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홀붕이가 있다. 편의상 Y라고 하자.

Y는 기대라는 이름의 악의에 절여져 어린 나이에 도전보다는 포기를 먼저 배웠다.

그렇기에 Y는 도전을 모른다. 도전을 모르기에 실패의 분함과 성공의 쾌감조차 모른다.

그렇기에 Y는 나이를 먹을대로 먹어놓고 이루어 낸 것 하나 없이, 목적도 목표도 없이 그저 살아져 있을 뿐인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Y 본인은 최근까지 본인이 살아져 있는 시체라는것을 알 지 못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목적도 목표도 없으니 그저 흥미를 우선으로 살아오며 자신은 흥미없는 일은 손이 가지 않는다며 자위를 했기 때문이다.

Y는 자신의 감정에 인색한 사람이다.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괴롭힘을 숱하게 받아온 Y였기에 그는 화를 내는 방법부터 잊어갔다.

화를 내는 방법을 모르니 분노는 점점 안에 쌓이기 시작하고 그런 분노는 자신에게 향하게 됐다.

스스로의 신체를 수시로 물어뜯거나 손톱과 발톱을 과하게 잘라내거나 스스로를 때리고

급기야는 저수지에 빠져 죽을까 스스로 목을 졸라 죽을까 선택을 하기도 했다.

멍청한 선택을 한 Y는 죽지도 못했기에 감정을 죽여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Y는 자신의 감정에 인색하다. 누군가가 정말 좋은 노래라며 추천을 해줘도

'응 그렇네.' 라며 썩은 동태눈으로 무미건조하게 반응하는게 고작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Y는 홀로라이브라고 하는 새로운 흥밋거리를 접하게 되었다.

홀로라이브 멤버의 방송을 보는것은 즐거웠지만 그는 딱히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있어서 이건 새로운 흥밋거리에 불과했으니까.


방송을 보기 시작하며 신기수가 데뷔하고 멤버 4명이 떠나가고 페스도 두번을 보고 신년 카운트다운 방송도 보고 

정월배나 운동회같은 여러 기획물도 보면서 시간이 흐른 2023년의 어느 날.

Y는 무언가에 홀린 듯 츠노마키 와타메의 My song을 검색했다.

츠노마키 와타메에 대해서는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서 잘 때 듣기 좋은 방송, My song에 대해서는 취향에 맞는 노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은 뭔가 달랐다. MV를 보면서 Y는 점점 자신의 눈시울의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번, 열번에 그치지 않고 백번 천번을 계속해서 도전할 동안의 감정을 담아 만든 노래를 들으며

Y는 참았던 눈물을 한여름의 장마마냥 쏟아내기 시작했다.

노래나 MV가 감동적인 것을 떠나서 스스로의 감정을 죽여온 것, 흥미가 없는 일엔 손이 가질 않는다며 도전으로부터

포기, 아니 도망쳐왔던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을 참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위해 천번을 넘게 계속 도전하는 동안 자신은 무엇을 했나

스스로가 입버릇 처럼 말하던 '흥미'는 과연 흥미인가 도피처인가.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며 노래가 끝났을 때엔 Y는 거진 20년만에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Y는 달라졌다.

스스로의 감정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고 무서웠던 사람들의 관계도 점점 편안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방구석에서 썩어가고 있던 살아만 있는 시체가 조금씩 활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아직도 미래는 무서운 감정을 들게 하는 존재지만, 아마도 Y는 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울게만든 노래의 화자처럼.



아무리 그래도 백번 천번 도전을 계속하는 건 힘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