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바다의 저편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는 고소한 빵 냄새가 섞여있었다.

마치 황금빛 갈기를 휘날리는 말이 무리지어 뛰어다니는 듯한, 끝이 없는 황금빛 바다.

이제 가을도 완전히 무르익었다는 듯, 조금은 선선한 바람에 그는 옷깃을 여민다.

그리고 지금껏 바라보던 저편에서 뒤돌아 지금껏 등지고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을 똑 닮은 아이가 서로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셋의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면서 아이는 마치 산새처럼 맑은 웃음을 터뜨린다.

세상의 더러운 것은 하나도 모르는, 그 나잇대의 어린이처럼 마냥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를.


마구간을 벗어나 초원에 첫 발을 내딛은 망아지처럼, 아이는 뜀박질을 시작한다.

마치 카시미어의 전래 동화 속의 천마天馬와도 같이, 언제 날아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금세 밀밭의 한복판으로 달려간다.

내버려 두었다가는 컬럼비아의 보리밭과 염국의 논을 모조리 헤집을 듯한 기세로 한참을 뛰어다니더니 어느 순간 우뚝 멈추어 선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날아오르기라도 하려는지 팔을 한껏 벌리고, 살짝 배어나온 땀방울을 소매로 훔쳐내고 숨을 고른다.


그러더니 아이는 뒤돌아 서서, 이 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분명히 활짝 웃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발을 굴러, 그를 향해 제 발걸음에 이삭이 꺾이어도 상관 않고 힘껏 뛰어와, 바로 앞에서 마찬가지로 힘껏 뛰어올라 그의 품속에 안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굳센 팔로 아이를 끌어안고,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맞춘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은 그림이 찢겨나간 캔버스처럼 텅 비어 있다.

이목구비가 없는 새하얀 얼굴도 아니고, 동굴처럼 텅 비어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도 아닌, 그저, 그게 당연하다는 듯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얼굴.

자신이 그 아이의 행복한 얼굴을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듯, 어렴풋한 느낌만 전해져 올 뿐인, 그런 텅 빈 캔버스.

그는 그런 아이의 모습에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내 품에 안겨 웃는 아이의 얼굴은 분명히,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텐데.

황금과 상아의 빛깔이 동시에 흘러넘치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아이를 더욱 부둥켜안는다.

아이는 울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되려 지금껏 참았던 눈물을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고, 아이의 외출복을 적실 뿐이다.


아이를 안은 그를 좇아, 그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명예로 빛나는 기사의 깃발처럼, 새하얀 원피스를 바람에 나부끼며, 황금빛 머리카락과 풍성한 쿠란타족의 꼬리를 늘어뜨린 그 사람.

그 사람도,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텅 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물을 제 소매로 닦아주던 아이는 도무지 그가 우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뺨을 한번 꼬집어 주고는, 제 얼굴을 물려준 그 사람에게 달려갔다.

그 사람은 몸을 숙이고 팔을 벌려 달려오는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는 그제서야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몇 줄기로 뺨을 적신다.

그토록 바라왔던 모습에 마음 한 켠이 너무나도 아파 눈물이 났다.

주먹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내는 그에게 아이를 안은 그 사람이 다가왔다.

아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제 손가락으로, 그 사람은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

여전히 두 사람의 얼굴은, 노이즈가 낀 듯 인식할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내 앞에서 이 둘은, 나를 위해 웃어줄 것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내가 어리숙하고 미숙해서, 이 풍경을 꿈에서 멈춰 버렸다고, 그는 최선을 다해 사죄하듯 입술을 달싹인다.

하지만 자신을 위로하는 둘에게는, 자신이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듯 전해지지 않는다.

그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무어라 말하지만 그는 들을 자격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은 울음이 터진 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 둘을 자신의 품으로 와락 끌어안는다.


하지만 그 모든 위로와 온기도 결국 자기만을 위한 형편 좋은 방어기제라는 듯, 저 편에서 바람이 불어와 마치 먼지를 쓸어내듯 그의 소망을 지워냈다.

방금 전까지 황금빛 파도가 일렁이던 밀밭은 그 광채를 잃어, 그만을 덩그러니 남겨두고 스산한 소리를 낼 뿐이다.

그는 이제서야 소리내어 울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목이 쉬어라 터뜨리는 울음의 사이사이에, 그 사람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는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답 없는 외침에, 더욱 서러이 울며 그는 밀밭에 쓰러진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저 우리만 있어도 좋으니 평화로운 곳에, 직접 지은 집에서 너를 닮은 아이를 품에 안고, 너와 함께 예쁘게 시들어가는 미래를. 네가 나의 머리카락을, 내가 너의 꼬리를 다듬어주는, 그런 자연스럽고 행복한 웃음만이 남은 날을.


그는 눈물에 젖은 입술을 작게 달싹이며, 바람에 자신의 소망을 흘려보냈다.

-

-

-

-

-

-

-

-

-

수술실에서 하루를 꼬박 보낸 중장대원 니어는, 한참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응급수술의 예후가 좋지 못했다.

이어지는 격전에서 몸이 크게 축나 상처가 아무는 속도는 느리고, 면역체계도 붕괴하기 직전이었다.

심각한 내장출혈의 고통에 기절한 채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개인실의 욕실에서, 하반신이 피범벅이 된 채로 쓰러져 코마에 빠지기 직전이었던 그녀를 발견한 것은 로도스의 박사였다.


○○○○의 압도적인 물량에 밀려, ○○○○과 적대하는 ●●●의 국경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한 순간 대원들의 손실은 예상하고 있었다.

박사를 비롯한 작전과는 최대한의 지혜를 짜내 그 피해를 어떻게든 최소화할 수 있는 작전을 설계했지만.....

내 피부를 타고 흐르는 피가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전장의 혼란, 자신이 버림패로 쓰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베테랑 대원들까지 지배하는 순간, 모든 것이 망가졌다.

각자도생과 이기주의가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체스말을 지배하고, 고립과 돌파가 일상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5분마다 바뀌어대는 박사의 작전안을 믿어 준 이들 덕분에 예측 범위 내의 희생으로 로도스는 목표지점의 3km 앞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의 저격병이 날린 고중량의 발사체에, 후위대의 최후미를 맡은 중장대원 니어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물론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털고 일어나 로도스로 복귀했지만, 닥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PRTS로 지켜보며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혔다.

마중이라도 나가려 했지만, 작전과를 잡아먹을 듯 불만이 하늘 끝까지 뻗친 후위대가 두려워,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지만.....

니어는 개인실에 들어간 지 3시간이 지나도록 으레 하던 전투보고를 제출하러 오지 않았다.


더 큰 공포에 휩싸인 박사는 개인실의 방문을 정확히 50번을 두드렸지만 대답을 듣지 못하자, 강제로 마스터키를 써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가 발견한 것은 전투복도 욕실에서 벗은 것인지 바닥에 나뒹군 채로, 하반신을 피투성이로 한 채로 쓰러져 있는 니어였다.

그는 그녀를 들춰업고 무작정 달려, 막 수술을 끝마친 환자가 빠진 수술실에 쳐들어가 긴급수술을 집도했다.

그 뒤로도 그는 칼로리 스틱으로 끼니를 떼우고, 샤워는 5분 내로 하루에 한 번, 결재가 필요한 서류는 제외하고 사무는 모조리 사무과에 위임할 정도로, 24시간을 온전히 니어의 간호에 집중했다.


그렇게 두어 달째, 정신을 차리지 못한 니어는 세 번의 추가수술과 다섯 번의 심실세동을 겪었다.

그리고 닥터는 켈시에게 뺨을 열 대를 맞았고, 니어가 회복한 이후 스무 대를 더 맞기로 약속했다.

피범벅이 된 니어의 욕실을 청소하던 의료대원 수수루가 욕실 바닥에서 피에 섞인, 사람이 되다 못한 살덩어리의 파편을 발견했고, 이를 켈시에게 보고한 것이다.


" 닥터, 당신이 누구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든 상관 안 해. 하지만 그 관계의 결과도 제대로 눈치채지 못하면, 도대체 당신은 뭘 위해 그 자리에..... "


닥터는 말 그대로 분노한 켈시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나가서는, 병실 복도에서 세차게 뺨을 얻어맞았다.

박사 직속의 정예대원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따라온 호무라는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건지, 아니면 박사에게서 정이 떨어진 건지, 뒤에서 팔짱만 낀 채로 켈시를 말리지 않았다.

물론 마음이 여린 로즈마리는, 박사의 눈물을 보며 자신도 눈물이 맺히는지 애써 복도의 천장을 올려다봤지만.

소리내어 울기는 커녕, 부르튼 입술을 꽉 깨물며 벌겋게 뜬 눈에서 눈물만 흘리는 박사.

그런 모습에 켈시도 한켠으론 딱했던 건지, 잡은 옷소매를 놓아주었다.


" 내 권한으로 닥터에게 즉결처분을 내리겠어. 니어 씨가 깨어날 때까지 로도스의 모든 의사결정 활동에서 당신은 배제야. 그리고 만약, 정말로 만에 하나 니어 씨가 잘못되면, 그때는 응당 책임을 묻겠어. "


박사는 고개만 한번 끄덕이고, 다시 니어의 병실로 비척비척 들어갔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다.

닥터는 그동안 묵묵히 더운 물수건으로 니어의 흉터투성이 몸을 닦고, 튜브와 수액을 갈고, 빈 시간에는 그녀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의 몸에 욕창이라도 생길까, 자다가도 일어나 그녀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고 몸을 뒤척여 줬다.


겨울을 보낸 밀이 황금빛으로 익은 밀밭이 병실 창문으로 보이는 어느 날 아침, 니어는 눈을 떴다.

몇달만에 뜨인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꾸벅꾸벅 조는 박사.

그간의 와병생활 탓에 마른 그녀 자신의 손만큼, 그의 얼굴도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그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니어는 다른 손도 조심스레 그의 손 위에 얹어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하지만 박사는 반사적으로 눈을 뜨고, 방금 전 느껴진 촉각의 근원을 바라본다.

니어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살풋 웃으면서 아침 인사를 건넨다.


" 잘 있었나, 박사. 좋은.....아침이구나. "


움푹 들어간 눈을 꿈벅거리며, 자신을 향해 웃는 니어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닥터.

이것이 꿈이 아님을 깨닫고, 소리내어 서러이 울기 시작한다.

그녀의 손을 꼭 붙들고 끌어당겨 제 볼에 비비면서, 산더미처럼 쌓인 말을 횡설수설 뱉어내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격류에 어깨를 들썩인다.

니어는 다 이해한다는 듯, 그의 거칠어진 뺨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랜다.


" 박사, 체취가 심각하다. 먼저 씻고 오지 않겠나. 그 뒤에 같이, 저 밀밭으로 산책을 나갔으면 한다. "


-

-

-

-

-

예에ㅔ에에ㅔ에ㅔㅔ전에 핲갤에 올렸던 거, 다시 읽어보니까 너무 내용이 부실해서 살 좀 붙여서 올려봄.

그 전 이야기인 니어하고 박사 떢씬도 쓰고싶다.... 이후 이야기인 니어가 재활하는 동안 실권 잃은 박사가 수난 겪는 이야기도 쓰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