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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은 감수하도록



소재가 된 게시 글

https://arca.live/b/holopro/84860493/406163817#c_406163817


여름이 싫다.

수십 개나 되는 이유를 들어줄 인내심이 있다면 이유를 물어봐도 좋지만, 그런 인내심이 없다면 조용히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한 번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테니까.

그래도 하나만 말해주자면, 그건 더위다. 이 미칠듯한 더위를 나는 극복할 자신이 없다. 에어컨을 틀면 되는 거 아니냐고? 에어컨은 공짜가 아니란 말이다.

거기다 에어컨이 멀쩡해야 틀던 말던 할 거 아니야.


바로 어제 소꿉친구란 녀석이 우리 집에 놀러왔었다. 그 녀석이 놀러오는 일이야 꽤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문제는 우리의 사상 차이였다.

나는 에어컨을 최대한 조금 튼다는 주의다. 어느 정도 더위는 시원한 마룻바닥에 붙어있으면 해결이고, 더 더워지면 찬물로 샤워하고 선풍기 앞에 들어앉으면 그만이다. 33도가 넘어가면 나도 못 버티니 틀긴 해도 그것도 1시간 이상을 넘기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까지 우리 집 에어컨은 여름에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 소꿉친구 녀석은 나랑 정 반대로 생각한다는 게 문제였다. 문명의 이기는 쓰라고 있는 거라며 녀석은 놀러와 있는 내내 에어컨을 틀어제꼈다. 가엾은 우리 집 에어컨은 그런 장시간의 가혹한 노역에는 노출되어 본 적이 없었고, 불쌍하게도 가동 4시간만에 내 사랑하는 에어컨이 20년의 긴 삶을 마치고 말았다.

바로 에어컨 기사님에게 전화했지만 여름이라 일주일은 더 지나야 수리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고, 녀석은 좀 미안해하긴 했지만 그래도 갈 때가 되어서 간 거라며 내 속을 벅벅 긁었다. 나는 제 247회 '저런 걸 친구라고 둔 나를 저주하는 시간'을 좀 갖기로 하고 녀석을 쫓아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는 여름의 더위를 원망하며, 땀에 푹 절은 채로 녹아내린 아이스크림마냥 마룻바닥에 엎어져 더위를 극복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지난 일을 회상하며 제 248회 '저런 걸 친구라고...이하생략' 을 가질까 고민하는 나를 휴대폰의 알림음이 깨웠다.


"홀톡."


음, 홀톡이 왔네. 읽기 귀찮으니까 누워 있자.


"홀톡."


조용해지겠지.


"홀톡, 홀톡."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자. 움직이거나 짜증내면 덥다. 더우면 지는 거다.


"홀톡, 홀톡, 홀톡, 홋홀톡."


젠장.

결국 미친 듯이 울려대는 홀톡의 알림음에 결국 열이 받아버린 나는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대체 누가 감히 나를 부르느냐.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내 가슴 속 마지막 평정심마저 무너져내렸다. 잠금화면을 가득 채운 홀톡 알림에 박혀 있는 이름은 내 에어컨을 무참히 살해한 소꿉친구, 시라카미 후부키였다.


-야


-자?


-뭐해?


-야


-뭐하냐구


-야!!!!!!!!!!!어이!!!!!!!!


-죽은거야? 죽어버린거야?


-답장 안 하면 너네 집으로 쳐들어간다?!


세상에나. 뭐가 그리 급하길래 이렇게 극단주의자들마냥 홀톡 테러를 저지르셨을까. 나는 한숨을 내뱉고 마룻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답장 안 하면 쳐들어온다니 답장은 해야겠지.


'뭔데'


보내기 무섭게 답장이 왔다.


-이거 보고 핑까점 ㅋㅋ


그리고 뒤이어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새로 산 수영복인데 어떰?


그러니까 수영복 평가나 해달라고 그렇게 불러댔던 거란 말이지. 세상에.


'남친한테 보낼 걸 왜 나한테 보내냐'


-없는 거 알잖아.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어떤데?


'먹기 좋으라고 손질해놓은 개고기냐? 극단주의자들이 보면 보신탕 끓여먹겠다고 덤비겠다.'


-아닠ㅋㅋㅋㅋㅋ 진짜 진지하게 괜찮냐고!!!!


뒤에 잔뜩 붙은 느낌표가 평소의 후부키같아 웃음이 났다. 이 정도 놀렸으면 진지하게 얘기해줘야지.


'네 얼굴 몸매에 비키니 입었음 끝났지 뭐. 니도 니 이쁜 거 정도는 알잖아'


한참 답이 없다. 게임이라도 하고 있나. 이 녀석 게임 좋아하니까.

나도 게임이나 할까 생각하던 중에 다시 답장이 왔다.


-진짜 괜찮아?


'ㅇㅇ'


-그래??? 그럼 이번 토요일 비워놔


'뭔데 또'


-아 진짜 더럽게 눈치 없네. 수영복 사진 보냈고 토요일 비워놓으라면 무슨 얘기겠어?


'양아치는 주말에 수영장을 가고 싶은데 데려가 줄 노예가 필요해요. 이런 양아치들은 양심이 없어요. 그들은 순간의 홀톡으로 빠른 운전기사를 원합니다.'


-ㅋㅋㅌㅋㅌㅊㅋㅋㅋㅌㅋㅋㅋㅌㅊㅌㅌㅌㅋㅋㅌㅌㅋㅋㅋㅊㅌㅋㅋㅋㅋㅌㅋ


겁나 좋아하네. 이런 게 뭐가 웃기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ㅋㅋㅋㅋㅋㅋ거의 다 맞추긴 했는데 좀 틀렸어. 너랑 나랑 갈 거고, 수영장 아니고 바다야.


'몇이서 가는데. 또 우리 겜붕이들 모임임?'


-아니


그럼 누구랑 간다는 거야. 설마 진짜 남친이 생겼을리는 없고. 정말 남자들 꼬시러 가나? 얘가 외로워서 미쳐버렸나?


-너랑 나랑 둘이서


'...'


-뭐야, 별로야? 이 시라카미 눈나께서 친히 데려가주신다는데 거부권을 행사할 건가?


'눈나는 무슨, 평소에는 아저씨라며'


-시끄럽노라! 어차피 너 일정 없잖아. 아저씨는 전부 알고 있단다? 그럼 가는 걸로 알고 난 겜하러감ㅂㅂ~


일방적인 통보를 끝으로 홀톡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나는 애꿎은 홀톡의 하늘색 인터페이스만 노려보다가 화면을 껐다. 자, 제 248회 '저런 걸 친구라고...이하생략' 을 가질 때가 왔나.

쓸 데 없는 잡생각을 하다 문득 매미 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눈을 감고 털털거리는 선풍기 바람을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여름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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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으로 돌아와서 여름방학 내내 쳐박혀있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던 차의 기름을 채우고, 기름값에 좀 경악한 다음, 해변에서 쓸 물건 몇 개를 사고 나자 금세 주말이 다가왔다.

나는 후부키의 집 앞에 차를 대놓고 기지개를 쭉 켰다. 차의 에어컨도 시원하게 틀어놓았다. 후부키는 더우면 축 늘어지니까.


"하이 프렌드~~~."


특유의 높은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조수석으로 하얀 번개가 날아들었다. 번개는 유려한 동작으로 조수석에 앉기, 안전벨트 차기, 조수석 문 닫기,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씩 웃기까지 한번에 해냈다.

나는 번개가 여우 귀와 꼬리를 가진 인간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잠깐 기다렸다가 대답했다.


"하이 프렌드는 무슨."


"오야오야, 소년은 프렌드가 싫은감? 그럼 콘콘키~츠네!"


"너 그거 안 부끄럽냐?"


"어차피 네 앞에서만 하는데 뭐. 그보다, 오늘 제 스타일은 어떻습니까?"


후부키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잘 보라는 듯이 몸을 뒤로 슬쩍 뺐다.

끝이 까만 귀가 위로 바짝 솟은, 밝은 흰빛의 머리가 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 아래 있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짓는다. 어깨부터 무릎 아래까지 덮고 있는 흰색 원피스는 시원하고 청초한 느낌을 동시에 주었고, 자그만 발에 신겨진 평소와 다른 갈색 가죽의 샌달은 하얀 피부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나는 이 모든 걸 한번에 요약해서 전달하기로 했다.


"꼬리 안 세우게 조심해라. 팬티 보일라."


"야!!!!"


후부키가 나름 혼내주겠다고 때리는, 하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은 주먹을 맞으며 나는 엑셀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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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키는 해변으로 가는 내내 쉴새없이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대학 첫 학기 생활은 어떤지, 어떤 동아리에 들었는지, 동기들은 어떤지, 축제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등등.

적당히 맞장구치며 차를 몰고 있자니 해변에는 금방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얼굴에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쳐올라왔다. 벌써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


"이야! 바다다! 완전 시원해 보여!"


후부키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자 넓고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코 끝에 스치는 비릿한 바다 향, 눈 앞을 가득 메운, 푸르른 나머지 눈이 아플 정도의 바다, 귓가에 청명하게 울리는 파도 소리, 입으로 숨쉬면 느껴지는 짭잘한 바다 공기. 피부에 닿는 끈적한 바닷바람.

비로소 바다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내가 그렇게 온몸으로 바다를 느끼고 있는 사이에 후부키는 탈의실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녀는 나를 잡아끌고 해변 입구에 있는 탈의실로 향했다.


탈의실에서 나오고 나자 햇빛이 따갑게 피부를 때려댔다. 눈이 부셔서 얼른 선글라스를 썼다. 주변을 둘러보니 후부키는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 좋아. 이 틈에 비키니 입은 쭉쭉빵빵한 누님들이나 구경할까.

해변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피서 온 가족들, 친구들끼리 왔는지 신나서 헤엄치는 남자들, 비키니를 입은 늘씬한 하프엘프 누님들, 예쁜 수영복을 입은 다양한 동물귀의 소녀들... 몇십 년 전에는 보기 힘들었을 풍경이다.

한참 눈호강을 시키던 와중에 옆에서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뭔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이. 어딜 보는 거야."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쁜 언니야들 구경하는 중이다. 아주 그냥 눈이 호강을 하네 호강을 해."


"여길 봐야지! 예쁜 애는 여기도 있다고!"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아픔의 강도가 점점 세지자 나는 한숨을 쉬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흰색과 검은색의 튜브를 들고 있는 후부키는 정말이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잡티라곤 찾아보기 힘든 피부는 햇빛 아래에 환하게 빛났고, 장식이 거의 없는 흰색 비키니는 그녀의 하얀 피부와 완벽하게 어울림과 동시에 후부키의 늘씬한 몸매를 가감없이 드러내었다. 손목에 걸린 푸른 링은 그녀가 팔을 움직일때마다 흔들거렸다.

검은 초크를 목에 차서 그녀의 가는 목은 더욱 가늘어보였고, 더워서인지 발갛게 상기된 얼굴은 남자를 미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거기서 확신했다. 후부키는 셀카를 더럽게 못 찍는구나.

멍하니 후부키를 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너무 빤히 바라보는 건 실례인데. 화내지 않으려나.

그런데 후부키도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래 보고 있느라 더워서 좀 멍해졌구나. 미안해지네.

사과하려던 차에 후부키 먼저 입을 열었다.


"...스 어울리잖아..."


"어?"


멍청하게 되묻자, 후부키의 녹색 눈에 팟 하고 생기가 돌아왔다. 그리고 눈에 띌 정도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아냐! 덥다, 빨리 바다 들어가자! 아하하하하..."


후부키는 급하게 몸을 돌렸다. 그런데 너무 급히 몸을 돌린 탓인지, 그녀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꺅!"


"후부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후부키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녀는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섰다.


"괜찮아?"


"어, 응. 고마워. 헤헤..."


한숨을 쉬며 손을 놓자, 후부키의 손목에 붉게 남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급한 마음에 너무 세게 잡은 모양이었다. 하얀 피부에 선명하게 드러난 붉은 자국은 눈에 확 띄었다.


"아, 미안해. 손목에 자국 남았네."


"응? 별 거 아냐. 좀 있으면 가라앉겠지 뭐."


"그래도 여자인데... 미안하다 야."


후부키는 묘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 여자로는 보는 거야?"


이크, 실수했다. 이대로라면 한 달 동안 놀림당할 게 뻔하다. 나의 뇌는 이 곤란한 질문을 회피하기 위해 가장 확실하지만, 아주 고전적이고, 거기에 더해 엄청나게 수치스러운 길을 선택했다. 후부키의 튜브를 낚아채서 바닷가로 전력으로 질주하며, 나는 크게 외쳤다.


"나 잡아봐라!"


"뭣, 야!! 나 그거 없으면 수영 못 해! 거기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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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힘드네."


오후 내내 해변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며 후부키와 놀다 보니 슬슬 체력이 경고 신호를 보냈다. 아니, 휘젓고 다닌 건 후부키고 난 그걸 어떻게든 쫓아다닌 거라고 해야겠지.

튜브를 끼고 신나게 수영하다가, 비치발리볼이 하고 싶다고 어디서 커플을 하나 데려와서는 2대2 비치발리볼을 한바탕 하고(우리가 졌다), 배고프다며 노점에서 햄버거 두 개를 해치우고, 어린 여자아이들이 너무 귀엽다며 달려들어서 같이 놀아주고...

그러다가 덥다며 나에게 음료수를 좀 사오라고 시켜서 나는 지금 낡은 자판기 앞에 서 있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가 조금 넘었다. 슬슬 집에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

낡은 자판기라 걱정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음료수는 다행히 시원했다. 나는 음료수 두 개를 옆구리에 끼고 해변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후부키는 멀지 않은 곳에 서있었다. 수영복을 입은 덩치 좋은 남자 둘과 함께.


"어?"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버렸다.

한쪽은 어깨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박박 민 남자였고, 한쪽은 금발로 염색한 잘 생긴 남자였는데, 둘 다 햇빛에 보기 좋게 그슬려 있었다. 그들은 후부키의 손목을 잡고 뭐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아, 헌팅인가.'


갑자기 뱃속에서 가슴까지 이상한 열이 치밀었다. 당장에라도 뛰어가서 후부키에게서 남자들을 떼놓고 싶었다. 그런데, 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후부키는 예쁘니까. 너도 알잖아?'


'그래. 이런 데서 좋은 인연 찾고 그러는 거지.'


'지금 가면 방해라고 화낼지도 몰라.'


나는 간신히 반박할 말을 떠올렸다.


'아냐, 극단주의자들일 수도 있잖아. 가서 도와줘야 해.'


그러나 비웃듯이 다른 생각이 바로 꼬리를 물어뜯었다.


'극단주의자들이었으면 애초에 뭔가 행동을 했겠지. 지금 지켜보는데도 웃고만 있잖아?'


'도와준답시고 설치다가 후부키 기분만 상하면?'


'네가 남친도 아니고, 해변에서 마음 맞는 사람끼리 노는 건 그녀의 자유지.'


억지로 마음 속을 헤집은 끝에 나는 투정에 가까운 생각을 끄집어냈다.


'뭐야, 그럼 난 왜 데려온 거야?'


그러나 내 머릿속의 생각은 냉정했다.


'그럼 너도 이 기회에 예쁜 여자 하나 꼬시던지, 애초에 먼저 다른 여자들 쳐다보던 건 너였잖아?'


멍하니 서서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후부키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예쁜 옥빛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그 안에 분노가 차오르는 게 보였다. 그걸 보자 갑자기 발이 떨어졌다.

후부키는 내가 옆에 서자마자 내 손에서 음료수를 낚아채고는 해변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이, 형씨."


굵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두 남자가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왜요."


"혹시 저 사람 팔, 형씨가 그런 거요?"


"팔?"


아, 후부키의 팔에 남은 자국.


"네. 넘어지는 걸 급하게 잡아주다가..."


두 남자는 서로를 돌아보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금발의 잘생긴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혹시 누가 손찌검을 했나 하고... 극단주의자들이 요즘 기승이잖아요."


뒤이어 문신한 남자도 말했다.


"제 여동생도 오늘 당할 뻔 했거든요. 그 쪽 여자친구분도 조심하라고 하세요."


"예? 여자친구 아닌데요?"


두 남자는 다시 한 번 서로를 돌아보더니 이번엔 씩 웃었다.


"아니라구요? 어련하시겠죠. 어쨌든 얼른 쫓아가 보세요. 저기 있을... 어?"


남자들은 후부키가 향한 방향을 보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리고 곧이어 시선을 돌린 나도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향한 탁 트인 해변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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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후부키! 어디 있어!"


목청껏 소리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언덕을 오르느라 숨이 턱까지 찼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후부키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그녀가 없어진 지 한 시간이 넘었다. 전화는 해도 받지도 않고, 해는 점점 기울어 어느 새 하늘은 붉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그녀를 찾는 남자 둘의 목소리도 들렸다. 후부키를 걱정하던 두 남자는 남 일 같지 않다며 나를 도와주기로 했지만, 아직까지 성과는 없는 모양이었다.


"전화 좀 받아라... 내가 잘못했으니까..."


내가 도와주지 않았던 게, 아니지. 겁을 집어먹고 꼼짝도 못 했던 게 싫었던 거지. 아무리 몇십 년 전 이야기라고는 해도, 그리고 지금은 극소수라고 해도, 동물귀를 차별하는 극단주의자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구해줄 만큼 용기있지 않은 게 후부키를 실망시켰을 거다.


'멍청한 놈. 거기서 멍하니 쳐다보면서 '연애는 자유지.'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고. 친구가 어떤 공포감을 느꼈을지도 모르면서. 천하태평하기 짝이 없이 거기서 멍하니 서있기나 하고.'


그녀를 찾는 내내 계속 자책했다. 하지만 자책한다고 후부키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나는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일곱 시 반이었다. 화면에 뭔가 묻은 듯 얼룩이 져 있었다. 나는 얼룩을 자세히 보려고 휴대폰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그 때, 뭔가 하얀 게 시야 끝에 걸렸다.

어느 새 갈아입었는지 원피스 차림인 후부키가, 길 끝에 서 있었다.


"야, 후부..."


후부키는,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검은 모자를 눌러 쓴 남자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서 벗어나려는 듯 조금씩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후부키의 얼굴을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뭔가 끊어졌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검은 모자를 쓴 남자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 새끼야! 안 떨어져!"


후부키가 이쪽으로 돌아섰다. 그 때,  남자의 오른손에서 뭔가 빛난다 싶더니, 남자는 왼손으로 후부키의 목을 감싸고 오른손을 그녀의 턱 밑에 바짝 들이밀었다.


"안 멈추면 찌른다!"


나는 반사적으로 우뚝 멈췄다.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건 송곳이었다. 길다란 공업용 송곳.

극단주의자들의 상징적인 물건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발을 떼었다.


"그 손 당장 안 치워!"


"시끄러워! 더 다가오지 마! 안 그러면 찌른다!"


나는 남자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대략 5미터정도 되는 거리였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내가 먼저 남자에게 다가가기 전에 남자가 후부키의 목을 꿰뚫어버리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다가오지 말라고 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떼었던 발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남자는 그걸 보고는 송곳을 후부키의 목에서 조금 떼어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남자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이봐, 너. 이 역겨운 짐승의 뭐냐?"


짐승이라는 말에 머리 끝까지 열이 치솟았지만, 조금이라도 저 남자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후부키가 다칠 것 같아 걱정되어 화를 꾹 참았다.


"...친구다."


"친구? 하! 거 재밌네. 짐승새끼랑 친구사이라니."


남자는 듣기 싫은 목소리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조용히 분노를 삭이며 후부키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걸 보자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럼 뭐 하나 묻자. 너는 이 짐승을 구하는 데 얼마나 낼 수 있냐?"


"...뭐?"


"짐승이랑 어울리더니 짐승새끼가 됐나. 못 알아 처먹어? 이 짐승 값으로 얼마나 낼 수 있냐는 거야!"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일단 걔를 놔 줘."


나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려 애썼지만, 남자의 눈은 모자 챙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뭔가를 궁리하는지 잠시 말이 없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야, 너 차 있냐?"


"...있다."


"여기 갖고 왔냐?"


"그래."


"그 차는 어디 있지?"


"저 아래 해변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어."


말을 마치자마자 길의 가로등이 전부 켜졌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눈에 핏발이 선, 추레한 인상의 깡마른 중년 남자였다.

남자는 이죽거리더니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네 핸드폰을 바닥에 두고 그 차를 몰고 와라. 5분 주겠다. 만약 5분보다 오래 걸리면 이 짐승은 뒤지는 거야. 알아들어?"


"...차를 가져오면 놔 주는 거지?"


"늦지만 않는다면."


남자는 다시 듣기 싫은 소리로 낄낄거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냈다.


"좋아, 가져오지. 그런데 내가 갔다왔을 때 그녀에게 조그만한 상처라도 있으면, 넌 내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죽인다."


남자는 콧방귀를 뀌곤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허세는, 염병. 짐승새끼 따먹는 취미는 없어. 빨리 갖고 오기나 해라. 혹여나 경찰 불렀다간 알아서 하고."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물러났다. 시선은 후부키의 얼굴에 고정했다. 그녀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마음이, 반드시 구해주겠다는 마음이 털끝만큼이라도 전해지도록.

후부키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아주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부키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나는 미친 듯이 언덕을 달려내려갔다. 올라올 때는 그렇게 길었던 언덕이 달려내려갈때는 순식간이었다.

저 멀리 주차되어있는 차가 눈에 들어오자 나는 차키를 든 손을 뻗었다. 그 때, 갑자기 몸이 기우뚱 하고 기울었다.나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무릎이 까졌는지 피가 종아리를 따라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파할 새가 없었다. 후부키는 훨씬 더 무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까. 나는 벌떡 일어나 차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엔진음이 들리기 무섭게 나는 엑셀을 밟았다. 언덕은 금방 올랐다. 남자는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라이트를 끄고 창문을 열었다.


"차를 가지고 왔다! 걔를 놔 줘!"


"놔 줬다가 네 차에 치이라고? 먼저 내려라!"


빌어먹을 놈. 안 그렇게 생겨서 똑똑하긴. 나는 남자의 지시에 따라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남자의 뒤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남자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뒤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빨리 안 내리면 찌른다! 얼른 내려!"


"잠깐만! 안전벨트가 끼었으니 잠깐 기다려!"


남자는 툴툴거리며 송곳을 후부키의 목에서 조금 느슨하게 떼었다. 거짓말로 잠깐의 시간을 벌고 나서, 나는 남자의 등 뒤에 있는 실루엣을 필사적으로 살폈다.

실루엣은 남자에게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우뚝 멈췄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천천히 차에서 내리며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하면서 왼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남자의 얼굴이 저열한 기쁨으로 차오르는 게 보였다. 남자의 오른팔이 후부키의 목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 나는 조명 레버를 밀어 차의 상향등을 켰다.

남자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가리자마자 실루엣이 남자를 덮쳤다.


=======================


"이야, 그래도 다행이네요. 어떻게 코로네가 딱 거기 나타났네요."


"감사합니다. 코로네 씨 아니었으면 후부키는 크게 다쳤을 거에요."


"아뇨, 거기서 상향등 킬 생각을 하신 게 대단하죠. 잘하셨어요."


금발의 남자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삭발한 남자는 기분 좋게 껄껄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부키를 구해준 건 이누가미 코로네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발 남자의 여자친구이며 후부키의 대학교 친구라고 했다.

그녀는 상향등이 켜지자마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극단주의자 남자의 얼굴을 후려쳐서 쓰러뜨렸다. 어찌나 주먹이 매운지 남자는 경찰이 올 때까지 깨어나지도 못했다.


"이야, 동생이 이름을 듣자마자 자기 친구라며 벌떡 일어나더라구요. 복싱 가르칠 때나 보던 눈인데. 어찌나 살벌하던지요."


코로네 씨의 오빠라고 밝힌 삭발한 남자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코로네가 주변을 좀 둘러본다 싶더니 바로 후부키 씨의 냄새를 맡았다고 달려가버렸죠. 거 참, 어머니 닮아서 코는 기가 막히게 좋다니까요. 저는 아버지 닮아서 동물귀도 없는데."


삭발한 남자가 연기를 뱉자, 매캐한 향이 코를 찔렀다.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며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는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친구와 같이 있어서 긴장이 풀렸는지 아까만 해도 벌벌 떨던 후부키는 즐겁게 불꽃을 들고 빙빙 돌고 있었다.

코로네 씨는 후부키를 구해내자마자 나와 후부키를 마구 야단쳤고, 나는 사죄와 감사를 동시에 하는 진귀한 체험을 하며 엉엉 우는 후부키를 달랬다.


"예쁘네요."


"네?"


금발 남자의 목소리에 후부키에게서 시선을 떼자, 코로네 씨도 불꽃을 들고 빙빙 도는 게 보였다. 그걸 바라보는 금발 남자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 여자친구, 참 예쁘지 않나요?"


"네. 그렇네요."


갑자기 여자친구 자랑인가 싶었는데, 금발 남자는 내 어깨에 손을 턱 걸쳤다.


"할 수 있을 때 아껴줘요."


"네?"


"오늘 알아챘잖아요?"


코로네 씨의 남자친구는 나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해변으로 내려갔다.

그걸 멍하니 보고 있는데 삭발한 남자도 내 등을 탁 쳤다.


"저 친구 말이 맞아요. 둘이 잘 얘기해보세요."


남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내려간 그의 친구를 따라 해변으로 내려갔다.

코로네 씨는 손을 흔들다가, 그녀의 오빠에게 담배 좀 그만 피우라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내가 앉아 있는 벤치에서도 들렸다.

후부키는 그걸 난처하게 바라보다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벤치 옆자리를 툭툭 쳐보였다.

후부키가 옆에 앉자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괜찮아?"


"응. 이제 많이 진정됐어."


가벼운 떨림이 전해졌다. 많이 놀랐겠지.

나는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가슴 속 일렁임을 억지로 눌렀다. 


"미안해.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해서."


"아냐아냐, 내 잘못이지. 그렇게 멋대로..."


후부키는 손사래를 치며 어설프게 웃었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가 내 죄책감을 더했다.


"미안해. 그렇게 겁쟁이처럼 굴어서."


"무, 무슨 소리야! 날 구하려고 차를 가지러 간 거잖아! 그게 왜 겁쟁이같은 건데!"


"어? 아니, 네가 뛰쳐나간 건 내가 너를 구하려고 하지 않아서..."


"에? 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후부키는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아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


"뭐, 뭐야. 왜 웃는데?"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어버렸다. 후부키는 뭐가 그리 웃기는지 한참이나 더 웃었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나서 그녀는 벤치에 등을 기댔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난 그런 거 때문에 화가 나서 뛰쳐나간 게 아니야."


"그럼 왜?"


"그건..."


후부키는 얼굴을 슬쩍 돌렸다. 귀가 쉴새없이 파닥거리고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뭔가 부끄러울 때 하는 행동이다.


"그... 그게... 그러니까 있잖아..."


"응."


"말해도 안 비웃을 거지?"


"응."


"정말?"


"어. 정말"


"진짜로?"


"그래. 진짜로."


"맹세코?"


"...나 화낸다?"


내가 짐짓 화난 목소리를 내자 후부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커다란 옥빛 눈이 맑게 빛났다.


"네가 나를, 여자로 안 보는 것 같아서 그랬어."


아. 그거였구나.

항상 도망치기만 했다. 비키니 입은 사진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고, 만나서 원피스 입은 모습을 봤을 때도, 비키니 입은 걸 처음 눈앞에서 봤을 때도, 코로네 씨의 남자친구와 오빠에게 헌팅당하는 걸로 오해했을 때도,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전부터, 나는 내 마음에게서 도망쳤다.

사실은 나도,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후부키."


"응?"


"난 네가 여자로 보여."


"으...어?"


"푸흡, 푸하핫! 푸하하하하핫!"


이번엔 내가 웃을 차례였다. 맹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후부키도 나를 따라 같이 웃기 시작했다.

서로 한참 웃고 나서야 나는 다음 말을 할 수 있었다.


"난 네가 여자로 보인다고. 오늘 비키니 입은 거 봤을 때도, 아침에 원피스 입고 내 차에 탔을 때도, 며칠 전에 비키니 입은 사진 보냈을 때도, 그리고 그 훨씬 전부터, 난 널 여자로 봤어."


후부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별이 쏟아질 것만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코로네 씨 남자친구분이 그러더라. 아껴줄 수 있을 때 아껴주라고. 오늘 배우지 않았느냐고. 그 말이 맞더라. 오늘 너를 잃을 뻔 하면서 알았어. 나는 네가 없어진다면 정말 많이 후회하고 아프겠구나, 하고 말야."


나는 후부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후부키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벤치 위의 후부키의 손을 잡았다.


"시라카미 후부키."


"응."


멀리서 폭죽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다시 폭죽을 터뜨리고 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게. 나는 네가 좋아. 나랑 사귀어줄래?"


폭죽의 불빛에 후부키의 흰 머리카락이 여러 빛깔로 반짝였다. 그녀의 입가에 마침내 환한 미소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후부키는 내 손을 깍지껴 마주잡고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팔딱거리며 움직이는 귀가 내 귀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그녀의 꼬리는 어느 새 내 허리에 슬쩍 감겨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바라보았다.


=========================


으로 돌아오는 길은 엄청나게 짧게 느껴졌다.

코로네 씨는 후부키를 울리면 손가락을 잘라가겠다며 나에게 엄포를 놓았고, 나는 내가 후부키를 더 오래 봐왔다고 능글맞게 받아치다가 후부키에게 꼬리로 한 대 얻어맞았다.

우리는 방학이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자고 약속하고 연락처를 교환한 다음 헤어졌다.

후부키는 늦은 밤인데다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피곤했는지 돌아오는 내내 조수석에서 잤다. 덕분에 나는 신호등 앞에 설 때마다 실컷 그녀의 자는 얼굴을 감상하는 행운을 누렸다. 감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신호 두 개를 놓쳐버리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후부키의 집 앞에 도착하자 이미 새벽 3시가 넘어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후부키를 흔들어 깨웠다.


"후부키, 집 앞이야."


"우웅..."


후부키는 귀를 축 늘어뜨리고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졸려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엄청나게 귀엽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내 여자친구는 귀엽네.

눈을 비비다 못해 고양이 세수까지 한 끝에 후부키는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 나 내내 잔 거야? 침 안 흘렸지? 잠꼬대 안 했지? 코 안 골았지? 이 안 갈았지?"


"전부 다 한번에 대답하자면, 응. 응. 응. 응. 응."


"정말?"


"어. 정말"


"진짜로?"


"그래. 진짜로."


"맹세코?"


"...나 화낸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은 여러가지로 전부 고마워."


"별 말씀을."


"그러니까, 보답을 해야겠지요?"


"응? 보답?"


후부키는 배시시 웃었다.


"코로네한테 배워 왔는데, 선물로는 이게 직빵이래. 눈 감아봐."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양 손 다 등 뒤로 가 있는 게 뻔히 보인다. 뭐 선물이라도 산 건가.


"그래. 눈 감았어."


"그럼, 자."


살풋 사과향기가 다가오나 싶더니, 따뜻하고 부드러운 게 입술에 닿았다. 그건 아주 잠깐 닿더니 이내 떨어졌다.

눈을 뜨자, 새빨간 얼굴을 한 후부키가 있었다.


"으흠, 으흠! 소년의 첫 키스는 이 아저씨가 가져가마! 그럼 이만!"


후부키는 번개처럼 차에서 뛰쳐나가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 이게 내 첫키스구나.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굳이 막지 않았다.


여름이 좋아질지도 모르겠다.


- End




원래 이렇게 길게 쓸 생각 없었는데

쓰다 보니까 쥰내 길어졌네


귀여운 후부키 표현하려고 노력을 해 봤으나

나의 능력이 부족함인지 그것은 불가능했다


허접한 글 읽어줘서 고맙워요


Ps. 글 쓴 건 나지만 그림은 내가 그린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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