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는 것 같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PDA를 내려놓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건너편에 앉아있던 두 명의 양복쟁이 중 나이가 든 남자가 PDA를 회수한 뒤 물었다.


"더 안 보십니까?"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일세. 할 일이 없으니 맨날 그 아이 영상이나 찾아보게 되더라고. 저번에 슬쩍 내가 보고 있다고 티를 내 봤더니, 당황하던 모습이 얼마나 재밌었는지. 그나저나, 옆에 있는 아가씨는 처음 보는데. 신입인가?"


편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 싱글싱글 웃으며 얘기를 한 남자가 잔뜩 긴장한 채 앉아있는 젊은 여자에게 물었다.

지목당한 그녀는 화들짝 놀라고는 옆에 앉아있는 선배의 눈치를 봤다.

선배가 후배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이번에 새로 들어왔습니다."

"게임 좋아하나?"

"네?"


신입이 두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남자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면서 게임 종류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포커, 화투, 마작, 블랙잭, 체스, 바둑, 샹치, 쇼기, 장기, 오셀로, 체커..."


그가 게임을 하나씩 열거할 때마다 어디선가 게임에 필요한 물건들이 나타났다.

책상에 점점 쌓여가는 물건들을 보는 신입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더이상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게임을 꺼낸 남자가 가볍게 손을 털며 말했다.


"아니면 이런 것들보다 전자기기가 취향인가? 대전 격투도 좋고, 실시간 전략도 좋네. 팀 게임은... 조금 힘들겠구먼. 그래도 사람만 구하면 팀 게임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저, 저는... 저는..."


두려움에 식은땀을 흘리던 신입은 말을 더듬으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틱택토! 틱택토로 하겠습니다!"

"틱택토? 흐음... 틱택토... 알겠네. 그걸로 하지."


남자가 손을 휘젓자 책상 위에 놓여있던 물건들이 사라지고 3x3 격자가 그려진 하얀 종이와 볼펜이 나타났다.


"게임은 자네가 정했으니, 시작은 내가 하겠네."


남자는 신입이 대답하기도 전에 오른쪽 귀퉁이에 가위표를 그리고 볼펜을 신입에게 내밀었다.

신입은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 가운데에 동그라미를 그린 뒤 남자에게 다시 볼펜을 돌려줬다.

비어있는 아홉 칸이 채워지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승부가 확정되었다.

네 번째 원을 그려 무승부를 만들어낸 신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쓰러지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마지막 남은 한 칸을 보며 볼펜을 돌리던 남자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조금 구기며 가위표를 그려 넣었다.


"나 참, 이 게임은 대체 누가 생각해 낸 건지. 뭘 어떻게 해도 서로 잘하면 무조건 비기잖아. 내가 이래서 이 게임에게 낮은 점수를 준 거야."


남자가 투덜거리자 긴장을 풀었던 신입이 다시 몸을 바로 세우며 침을 삼켰다.

그러나 남자는 신입은 신경 쓰지 않고 볼팬과 종이를 어디론가로 치운 뒤 선임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뭐로 할 건가?"

"묵찌빠나 하시죠."

"좋지."


미리 짠 것같이 자연스러운 둘의 대화에 신입이 벙찐 사이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묵묵빠!"

"찌찌묵!"

"그렇지!"


3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승리를 거둔 남자가 기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외쳤다.

패배한 양복쟁이는 아깝다는 듯 혀를 차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운이 나빴네요."

"운이 아니라 실력일세. 아무튼, 자네가 졌으니 내 몫을 챙겨야지."


그때까지도 멍하니 있던 신입은 남자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 돼!"


여자가 소리치자 두 사람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기가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듯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한동안 기묘한 침묵이 똑바로 서 있는 남자와, 엉거주춤하게 선 신입과, 앉아있는 선임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번 신입은 재밌구먼."


어색한 침묵을 깨며 남자가 책상에 두 손을 올리고 신입에게 물었다.


"뭐가 안 됀다는 거지, 아가씨?"


신입이 대답하지 못하자 남자가 신입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왜 대답을 못 하나? 아니면, 수수께끼인가? 자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맞추면 되는 게임?"


남자가 여자의 눈앞에 자신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손바닥이 천장을 향하게 만든 그가 손을 조금 굽히자 그의 손바닥 위에 검은색으로 일렁이는 불꽃이 나타났다.

여자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불꽃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생각한 게 이거 맞나?"


흔들리는 불꽃보다 더욱 심하게 요동치는 여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남자가 물었다.

여자는 가쁜 호흡을 내쉬며 불꽃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여자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고 흐려진 판단력만큼 흐릿해진 시야가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최면을 걸듯 좌우로 꼬리치는 불꽃은 심란한 정신을 휘저었고 덜덜 부딪히는 이빨은 그나마 남아있는 정신력을 갉아먹는 소리를 냈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당장이라도 풀려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녀를 얽매고 있는 공포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장에서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를 때까지 대답이 나오지 않자 남자가 선임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더 해야 하나?"

"아니요, 충분합니다."


선임의 대답을 들은 남자가 손을 완전히 쥐자 검은 불꽃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불꽃이 사라지자 그제야 압박감에서 벗어난 신입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내가 좀 심했나?"


정신줄을 반쯤 놓은 신입을 보던 남자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던 양복쟁이에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이게 괜찮다니, 지독하구먼."


다시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린 남자가 여자에게 무언가를 안겨줬다.


"자, 이것 좀 안고 있게. 그럼 좀 나을 거야."


여자는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받아 품에 안았다.

품을 꽉 채우는 푹신한 감촉에 한결 표정이 풀린 신입을 보며 자리에 앉은 남자가 선임에게 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신입들에게 이럴 건가? 이 아이 진짜 숨넘어갈 것처럼 보였는데. 이러다 사람 잡겠네."

"저렇게 만든 건 선생님이시잖습니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건 자네들이잖나. 그보다, 다음에 부를 땐 우리 애 앨범 좀 구해주게. 사인 넣어서."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까?"

"케이스가 많이 상해서. 최근에 고양이 한 마리를 들였더니 집 안에 멀쩡하게 남은 게 없네."

"키우시는 겁니까?"

"그냥 잠시 맡아둔 걸세. 적당한 주인이 나타나면 보내 줘야지."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천천히 정신을 차린 신입이 자기가 안고 있는 걸 내려다봤다.

선글라스를 쓰고 후드를 뒤집어쓴, 캐릭터화된 사신 모양의 캐릭터 인형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신이라기보단 유령에 더 가까웠지만.


"이게 뭔...?"

"내 모습을 본떠 만든 걸세.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마음에 드나?"


신입의 혼잣말을 들은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남자와 인형을 번갈아 바라본 신입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인형과 전혀 닮아있지 않았다.


"못 믿는 거 같군. 그럼 이러면 어떤가?"


남자가 자신의 옷깃을 잡고 위로 올리자 그의 옷이 로브로 변했다.

이어 그가 자신의 얼굴을 훑어내자 그의 눈에 검은 선글라스가 씌워짐과 동시에 얼굴의 살점이 사라지며 하얀 해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남자가 사람 키만한 낫을 꺼내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놓았다.


"자, 이제 비슷하지?"


신입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이 다 좋은데, 표정을 지을 수가 없어. 아, 말 나온 김에 홀덤 한 판 하겠나?"

"그 모습이면 안 합니다."

"내 포커페이스가 어때서?"

"그걸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네 외모지상주의자인가? 요즘 세상에 아직도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실망했네."


선임은 대꾸하지 않고 후배에게 손수건과 물병을 건넸다.

신입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것들을 받아 땀을 닦고 목을 축였다.

잔뜩 긴장했던 신입의 몸에 수분이 들어가자 근육들이 그제야 피로를 호소했다.

약한 전류가 몸속을 흐르는 것 같은 가려움에 여자가 자신의 다리를 가볍게 긁었다.


"많이 놀랐나?"


해골이 물었다.


"아, 아니요..."

"아니긴. 걱정 말게. 나한테 진다고 그 자리에서 픽 쓰러지는 건 아니니까. 반대로 나한테 이긴다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건 다 지어낸 이야기야."

"네?"


해골이 자신의 낫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뭣 하러 산 사람의 영혼을 가져가겠나? 또 무슨 힘이 있어서 죽음을 미루고?"

"어... 하지만..."

"게임을 하자고 한 건 그냥 내가 게임을 좋아해서 제안한 것뿐일세. 다만 일이 일이다 보니 산 사람이랑 게임을 할 일이 얼마 없어서 좀 지나치게 권하는 측면이 있긴 해. 나도 알고 있지만 영 고쳐지지가 않아."

"... 유감이에요."


신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 아, 또 오해를 샀구먼. 그런 거 아닐세. 산 사람 말고도 게임을 할 수 있는 상대는 많아. 내 제자들하고도 벌점을 걸고 게임을 하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이랑 심심풀이 삼아 즐기기도 한다네. 그저 말 그대로 산 사람이랑은 게임을 할 기회가 드물어서 그런 것뿐이야. 왜, 자네도 평소에 비싸서 잘 시켜 먹을 수 없는 요리가 있다면 원래 먹는 양보다 더 많이 먹고 그런 경험 있을 거 아닌가?"


그제야 제대로 말뜻을 이해한 신입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 그래. 그런 걸세."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사신은 낫을 고쳐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나에게 더 볼 일이 남아있나?"


사신의 질문에 선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습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아가씨도 다음에 보세나. 다음엔 좀 더 재밌게 놀자고. 아, 그건 선물일세."


말을 마친 사신은 여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신입이 안고 있는 인형이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그가 없었다고 말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선임은 PDA를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어땠지?"

"네?"


갑작스러운 선임의 질문에 신입이 되물었다.


"무서웠나?"


바뀐 표현에 질문의 의도를 깨달은 신입이 선임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아, 어... 처음엔 무서웠는데, 좀 시간이 지나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음...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는진 모르겠는데... 인간적이었어요."

"좋은 대답이야."


후임의 대답을 칭찬한 선임이 PDA를 품 안에 집어넣고 손을 내밀었다.

신입이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에게 내민 손을 잡자 선임이 말했다.


"말고, 손수건."

"아, 아! 아."


신입이 허둥거리며 손수건을 되돌려줬다.

실수를 연발하는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운지 여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선임은 그녀의 실수가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이제 제대로 우리 업무에 대해 설명을 해줘야겠지. 걸을 수 있겠어?"

"아, 네."

"좋아."


후임이 선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인형은 어떻게 하죠?"

"방에 장식하던가, 껴안고 자던가. 네 맘대로 해."

"제가 가져도 되나요? 뭔가 특이한 게 있다거나..."

"그거 우리가 만든 인형이야."

"아..."


방을 나온 둘은 복도를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통로에 둘이 걷는 소리가 작게 메아리쳤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네?"

"그 되묻는 버릇 고치는 게 좋을 거야. 어쩌다 여기서 일할 생각을 하게 됐냐고 물었어."

"그냥... 어쩌다 보니..."

"이런 곳에서 일하게 될 거라 생각은 한 적 있어?"

"어렸을 때 가끔... 했었죠?"

"지금 심정은 어때? 후회되진 않아?"

"조금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인형을 품에 안고 조금 빠른 선배의 발걸음에 맞추기 위해 발을 바삐 놀리면서도 신입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이곳에선 거의 혼자서 일하게 될 거야. 물론 업무상 보고나 지시사항이 내려오긴 하겠지만, 거의 대부분 너 혼자 판단하고 해결할 일이 많다는 뜻이지."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잘 해내야만 해."

"하지만, 제가 실수하면..."

"내가 바빠지겠지. 자, 들어가."


조금 긴장하며 선임이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간 신입의 시야에 불이 꺼진 모니터들이 보였다.

창문 하나 없이 확실하게 밀폐된 공간과 깜빡거리는 불빛들을 품은 채 조용히 구석에서 돌아가는 기계들의 소리가 그녀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신입은 이곳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하게 될지에 대한 기대와 떨림을 가라앉히기 위해 인형을 품은 팔에 조금 힘을 주었다.


"하... 미리 준비해두라니까..."


처음 보는 광경에 설렘으로 가득 찬 그녀와는 달리 뒤따라 들어온 선임은 익숙한 광경에 짜증을 내며 벽면에 있는 스위치를 켰다.

천장에 있는 등에 불이 들어오며 어두웠던 방이 확 밝아졌다.

불을 켠 선임은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아 모니터에 자료들을 띄우면서 말했다.


"지금 보이는 건 전부 미리 녹화해 둔 영상들이야."


신입은 모니터들을 계속해서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화면을 바라보아도 그것들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뭐죠?"

"뭐 같은데?"

"인터넷 방송 아니에요?"

"제대로 봤네. 네가 할 일은 저 방송들을 지켜보는 거야."

"네?"


후배의 되물음을 무시하며 선배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저들의 이메일은 네가 미리 확인해서 알려주고, 저쪽에서 너한테 뭐 요구하거나 물어보면 대답해 줘. 채팅창에 이상한 놈들 나타나면 차단하고. 쉽게 설명하자면 그냥 인터넷 방송 매니저 업무 하면 돼. 매일 일과 끝나면 특이사항 기록해서 보고하고, 돌발상황이나 긴급상황 터지면 옆에 있는 유선 전화로 즉시 연락하고. 수화기 들고 버튼 누르거나, 수화기 내려놓은 체 3초 이상 지나면 자동으로 신호 갈 거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업무에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신입을 보며 선임이 말했다.


"물어볼 거 있어?"

"진심이에요? 제가 하는 일이 인터넷 방송 관리라고요? 그런 경험을 시켜놓고?"


선임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하는 후배를 올려다보았다.


"생각하던 업무와 많이 다른가?"

"네! 당연하죠! 미친듯한 스팩을 요구하고, 수없이 많은 계약서를 작성시키고, 신체검사에 심리검사까지 하고, 상상 속 존재인 줄만 알았던 사신을 직접 대면시킨 다음에 하는 일이 고작 인터넷 방송 관리라고요?"

"고작? 일주일만 지나도 이 세상에 온갖 인간 군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될걸? 오히려 먹고 살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고민할지도 몰라."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일부러 이야기를 엇나가게 만드는 선임의 말에 여자가 기막혀했다.


"저는, 뭔가 조금 더 진지한 일을 생각했다고요."

"진지한 일이라. 네가 생각하는 진지한 일이 뭔데?"

"그건..."


후배가 바로 대답을 못 하자 선배가 스스로 대답했다.


"신화 속 숨겨진 메시지를 해독한다거나, 미지의 물건을 연구하거나?"

"네, 그런 거요."

"그러다 가끔 인명사고도 나오고?"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고대의 유물이 갑자기 작동해서 주변 사람들을 먼지로 만들어버린다거나?"

"..."

"마침내 지옥의 존재가 차원을 찢고 나와서 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고?"


선임의 비꼬는 말에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네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안 하는 게 나을 거야."

"무슨 뜻이죠?"

"믿지 않으면 그건 현실이 아니야. 바꿔 말하면, 현실은 믿는 것일 뿐이란 거지."


선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상대의 표정을 읽었다.


"네가 알고 있던 말과 다르지? '현실은 믿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다.' 나도 그 작가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이 바뀌는 건 아니야."

"솔직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요. 믿지 않으면 현실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전 사신 같은 거 믿은 적 없는데도 오늘 사신을 만났어요."

"'너는' 사신을 안 믿었겠지."

"무슨 말이죠?"

"믿는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야. 인류 전체지. 개인과 개인 사이.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믿음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야."

"저는 제가 어떤 연구소 같은 곳에 입사한 줄 알았는데, 지금은 무슨 종교단체에 입교한 거 같네요. 그럼 인류가 존재하기 전에는 대체 뭐가 있었던 건데요? 수많은 물리법칙도 그냥 인류가 '그렇다'라고 믿으니까 존재하는 거예요? 뉴턴이 중력을 발견하기 전에는 우리 모두 무중력 속에서 살았나요? 다들 생명은 자연발생한다고 믿었는데, 그 믿음을 박살 낸 파스퇴르 한 명의 믿음이 그때까지의 모든 인류의 믿음보다 강했다는 건가요?"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으면 능히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길 수 있으리라.' 현실을 바꾸는 데 필요한 건 크기가 아니라 그 견고함이야. 그리고, 인류가 법칙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명명'하는 거고. 막연히 '땅에 붙어있어야 한다'라는 믿음을 '중력'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인식하기 쉽게 만들었기에 그것이 법칙이 될 정도로 견고해진 셈이지. 마지막으로, '인류'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총합이 아니라, '과거에 살아 있었고, 지금 살아 있고, 앞으로 살아 있을' 모든 사람들이 '만들어낸 유무형의 모든 것들'의 총합이야."

"... 하, 어이가 없내... 진짜 어디 사이비 광신도들이나 할 법한 주장을 하고 있는 거 알아요? 젠장, 인신공격이나 뭐 그런 걸 하고 싶은 게 아닌데,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네요."

"네가 들고 있는 그 인형, 그 인형을 누가 줬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뜬금없는 것을 묻는 선임의 질문에 신입은 짜증을 약간 담아 대답했다.


"사신이요."

"그 사신에 대해 뭘 알고 있지? 아니면 범위를 좁혀서, 그 존재가 너에게 보여줬던 능력들 중 하나라도 설명이 가능한 게 있나? 인류가 그동안 쌓아 올린 지식으로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 있어?"

"..."


신입의 말문이 순간적으로 막혔다.


"어설픈 이론을 들먹일 순 있겠지. 평행 세계라던가, 초공간이라던가, 다차원이라던가. 하지만 그중 뭐 하나라도 제대로 증명된 건 없어. 그저 '이거라면 가능할 거야.'라면서 끼워 맞출 뿐. 결국 너도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라는 또 다른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을 뿐이야."

"... 아직 우리가 밝혀내지 못했을 뿐이지, 그런 것들도 언젠가는 제대로 규명될 수 있잖아요. 과학의 핵심은 '법칙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서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에요."

"그래. 그렇기에 항상 과학은 현실보다 한발 늦어. 현실이라는 존재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마침내 납득할만한 어떤 이유와 논리를 붙이고 나서야 방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과학이야.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낸 방패는 현실의 공격에 비하면 턱없이 작고 부족하지. 이 세상엔 인류의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아. 네가 본 사신처럼. 그리고 그것들은 지금 우리가 언쟁하는 이 순간에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고."


신입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인형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선임이 하는 말에 무언가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확하게 그것이 뭔지 집어낼 수 없었다.


"이해하기 어려우리란 거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이 시대에, 비이성적인 이야기는 그저 미친 헛소리로 들리는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이게 진짜 이 세상의 진실이야. 인류의 이해를 아득하게 벗어난 것들이 넘쳐나고, 그것들이 인류를 절멸시킬 수도 있다는 진실. 하지만, 우리는 무력하게 종말을 기다리지 않아. 오히려 그들을 정복해나가고 있지."

"정복?"

"늑대인간, 사이클롭스, 이무기, 구미호, 그렘린, 바바야가, 인큐버스, 거인, 그리폰... 수없이 많은 신화와 전설 속 생물들이 다 어디 갔을까? 그런 것들을 섬기던 사제와 마법사들은?"

"그런 건 허구의 존재가 아닌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신도 허구의 존재라고 알고 있지."

"..."

"인류의 역사는 생존의 역사야.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것들과 맞서 싸웠고, 끝끝내 이겨내서 이 행성을 차지했지.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미지의 존재들로부터 위협받고 있어. 그래서 우리가 있는 거야. 우리는 이 끝없는 전쟁에서 인류의 승리를 위해 일하고 있어. 그 일 중 하나가 방금 네가 '고작'이라고 치부해버린 이 일이고."

"그렇게 말해도... 여전히 이해가 안 돼요. 인터넷 방송이 지금 말한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선임이 대답 대신 자판을 누르자 모니터 화면 하나가 바뀌었다.


"...!"

"저게 네가 관리해야 하는 존재의 중 하나의 본모습이야."


모니터에는 누워있는 촉수와 결합한 소녀가 있었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조용히 잠들은 소녀와 달리 보라색 촉수들은 끊임없이 꾸물거리며 이곳저곳을 기어 다녔다.


"저게 뭐죠? 저 꿈틀거리는 촉수들은 대체..."

"나도 몰라."

"모른다고요? 저 소녀는 괜찮은 거 맞아요?"

"나도 모르지."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대체 저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것도 몰라. 그리고 그게 중요한 거야."

"... 그게 중요하다고요?"


모른다는 말만 반복하는 선배에게 한 소리하려던 여자는 짜증 낼 순간을 놓쳐버리고 조금 멍청하게 되물었다.


"네가 보기엔 촉수가 저 여자를 잡아먹는 것처럼 보이지? 그 반대야. 저 소녀가 저걸 잠식하고 있는 거야."

"네?"

"저게 인류가 미지와 싸우는 방식이야. 인식하고, 이해하고, 삼켜버리는 거지."


선배는 다시 화면을 원래대로 돌리고 말을 이었다.


"'일상에 스며든 공포'라는 말이 있지?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그 반대야. '인간'이 공포에 스며들지.

 저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본인 주장에 따르면 저 여자는 평범한 사람이고 고대신을 섬기는 사제야. 우연히 어떤 책을 만져서 그렇게 됐다고 해. 하지만 언제 그런 일을 겪었는지,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사제라면 다른 신도들은 어디 있는지, 다른 사제들도 그렇게 변하는 건지 아무것도 몰라. 심지어 그녀가 진짜 사제인지도 모르지. 어쩌면 고대신 본인일 수도 있는 일이야.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우리는 저 존재를 인식했어. 그리고 싸움이 시작됐지. 저 '미지'에게 인류가 먼저 당하느냐, 아니면 저 '미지'를 인류가 먼저 이해하느냐 하는 싸움. 인류가 저것을 친숙하고 무해하며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가 이기는 거야. 착각 속 존재로 만들어 실체를 빼앗거나, 질병이나 기형으로 분류되어 치료하는 방법으로."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인터넷 방송을 하는 거네요. 저것이 무해하다는 걸 인식시키기 위해서... 그럼 다른 사람들도 다 저 아이 같은 건가요?"

"비슷해. 어떤 미지의 개념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인격화시킨 거야. 정확하게는 이미 인격화된 존재에 개념을 덧씌운 거지만."

"흥미롭네요.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어요?"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흥미를 감추지 않는 후배의 모습에 선배는 예전의 자신이 생각나 속으로 웃었다.


"다음엔 뭐가 궁금한데?"

"저 분홍 머리 여자요. 사신의 제자라고 했죠? 왜 사신을 직접 방송에 내보내지 않고 저 사람이 방송하는 거예요?"


신입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냥 사신 본인이 방송을 하게 만들어서 친숙하게 만들면 안 돼요?"

"죽음 정도로 강한 개념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없어. 인류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공포를 완전히 걷어내고 진심으로 죽음이 무해하다고 믿어야 해. 아무리 우리가 무해하다 떠들어대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죽음과 게임을 해서 이기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전설도 그를 막지는 못했던 것처럼. 죽음을 이기기 위해선 단순히 친숙하게 만드는 것 외에도 실제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의술이나 공학 같은 게 필요하지. 그리고 그게 과학의 역할이야. 인류가 가진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것."

"그럼 저 방송은 왜 하는 거예요?"

"사실 저 방송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어. 의미가 있는 건 저 여자 자체야."

"저 여자요?"

"생각해 봐. 죽음은 하나의 현상이야. 어떤 수를 쓰더라도 피할 수 없는 현상. 그런데 인류는 죽음을 대변하는 인격체인 사신을 만들어냈어. 인격화된 죽음은 대화하고 협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지. 인류가 죽음을 인식의 범위로 끌어내린 거야.

 우리는 거기서 더 나아가, '사신의 제자'라는 개념을 통해 죽음을 더욱 약화시키기로 했어. 원래라면 모든 인간에게 동시에 나타날 수 있었을 사신은 이제 모든 영혼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야만 할 정도로 약화되었어. 게다가 지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사신의 힘에 한계가 생긴 거야. 하지만 여전히 그것만으로는 죽음을 이길 수 없어. 그저 시간을 벌었을 뿐이야."


선임의 설명을 들은 신입은 자신이 안고 있는 인형을 내려다봤다.

귀여운 디자인의 인형을 보며 자신과 마주했던 해골을 떠올려 본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걸로 충분한가요? 제 말은, 죽음이 그 정도로 강력하다면 더 많은 안전장치가 필요하지 않나요?"

"네가 무슨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알겠지만, 특정한 개념을 상대할 수 있는 '안전장치' 같은 건 없어. 그저 무기만이 있을 뿐. 이 방송들은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공격이야. 다만, 네가 말한 안전장치와 비슷한 걸 만들려는 시도는 하고 있지."


그는 말을 하면서 모니터에 두 명의 프로필을 띄웠다.


"이 둘이 안전장치인가요?"

"아니, 안전장치를 만들기 위한 재료야. 먼저 이쪽은 표면상으로는 불사조로 되어있어. 하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그 안에 품은 '연속성'이야. 죽기 전과 죽은 후의 개체를 동일하게 만들어주는 그 어떤 무언가. 그 연속성을 개념화시킬 수 있다면 죽음은 끝이 아니게 되겠지. 그럼 우리는 죽음에 쫓기지 않아도 돼.

 이 노란 머리는 시간 여행자라는 설정이야. 물론, 다른 이들처럼 더 큰 걸 품고 있지.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연속성이 종말을 정면에서 받아내기 위한 방패라면, 가능성은 종말을 속이기 위한 연막이야. 만약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실패하지 않은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쪽으로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죽음이 우리가 정복해야 하는 최종 목표인 것 같네요."

"최종 목표는 아니더라도, 그만큼 강한 것이긴 하지."


선임이 마우스를 누르자 이번엔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이것도 재료야. 다만 앞선 둘과는 다르게 그것이 담은 속성을 추출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어떤 속성을 집어넣었지. 아틀란티스라는 신화에 '잊힌 인류의 역사'라는 의미를 부여했어. 이를 통해 어떤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망각되더라도 그 존재 자체는 희미한 흔적으로나마 남아있을 수 있게 만든 거야."

"그럼 이게 안전장치 아닌가요?"

"아니. 안전장치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구체적인 어떤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니까. 말 그대로 존재에 대한 모든 것이 잊히더라도 그것이 존재했었다는 사실 자체만큼은 사라지지 않는 것 뿐이야."

"그게 의미가 있나요?"

"1이 0보단 크니까.

 아무튼, 이 다섯이 우리가 최초로 인격화한 개념들이야. 다만 순수하게 우리의 힘만으로 이루어내지는 않았지. 각 개념들을 속이다시피 하면서 끌어들였으니까. 만약 저들이 떠나기로 마음먹는다면, 우린 그걸 막을 수 없어. 저들이 떠난다고 당장 큰일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우리의 승리가 멀어지겠지.

 그래서 우린 저들이 남아있는 동안 '인격화된 개념'을 만들어내려고 애썼어.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고, 수많은 실패가 있었지. 지난 일이니까 쉽게 말하는 거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쉬운 일은 아니었어. 일단 우리가 처음 기획했던 모든 시도는 다 처참하게 실패했지. 온전하게 우리가 필요한 개념만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었어. 비슷한 개념들을 섞어도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 우리는 정반대되는 두 속성을 하나로 합쳐보려 했어. 그리고 멋지게 성공했지."


화면을 넘긴 선임은 조금 뿌듯함이 느껴지는 어조로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희망과 절망. 우리가 바라던 것과 실제로 얻은 것을 섞어 만들어낸 첫 성공작이야. 약간의... 설명할 수 없는 작업이 포함되긴 했어도. 아무튼 그녀는 위험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였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섞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 대가로 언제나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품게 되었지만... 중요한 건 우리는 이 존재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가 목표로 했던 것을 마침내 시도할 수 있게 됐다는 거야."

"목표? 인류의 생존이요?"

"그걸 위한 첫걸음."


다섯 명의 사진을 모니터에 띄운 선임이 말했다.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인류를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들과 동급으로 만드는 거였어. 그리고 이게 그 결과물이야. 우리는 모든 신화에서 가장 강력하게 여겨지는 것들, 곧 시간, 공간, 자연, 혼돈의 사이에 문명을 끼워 넣어 하나의 그룹으로 만들었어. 물론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묶은 건 아니고, 그냥 옆에 세워둔 정도라서 언제든지 튕겨 나갈 위험이 있지만."

"갑자기 스케일이 너무 커진 것 같은데요."

"그 정도로 강해져야만 하니까. 그리고 동시에 죽음에게 한 일을 똑같이 하려는 목적도 있고."

"힘을 나누는 거요? 그럼 저들도 각 개념의 제자 비슷한 건가요?"

"아니. 그렇진 않아. 하지만 그들의 힘에 그들을 속박시키거나 스스로 약해지도록 만들었어. 이제 공간은 공간에 속해있고, 시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움직여. 자연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자연을 훼손해야 하고, 혼돈은 스스로의 몸을 유지하기 위한 질서를 만들어야 하지. 만약 문명이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더라도, 한 번 손상된 개념들의 절대성은 회복되지 않을 거야."


선배의 말을 들은 신입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 아니에요. 그냥... 좀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요. 익숙한 상황은 아니네요."


분명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그녀는 굳이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선배 역시 더 묻지 않고 새로운 화제를 이어갔다.


"익숙해져야 할 거야. 새로운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너니까."

"네?"

"저 다섯은 이제 막 만들어진 존재들이야. 그들이 어떻게 나아갈지는 너의 행동과 믿음에 달려있어."

"이렇게 중요한 걸 신입에게 맡겨도 되는 거예요?"

"너나 나나 높으신 분들이나 다 똑같은 인간이니까. 그럼에도 굳이 너를 고른 이유는 우리가 판단하기에 네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는 마."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기 전에 더 궁금한 건 없어? 여기서 밖에 말 못 하는 것도 있으니까."

"... 우리가 목표로 하는 걸 전부 이루면 어떻게 되나요?"

"모든 미지를 정복하면?"

"네."


선임은 대답하기 전에 생각을 가다듬었다.

조금 시간을 들여 정리를 마친 그가 입을 열었다.


"신이 되어 있겠지."

"신이요?"


그는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꺾어 목을 풀며 설명을 덧붙였다.


"적당한 단어를 모르겠네. 그나마 그게 제일 가까운 단어일 거야. 더 궁금한 건?"

"지금은 생각나는 게 없어요."

"그래. 나중에 생각나면 더 물어봐. 그럼 이제 건물 구경이나 좀 시켜줄게. 최소한 식당이 어딘지는 알아야지."

"그냥 이대로 나가도 되나요?"

"어차피 이제 여긴 네 공간이야. 큰 사고만 안 치면 네 맘대로 써도 돼. 가끔 검사하러 오긴 할 거지만. 아, 맞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선임이 문을 열려다 말고 멈췄다.


"이제 너도 정식 인원이니까, 호출 코드를 알려줘야지."

"그런 것도 있어요?"

"나름 비밀 기관이니까. 이 방과 너의 호출 코드는 알파야."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선배는요?"

"오메가."

"..."


신입이 또다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시간을 들여 생각하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호출 코드에 의미가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큰 의미는 없어. 그냥 이 프로젝트에서 네가 처음 결정권자니까 알파고 내가 최종 결정권자니까 오메가야."

"그나마 다행이네요."

"뭐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신입은 아차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선임이 문을 열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자 그녀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들은 것도 그렇고, 호출 코드도 그렇고, 좀 많이... 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야 하나, 만화 같다고 해야 하나, 음..."

"오타쿠 같다고?"


선임이 어떻게든 순화해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후배의 노력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 네."

"다들 그렇게 생각해."


선임이 부끄러움이 섞인 한숨과 같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