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오류 지적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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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한 시. 늦게까지 이어진 야근을 겨우 끝냈다. 마음 같아선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기약 없는 방문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가방을 풀 새도 없이 욕실에 들어가 격무로 범벅이 된 몸을 씻었다. 따뜻한 물로 긴장을 풀고, 마지막에 찬물로 잠을 깬 다음 서둘러 4층 선실 다섯 번째 방으로 갔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조용히 노크를 했다. 그에 대답하듯 의자 끌리는 소리, 조용한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문고리 풀리는 소리가 언제나처럼 들렸다.


"어머, 어서 와, 박사."


책이라도 읽고 있었는지 레나는 평소 입는 사복에 알이 둥근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 너머의 온화한 미소는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더 따스해 보여서,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풀린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레나. 매번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쉬시는데."


"박사가 되는 시간이 이 시간 뿐이잖아. 매일 오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들어와, 들어와."


레나가 뒤로 살짝 물러서 내가 들어올 수 있게 해 주었다. 방 안에 들어오자 등 뒤에서 문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는 평소처럼 레나의 방 한 가운데에 놓인 이동식 침대 위에 큰 수건이 깔려 있다. 옆에는 작은 여우 한 마리가 몸을 말고 자고 있는 스툴과 작은 병들이 줄지어 놓여진 끌차가 하나 세워져 있다.


"샤워하고 왔지?"


"네."


"그럼 이걸로 갈아입고 오렴."


레나의 그 말도, 그에 따른 내 행동도 평소랑 같았다.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가 괜히 코를 가져가 본다. 오늘은 라일락 향기를 머금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개인실, 그것도 욕실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들어가면 안 되는 곳 아닌가 하면서 많이 당황했지만 이렇다하게 꾸며놓은 것 없이 방향제만 놓여 있었어서 이젠 거리낌없이 가서 옷 갈아입고 나오게 되었다.


매일 늦게까지 이어지는 격무, 가끔 나가야 하는 작전까지 포함해 몸이 세 개여도 모자란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몸이 작살날 것 같다고 생각한 내게 아로마테라피를 권한 것은 로도스 아일랜드 의료부의 메딕 오퍼레이터 퍼퓨머였다.


본명은 레나. 불포 족 조향사이자 메딕 오퍼레이터. 광석병으로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오퍼레이터들에게 향기 치료로 안식처를 찾아주고 있다. 정작 자신도 광석병 감염자이지만, "나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라면서 더 중증인 사람들에게 의료 지원을 해 주고 있는 착한 사람이다.


일이 끝나고서도 괜찮으니까 가끔 자기 방에 와서 아로마테라피를 받으러 오라고는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면 레나도 제때 쉴 수 없는 법.그나마 일찍 끝나는 날에 레나를 찾아가 이렇게 아로마테라피를 받고 있는 것도 벌써 여섯 번째다. 두세 주에 한 번 오고 있으니 석 달 정도 되었으려나.


평소엔 퍼퓨머라는 코드네임으로 부르고 있지만 퇴근했으니 레나라고 불러달라 해서 나도 사석에서는 레나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남녀 관계로서 친하다곤 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고, 레나가 해 주는 옛날 일상 이야기도 비록 나하곤 상관없지만 포근한 기분으로 들을 수 있어 마음이 진정된다.


레나의 아로마테라피에는 향기와, 정성어린 손길은 물론이고 기억에도 없는 사람 사는 이야기까지 수반된다. 그러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서 좀 더 이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할 정도다. 


"좋은 향기 나요."


옷가지에서 나는 향기를 조금 즐기다가 나왔다곤 치더라도 1분 안 되어서 나왔을 텐데, 방 안에 이미 꽃 향기가 은은하게 가득 차 있다. 라일락에 무언가 하나 더 섞인 느낌인데....아니, 라일락은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에서 나는 것 같다. 다른 꽃 이름은 모르겠다.


"매번 어떻게 하는 거에요? 저기 안에 들어갔다 나오면 거의 다른 방이 되어 있는데."


"그건 나중에."


그때 종아리 근처에 무언가가 스치며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아래를 보니 레나의 애완 여우가 귀를 쫑긋거리면서 내 다리에 코를 대고 킁킁대고 있었다. 이것도 두 번에 한 번은 있는 일이라 여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방 중앙의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저번이랑 똑같이?"


"네."


물수건으로 가볍게 손을 닦은 레나가 가까운 쪽 팔부터 양손으로 쓸듯이 문지르기 시작했다. 시작하기 전에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는 거라던가. 여자 오퍼레이터들 중에서 의외로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긴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 것 같다.


"이제 꽤나 긴장 풀고 있구나. 익숙해졌나 보네."


"그러게요."


"오늘 온 걸로 몇 번째였지. 여섯 번째였던가?"


"기억하고 계시네요."


손바닥으로 감싸듯 하던 레나의 손길이 은근해졌다. 손가락 끝과 그 안쪽으로, 강도를 조절해 문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내 방에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 시간엔 글로리아도 못 오게 하거든."


"글로리아도요?"


"그렇지. 나랑 바이올렛 뿐이야. 가끔 누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못 견디겠다고 오는 거 빼면."


"그건....좀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글로리아ㅡ나이트메어는 어떻게 보면 레나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데도 이 시간에 못 오게 한다니. 거기다 글로리아는 안 된다면서 나를 이렇게 불러들이는 건 혹시 그런 걸까. 얼음 가득 담긴 컵에 탄산음료를 부은 것 같은 느낌이 가슴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기뻐할 건 아니란다. 박사는 이 시간밖에 올 수 없으니까 예외인 거지."


하지만 레나의 딱 자르는 말이 컵뚜껑을 닫아버렸고, 가슴속이 간질간질한 느낌도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쉬어야 할 시간을 쪼개서 내게 들이는 거니까 불만은 딱히 없다. 오히려 매번 이 시간에만 올 수 있으니 레나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 레나는 말하면서도 손이 멈추거나, 페이스가 줄어들거나 하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프로는 프로다.


그 후로 가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레나의 손길이 쉬지 않는 것을 느끼다 잠깐 가볍게 잠들고선 자세를 바꾸어서 다시 아로마테라피를 받는 것으로 오늘 하루도 끝이 났다.


"끝. 수고 많았어."


레나의 손길이 멀어졌다. 조금 아쉬움을 느끼며 여운을 즐길 차도 없이 가벼운 손뼉 소리 한 번이 실내를 울렸다.

잠이 달아나는 것과 동시에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레나가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날짜가 바뀌고도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고마워요, 레나. 고생 많았어요."


다시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이미 레나는 손을 닦고 이동식 침대를 접어 한구석에 세워놓고 있었다. 몇 번 정도 내가 접어도 괜찮다고 나서봤지만 뒷정리도 자기 몫이라며 내주질 않아서 이것도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또 필요하면 얘기해줘. 너무 늦지만 않으면 항상 열어둘 테니까. 자, 이제 들어가서 자야지."


레나의 축객령에 문 앞에 섰다. 하지만 문을 열기 전에 방 안에 퍼진 은은한 향기를 코로 한껏 들이마셨다. 이것도 습관처럼 되어버려서, 뒤에 레나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다.


"잘 자요, 레나."


"잘 자렴. 좋은 꿈 꾸고."


나긋한 이 인사로 이제 정말 오늘은 끝.


문을 열자 꽉 차 있던 다른 공기가 옅어진 것 같다. 숨쉬기는 조금 더 편해졌지만 반대로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나서고 싶지 않은 경계선을 넘어 복도로 나오고, 등 뒤에서 문이 닫히면서 그 향기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희미하게 남은 향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듯 옷깃에 코를 한 번 가져가고, 가벼워진 몸으로 내 방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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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퍼퓨머로 순애글 쓰고 싶어서 시작한거

중간에 막히지만 않으면 매주 목요일 넘어가는 자정에 올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