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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은 생각보다 빨리 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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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렸고, 칠흑 같은 어둠 속 바닥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머리를 살짝 집어넣어 내부를 바라보니, 제대로 기관실에 도착했음을 직감해 그대로 조심히 착지했다. 입에 물고 있는 손전등 하나에 의지한 채 천천히 좁고 어두운 통로를 통과하길 5분. 로도스에서 비밀 네트워크로 보낸 젬머링 열차의 설계도가 과연 맞는 건지 의심하면서 기어들어 온 게 허사는 아닌 듯 싶다. 

젬머링 열차는 꽤 오래된 역사를 가진 열차인 만큼 시간이 지나도 열차 구조엔 그 세월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재료를 중간중간 바꾸고 내부 구조를 확장할지언정 기존의 구성 요소를 없애지 않는다는 회사의 신념. 이 열차의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큰 이유기도 하다. 덕분에 몇 세기 전 구식 열차에나 존재하는 천장 쪽 비상 통로를 활용해서 이렇게 기관실 내부로 들어왔으니, 역시 뭐든지 있으면 언젠가는 제값을 하게 된다는 걸 체감했다. 오래된 덕택에 코트가 먼지랑 거미줄로 치장된 게 흠이라면 흠이다.

[얌전히 있어! 걱정 마. 너희를 해칠 생각은...]

오른쪽 귀에 장착된 통신기에서 우렁찬 남성의 고함이 들려왔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반대쪽 귀까지 지잉 울리면서 얼얼해질 정도였다. 아마 테러리스트의 두목쯤 되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통신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모스티마는 내가 준 통신기를 잘 챙기고 별일 없이 휴게실에 들어간 모양이다. 그녀라면 이 이후의 일은 알아서 처리해주겠지. 

“어디, 한 번 찾아볼까...”

테러리스트가 목표로 하는 건 지리적으로 고립된 장소에서 폭탄을 빌미로 인질을 확보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건 단순하게 생각해서 열차를 다시 움직이거나 폭탄을 해체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공학 지식이 없는 나로서 폭탄 해체는 무리에 가까우니, 열차를 재가동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다못해 이번 파견에 마젤란이나 메이어 같이 라인 랩 소속의 대원이라도 데리고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감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가...?”

각종 계기판이랑 여러 개의 레버, 열차 내부를 비추는 화면들이 기관실 한쪽을 가득 메꾸고 있었다. 기관실 내부의 컨트롤 패널이 이거겠지. 이제 보니 로도스 전함의 기관실이랑 상당히 유사하게 생겼다. 같은 회사 제품인 건가 싶어 두리번거리니, 벽에 코팅지로 겉면이 포장된 얇은 책자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내용을 살펴보니 이 열차의 비상사태 대비 매뉴얼이었다.

“어디 보자...”

매뉴얼을 보아하니 예상했던 대로, 이 컨트롤 패널은 로도스의 컨트롤 패널이랑 거의 똑같다. 버전이나 소프트웨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조종 시스템 사용 방법은 내가 알고 있는 거랑 판박이일 수준이었다. 심심할 때 클로저를 비롯한 기술자 오퍼레이터들에게 조종 및 수리 수업을 들은 내게 있어 급박한 상황인 와중에 반가운 소식인 셈이다. 

“으악. 이게 뭐야...”

역시 세상엔 쉬운 일이 없는 법인가보다. 클로저 녀석에게 배운 기억을 토대로 시스템 재부팅을 위해 하단의 보드를 뜯어내 확인해 보니 새까만 연기를 내뿜으며 단말마를 내지르고 있는 내부 패널들이 보였다. 여기저기 끊긴 회로에 총알의 흔적이 보이는 메인 보드까지. 어쩐지 화면이 다 꺼져있다 싶더니... 대놓고 ‘다 망했다'라며 열차가 나에게 엿을 먹인 기분이었다.

“돌아버리겠네 진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테러리스트 녀석들에 대한 감탄과 비탄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확실하게 수단을 틀어막다니. 이번 계획을 세운 놈에게서 성공에 대한 집념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봐. 설마 진짜 죽을거라 생각해서 못 당기는 거야? 제대로 겨눠. 사람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고.]

계속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통신기 너머로 모스티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처에서 남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도 들리는 걸 보니, 아마도 테러리스트랑 대치하기 시작한 거 같다. 그녀가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묘하게 의미심장하게 들려왔지만, 궁금한 건 일이 다 끝나고 물어봐도 될 일이다.

[으아아아악! 손이... 내 손이!!!]
[이게... 커헉...!] 

테러리스트와 대화로 풀어나가고 있나 싶더니, 갑자기 남성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에 총격까지. 꽤나 크게 한바탕 벌이고 있는 듯 싶다. 승객들... 무사한 거겠지...?

“다시 통로 타고 돌아가야 하나... 음?”

포기하고 그냥 모스티마한테 다 쓸어버리라고 부탁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나 자신이 한 말을 되짚어보았다. 천장의 비상 통로가 있듯이 젬머링 열차는 기존의 구조에서부터 추가 파츠를 덧붙이는 형식으로 그 형태가 발전되어 왔다. 그렇다는 건 구식 열차처럼 수동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장치가 있지 않을까? 선박도 조타기가 망가졌을 때를 대비한 수동 조타 모드가 별개로 있는데 열차라고 없으리란 법도 없다. 

“역시...!”

그런 생각이 들어 황급히 매뉴얼을 다시 읽어 봤더니, 다행히도 중간쯤에 비상수동조작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매뉴얼이 걸려 있던 벽면 옆에 있는 열쇠를 꺼내 패널에 장착. 그다음에 중앙 패널에 있는 버튼 두 개를 눌렀다. 기관 비상 정지. 그리고 수동 전환. 몇 초 후에 울리는 알람음. 그에 따라 조종 기어를 움직여 전진과 후진 테스트도 완료. 남은 건 기관 재기동 버튼이다.

[너희들이 폭탄을 기관실에 넣어두고 그걸 근처 도시들이랑 협상할 계획도 끝냈다는 것도 알고 있어. 포기해. 이미 지금쯤이면 내 일행이 그 폭탄을 해체했을 거거든.]

타이밍 적절하게도 모스티마가 테러리스트들을 설득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폭탄을 해체하진 못 했지만, 적어도 열차가 재기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심리전에서의 우세를 점할 수는 있겠지. 

기관 재기동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지면이 미약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4행정 내연 기관의 피스톤이 작동하는 걸 알리는 신호였다. 앞으로 조종 기어를 밀어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영원히 멈춰있을 것 같던 열차가 매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급한 불은 껐... 우왁!”

긴장이 풀려 바닥에 털썩하고 드러누운지 10초도 되지 않은 채, 기차가 들썩일 정도의 굉음과 함께 창문 밖으로 푸른 섬광이 보였다. 뭔가 해서 창가에 가보니 빛의 근원지는 휴게실로 추정되는 열차의 뒤편이었다. 아무리 저속이더라도 열차가 움직이고 있는데 저렇게 강력한 위력의 아츠를 사용하다니 제정신인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모스티마가 만들어낸 걸로 추정되는 진동과 빛은 얼마 안 가 사라졌다. 

[여긴 모스티마. 박사, 들려?]

드러누우면서 바닥에 떨어트린 통신기를 주워서 먼지를 털고 조심스레 귀에 꽂자, 모스티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려. 무슨 일이야?”
[이쪽은 다 처리했어. 테러리스트 녀석들은 네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죽이지 않고 기절만 시켰고, 포박은 승객들이 대신해준다네.]
“무리한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고생했어.”
[죽이면 그것대로 찝찝하니까.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야.]
“하하하...”

삐. 삐. 삐. 

“...어?”

들을 이유가 없는, 정확히는 절대 듣고 싶지 않은 섬뜩한 소리가 내 양쪽 귀를 자극했다. 숨이 턱 막힘과 함께 손끝이 뻣뻣해지면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도통 목 너머로 가려 하지 않는 침을 애써 삼키며,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조금씩 뒤로 틀기 시작했다.

소리의 근원지는 조금 전까지 내가 사용한 컨트롤 패널, 정확히는 그 내부. 닫아두었던 보드를 황급히 다시 열었다. 끊어진 전선의 수풀을 파헤쳐 보니, 컨트롤 패널 내부 깊숙한 곳에서 작은 저승사자가 죽음으로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럴... 수가...”

주머니에 넣어뒀던 손전등을 비추니 그 형상이 보였다. 19-33. 19-32. 19-31.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계기판과 연결된 붉은색 실린더 형태의 불길한 물체. 틀림없다. W 녀석이 사용하는 대량 살상용 폭탄이랑 똑같이 생겼다.

[박사. 무슨 일이야?]
“폭탄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
[뭐...? ...잠시만. 이봐, 너.]

모스티마의 적잖게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평소에 침착한 그녀라도 이 상황은 예상외의 상태였던 거겠지. 다만 그 성격 어디 안 가는지, 곧바로 냉정을 되찾고 체포한 테러리스트에게서 정보를 캐묻고 있는 것이 들려왔다. 

[박사. 통신으로 들었지?]
“어...”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통신기 너머로 들은 정보를 정리했다. 설마 폭탄이 테러리스트들의 대장의 심장 박동에 반응하여 작동한다니. 대장 녀석, 자신이 당하는 것까지 상정하고 이 계획을 꾸민 거란 말인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계획 능력이다.

[박사. 어떻게 할래? 지금이라도 열차에서 탈출할까?]
“아니... 그, 일단은 기관실로 와줘. 오는 와중에 잔당들이 있으면 처리 부탁할게.”
[알았어.]

머리 좀 식히자는 차원에서 창문을 열어 공기를 쐬었다. 평소라면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었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오히려 구역질이 나게 만드는 불쾌감이 느껴졌다. 한숨을 푹 쉬며 철도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은 가파른 절벽을 보았다. 작전이 실패해 폭탄이 터져서 모두가 아래로 떨어지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아찔해졌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양쪽 볼을 손으로 찰싹찰싹 때리면서 나 자신에게 정신 차리자고 다그쳤다. 진정하자. 당황해봤자 시간만 잡아먹을 뿐이다. 폭탄의 카운트다운은 아직 한참 남았다. 이걸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우릴 포함한 승객들의 목숨이 갈린다.

단말기를 꺼내 로도스에서 보낸 젬머링 철도의 노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 절벽의 거리는 대략 41km. 테러리스트가 습격한 게 협곡에 진입하고 나서 얼추 20분 후. 젬머링 열차의 일반적인 속력은 시속 80km 정도에 RPM(엔진 분당 회전수)를 줄인 지금은 그 절반도 안 되는 30km 정도. 절벽을 완전히 통과하려면 속도를 오히려 늘려야 할 상황이다. 아니, 생각이 잘못됐다. 절벽을 통과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산맥에 진입하고 폭탄이 터지면 지반에 영향이 가서 산사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엔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가만 있어 보자. 이거라면...”

쾅!

뒤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휙 돌려보았다. 박살이 난 것도 모자라 뜯어져 바닥에 너덜너덜하게 나뒹굴고 있는 기관실 문 너머로, 한 손에 누군가의 멱살을 잡은 채 천천히 걸어오는 푸른 사신의 실루엣이 보였다.

“깜짝이야. 모스티마 너였어?”
“기관실 문이 손상되어 있었더라. 시간이 없어서 그냥 폭발시켰어.”
“난 또 폭탄이 다른 곳에서 터진 줄 알았네... 것보다 손에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야?”
“기관실 문을 지키고 있던 테러리스트야. 반항하길래 제압했어.”
“어째 피를 흘리고 있는 거 같은데...?”
“괜찮아. 생명에 지장은 없어.”

죽지만 않으면 괜찮은 건가. 역시 이 제멋대로에 단순무식한 작전 수행. 과연 펭귄 로지스틱스 직원이라는 걸 체감하게 된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방법은 있어?”
“어. 내가 봐도 좀 정신 나간 방법이긴 하지만 말이야.”
“이번엔 또 어떤 기이한 일을 꾸미는 거야?”

날 매번 이상한 걸 생각하는 괴짜라고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오늘따라 유독 모스티마의 어조에서 기대감이 느껴졌다. 내가 평소에 하는 짓을 생각하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게 내심 슬퍼진 건 덤이다.

“이 짓을 하는 거에 일단 확인부터 할게. 모스티마. 혹시 너 사람 한 명 데리고 절벽에 추락해도 살아남을 수 있어?”

내 질문을 잘못 들은 걸까. 아니면 일부러 듣지 않은 척을 한 걸까. 3초 정도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모스티마의 눈이 크게 떠짐과 동시에 웬만해선 유지하는 미소가 살짝 일그러지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다.

“다시 한번 말해봐. 뭐라고?”
“사람 한 명 데리고 절벽에서 추락해도 생존 가능하냐고.”

팔짱을 낀 채, 모스티마는 생각에 잠긴 듯이 주변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몇 번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힐끗 나를 바라보기를 반복하더니, 아무래도 뭔가 알아차린 게 있는지 옅은 한숨을 쉬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은 아니지? 박사.”
“네가 뭘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아마 맞지 않을까?”
“진심인 거야? 장난으로 말하는 거 아니지?”
“나 지금 매우 진지해.”

아까 테러리스트에 대비하기 위해 작전을 짰을 때와 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모스티마는 매우 크고 격렬한 웃음소리를 호탕하게 내뱉었다. 너무 웃은 나머지 배가 아프기라도 한 건지, 고개를 앞으로 숙인 채 배를 부여잡으면서까지 한동안 그녀의 웃음소리는 대략 1분간 멈추지 않았다. 

들썩이는 어깨. 나풀나풀 휘날리는 사파이어색의 머리카락. 손으로 막고 있는 하관. 가늘게 뜬 눈동자. 

정말로 재밌어 보이는 걸 발견한 순수한 어린이와도 같이, 초저녁의 하늘이 비추는 오렌지색의 빛이 머무는 모스티마의 양쪽 눈엔 광기라고 느껴질 정도의 환한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박사. 넌 정말 내가 본 사람 중에 최고로 정신 나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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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작중 언급된 41km는 실제 젬머링 철도의 운항 거리


모스티마편도 슬슬 완결이 가까워지는 듯. 다음 히로인도 정했으니 이대로 무난히 가면 될듯 싶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