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던지.

아, 딱히 내가 흡혈귀라서 그런건 아니다. 이래 보여도 꽤 독실한 신자로 살아왔다.

뭐? 흡혈귀한테는 위험하지 않냐고? 아니 아니, 십자가라던지 염주라던지 들이 밀어도 약체화되거나 하지 않으니까.

그런건 그냥 가십거리 좋아하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허상이고 애초에 난 흡혈귀가 아니니까.

 아무튼 내 종교활동이라던가 내가 흡혈귀인지 아닌지 하는건 아무래도 좋다. 꽤 독실한 신자로 살아왔다고 자부한 내 신앙심에 금이 가버리다 못해 박살이 나버린게 중요하다.

 처음부터 말한대로, 신은 죽었거나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가증스러운 여자랑 같은 공간에 묶어두거나 하지 않을테니까. 이걸 신의 시련이라 한다면 신은 꽤 악취미를 가진 변태인게 분명하다.

어찌됐건 나와 그 여자는 농구코트에 갇혀있고 그 여자는 내 옆에 서서 농구공을 들고 그것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니 왜 농구코트? 그리고 왜 하늘엔 『테에테에 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이라고 적힌건데?"

 "좀 진정해 할아방탱아. 인간들이 만든 영화 중에 비슷한 거 있잖아. 그거랑 같은 거 아냐?"

 "트루먼 쇼? 하지만 그건 영화야. 하물며 여긴 야외라고! 혓바닥만 맛이 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넌 지금 사람을 쪄 죽일 듯이 내리쬐는 햇빛이 느껴지지 않는거냐?

 "쪄 죽일 듯이라니? 그건 네가 흡혈귀라서 그런거겠지. 아직 4월이 되려면 이틀이나 남았잖아. 그리고 그 영화 속 주인공, 결국 30년동안 자기가 세트장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다른 출연자가 실수하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잖아. 그렇다면 여기가 실내인지 실외인지 구분도 못 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실내 세트장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지."

 "이 시계 꼬맹아, 난 흡혈귀가 아니고 여긴 현실이야. 그런건 말도 안 되는.."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영화 같은 일이 이미 현실에서 일어났잖아. 그냥 좀 받아들이는게 어때?"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여자다. 매번 마주칠 때 마다 내 속을 뒤집어 놓더니 이제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순응하라 하기까지 한다. 차라리 누가 악몽이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아니 그 '차라리 악몽이 더 낫겠다' 같은 표정을 지어봤자 어쩔 수 없잖아. 실제로 밖은 커녕 농구코트 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러니까 왜 농구코트인데? 내가 아웃도어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 그마저도 캠핑이나 낚시, 하이킹 정도라고. 농구는 솔직히 말해 자신 없는데."

 "응 그건 나도 그래. 농구 어떻게 하는건데?"

 "하, 그러셔? 완벽무적인 시간의 화신님도 농구는 못하시나보지?"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완전 카피라던가 엠페러 아이라던가 못 써. 솔직하게 얘기해 볼까? 나 의외로 허당이야."

 "아니 네가 허당인 걸 모르는 병ㅅ.. 지금 뭐라고?"

 뭔가 알아먹지 못할 말장난을 친 것 같지만, 그것보다도 그 뒤에 나온 그녀의 말 때문에 나는 꽤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완벽한 척 허세를 부리던 그녀가 스스로를 허당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나 허당 맞다고. 내친김에 더 솔직하게 얘기해 보자면 내가 완벽한 척 하는 것은 압박감이라 해야 할까, 인간들에게서 받는 기대감 때문이야."

 "기대감?"

 "응 기대감. 수백만년이라는 역사동안 인간들은 나에게, 『시간』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했고, 그 중 가장 큰 의미가 '절대성'이야. 물론 알버트였나.. 한 물리학자가 말한대로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절대적이기도 하거든. 봐, 누구나 시간이 다 되면 죽기 마련이고 한번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

 "교통사고 같이 사고로 죽은 사람들은?"

 "그게 그 사람들에게 정해진 시간이었겠지.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그 형태까진 공평하지 않으니까. 아무튼 그 절대성을 포함해 여러 의미를 부여 받은 나는 본의는 아니지만, 참으로 애처롭게도 절대적이고 완벽한 존재로 있지 않으면 않게 된거지."

 "이거 참 놀랄 노 자군. 너가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할 줄이야."

 비꼬는게 아니다. 난 지금 진심으로 그녀의 말에 놀라고 있다. 나랑 크로니의 관계는 뭐랄까,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천적 같은 관계니까. 스스로 약점이나 다를 것 없는 부분을 솔직하게 말해주는 것이 그저 놀라운 것이다.

 "본의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크로니, 너가 원하는 건 뭔데?"

"이제와서 원하는 것이라고 해봐야... 아, 하나 있다."

 자소섞인 얼굴로 대답하던 크로니는 이내 두번 다시 없을 활짝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 농구 좀 알려줘 베스퍼. 자신 없다고는 했지만 생초보한테 알려 주지 못 할 정도로 못하는 건 아니잖아?"

 " 공 줘. 드리블이랑 슛 하는 방법 정도는 알려줄게."

 평소였다면 싫어하다 못해 이름을 듣기만해도 치를 떨 가증스러운 존재였을텐데.. 크로니의 사정을 듣다보니 분에 맞지 않는 무거운 짐을 들게 돼 고생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미워도 정이라고 했나, 나는 크로니에게 드리블과 슛을 알려줬고 크로니는 크로니대로 곧잘 배워 나가서 어느샌가 1대1 하프코트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해..아니 조명이 울긋불긋 하게 바뀌는 걸 봐서 저녁이 된 것 같았다. 스코어는 어디까지 셌는지 기억도 안 나고 나도 크로니도 서로가 지쳐있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스코어도, 헥,  기억 안 나고.. 크로니 너도 나도 지쳤으니까, 헥,  이 한 골로 정하자. 골을 넣으면 내 승리, 막으면 네 승리. 어때?"

 "헤, 그거 좋네. 근데, 헥, 괜찮겠어? 내가 무조건 이길텐데."

 "웃기고 있네. 너한테 지느니 내 심볼을 잘라서 풀숲에다 버리겠다."

 여자애 앞에서 심볼이니 뭐니 할 소리는 아니지만 그만큼 진지하다는 뜻이다. 한번쯤은 이겨서 저 잘난 표정을 한번쯤은 울상짓게 만들고 싶다! 이미 예전의 감정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번만큼은 하나밖에 없는 주니어를 걸고서도 이기고 싶은것이다.

 "아."

 근데 하늘이 날 돕고 싶지 않은건가, 아니면  지친 탓인가. 왼쪽으로 가듯이 페이크를 걸고 크로스 오버해서 오른쪽으로 드리블을 하려던 찰나 참으로 멍청하게도, 정말이지 스스로에게 욕을 하고 싶을 정도로 멍청하게도 내가 내 다리에 걸려버렸고, 관성의 법칙에 의해 난 크로니를 덮치듯이 쓰러졌다.

 "으으으, 괜찮아 크로니?"

 엎어지면서 크로니가 다치지 않게 팔을 쭉 뻗은 상태로 넘어졌기에 그 충격이 손목은 물론 팔을 통해 온몸에 울리기 시작했다. 다리끼리 걸려서 넘어진 탓에 본의 아니게 크로니까지 말려 들게 했는데 크게 다치진 않았으면..

 "으..응, 난 괜찮아. 그보다 베스터.."

 "앗.."

 "그.. 비켜줄래..? 아무리 나라도.. 이런건.. 좀 부끄러워.."

 진짜 노을이라 착각할 만한 조명 때문인지, 아니면 크로니의 얼굴에 살며시 떠오른 홍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 밑에 깔린 크로니는.. 언제나 완벽한 척을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감시자의 모습도, 무거운 짐을 지고 완벽함을 연기하는 불쌍한 소녀의 모습도 아닌 그저 수줍어하는 청초한 미소녀 그 자체였다.

 "아, 앗, 미안. 정말 미안. 진짜, 고의는, 아니었어."

 "아니, 괜찮아. 서로 지쳐있었고 고의가 아닌 것 쯤은 알아."

 .................

 서로간의 대화도 없이, 부끄러워하는 어린 아이 처럼 시선을 돌린 채 어색한 침묵으로 공간을 채우길 수 초 정도, 농구코트의 문 쪽에서 철컥, 하고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간부터 눈치채긴 했다만, 역시 여기는 진짜 야외 농구코트가 아니라 그렇게 보여지게 셋팅된 실내 촬영장이었구나. 그래서 '나가지 못하는 방'인가.. 틀린 말은 아니다. 규모도 그렇게까지 크진 않으니 세트를 치우고 나면 방처럼 보이긴 하겠지.

 문이 열리고 나서는 나나 크로니나 아무 말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은 계속됐지만 서로 보기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것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문을 지나자 마자..

 "휘유, 뭐야 영감. 그렇게 크로니 이름만 들려도 치를 떨더니... 아주 하이틴 로맨스 하나 찍으셨어?"

 "크로~니? 너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 거야? 경사났네, 경사났어~."

 "이 씨...ㅂ..매그니 좀 닥쳐봐."

 "..시..시끄러워 베이.."

 각자의 동료가 놀리는, 참으로 유쾌하지 않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트루먼 쇼 얘기를 하길 했다만.. 진짜 트루먼 쇼였냐고..!

 하지만 뭐..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녀석들이 날 놀리며 장난치는 것도 하루이틀도 아니고. 크로니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면야 싼 편이라고 생각한다. 아까 신은 죽었거나 존재하지 않다고 했는데, 사실은 신은 존재하는게 아닐까.

 "아, 맞다. 베스퍼."

 "어?"

 "오늘도 내가 이긴거니까. 그거, 기대할게."

 "그거..라니?"

 "뭐긴 뭐야, 나한테 지느니 자른다며. 졌으니까.. 잘라야겠지?"

 "너.. 너, 이.. 망할 시계 꼬맹이...!"

 역시 신은 죽었다. 아니면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고 한다면 진짜 가학적인 악취미를 가진 쓰레기 말종 변태새끼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뭐? 수줍은 청초한 미소녀? 내가 미쳤지. 눈에 뭐가 씌여도 단단이 씌인 모양이다. 그렇게 갑자기 저 여자가 좋아질리가 없잖아. 하지만..

 "너.. 두고봐. 다음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이길테니까."

 "헤, 기대할게. 다음에도 내가 이기겠지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부턴 저 녀석을, 크로니를 무조건 싫어하는 것을 못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허, 뭐야? 진짜 자르는 거야, 영감?"

 "진짜 부탁이니까 입 좀 닥쳐줄래요, 매그니 데지몬드?"

 "여..영감이 이상해 알테어! 평소엔 존댓말도 욕도 안 쓰는데!"

 "영감은 원래 좀 이상했어."

 정말이지, 평소엔 보지 못한 모습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가.. 크로니가 '그런 방법'이라도 웃을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니, 이 경우 내가 독박으로 손해를 보는 거 아닌가?

 "뭐, 아무래도 좋나."

 "알테어!! 영감 진짜 이상하다니까? 이젠 혼잣말로 알 수 없는 소리까지 하고 있고."

 "그러니까, 영감은 원래 좀 이상했다고."


-끗-


+여담)토와X마츠리에 야마다 난입하려다 물리적으로 실패해서 절망하는 끈적끈적한거, 신리X마키나로 질펀한 해병문ㅎ..아니 BL, 4th 페스때 파우나한테 머리깨진 홀로멤으로 질척질척한 치정극 써볼까 하다가 갑자기 이 둘이 엮이면 재밌을 것 같아서 써봄. 근데 테에테에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몰라서 걍 로맨스코미디 비슷한거 싸지름. 근데 왜 농구냐고요? 크로니X베스퍼->크로X베스->쿠로바스..?->쿠로코의농구?? 같은 의식의 흐름때문에. 참고로 트루먼 쇼 컨셉이라 템퍼스HQ전원+카운슬리스 전원이 저 촌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