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및 전 화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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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알고 있었냐고?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아닐까?

네가 사람 좋은 것도 알고 있었고, 나랑 친해지려고 다가오려는 것도 꽤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어. 네가 날 위로해주려고 이렇게 서우인에 데려온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인 것도 알고 있었지.

호의는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박사, 나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어. 아까도 말했지만, 나에겐 우정도, 가족애도, 사랑도 전부, 싫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필요하지도 않은 거야. 

며칠 전 일, 기억나지? 몇몇 사람들이 화난 듯이 문을 열고 나가는걸. 그 사람들도 너처럼 내게 친해지려고 다가오다가 포기하고 물러간 사람들이야.  

이런 사람들을 내가 몇 번이나 봐왔다고 생각해? 수십, 수백을 넘은 사람들이 내게 다가왔지만, 그 누구도 내 옆에 남지를 못했지. 왜일까? 간단해. 내가 다 쳐내버렸으니까. 

예전부터 난 혼자인 삶을 살아왔고, 혼자인 것을 좋아해 왔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혼자여야만 해. 내 삶은 그렇게 정해졌으니까. 

그러니 이쯤에서 관둬. 박사. 이 이상 해보려 해도 너만 상처 입는 결과가 될 거야. 지금처럼 우호적인 비즈니스 관계로 남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하하. 표정을 보아하니 이렇게 말해도 너는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네. 

음...? 대결을 하자고? 친구가 되는 것에 성공하면 너의 승리? 지면 소원을 하나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하하. 하하핫! 진짜로 별난 사람이구나. 박사.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계속 다가올 생각인 거야? 

재밌네. 그래. 그 도전, 받아들일게. 네가 끝까지 노력하던 중간에 포기하던 나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시도해봐. 네가 나에게 질려버릴 때까지 어울려 줄 테니까. 



“그렇게는 말했지만 말이지...”

들고 있는 서류를 얼굴에 파묻은 채 멍하니 있던 중, 며칠 전의 일들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대체 무슨 용기로 했는지 모를 부끄러운 대사 하나하나가 너무 선명히 들리는 거 같아 이불속으로 몸을 숨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거야?”

옆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서류 너머로 그녀의 녹색 머리칼이 형광등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메딕 오퍼레이터인 동시에 로도스의 실질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자, 그리고 그 동시에 내 현생 최악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녀석인 켈시였다. 

“보나마나 뻔하지. 또 여자 한 명 꼬시려고 객기 부리고 온 거지?”
“말하는 거 참...”
“그럼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라고 말하려 했는데. 내 머릿속 이성이 나불거리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라곤 하기엔 며칠 전에 내가 한 짓이 기묘하게 켈시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친구가 되는 것에 대한 내기라고 말은 했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선 뉘앙스가, 아니, 단어 몇 개만 바꾸면 거의 남녀 간의 프로포즈랑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바늘로 쿡쿡 찌르듯이 내 양심을 건드렸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과 동시에 손에 뭐든지 쥐고 이리저리 찌그러트리고 싶은 욕망이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왜 이런 때에 에어캡 뽁뽁이가 없는 걸까. 평소엔 방구석에 그렇게 쌓여있거늘.

“박사. 남의 이성관계에 손을 댄 생각은 없지만, 할 거면 너나 내 선에서 커버 가능한 정도에서 해둬. 잘못하다가 세력 간 갈등을 일으키는 건 피해야 해.”
“누가 들으면 카사노바로 알겠다?”

들고 있던 머그컵의 커피 한 모금. 켈시는 잠시 날 힐끗 바라보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날 보면 한숨부터 쉬는 그녀지만, 오늘따라 특히 ‘한심하다'라는 걸 강렬히 표현하려는 듯 도끼눈으로 날 보는 그녀의 인상이 유독 무섭게 느껴졌다.

“너 때문에 발생하는 대원 간 문제가 얼마나... 아니 됐다. 네가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

켈시 녀석은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엿을 먹이기라도 하는 건지, 종종 말해줄 수 있는 것도 말하다가 마려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이 이상한 화법 좀 고치면 안 될까,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무리 나라도 최소한의 분위기를 읽는 능력은 있다. 지금 말했다간 분명 그녀의 소환수인 Mon3ter에게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을 것이다.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게 한동안 아무 대화 없이 서류 작업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말이 작업이지, 며칠 전 일 때문에 머릿속이 난잡해서 대부분의 시간은 허공에 날려버렸다. 시데로카 녀석의 평소 말버릇을 인용하자면 이 시간이면 운동 루틴 몇 번은 더 했을 것이다.

무엇일까? 대뇌피질을 살살 긁는 것 같게 만드는 이 불편함의 원인은. 오기 생겨서 던진 낯부끄러운 말 때문에? 물론 그것도 있지만 내 집중력을 흐트려놓은 문제는 따로 있었다. 조직폭력배에게 쫓겨서 용문 빈민가까지 도망간 그 때, 모스티마가 일으킨 그 현상. 눈을 떴더니 다른 장소고,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건물이 어느새 불길 속에 무너져 있는 그 장면이 계속 내 눈에 아른거렸다. 

분명 서류상 모스티마의 아츠 능력은 로도스에 돌아와서 몇 번이고 돌이켜봤는데도 단순한 ‘초고열의 불꽃 아츠'였다. 하지만 그렇기엔 공간을 이동한 것 같은 그것을 해설할 수가 없었다. 모든 변수를 제쳐두고 단순히 별개의 능력이라고 단정 짓더라도, 사람은 극히 희소한 오리지늄 도구의 보조가 없고서야 두 개의 능력을 보유하는 게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내 머리로는 해석이 전혀 되지 않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눈앞에서 일하는 중인 켈시를 보니,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번뜩하고 뇌리를 스쳤다. 확실히 성격이며 화법이며 껄끄러운 게 한두 개가 아니지만, 머리 하나는 로도스에서 겨룰 자가 없을 정도니 내 의문에 답해줄지도 모른다. 그런 일말의 희망에, 난 잠시 머뭇거리던 입을 움직였다.

“그... 켈시. 바빠?”
“뭔데?”
“사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 말이야...”

난 최대한 상세히 켈시에게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공동묘지에서의 대화에서 시작해서 빈민가에서의 추격전, 그리고 시내 앞 신호등에서의 대화까지, 주관성을 최대한 배제한 채 내가 목격한 모든 것들을.  

“혹시 알고 있는 거 있어? 모스티마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

녹색 머리카락 위의 동물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입술을 몇 번이고 깨물고 그만두길 반복하며, 이것을 과연 말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켈시의 생각이 확연히 느껴져 왔다. 고민하듯이 몸을 잠시 이리저리 비틀더니, 결심한 듯이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건...”

말해줄 것인가? 아니면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함구해줄 것인가? 양쪽이 공존하는 상태가 지금 깨지려 하고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화법은 어떤 결과를 낼 것인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말 안 하고 숨기려고 하는 저 짜증 나는 화법이 안 나오길 비는 것 뿐이었다.

“그건... 아니 됐다. 네가 알기엔 아직 일러.”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젠장.



서류 작업을 마치고 잠깐의 쉬는 시간. 두 사람을 빼고 아무도 없는 휴게실을 감싸고 있는 건 카드를 셔플하는 소리, 남녀의 대화. 그리고 창가에서 선선히 다가오는 산들바람의 삼중주였다. 

“그래서 자네는 어떤 답답한 심정으로 본녀를 찾으러 온 건가?”

눈앞에 있는 여성은 잠시 허공에 흩날리는 긴 은빛 머리칼을 다듬더니, 한손에 들고 있는 카드뭉치를 위에서부터 다섯 장 꺼내서 내게 건넸다. 
뒤집어서 보아하니 스페 이드 3이랑 4, 하트 3이랑 5, 그리고 클로버 8. 원 페어인가. 

“딱히 그런건 아냐. 그냥 커피라도 마실겸 나온 건데, 어쩌다 보니...”

다섯 장 중에 하트 5랑 클로버 8을 다시 여성에게 건넸다. 여성은 곧바로 카드뭉치를 셔플하고 나서 내게 새 카드 2장을 넘겼다. 뒤집어서 보니 다이아 3에 하트 9. 패에 남아 있었던 스페 이드랑 하트 3을 조합해서 트리플. 무난하게 승부를 볼 수 있는 패다.

“설령 여기서 못 만났더라도 자네는 본녀를 찾으려 했을거라네. 오늘 점에서 그대의 고뇌하는 얼굴이 훤히 보였었거든.”
“그렇구만. 암튼 트리플.”
“유감이로군. 포카드라네.”
“...실화냐?”

각 문양의 7 카드들이 테이블 위에 고스란히 올려져 있는 걸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이렇게 된다고? 대체 몇 퍼센트의 확률을 뚫은 건지 원. 이걸로 좀 전부터 3연패구만.

“역시 너한텐 카드로는 못 이기겠다니까. 기타노.”
“후후. 칭찬 고맙네.”

잠시 휴게실에 왔더니 자판기의 커피를 두고 내기해서 카드 게임을 했더니, 시간은 어느새 30분이 지나버렸다. 슬슬 돌아가야겠군. 게임은 전부 패해버려서 아쉽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유명한 점술사이자 로도스의 캐스터 오퍼레이터. 그리고 실력 있는 카드 겜블러. 그와 동시에 별다른 금전 없이 점을 쳐주기도 하고 종종 나와 카드 게임을 해주는 동료. 그것이 내 눈앞에 있는 은발의 엘리피아 여성, 기타노다. 

“일단 졌으니, 여기.”
“잘 마시겠네.”

양쪽의 카드들을 모아서 셔플하더니, 기타노는 카드뭉치를 그녀의 허리에 있는 가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내가 방금 자판기에서 가져온 커피 캔에 입을 가져다 대더니, 꽤나 만족스러운지 그녀에게서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박사. 헤매고 있는 길에 빛이 필요한겐가?”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내게 물어봤지만, 해석하자면 점이라도 한 번 쳐보겠냐는 뜻이다. 켈시 녀석의 화법에 단련된 나에게 이 정도쯤은 얘들 장난 수준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점이라... 딱히 지금 내 고민을 해결해줄 만한 단서가 되겠냐마는, 기분 전환으로 하는 정도면 나쁘진 않겠지. 뭣보다 기타노의 점이면 매우 용하기로 소문났으니, 의외의 방향에서 도움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모처럼인데 한 번 봐볼까?”
“타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수정구?”
“조금 전까지 카드 가지고 놀았으니, 이번에도 카드로 해볼까?”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기타노는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아까와는 다른 카드뭉치를 꺼냈다. 현란한 솜씨의 파로 셔플 후에 이어지는 몇 번의 컷 셔플. 그러고 나서 부채를 펼치듯이 카드를 나열하더니, 그녀는 내게 카드를 3장 고르라 말해주었다. 

“그럼, 자네의 운명을 보도록 할까.”

정리 후에 테이블 위에 남은 건 3장의 타로 카드. 기타노는 내가 보는 기준에서 왼쪽의 타로 카드에 손을 뻗었다. 뒤집혀서 나온 것은 한 남성이 태양 아래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림. 이게 분명...

“정방위의 The Fool(광대). 모험, 혹은 무지(無知)함을 의미한다네. 이게 자네의 과거이로군.”

기타노는 곧바로 옆에 있는 2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곧바로 내 눈에 보이는 건 뒤집힌 산크타 남성이 두 개의 잔을 들고 있는 그림이었다. 

“역방위의 Temperance(절제). 낭비를 의미하기도 하고, 불안정을 의미하지. 이게 자네의 현재.”

무지의 과거에, 불안정한 현재?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그런 내 의문에 고찰해볼 시간도 없이, 기타노는 곧바로 마지막 카드를 뒤집었다. 나뭇가지에 묶인 끈으로 인해 발이 붙잡혀 매달리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남성의 그림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건 The Hanged Man(매달린 남자). 자기희생, 또는 인내를 의미하지. 이게 자네가 겪게 될 미래가 되겠지.” 

기타노 역시 나랑 마찬가지로 이 점의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듯이 한참 동안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하더니,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정면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네는 이전에 자신이 모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군. 그런데 그걸 알 방도가 없으니 더욱 불안하게 느끼고 있겠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말이야.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겠다만, 박사 자네의 평소 생활을 보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사람과 사람 간의 문제겠군.”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오싹함이 내 몸을 잠시 지배했다. 기타노가 묘사한 것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랑 상당히 유사해서, 무심코 주먹을 꽉 쥐었다. 모스티마의 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카드만을 보고 안 거지? 순간적으로 내가 모르는 곳에서 도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이것이 점술사의 능력이라는 것인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전율에 입이 턱 막힌 나머지, 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자네가 낼 답안은 이 카드의 의미대로 ‘인내’. 문제의 답안이 자네에게 직접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걸로 정하게 될 걸세.”

기타노는 이보다 더 뒤의 미래를 점쳐보기 위해서인지, 가장자리에 모아두었던 카드뭉치에 다시금 손을 뻗었다. 그렇게 뽑은 카드 1장이 꽤나 흥미로운 건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살며시 테이블에 카드를 올려두었다.

“그럼 언젠가 기회가 오게 될 걸세. 쌓여왔던 호기심을 전부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말이야.”

정방향의 Wheel of Fortune(운명의 수레바퀴). 내 기억이 맞다면 의미가 ‘기회’, 혹은 ‘일시적 행운'이었을 것이다. 지금 추가된 카드를 포함해 4장의 의미를 종합해 본다면, 이건...

“햇빛과 바람처럼 쫓아 들려 하지 말게. 박사. 여행자가 필요한 건 나무 한 그루 아래의 그늘일지도 모를 테니.”

고뇌하고 있는 내 모습에 기타노는 웃으면서 격언 한 마디를 건넸다. 평소보다도 더 애매하고 은유적인 표현이었지만, 왜인지 그녀가 말한 게 어떤 의미인지를 얼추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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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1이가 금지어가 되어 있어서 스페 이드를 그대로 못 쓰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