얽힌 묘한 감정을 읽은 시온은 저도 아무 말 없이 있기로 했다. 그녀는 빗자루를 잡고 천천히 녀석의 걸음을 쫓았다. 녀석은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와본 곳이야.”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진 한 마디가 그것의 위에 어느 모습을 씌웠다. 간편한 티셔츠에 치마를 입고 천천히 걷던 한 언데드.

 

“루아랑 같이.”

 

루시아가 덧붙였다.

 

그것은 한참 걸었다. 황혼의 시간, 숲은 이미 그림자로 가득 차고 하늘에 햇빛의 편린만이 둥둥 떠다니는 시간, 루시아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그것을 계속 내려다보았다.

 

감시와 회상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숲은 길었고 시간은 그것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다. 어느새 밤이 다가오지만 녀석의 산책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는 듯 녀석은 어둠에 싸인 나무를 어루만지고, 꽃을 바라보고는, 계속 걷기를 반복했다.

 

“그냥 산책만 하는 건가?”

 

“아니.”

 

시온이 화들짝 놀라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루시아가 빗자루를 꽉 붙잡은 채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시온, 혹시 우리가 온 경로 같은 걸 보여줄 수 있어?”

 

시온이 화면을 조작하자 지도 위에 구불구불하게 그려진 선이 떠올랐다. 루시아는 그것을 살피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루아.”

 

“어, 루아? 맞는 거야?”

 

루시아가 옆머리를 오른손으로 꾹 누르면서 대답했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볼을 가로지른다.

 

“몇 년 전에 사라진 산책로야. 그걸 계속 걷고 있는 거야. 루아가 좋아하던 길이었어……. 시온, 내려가 줄래?”

 

“뭐? 안 돼. 위험할지도 몰라. 너 쓰러져 있던 거 기억 안 나?”

 

“소환이 잘못되면서 폭발이 일어났을 뿐이야. 저 아이가 루시아를 직접적으로 공격한 적은 없어. 설령 루시아에게 적대적이라 해도, 우선 말을 걸어봐야 그것도 알 수 있을 거야. 시온, 부탁할게.”

 

시온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얼굴은 혼란과 슬픔이 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만은 달랐다. 굳게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를 보고 만 시온은 침음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적정거리 지키고. 내 보호 범위 넘어가지 말고. 또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쓰러뜨리든지 도망가든지. 그것만 지켜.”

 

“응.”

 

시온의 빗자루가 땅에 내려앉았다. 밤의 숲속은 어두웠다. 하지만 루시아의 눈에는 그것이 똑똑히 보이는 모양이었다. 시온이 마법을 시작하기도 전 그녀는 먼저 앞으로 나섰다.

 

“루아?”

 

시온이 부랴부랴 마법을 걸고, 반투명한 보호막이 설치되었을 즈음 루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것을 불렀다. 아니, 그녀라고 해야 할까. 시온은 그것을 부를 만한 적절한 말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녀석의 발걸음이 멈췄다. 루시아는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면서 조금 더 크게 그녀를 불렀다.

 

“루아?”

 

철퍽. 점액이 바닥에 떨어졌다가 도로 들러붙는다. 되살아나다 만 좀비를 산 용액에 넣고 섞으면 그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온은 불길한 기분에 빗자루를 움켜쥐고 보호 마법을 하나 더 걸기로 했다.

 

녀석은 이제 루시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녀석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돌연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숲의 그림자에서 바깥으로. 그나마 달빛이 구름을 거쳐 흐릿하게 땅을 비치는 곳으로. 녀석이 루시아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 녀석의 얼굴이 꿈틀대더니 찰흙 인형처럼 형태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든 과정을 둘은 숨죽여 지켜보았다.

 

머리가 깎여 나가고 꽤 많은 점액이 몸뚱이에 녹아들었다. 팍, 하고 터져 나가는 점액 사이로 해골 모양으로 변한 머리가 드러났다. 루시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루아가 맞다는 거야?”

 

퍽, 퍽, 소리를 내며 튀어 나가는 점액 사이에 녀석의 목소리는 없었다. 대신 루아의 모습으로 변한 얼굴만이 철벅거리면서 하관을 떨 뿐이었다.

 

“시온, 혹시 텔레파시 마법은 없어?”

 

“미안. 그건 너무 위험해. 아직 안전한지도 모르는 저 녀석과 네 머리를 연결할 수는 없으니까.”

 

루시아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방어막의 경계선을 보고는 그 바로 앞까지 가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해골을 점액 위에 얹어둔 것 같다. 둘의 시선은 한참 동안 맞부딪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숲속에 바람이 불어와 조용한 새소리를 나뭇잎 날아가는 소리가 뒤덮을 무렵, 녀석은 한 발짝 한 발짝 그녀를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시온이 흠칫하며 루시아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루시아가 손을 뒤로 뻗는 것을 본 그녀는 멈칫하고 말았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은 아직도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씨이…….”

 

시온은 빗자루의 각인을 문지르며 여차하면 공격할 준비를 했다. 한편 녀석은 이제 루시아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방어막을 사이에 둔 채 둘은 서로를 마주했다.

 

그르르르. 점액 끓는 소리가 났다. 말을 건넨 것일까? 루시아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대답했다.

 

“루시아야. 루아.”

 

녀석이 침묵했다. 철벅거리는 점액 떨어지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시온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식은땀을 닦아냈다. 적막. 그 속에 울려 퍼지는 철벅거리는 소리는 경계일까, 안심일까?

 

루시아가 손을 들어 보호막에 가까이 대었다. 돌연 녀석의 몸이 꿈틀거렸다. 시온이 혀를 잘근잘근 씹으며 마법을 날릴 준비를 했지만, 녀석은 루시아를 공격하지 않았다. 점액 속에서 길다란 촉수가 뽑혀 나오면서 점차 손의 형상을 갖추었다.

 

녀석은 루시아의 손에 제 손을 맞댔다. 둘의 손바닥 사이에 끼인 보호막이 진동했다. 시온이 마법을 당장이라도 날릴 준비를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녀의 얼굴에 서린 긴장감은 사그라들었다.

 

‘진짜?’

 

시온은 눈을 깜빡거리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죽은 영혼이 돌아왔다고? 아니, 애초에 죽지 않았다고? 뭔가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기분인데. 그녀는 제 손바닥 안에서 진동하는 마법의 빛을 내려다보았다.

 

시온은 한숨을 쉬면서 마법의 출력을 낮췄다. 혹시 몰라 준비는 하고 있겠지만, 그들은 적어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 눈은 옛날의 그 눈일 것이고, 그 손은 옛날의 손을 이어받은 지금의 손이 되었겠지. 시온은 공중에 떠 있는 빗자루에 걸터앉았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씨가 꺼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시온은 모자의 챙을 붙잡으면서 얼굴로 달려드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렸다. 끈적거리는 공기가 그녀의 얼굴을 한 번씩 핥고 지나가는 듯하다. 그녀는 소매로 볼을 문질렀다.

 

‘뭐지?’

 

그녀가 내려다본 소매에는 눅눅한 바람과 꺼칠한 그림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급히 손을 들고 마법의 출력을 다시 높였다. 그때쯤 시온은 루시아의 말을 떠올렸다. ‘문제는 폭풍이었어. 그러고 보니 오늘 밤에도 사령의 폭풍이 오겠지.’

 

거센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늘어졌다. 나무의 손을 놓친 나뭇잎이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그녀는 간신히 눈을 뜨고 바람이 불어온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랏빛 세계. 거센 바람과 함께 사령들이 깨어나고 있다.

 

“지금……?”

 

“루아!”

 

루시아의 비명이 시온을 일깨웠다. 그녀는 곧바로 뒤돌아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때 다시 밀려든 바람이 마법의 빛을 흐트러뜨린다.

 

그 사이였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시온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루시아의 눈은 그것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갖 것을 모방하며 울부짖는, 하루의, 루시의, 루의, 시온의, 그리고 루시아의 얼굴을.

 

“너…….”

 

루시아가 입을 여는 사이 녀석의 점액이 폭삭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정적과, 아주 짧은 간격을 거쳐서.

 

녀석이 폭발하듯 팽창했다.

 

“루시아!”

 

시온이 소리친다. 새로운 마법이 그녀의 손을 떠나고, 환한 빛을 사방으로 흩날리는 사이. 그 빛마저 밀어닥친 바람에 찢어지는 광경이 시온의 망막에 내리꽂힌다.

 

점액이 루시아를 집어삼킨다.

 

 

-

 

 

“루시!”

 

하루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텅 빈 방 안에 울려 퍼진다. 아니, 텅 비었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사방에 널브러진 필기구와 종이 쪼가리, 그리고 그 사이에 루가 쓰러진 채 꿈틀대고 있었다.

 

“루?”

 

‘하루.’

 

루는 제 몸에서 분리된 두 다리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것은 비단 뼈만이 아닌 루시의 환영도 서린 것이었다. 울고, 제 목을 조르고, 결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

 

창문이 덜컹거렸다. 하루가 불안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사이, 루는 거친 필체로 한 문장을 바닥에 휘갈겼다.

 

‘루시를 막아야 해.’

 

“알고 있어. 그럴 것 같았으니까. 어디로 갔지?”

 

루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창문 밖을 가리켰다. 공동묘지가 보였다. 그 순간, 하루는 그곳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알아챘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도 전에 사태는 벌어졌다.

 

열린 창문 너머로 끈적한 광풍이 들이닥친다.

 

 

-

 

눈앞이 흔들린다. 루시는 눈을 질끈 감으며 비틀거렸다. 너무 오랜만에 물건을 들어서일까. 아니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루의 다리를 그렇게 떼어 놓아서였을까. 그녀는 눈을 다시 뜨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좋아.

 

그녀는 제 눈앞으로 작은 케이스를 띄워 올렸다. 그런 행위 하나하나가 두통의 주범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제 머리를 찌르는 통증을 무시하면서 눈빛만으로 케이스를 열었다.

 

그곳엔 반지가 있었다. 마법사가 특수 방부 처리한 하루의 살점이 꽃 모양으로 조각된 채 그 속에서 죽어 있는, 이제는 그런 반지였다.

 

루시는 문득 오래된 날을 떠올렸다. 이 살점이 아직 살아 있을 적, 그녀는 언제나 청초했다. 루시는 아직도 루와 단둘이 하루와 루아의 미래를 축복하던 어느 밤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잊게 되겠지.

 

“오는군.”

 

루시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비틀대는 걸음으로 허름한 공동묘지의 구석으로 향했을 때, 사령이 하나둘씩 세상을 향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루시는 루아의 묘비 옆에 앉아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보랏빛 세계. 사령술사가 부르지도 않은 이 세계로의 불청객. 그녀의 눈앞에서 보랏빛 소용돌이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망가진 묘비의 조각이 하늘로 치솟고, 풀밭을 뒤집어 집어삼키고, 이곳에 잠든 영혼의 깊은 잠을 방해하는.

 

루시의 손끝을 통해 바닥의 진동이 전해져 온다. 루아의 묘비가 덜덜 떨리는 것을 본 루시는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을 지그시 감는 그녀의 귓가로 사령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루시가 알기로는 사령의 폭풍은 한참 동안 몸이라도 풀듯 서서히 휘몰아치다가 어느 순간 확 세기를 키우는 편이었다. 루시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령의 폭풍이 거세지면 그녀도 그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

 

그녀의 발치에 사령이 기고 있다. 루시의 얼굴색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제 몸을 뚫고 지나가는 보랏빛 바람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웠던가?

 

“아악!”

 

사령 하나가 그녀의 머리에 달라붙었다. 루시가 그것을 내던지고 폭풍을 다시 바라보았을 무렵, 사령의 장벽은 어느새 루아의 묘비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묘비의 앞으로 몸을 던졌다.

 

“안 돼. 안 돼, 이건!”

 

광풍이 그녀의 시야를 찢어 놓았다. 조각난 세상 속으로 수많은 광경이 비친다. 보랏빛 바람, 사령의 일그러진 얼굴, 망가진 잔디밭, 그리고 투명한 막에 보호받는 루아의 묘비.

 

“아, 그랬었지.”

 

루시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기운 없이 웃으면서 폭풍 속에서 이리저리 내던져졌다. 그녀는 온몸을 비틀고 주변의 바람을 밀어내려 애썼다. 긴 사투 끝에 그녀는 폭풍의 눈 속에 곤두박질쳤다.

 

눈앞까지 다가온 잔디는 생기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땅속으로 푹 꺼지는 손을 보고 허허 웃는다. 잔디 위에 걸터앉은 그녀는 점점 짙어져 가는 바람을 보고 눈을 감았다.

 

“루아. 돌아온다면 날 기억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녀의 곁으로 발소리가 다가온다. 철벅, 철벅……. 루시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정면을 향해 들었다. 유령의 눈물이 몸을 관통해 잔디를 적신다. 그녀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와.”

 

 

-

 

 

루시아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그 표정이 그녀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시온은 병실 침대 시트를 만지작거리며 다른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의사가 했던 말이 되살아났다. ‘신체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영혼 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요.’

 

시온은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무참하게 찢어지는 보호막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내 잘못이야.’

 

루시아가 놈에게 집어 삼켜진 뒤, 예상외로 놈은 그녀를 빨리 풀어 주었다. 다만 그것이 정신을 잃은 루시아의 몸뚱이일 뿐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시온이 쓰러지는 루시아를 간신히 받아냈을 때, 놈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진작에 포획했어야 했어. 쓸데없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병원의 창문이 소란스럽다. 그녀는 창밖을 노려보았다. 흉흉한 보랏빛 바람이 서서히 진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그 광경을 째려보다가 다시 루시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는 평온했다. 시온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루시아의 언데드들이 걱정됐다. 루시아의 영혼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 애들에게도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물어볼 사령술사가 없으니 걱정은 커져만 갈 뿐이었다.

 

“잠깐만 빌릴게, 루시아.”

 

시온은 루시아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내 빗자루의 각인에 감았다. 그러자 각인의 빛이 공중에 화면을 띄웠다.

 

“타깃은 루시아의 언데드들로.”

 

시온의 목소리에 따라 화면 위에 지도가 떠올랐다. 그 위에 새겨진 세 점과 함께.

 

시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수 갈래 생각이 스쳤다. 지도는 정확하다. 세 점은 모여 있다. 이름표는 정상이다. 루시아의 정보는 제대로 입력했다. 다시 말해 위치 추적이 틀릴 이유는 없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점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창밖의 폭풍을 바라보았다. 모든 점은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사령의 폭풍의 중심지에.

 

 

-

 

 

“왜 온 거야? 아니, 어떻게 온 거라고 물어야 할까?”

 

루시의 말은 죽어가고 있었다. 이미 죽은 몸뚱이에서 다시 죽어가는 느낌은 생각보다도 더 싸늘했다. 루는 하루의 등에서 내려오며 턱뼈를 달가닥거렸다.

 

루시는 점액으로 뭉친 루아의 얼굴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겨우 한 뼘이나 될까 싶은 거리를 둔 채 서로를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루는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루시아 님이 냉장고에 간이 마법 각인을 좀 넣어 뒀어. 마구잡이로 가져온 것 중에 보호 각인이 있었는데, 그걸 좀 쓰니 여기까지 들어올 수는 있더군.”

 

입을 연 건 하루였다.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떨어지려는 그의 손가락을 붙잡은 루가 턱뼈를 달각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내심 루시의 농담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그의 성대에는 이제 관심이 없는 듯했다.

 

루시가 입을 열었다.

 

“하루, 난 이제부터 루아에게 인장과 내 몸뚱이를 넘길 거야. 내 몸이지만 잘 보살펴 줘. 이제부터는 루아가 이곳에 살 테니까.”

 

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고목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떨어지려는 살점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폭풍이 세운 사령의 장벽이 한 차례 번쩍거렸다. 루에게는 익숙한 빛이었다. 루시아가 소환을 시작할 때면 꼭 이런 빛이 한 번쯤은 반짝거리곤 했다. 사령의 소환을 의미하는 빛이니까.

 

“곧이야. 빨리 빠져나가는 게 좋을걸.”

 

“난 실밥이 풀렸고 루는 해골이야.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군.”

 

“말장난이라도 하고 싶은 거니? 보호 각인이 남아 있다는 거 다 알아.”

 

루시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나란히 선 둘을 돌아보았다. 얼핏 드러난 그녀의 시선은 곧 땅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남았던 자리에는 어두운 그림자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루가 하루의 팔을 툭 건드렸다. 그는 수첩에 빠르게 문장을 휘갈겼다.

 

‘내가 설득할게.’

 

“아니.”

 

앞으로 나서려던 루가 발을 내려놓지도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고목 같은 표정이었다. 루아가 죽었던 날과 같은 표정.

 

광풍이 휘몰아쳤다. 두개골을 양손으로 붙잡은 루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령의 폭풍을 바라보았다. 색이 확연히 변해 있었다. 본격적인 폭풍이 오려고 한다.

 

“루시!”

 

하루가 소리쳤다. 그는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계속 소리쳤다.

 

“그 녀석에게 인장을 준다 해도 소용없을 거다. 인장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결국 그 영혼이나 네 몸뚱이나 사라질 테니까.”

 

“너도 알잖아. 이 폭풍 속에선 누구나 쉽게 인장을 뺏을 수 있다는 걸. 루아도 예외는 아니야.”

 

“어차피 그렇다 해도 네 몸뚱이나 놈의 영혼이나 이 폭풍에 휘말려 사라지게 될 거다!”

 

“폭풍의 눈도 모르진 않겠지, 하루. 나도 그 정도는 알아.”

 

“하지만 이번 폭풍은 조금 다르지. 규모부터가 달라. 루아의 묘까지 오지 않던 범위였는데 그걸 이미 한참 넘어섰어.”

 

“폭풍의 눈에서도 버티긴 힘들긴 하겠네. 그래. 하지만 난 유령이야. 땅속으로 파고들어 루아의 묘비 아래로 들어가면 그만이거든.”

 

“묘비의 주인만이 그곳에 있을 수 있다는 걸 너도 알 텐데.”

 

“그래서야.”

 

루시는 손을 뻗어 점액 덩어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녀가 뒤돌아 하루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묻은 건 무엇도 아닌 후회와 자책이었다.

 

“내가 그곳에 간신히 들어갔을 때쯤엔 이미 루아의 영혼일 테니까. 하지만 너희들은 아니야. 자, 돌아가. 어서.”

 

하루는 제 몸뚱이를 뒤에서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곧 그것이 루시의 짓임을 알아채고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며 받아쳤다.

 

“넌 정말 그게―!”

 

광풍이 몰아쳤다. 곧 하루는 제 시야가 어딘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메아리? 아니, 메아리는 아니었다. 그건 합창 같은 느낌이었다. 불협화음으로 장식한 철조망 같은.

 

조각난 시야 속에 하루의 몸뚱이가 들어왔다. 바람에 휩쓸려 조각난 살점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루가 달각대며 다가오는 것이 얼핏 보였지만 곧 바람 탓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루, 저게! 그거 봐! 내가 나가라고 했지! 야, 루! 빨리 저거 주워! 각인 쓰는 법은 알 거 아니야!”

 

루가 헐레벌떡 달려와 잔디밭을 구르는 각인을 주워 모았다. 그가 각인을 활성화할 때쯤엔 이미 하루의 몸이 거의 조립되어 가고 있었다. 루시는 머리를 난도질하는 듯한 두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대충 조립했으니까 가. 걸을 수 있을 거야.”

 

하루는 뭐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그의 입은 코트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빠지지 않았다. 그가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건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했다. 루시는 거칠게 호흡하면서 도로 뒤돌았다. 가만히 있는 녀석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등에 대고 루가 턱뼈를 달가닥거렸다.

 

그건 단지 작은 소리였다. 의사소통을 하기에는 너무 불명확한 소리. 하지만 루시는 잘 알고 있다는 듯 대답했다.

 

“미안해. 난 가지 않아.”

 

루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루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루아를.

 

그녀의 등에 찌릿한 감각이 퍼졌다. 그녀가 황급히 뒤돌자 뭔가를 던진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루가 보였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각인이 하나 있었다. 이내 그녀는 그것이 보호 마법과는 다른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루시의 몸이 허물어졌다.

 

루가 급하게 각인을 주워들고 루시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는 하루에게 찰싹 달라붙어 남은 보호 각인을 활성화했다. 각인을 문지르던 루가 고개를 돌려 폭풍의 눈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선 점액 덩어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죽은 것처럼. 하루가 비틀비틀 다가가 그것을 안아 들었다. 그것은 축 늘어지면서 그의 팔에 온몸을 기댔다.

 

하루가 짤막하게 소리를 냈다. 루는 고개를 끄덕이고, 각인을 움켜쥔 뒤, 폭풍의 장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시도했다. 처음 닿은 보호막이 맥없이 갈려 나가고, 그 뒤로 차례대로 두 번째, 세 번째 보호막이 찢어졌을 때 둘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루가 손가락을 뻗어 보았다. 폭풍의 장벽에 떨리는 손가락이 가까워지자마자 진한 보라색의 손이 튀어나와 그것을 움켜쥔다.

 

‘사령!’

 

루가 기겁하며 팔을 잡아뺐다. 하지만 그것이 방아쇠를 당긴 것일까, 사령이 조금씩 기어 나오고 있었다. 아니, 조금씩이 아니었다. 사방을 둘러싼 폭풍의 장벽을 뚫고 놈들의 손이 빽빽한 가시처럼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위험한데.’

 

둘은 조금씩 뒷걸음질쳤다. 사령의 손이 너덜너덜한 보호막을 잡아채려 발악한다. 지금은 닿지 않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곧 도달할 것이라는 미래는 자명했다.

 

폭풍의 장벽이 번뜩였다.

 

‘루시아 님.’

 

루가 머릿속으로 그녀를 떠올렸다. 곧 광풍이 몰아쳐 그 생각마저 앗아가고, 텅 빈 생각만을 공유하며 그들은 점점 더 중심을 향해 뒷걸음질쳤다.

 

그 순간 루의 귓가를 무언가가 간지럽혔다. 그가 하루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사령일까? 그렇기에는 뭔가 불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얘들아아아아!”

 

시온의 고함 소리가 길게 늘어나며 사령의 장벽에 구멍이 팍 뚫렸다. 땅에 내려꽂히듯이 착륙한 시온이 급히 소리쳤다.

 

“빨리 태워! 너, 너, 빗자루에 앉고, 루시는 네가 안아! 바로 출발할 거니까!”

 

다시 폭풍이 번쩍거린다. 시온의 재촉 하에 둘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빗자루에 셋이 모두 올라탄, 혹은 태워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곧장 빗자루의 방향을 틀었다.

 

굉음과 함께 폭풍이 번쩍거린다. 시온은 준비해 둔 보호막을 전방에 배치하는 동시에 빗자루를 가속했다. 빗자루의 끝자락이 빛을 흩뿌리는 찰나.

 

“간다!”

 

빗자루가 맥없이 잡초 위를 구른다.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진 그들은 혼란 속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단 한 곳이었다. 빗자루의 끝자락, 점액 덩어리가 꿈틀대는 곳.

 

녀석의 위로 사령의 실루엣이 스친다. 시온이 창백하진 얼굴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순간.

 

문이 닫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들에겐 실제로 문이 닫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령의 폭풍이 진한 보랏빛으로 번쩍였다.

 

 

-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붉은 안광이 병실의 침체된 어둠 속을 꿰뚫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완연한 보랏빛으로 무장한 사령의 폭풍이 시끄럽게 울부짖는다. 보랏빛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순간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이내 그녀는 병실을 나서 바깥으로 향했다.

 

그녀가 가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축축한 어둠만이 폭풍의 두려움에 떨 뿐이었다. 그녀는 그 속을 걷고, 걷고, 또 걸어 병원 바깥에 발을 디뎠다. 초점 없는 눈이 마침내 어딘가를 향했다.

 

 

-

 

 

시야가 점점 밝아졌다. 루시는 눈앞을 가득 메운 보랏빛에 눈을 찌푸렸다. 이내 빛이 익숙해지고,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그녀에게 제일 먼저 다가온 것은 혼란이었다.

 

거대한 사령의 폭풍이 포효한다. 대기를 울리는 찢어지는 소음은 영혼을 긁어내기라도 할 듯이 그들에게 달려든다. 루시는 흠칫 놀라며 웅크렸다. 머리에 빛의 고리를 쓴 두 언데드가 점액 덩어리를 상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일어났어? 그럼 도와, 아니, 넌 꺼져! 거기 가만히 있어라, 쓸데없이 몸을 넘기겠다고 설치지 말고!”

 

하루가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점액 덩어리는 주먹을 뭉쳐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날아간 살점은 곧 루가 회수해 하루의 몸에 끼워 맞췄다.

 

“이게 무슨.”

 

“루시, 정신 차린 거 맞지!”

 

지친 고함 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빗자루를 바닥에 꽂은 채 그것에 매달려 있는 시온이 있었다. 빗자루 끝자락에 새겨진 각인이 파직거리면서 밝은 빛을 흩뿌렸다.

 

“정신 차린 거 맞으면 빨리 저거 막아 봐!”

 

“아니야! 됐어! 쓸데없이 영혼 주겠다고 난리치지 말고 그냥 거기 가만히 있어!”

 

시온이 소리치자 곧장 하루의 고함이 들려왔다. 루시는 제 머리에서 혼란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자책감과 의문이었다.

 

루시는 손을 뻗어 그것을 가리켰다. 하루가 녀석을 온몸을 동원해 붙잡는 순간, 루시가 손가락을 홱 그었다. 점액 속에서 사령 하나가 튀어나왔다. 점액 덩어리는 곧 바닥에 철퍽 엎어져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녀석이 비명을 꽥꽥 질러 댔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루가 제 상완골을 뽑아 놈을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분투는 끝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살점을 붙든 하루가 루시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누가 봐도 화가 난 게 분명했다. 루시는 고개를 푹 떨궜다.

 

“루! 마력이 필요해! 방어막 하나 더 증축할 테니까 각인 남은 거 있으면 줘 봐!”

 

“두 개 남았습니다!”

 

하루가 대신 대답하며 루에게 각인 두 개를 쥐어 주었다. 냉장고에서 마구잡이로 가져오느라 별 필요 없는 것들까지 섞여 있었는데, 이 둘이 그런 케이스였다. 루가 시온에게 각인을 보여주자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보호막이 번쩍거렸다. 곧 화답하듯 사령의 폭풍은 수많은 손으로 보호막의 표면을 긁고 지나갔다. 바람과 사령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은 루시가 떨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하루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대답했다.

 

“보다시피.”

 

루시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실이 엉키고 꼬이길 반복했다. 그녀는 짓눌린 소리로 대답했다.

 

“내 잘못이야.”

 

“그래. 네 잘못이지. 루아가 죽은 것도, 우리가 여기에 갇힌 것도.”

 

루시의 고개가 더 깊숙이 내려갔다. 못이 박힌다. 이미 그녀가 수없이 못을 박아 둔 자신의 이름에 커다란 송곳이 자리하는 듯하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그 고통을 감내했다. 그리고 되새겼다. 내 잘못이야.

 

하루가 루시의 머리를 잡고 들어올리려다 포기했다. 마법 같은 것들이 없고서야 그녀를 직접 만질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 그녀의 면전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악!”

 

하루의 얼굴은 꽤 처참했다. 뜯어지고 다시 붙기를 반복한 얼굴에 자연스러운 조형미 같은 것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루시가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이제야 좀 볼만하군.”

 

머리를 흔들며 일어난 그는 곧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루아가 항상 말했던 게 뭔지는 아냐?”

 

루시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루는 분을 삭히는 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루시아 님의 말을 잘 따라라. 그리고 루시아 님이 하셨던 말을 덧붙였지. 서로 소중한 아이들이라는 걸 꼭 잊지 말라고.”

 

소중한 아이. 그 다섯 글자는 사정없이 루시의 가슴에 푹 박혀 들어왔다. 그녀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서서히 내렸다.

 

“고개 들어.”

 

루시는 그의 말대로 했다. 루가 시온 쪽에서 천천히 걸어와 하루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는 말없는 눈으로 그녀를 쭉 응시했다. 루시도 그렇게 했고, 하루는 그런 루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부가 소중한 거라고 루아는 항상 말했다. 소중한 이를 죽인 너지만, 그조차도 소중하다고 루아라면 말했겠지.”

 

하루의 얼굴은 점점 굳고 있었다. 루시가 그의 얼굴을 읽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건 분노였다. 그는 이를 갈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그것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어. 넌 어찌 됐든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병신이고, 나와 루아와 루와 루시아 님은 피해자니까. 하지만 너도 나 못지않게 힘들어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어. 그러니.”

 

하루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루시는 그것이 심호흡이라 짐작했지만, 그는 숨을 내쉬지 않았다.

 

“책임을 져라!”

 

단호한 호령질이 그녀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세운 루시를 내려다보며, 하루는 훨씬 작아진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루아를 죽였다면 항상 속죄하고 살면서 책임을 지라고. 그녀가 바란 일을 행해. 루시아 님의 바람을 죽이려 들지 마. 루와의 일상을 계속 영위해.”

 

루가 루시의 곁에 다가와 반투명한 손 위에 손을 얹었다. 한참 동안 계속 움직였던 탓인지 그의 손은 따듯했다. 동시에 그것은 루아의 손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탁이니, 내가 보는 곳에서 그렇게 살아.”

 

하루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부드러운 말투였다. 그의 얼굴은 젖은 것처럼 푹 가라앉아 있었다. 찢어지는 목소리 속에 숨어든 온기가 그녀의 영혼에 스민다.

 

루시는 풀밭 위에 쓰러진 점액 덩어리를 보았다. 루아. 곧 그녀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선이 허공을 헤매다 그녀 자신을 직시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루를 스쳐, 하루를 향해, 엎드리며 말했다.

 

“미안해…….”

 

투명한 눈물이 그녀의 볼을 스치운다. 무게조차 없는 그녀의 몸뚱이가 땅바닥에 무겁게 넘어진다. 바닥에 엎드린 그녀가 하루의 다리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책임이 없어서…….”

 

하루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눈을 질끈 감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호흡기가 찢어진 탓인지 내쉬는 숨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언가 가지고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루의 팔뚝에서 툭툭 소리가 났다. 루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턱을 달각거리며 양손을 마주 잡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하루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곧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에게 그는 덧붙였다.

 

“언젠가는.”

 

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루는 피식 웃고 사령의 폭풍을 바라보았다. 굳은 눈동자에 비친 것은 눈에 띄게 약해진 보호막과 깔깔대고 비명을 질러 대는 수많은 사령이었다.

 

“얘들아! 분위기 좋은데 방해해서 미안한데! 중앙으로 좀 모여 줄래! 범위를 좀 좁혀야겠어!”

 

그들은 곧장 폭풍의 눈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울며불며 하루의 발치에 매달리던 루시도 훌쩍이며 공중을 부유해 그곳으로 움직였다.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시온이 바닥에 꽂아 둔 빗자루를 뽑았다. 숱이 모조리 잘려나가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보호막이 크게 흔들리고 폭풍이 그들의 귓전에 대고 고래고래 포효했다. 언데드들이 흠칫하는 사이 시온은 빗자루를 들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 곧장 빗자루를 다시 바닥에 꽂아 넣었다. 보호막이 압축되기 시작했다.

 

“좀 더 버틸 수는 있겠군요.”

 

“좀 더 버티는 게 아니라 끝까지 버티는 거야. 그래서 우리 여기 들어온 지 몇 시간 지났지? 아, 너희 시계 없지. 젠장. 나도 고장났는데.”

 

시온이 빗자루를 털어 봤지만 떠오르는 건 지직거리는 빛무리뿐이었다.

 

“구조 요청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지. 일단 그것부터 확인해 보자구.”

 

시온은 투덜대면서도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각인이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는 귀를 간질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폭풍이 포효하면서 공기가 진동했다. 잠시 움츠렸던 루시가 눈앞에서 팔을 치우자 바닥에 널브러져 떨고 있는 점액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것을 잠시 응시하다 팔을 뻗었다.

 

녀석이 공중에 떠올라 루시를 향해 다가온다. 그러자 그것은 루아의 얼굴을 뽑아내 그녀를 응시했다.

 

“네가 루아였다면 좋겠어. 만일 맞다면 루시아 님이 새로운 몸을 준비해주실 테니까. 하지만…….”

 

루시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그 사이에서 눈에 들어온 몇 문장을 되새긴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아니. 그래, 그때가 되면 직접 사과하고 싶어. 책임을 지라고 들었으니까.”

 

점액이 파르르 떨었다. 돌연 루아의 형태를 하고 있던 부분이 무너져 내리면서 점액이 단단하게 뭉치기 시작했다.

 

“어? 어! 어! 있다!”

 

“예?”

 

루시가 시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소리치고 있었다.

 

“폭풍 바로 앞에 지금 누가 있어! 잠깐만, 어라?”

 

빗자루 옆에 떠오른 화면을 확대한 시온이 눈을 끔뻑거렸다. 세 언데드의 눈이 그녀에게 집중된 가운데, 그녀의 입에서 넋이 나간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시아?”

 

점액 덩어리가 눈을 떴다.

 

 

-

 

 

기억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 수많은 장면이 비눗방울처럼 그녀를 스쳐 지나가다가 팡, 팡,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간다. 수많은 기억이 저 바다 밑으로 돌아가고, 남은 것은 겨우 몇 개 장면이 전부였다.

 

마침내 세 아이를 새긴 기억의 방울이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루시아는 눈을 떴다.

 

“여긴…….”

 

밤이 무색하게도 밝은 보랏빛이 공동묘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루시아는 점차 그녀의 현실을 자각했다.

 

거대한 보랏빛 폭풍이 세상을 향해 발톱을 내밀고 있었다. 바람이 몰아치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계속해서 두드려 댔다. 점점 돌아오는 현실의 감각 속에서, 그녀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시야였다. 흐릿한 모자이크를 씌운 듯한 시야.

 

 

-

 

 

“젠장! 각인 다 썼지?”

 

챙 넓은 모자를 꾹 누르면서 시온이 소리쳤다. 그녀의 작은 손은 끊임없이 부들거리는 빗자루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각인은 다 썼습니다! 마력을 보충할 게 더는 없어요!”

 

하루가 소리치자 시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순간 바깥의 보호막 하나가 갈려 나갔다. 약간의 틈이 생기자마자 달려든 사령들이 그것을 찢어 버렸다. 그녀가 손을 펼쳐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보았다. 접힌 손가락은 네 개에 불과했다.

 

“네 개 남은 거죠?”

 

시온은 휘청거리는 빗자루를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와 하루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밖에 루시아 님이 계신다고요.”

 

“아픈 애가 왜 여기에 있지?”

 

“그럼 위험한 거 아닙니까!”

 

“내 말이!”

 

그들이 할 말은 아니었다. 또다시 보호막 하나가 찢겨 나간다. 시온은 갑자기 강력해진 폭풍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빗자루의 각인이 번쩍 빛났다. 보호막 안쪽으로 새로운 보호막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루가 시온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의 몸이 넘어질 듯 휘청였다.

 

“위험할 텐데요.”

 

시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허 웃었다. 그녀는 다시 일어나며 빗자루를 곧추세웠다. 그녀가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시온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언데드 둘의 시선이 움직인다.

 

점액질의 그것이 사람의 형태로 변해 가고 있었다.

 

 

-

 

 

루시아는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점액에 삼켜졌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형언할 수 없는 이 감각은 그녀가 받아들이기에 거부감이 너무 큰 것이었다.

 

마치 영혼을 둘로 나눈 듯한 부재의 무게감. 루시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야는 선명해져 갔다.

 

두 번째 시야가 분명해진 순간, 루시아는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사령의 폭풍을 바라보았다.

 

“얘들아?”

 

루시아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그녀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그러자 사령의 비명이 울려 퍼지며 그녀를 거부하듯 바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비틀거리다 간신히 자세를 잡은 루시아는 두 번째 시야에 집중했다. 흔들리는 보호막과 빗자루를 잡은 채 비틀대는 시온이 보였다. 그 뒤에 모여 불안에 굳어 버린 그녀의 세 언데드들도.

 

보이지 않는 실이 다시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혼란에 빠진 채 앞으로 나섰다가, 온몸을 두들기는 거친 바람에 다시 정신을 붙잡았다.

 

시야는 사실이다. 직감이 확신을 물고 놓질 않는다. 그녀는 폭풍을 올려다보면서 시야를 바라보았다. 보호막은 이제 단 두 장이 남은 전부였다.

 

‘가야 해.’

 

루시아가 앞으로 뻗은 손을 떨궜다. 하지만 어떤 수로? 불안 서린 의문이 들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에도 어떤 수로든. 그녀는 생각을 정정했다.

 

그 순간, 그녀는 제 영혼이 그곳에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어진 듯한, 그곳을 걸어 나선다면 사령의 폭풍 속일지라도 굳건히 걸음을 이어갈 수 있을 듯한.

 

새로운 세계. 그녀는 세계를 뒤덮은 새로운 감각에 전율했다. 둘로 나뉜 세상이 하나로 겹쳐져 몽환적인 빛을 뿜어낸다. 저 멀리 있는 듯한 폭풍의 바람 소리를 두고, 그녀는 결심을 굳혔다.

 

루시아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한 올 감아 뽑아낸다. 그것은 초록빛이 아닌 분홍빛의 머리칼이었다.

 

그녀의 주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초록빛의 단발이 허리춤으로 떨어지며 분홍빛으로 변해 갔다. 은은한 빛으로 사방을 밝히면서.

 

루시아는 사령의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보호막이 찢겨 나간다. 창백해진 시온이 마법을 발동하려 했지만 그녀의 몸뚱이는 그것을 반대했다. 더 이상 할 수가 없다며 울어 대는 제 몸을 원망해 보지만 소용없었다. 폭풍을 마주하는 방어막이 풍전등화처럼 흔들렸다.

 

시온이 안간힘을 쓰며 빗자루의 각인을 빛내려 애쓰던 그때, 그녀의 곁으로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아니었다. 그건 그것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루시아가 소환했던 점액질의 그것이 어느새 명확한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시온은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뒤에 선 언데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보호막 앞에 멈춰 서서 손을 뻗었다. 시꺼먼 손이 보호막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의 체형도 점점 변해 갔다.

 

조금 더 작게, 더 부드럽게, 하지만 더 굳건하게.

 

점점 보호막을 흔드는 사령들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보호막 속으로 들어오던 바람조차 점차 잦아든다. 찾아오는 평화 속에서 한 사람과 네 언데드는 그것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이변을 알아차린 건 루였다. 그는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더니, 갑자기 턱뼈를 덜걱거리면서 저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음은 루시였고, 다음은 하루, 그리고 시온이 마지막으로 그것을 알아챘다.

 

폭풍 속으로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령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사방을 가득 메운 보랏빛의 강렬한 바람도 점차 사그라든다.

 

보호막 앞에 서 있던 그것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선다. 폭풍 속에 새겨진 틈이 점점 커지면서 사령들의 비명이 옅어져 가고 있었다.

 

루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랏빛의 난류 속으로 스미는 찬란한 밤의 어둠. 사령들의 포효가 사그라들며 바깥의 풍경이 그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

 

마침내 폭풍 속의 틈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나온다. 그녀가 보호막을 사이에 두고 그것을 향해 손을 뻗는다. 수많은 사령들의 격류 속에서 두 손이 서로를 맞잡는 순간.

 

폭풍이 가라앉았다. 두 손의 연결에서 시작된 광휘가 보랏빛 사령을 흩어 버린다.

 

마침내 드러난 구름 속의 달빛. 흐트러진 풀밭 위의 희미한 풀꽃. 사방에 무너진 묘비 속 홀로 솟아난 루아의 잠자리. 마침내 드러난 바깥세상이 갇혀 있던 그들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 어느 곳도 아닌 손을 맞잡은 두 인영이었다.

 

“루시아.”

 

시온이 중얼거렸다. 흐트러진 분홍빛 머리 사이로 루시아의 눈동자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그녀가 그렇게 묻는 순간 그것의 형태가 무너졌다. 그것은 루시아의 손을 잡은 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바닥에 남은 흔적조차 증발하는 것을 본 루시는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그들을 향해 양팔을 벌리며 걸어왔다. 작은 품이 그들을 끌어안는다. 루시아는 그들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는 걸로 하자.”

 

잠시 사라졌던 귀뚜라미 소리가 돌아온다. 밤이 살아났음을 외치는 연주가 서서히 사방을 물들인다. 흐릿한 달빛이 내려앉는 곳, 선선한 바람이 풀잎을 쓰다듬는 곳. 그리고 루아의 영혼이 잠든 곳에, 서로를 끌어안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

 

 

걸레질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얼마나 닦은 건지 문지를 때마다 빡빡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네에 앉아 있던 루시가 빽 소리쳤다.

 

“그만 닦아! 뼈 삭아!”

 

‘새로 얻은 뼈인데 아껴야지.’

 

루는 빠르게 휘갈긴 글씨를 뿌듯하다는 듯 보여주고는, 더 뿌듯하다는 몸짓으로 팔뼈를 닦기를 계속했다.

 

“저거 루시아 님이 새로 해 줬다고 좋아하는 거 봐.”

 

루시가 중얼거렸지만 루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그녀가 질렸다는 듯이 그네에 머리를 기댈 무렵, 그녀의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듯한 냉기는 덤이었다.

 

하루가 그네 옆의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되게 열심히 닦네.”

 

루시가 곧바로 입을 열었지만 튀어나온 건 알아듣기 힘들게 꼬여 버린 말뿐이었다. 그녀는 제 목을 붙잡고 몇 번 헛기침을 한 뒤 대답했다.

 

“응.”

 

짧았다. 긴장한 그녀를 힐긋 바라본 하루는 어깨를 으쓱하고 냉장고로 되돌아갔다. 그가 차가운 방 안으로 돌아가 문을 닫으려는 찰나, 루시가 갑작스레 문틈으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미안.”

 

“알면 됐어. 그 말이 열 번째라면 더더욱.”

 

“벌써 그렇게 됐나?”

 

루시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하루에게 손을 달라고 말했다. 그가 어리둥절하며 손을 내밀자 루시가 작은 반지를 그 위에 떨어뜨렸다. 살점이 속에 박힌 작은 반지였다.

 

“루아에게 주려던 거야. 너에게 주는 게 맞을 것 같아서…… 이제 줘서 미안.”

 

하루는 말없이 그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루시의 관자놀이 위로 땀방울이 가로질렀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이제 열한 번째다. 이제 가. 루아의 묘비에 편지나 걸어 둬.”

 

“응. 마침 준비도 다 끝난 참이야. 그럼 갈게.”

 

루시가 사라지고 찾아온 정적 속에서 하루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주머니 속을 뒤져 실 몇 가닥을 집어 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의 살점을 이어주고 있던 실이었다.

 

그는 반지에 실을 끼워 목에 걸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반지로는 끼지도 못하겠군.”

 

 

-

 

 

“루시아, 그래서 그건 어떻게 된 거야?”

 

전화 너머로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루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키보드 위를 급하게 오가고, 마우스를 클릭해 가면서.

 

“하아아아악!”

 

끝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고함에 시온이 말했다.

 

“또 죽었나 보네. 좋아, 세 번 다 됐다구. 이제 대답할 차례야.”

 

“으아아아.”

 

루시아가 책상에 엎드려 울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녀의 정수리를 향해 냉정한 게임의 알림음이 내려온다. 시온이 재촉하자 그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도 잘 몰랐어.”

 

“대답을 피하시겠다?”

 

“어제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오늘은 확신할 수 있었어.”

 

“오? 말해주는 거야? 빨리. 빨리 말해봐. 뭔데?”

 

재촉하는 시온의 목소리에 웃음으로 화답한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 어젯밤의 일을 회상한다.

 

“어디서부터 얘기할까…… 일단 레시피가 잘못됐단 것부터 말해 보자.”

 

 

-

 

 

그곳은 익숙한 장소였다. 루시아는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일까? 이곳이 꿈속이기 때문일까? 잠시의 고민 끝에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 눈앞의 다리를 올랐다. 그 아래로는 잔잔한 물살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난간에 기대 저 멀리서 흘러오는 강줄기를 시선으로 쫓았다.

 

“왔구나.”

 

“응.”

 

루시아의 말에 대답한 건 점액질의 검은 형체였다. 그것은 그녀와 나란히 서서 난간에 팔을 올렸다.

 

두 인영이 난간에 기댄 채 물살을 바라보고 있다. 한참의 침묵을 깬 것은 루시아였다.

 

“네가 누군지 알 것 같아.”

 

“알 만도 한걸.”

 

“그렇네. 응.”

 

루시아는 입속에서 잠시 말을 고른 뒤에 입을 열었다.

 

“그래도 확답을 듣고 싶어. 너는 누구니?”

 

그것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루시아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의 영혼의 조각. 원하던 대답이 맞니?”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의 조각은 그림자처럼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고는 덧붙였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청초한 루시아의 영혼이라고 해야겠지.”

 

루시아가 실실 웃었다. 영혼의 조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런 게 있었냐고 묻지 않는구나?”

 

“이게.”

 

루시아가 때리는 시늉을 하자 영혼의 조각이 움츠러들며 큰 웃음소리를 냈다. 피식 웃은 루시아는 다시 난간에 기대며 저 멀리서 오는 물결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빛이 춤추고 있다. 흔들리는 물결 위에서 저마다의 찬란으로.

 

“안녕이라고 말하면 될까?”

 

루시아의 목소리는 확연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잘못된 레시피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 부작용이 있으리라는 예상도 함께.

 

그것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녀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너는 아름다워.”

 

영혼의 조각이 난간에 기대면서 말했다. 루시아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봤지만, 그 위에 서린 기분 좋음은 숨길 수 없었던 듯했다.

 

루시아는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영혼의 조각을 마주하는 순간, 그럴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루아의, 하루의, 루의 모습이 스치운다. 점액질의 모습으로 산책을 하던 그 모습조차도.

 

루시아는 제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혼의 조각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니 그대로 있어도 돼. 내가 너의 청초로 그곳에 있을 테니까.”

 

루시아는 대답하려다 목이 막히는 듯한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녀는 난간에서 몸을 떼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영혼의 조각도 그녀를 끌어안는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어느샌가 품의 따스함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을 물들인 빛의 조각의 분분한 비행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루시아는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다, 곧 그만두고 제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루시아는 빛의 조각을 스쳐 난간에 기댔다. 그녀의 시선이 하늘에서 태양으로, 태양에서 물길로 내려왔다.

 

물결이 저마다의 찬란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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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게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어 4만자라니

뭔가 루시아와 시온의 캐릭터성이나 스토리를 하나로 묶는 것이나 여러모로 좀 부족한 게 있어서 아쉬웠네요

진짜 긴 글인데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절할게요 진짜


님들 추천수가 득표수래요

그러니까 재밌게 읽으셨으면 제발 개추 눌러주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