얕은 잠에 빠져있던 그녀를 깨운 것은 숨소리.



그것이 딱히 거슬리는 소리여서는 아니었다.



옆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소녀의 잠꼬대는 시끄럽기는커녕 오히려 남들보다도 조용한 편이었으니까.



단지 그녀의 커다란 귀가 작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을 뿐.



"흐아암."



하늘에 닿을 듯 크게 기지개를 펴자 어깨 너머로 밝은 금색의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커다란 두 귀가 주변을 살피듯 쫑긋 솟아올랐다.



동시에 몸을 덮고 있던 천이 흘러내리자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커스의 광대와 같은 화려한 빛깔의 천.



"라미, 그만자고 슬슬 출발하자."



"으응… 오마룽, 5분만 더…."



그만 일어나라는 폴카의 말에도 몸을 둥글게 말며 격렬히 반항하는 라미.



그런 라미의 모습에 서커스단의 현 좌장인 폴카도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목적지를 눈앞에 둔 상황에, 더 이상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아!"



순간 골똘히 고민하던 폴카의 입가에 묘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아앗! 저런 곳에 유키요즈키가!"



"뭐? 어디 어디?!"



폴카의 외침에 누워 있던 라미가 용수철 퉁기듯 튀어 오르더니 고개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자신의 애주(酒)를 찾기 시작했다.



"헤, 거짓말 이지롱~ 이런 곳에 갑자기 술이 떨어져 있겠냐고. 그것도 유키요즈키가."



혀를 베 내미며 조롱하듯 웃는 폴카.



그 태도에 라미의 노란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빛을 잃고 차가운 회색으로 물들었다.



"……."



만약 무언의 압력만으로 피해를 줄 수 있다면 폴카는 이 자리에서 네 번은 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쳐다봐도 없는 건 없는 거니까!"



폴카의 그 능청맞은 모습에 라미도 표정을 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그런 장난 좀 치지 말라구. 라미, 술 냄새 맡아본지도 두 달은 더 됐단 말이야."



폴카의 장난에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는지, 어느새 말똥해진 표정으로 이불을 개기 시작했다.



두 달.



두 사람이 의회를 향한지 두 달째가 되었으니 틀린 계산은 아닐것이다.



라미가 폴카 몰래 숨겨둔 술이 없었다는 전제하에는.



"됐으니까 이제 출발하자."



"잠깐, 이불만 개고. 오마룽도 자고 일어났으면 침구정리부터 해야지."



낡은 천 조각을 깔끔하게 개는 라미의 모습에도 폴카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귀를 후비며 길을 재촉했다.



"어차피 다 왔잖아. 더 쓸 일도 없을 텐데 여기 버리고 가면 안돼?"



"오마룽도 정말 낭만이 없다니까. 지금까지 우릴 지켜 준 이불들한테 미안 하지도 않은 거야?"



"아니 애초에 이불도 아니잖아. 이게 뭐였더라? 커튼? 카펫이던가?"



투덜대는 소리를 무시하며 천 조각들을 개어 배낭에 챙겨 넣은 라미가 폴카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왔다.



배낭의 중량감에 잠시 몸이 휘청였지만 이내 중심을 잡은 폴카는 씨익 웃으며 어깨에 달라붙어 오는 파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걷기 힘들잖아. 좀 떨어지라구."



"그래도, 이 여정이 끝난다고 생각하니까. 라미, 조금 안심이 돼서."



폴카의 어깨에 몸을 기댄 라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와 반대로 천천히 열린 작은 입에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마룽."



"왜애?"



"라미의 곁에 마지막으로 남아준 게 오마룽이라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 정말 고마워."



"하하, 그게 뭐야."



갑작스레 들어온 낯간지러운 멘트에 폴카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간지러운 듯 볼을 긁었다.



어쩌면 달아오른 볼을 숨기기 위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스읍, 하…."



크게 심호흡을 한 폴카가 다짐한 듯 굳은 표정을 지었다.



심호흡 하기 전보다도 얼굴이 더 붉어진 것이 문제였지만.



"나도…."



겨우 한 음절을 뗀 폴카.



아직 하고 싶은 말을 하나도 꺼내지 못했음에도.



그녀의 얼굴이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 걱정될 정도로 새빨갛게 물들어 올랐다.



"나도… 마지막으로 옆에 남은 게 라미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라미와 같이 부드럽게 얘기할 생각이었지만, 부끄러움에 점점 커진 목소리는 끝에가서는 거의 비명과 같은 소리가 되어 버렸다.



폴카는 조금 걱정이 들었다.



자신 또한 진심을 다한 말이었는데.



혹시나 자신의 목소리에 웃어버리진 않을까.



하지만 조금 우스꽝스러운 모습에도 라미는 처음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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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세계 다섯 개념의 화신이 세상의 흐름을 결정하는 곳.



"안은 생각보다 작은데?"



"쉿, 그런얘기하는 거 아니야. 집주인 분들 들으면 어떻게 해."



폴카의 경솔한 발언에 주의를 주는 라미였지만 사실 그녀 또한 같은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 밖에서 봤을 때는 페코랜드 만큼이나 거대해 보였던 건물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와보니, 내부는 회의실로 보이는 스무평 남짓한 방이 전부였으니까.



-스릉.



그때 둘의 침입을 알아차린 한 인영이 단상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거기, 누구야."



그림자가 걷히고 나타난 것은 짙은 남색의 특이한 헤어스타일, 뽑아 든 시곗바늘을 닮은 두 개의 검.



의회. 시간의 화신인 오로 크로니.



"크로니?"



"폴카?"



자신들의 공간에 들어 온 것이 침입자가 아닌 폴카와 라미인 것을 알아차린 크로니가 급하게 검을 거두며 두 사람을 반겼다.



"어떻게 두 사람이 여기에? 아니,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죠."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움직인 크로니의 두 팔에 폴카와 라미의 몸이 가벼운 짐 들듯 들어 올려졌다.



"정말, 조금만 늦었으면 무메이가 여러분을 톱질해서 조각조각 썰어버릴뻔 했네요."



둘을 양 허리에 낀 크로니가 고개를 들어 누군가에게 얘기하듯 크게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사나! 지금 레이네 방 비어 있지? 거기로 바로 들어갈게!"



아무도 없는 방 안,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사나는 크다!"



스피커도 무엇도 없는 공간에서 당연하다는 듯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 어쩌면 아무의미 없는 말일지도.



천장 너머에서 들려온 사나의 말에 폴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저게 무슨 뜻?"



폴카의 질문에 대답하듯 다시금 사나의 목소리가 회의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나는 영원하다. 사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계속해서 존재하는, 존재 그 자체이다."



"방 비어 있으니까 들어가도 된대요. 열쇠는 늘 두던자리에 있다고 말하네요. 아님 말라지."



끝에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크로니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순간 라미와 폴카는 눈을 질끈 감을 수 밖에 없었다.



눈부시게 밝은 빛이 주변을 가득 휘감았기 때문에.



눈꺼풀 너머로도 전해지는 밝은 빛이 사라질 즈음 조심스럽게 눈을 뜬 두 사람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동그랗게 떠진 두 눈에 비친 풍경은 이전의 회의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실내인지 야외인지 잘 모를 공간.



이렇게나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비단 큼직한 모닥불이 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것이다.



잘 꾸며진 방이, 잘 손질된 베리 덩굴이 정말로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사람의 흔적과 온기가 고팠던 둘에게는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두 사람에게 크로니가 어느새 타온 레몬티를 한 잔씩 건네주었다.



"라미는 차보다 술이 좋은데…."



볼을 부풀리며 귀엽게 투정하는 라미의 모습에 크로니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까요. 제가 시간 운운하는 것도 조금 웃기기는 하지만."



차를 홀짝이던 폴카도 크로니의 옆에 서서 편을 들어 주었다.



"그래 라미, 이른 시간부터 술을 마시는 건 좋지 않다고? 그리고 술은 돌아가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으니까."



"후으… 그렇지?"



주고받은 짧은 대화에 그녀들 사이에도 달콤한 베리향과 따뜻하고 향기로운 차와 같이 부드러운 분위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



크로니를 제외하고는.



"돌아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크로니가 조금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물었지만 폴카는 여전히 그와 대비되는 천연덕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아직 말 안했구나? 우린 사실 크로니를 만나러 온 거였거든. 지금 바깥이 완전 엉망진창이 돼서 말이야…."



"응응."



폴카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라미도 힘을 실어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폴카의 그런 밝은 표정도 이내 들려오는 크로니의 대답에 똑같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알고 있어요."



폴카의 위에 지어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입은 웃고 있던 그대로 굳어 있었지만 보랏빛의 두 눈은 그러지 못했다.



순식간에 험악하게 물든 폴카의 표정에 안절부절하던 크로니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정말 면목 없다는 듯이.



둘에게 사과하듯이.



크로니의 시선은 그저 아래를 향했다.



"하아?! 그걸 알고 있는데 왜 진작에 시간을 돌리지 않은 거야?!"



"오마룽! 진정해!"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난 폴카를 막으려 해 보았지만 역부족.



서커스 단원이었던 사막여우의 순발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 일이 일어나고 지난 두달 동안! 바깥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순식간에 뛰쳐나간 폴카의 손에 크로니가 멱살째로 잡혀 들어 올려졌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단원들도, 친구들도.



언제나 활발하던 이방인도, 누구보다 상냥하던 백수의 왕도 전부.



"알고 있어요.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폴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도."



축 처진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하는 크로니의 모습에 답답한 듯 힘을 꽉 준 폴카의 이빨이 으드득 갈려나갔다.



-쿵



쥐고 있던 옷깃을 거칠게 놓자 힘없이 주저앉은 크로니는 그대로 세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금이라도 돌려 놓으라고."



거칠게 돌아 자리로 돌아가는 폴카의 눈에 작은 찻잔이 비쳐들었다.



조금 전에 뛰쳐나가며 집어던졌던 찻잔.



깨지기는커녕 안의 내용물마저 그대로, 아니 오히려 다시 가득 채워진 듯 보이는 찻잔이 의자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칫."



찻잔을 살짝 밀어 옆으로 치운 폴카가 다시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시간을 다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크로니는 시간을 마음대로 멈추거나 돌릴수 있는 거 아니었어?"



이번에 말을 꺼낸 것은 라미였다.



제발 부탁한다는 듯이 양손을 꽉 쥔 채로.



"의회가 그걸 원하지 않으니까요."



의회.



다섯 화신이 세상의 흐름과 질서를 결정하는 곳.



그리고 의회원들은 다섯 화신이기 전에 폴카와 라미의 다섯 친구였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그런 의회가 시간을 돌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니?



폴카와 라미의 처지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사건 발생 당일 의회원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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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석에 앉은 붉은 귀의 작은 소녀. 벨즈가 회의의 시작을 알리듯 먼저 입을 열었다.



"다들 모이느라 고생했어! 오늘 회의 안건 있어?"



벨즈의 활기찬 목소리 뒤로 파우나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이어 나왔다.



"음, 아마 곧 지구가 멸망할 것 같은데…."



파우나의 말에 책상 위에 엎드려 볼을 부비던 무메이가 의견을 꺼냈다.



"지구가 멸망하면 내가 심어둔 베리 들은 다 어디로 가는데?"



"으음… 아마 우주로 흩어지지 않을까…."



파우나의 대답에 골똘히 고민하던 크로니가 입을 열었다.



"흠. 결국 다 사나 뱃속으로 들어가 버리는군."



"사나는 크다!"



"그래서 이번 의제가 뭐라고?"



-짝짝



"다들 조용!"



벨즈가 익숙하다는 듯 손뼉을 치자 소란스럽던 회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벨즈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지구가 멸망하는 원인이 뭔데?"



"어… 틈새에 작은 균열이 생겼거든, 사이로 괴물들이 튀어나와서 아마 한 달이면 지구의 인간들은 다 죽어 버리지 않을까?"



여전히 책상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무메이가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냥 여기 아무나 내려가서 그 괴물이란 걸 다 죽여 버리면 되는 거잖아."



"음… 글쎄…. 그 친구들한테 해를 입히는것보다는 균열을 막아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해보는건 어떨까? 시간을 돌려서 균열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도 좋겠네."



"번거롭게 할 필요 없잖아. 그냥 베이가 내려가서 토마토랑 감자로…."



파우나와 무메이 사이의 치열한 공방이 몇 분이나 이어지자 크로니는 지루하다는 듯 목을 이리저리 비틀며 기지개를 켰다.



"응?"



그러던 크로니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베이?"



벨즈가 웃고 있었기 때문에.



물론 단순히 웃고있다 해서 그런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 모든 웃음이 헤픈 사람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벨즈는 아주 소름끼치게 웃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환히 드러내며 정말 무구하고 해맑게.



세상의 어떤 때도 묻지않은 갓난 아이와 같은 순수한 웃음.



모든 주사위를 굴려 나왔던 시간 동안에도 본적 없던 너무나도 신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쾅!



벨즈가 만연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책상을 세게 치자 말싸움을 주고받던 파우나와 무메이는 물론 사나마저 입을 꾿 닫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 지구의 균열에 대해서 우리 카운슬은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 찬반투표 시작!"



"뭐?!"



크로니가 자리에서 뛰쳐나왔지만 상황은 이미 늦은 뒤.



이미 의장에 의해 투표가 시작됐으니까.



투표에 제일 먼저 손을든 것은 파우나였다.



"으음… 난 반대야. 이대로 뒀다간 사람들이 다 죽어 나갈 테니까."



파우나에 이어 크로니도 손을 들고 일어섰다.



"나도 반대. 이런 걸 가만히 뒀다간 Ωα가 가만 있지 않을걸."



"으음, 그렇지."



크로니의 말에 벨즈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로 손을 든 것은 무메이.



고개는 여전히 책상 위에 박혀 있지만 어떻게든 힘내서 잘 들어 본 모양이다.



"어, 그래서 이번 안건이 뭐라고?"



무메이의 말에 크로니가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감싸고는 그녀의 망토깃을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미지의 힘에 의해 일으켜 세워진 무메이가 크로니를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아, 고마워. 이제 좀 낫네."



"그래, 지금 네 망할 베리밭을 다 불태워 버릴지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거든."



"오! 그럼 난 반대야."



무메이의 반대표에 크로니는 만족한 듯 자리를 옮겼다.



"그래 네가 그 망할 가시덤불들을 아껴서 다행이네. 그래서 사나. 너는 어때?"



마지막으로 모두의 시선이 모인곳은 사나가 앉은 자리.



이제 그녀만 반대만 구한다면 지구를 지켜낼 수 있다. 



균열을 막던지 괴물들을 죽여 버리던지에 대해 결정하는 것은 이후의 문제겠지만.



하지만 사나의 입에선 그녀들이 기대하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나는 이번 안건에 대해 할 말 없어. 사나는 모든 존재. 모든 존재는 사나. 모든 존재의 의지는 사나의 의지. 결정하는 건 모든 존재."



"그럼 네 선택이 모든 존재의 선택이라는 거잖아! 빨리 고르라고!"



크로니의 말에도 사나는 그저 방긋방긋 웃음을 지을 뿐.



그런 크로니를 밀어내며 벨즈가 회의실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 나온다.



"자자 투표 끝난 거 맞지? 반대 세표, 중립 한표, 찬성 의장표로 세표. 동일표 일 때는 의장표에 따르는 거 맞지?"



"잠깐! 벨즈, 넌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려는 건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크로니의 말.



그 말에 대한 대답을 벨즈는 말로 들려주는 대신 눈으로 보여 주었다.



자신의 이빨을, 표정을, 원하는 것을.



벨즈의 웃음에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왜? 라고 묻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었다.



그것이 당연하니까.



크로니 자신이 시간 그 자체이고, 누구보다 그 흐름을 잘 알고 있듯이.



벨즈는 혼돈 그 자체이고, 누구보다 그에서 오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누가 그에 이의를 제기 할 수 있을까.



"잠깐!"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무메이가 회의실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벨즈의 정면을 가로막고 선 무메이.



순간 크로니와 파우나의 얼굴에 화색이 깃들었다.



혼돈의 대척점은 질서.



문명은 질서와 같은 선을 이루니까.



그녀들 중 유일하게 신의 손길이 닿지않은 문명의 수호자라면 해낼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모두의 운명이 걸린 상황.



무메이의 조그만 입이 열리고 노래하는듯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지금부터 내 베리밭을 태울거야?"



둘의 얼굴에 순식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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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거야? 이 세상은 이대로 끝인 거야?!"



폴카의 외침에 크로니의 고개가 슬쩍 들어 올려졌다.



"아뇨, 벨즈 그 녀석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것도 Ωα가 잠시 자리를 비워서예요. Ωα가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 오메가알파 라는 사람은 언제 돌아와?"



라미의 물음. 



그 말에 일으켜 세워진 크로니의 손이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졌다.



불쌍한 사람을 보듯이.



마치 위로라도 하듯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거예요. 라미의 시간에서는… 하지만 폴카의 시간에서는…."



전에 들어본 적 없던 침울한 목소리.



폴카와 라미 모두 크로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라미와 폴카의 수명은 단위 자체가 달랐으니까.



라미의 처지에서는 그냥저냥 견딜 만한 정도의 시간일지라도 폴카의 입장에서는 일생을 다 바쳐야 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것.



"더 빨리 돌아오게 할 수는 없어? 전화를 한다던지…."



다시금 물어 오는 라미의 말에도 크로니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연락같은 건 무리예요. Ωα의 이목을 끌수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하니까…."



-털썩



"그, 그럼 나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면서 수십 년간… 아니 어쩌면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단 말이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린 폴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 폴카의 몸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잔인한 현실 앞에 놓인 인간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누구나 민감할수 밖에 없는 문제인 것이다.



자신의 수명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걸린 문제라면 더더욱.



덜덜 떨고 있는 폴카에게 다가간 라미가 그 차가운 두 팔로 폴카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그리고 폴카를 향해 속삭이는 따뜻한 말.



"괜찮아. 라미는 오마룽이랑 같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폴카와 함께라면 수십 년의 시간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라고 생각한 라미였지만.



"라미는 …니까."



품속 폴카의 떨림은 전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응?"



"라미는 하프 엘프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라미가 원했던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하, 하지만… 둘이같이 견딘다면 얼마든지…."



"안 된다고! 라미랑 같이 있어도 수십 년은 무리야! 나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신나게 놀기도하고!"



"어떻게! 라미는 오마룽이랑 함께라면 얼마든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전의 따뜻하고 좋은 분위기는 어디 간 걸까.



어느새 말싸움이 되어 투닥이기 시작하는 라미와 폴카.



한참이나 싸우는 것을 바라보던 크로니의 얼굴에도 조금 당황한 빛이 감돌았다.



"뭐~가 얼마든지냐! 푸딩이나 훔처먹는 녀석이랑 평생 같이 살수있을까 보냐!"



"그, 그건 이름을 안 써놨으니까! 오마룽이야말로 내가 사놨던 아이스크림 다 먹어 버렸으면서!"



이젠 완전히 꼬맹이들 싸움으로 변해 버린 둘.



그런 두 사람을 말리는 것은 크로니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어느새 몸싸움으로 까지 번져나간 싸움.



이리저리 뒤엉킨 둘은 불안불안한 보폭으로 방 이리저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진정! 진정해요! 거기 베리 덩굴있으니까 조심…."



"우와앗!"



"꺄악!"



크로니의 주의에도 불과하고 .



둘은 베리덩쿨에 걸려, 마치 마법처럼. 갑작스럽고 놀랍게도. 레이네의 퀸사이즈 침대 위에 넘어졌다.



"라미 내가 왜 너랑 침대 위에 묶인 거야?!"



"모, 몰라! 전혀 못 움직이겠어!"



침대와 함께 둘을 옭아맨 베리덩쿨은 아무리 힘을 줘도 도저히 풀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둘이 묶인 침대의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하얀 복장의 한 소녀.



프리즘처럼 이리저리 반짝이는 색을가진 눈과 머리카락.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마치 깨진 유리 조각처럼 흩어져 나가는 빛무리들.



그녀들 중 오직 크로니만이 그녀의 존재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너희 둘이 화해하지 않는다면, 평생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연이어 겹쳐 찾아온 갑작스러운 상황. 



당황한 라미와 폴카 둘의 사고회로가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었다.



라미와 폴카는 침대에 묶인채로 그녀를 바라보며 동시에 외쳤다.





"어떻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