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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즈델은 살카즈의 국가야. 척박한 황야에서 유목민으로서 생활하면서 과거엔 정복 활동을 행해왔지. 그 영역은 우르수스 남부만이 아니라 빅토리아나 이베리아까지 뻗어 있었다고 하니, 그 정도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의 카즈델은 전쟁으로 인해 훨씬 황폐해져 있어. 인구는 급감하고, 지도자라는 녀석은 외국으로 피신해 있고, 여러 살카즈가 자기 살길을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났지. 

추천해줄 만한 관광 장소는 아쉽게도 없네. 건축물이라던가 문화유산은 대개 전쟁 중에 소멸해 버렸으니까. 굳이 있다면 이 광활한 황야 위에 있는 몇몇 협곡 정도려나? 그 위에서 보는 황야의 풍경도 나름 절경이라 생각해. 응? 협곡이라면 이제 사절이라고? 하하. 어지간히 스트레스였나 보네. 

아무튼 이런 카즈델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변방에 마을이 세워지기 시작했어. 지금 와선 다른 도시와의 교류도 미약하지만 진행되기 시작했고. 

신기하지 않아? 0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다시 쌓아 올리는 살카즈들의 모습이. 마치 낙엽이 가루 되어 흩어지고 나무에서 새로운 잎이 싹트는 것 같잖아. 더 나은 장소가 있을 테고, 더 나은 방법이 있음에도, 그 사람들은 모국을 선택했지. 애국심일까? 아니면 단순한 생존본능? 어쩌면 생각보다 복잡한 이유일 지도 모르지.

무슨 뜻이냐고? 요컨대 그런 거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만큼 흥미롭다는 거지. 그들을 볼수록, 내 뿔과 꼬리가 공명하는 것이 느껴져. 이상하지? 산크타가 살카즈에게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는 게. 아니, 애초에 뿔이랑 꼬리가 있는 시점에서 산크타라 하기엔 애매하려나. 하하. 

음.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렇게 카즈델은 과거부터 계속 쇠퇴와 재건을 반복해 왔어. 멸망의 순간이 가까워 보임에도 그들은 다시금, 몇 번이고 일어났지. 재앙과 광석병이 종횡무진 움직이는 이 세계에 이들 같은 존재가 몇이나 있을까? 얼마 없을 거라 생각해.

라테라노 교리엔 ‘희망'이라는 덕목이 몇 번이고 반복되서 교육되고 있어. ’신은 희망을 갈망한 자에게만 희망을 선물한다'라던가 별 의미 없는 내용이 주였지. 그때 수업, 마음에 와닿지도 않고 지극히 매너리즘인지라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카즈델을 보면서 조금이나마 이런 생각이 들었어. 저들이야말로 누구보다 ’희망‘을 갈망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박사? 후후. 피곤했나 보네. 그간 고생한 게 많이 쌓였겠지. 편히 자둬. 로도스에 돌아가면 분명 바로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있을 테니까.



“...사. 박사?”

나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분명 조금 전까지 모스티마가 말하는 걸 듣고 있었던 거 같은데, 어느새 잠들어 있던 거지?

“뭐야... 벌써 도착했어?”
“아직 황야 한가운데야. 운전수가 연료가 다 떨어져서 채울 겸 좀 쉬고 간대.”

하긴, 시라쿠사에서 염국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벌써 도착했을 리가 없지. 시간을 확인해 보려 했지만, 시계가 고장 났다는 걸 뒤늦게 떠올려서 가까이 다가오려는 왼팔을 진정시켰다. 습관이 이래서 무섭다.

“몇 시지 지금?”
“글쎄. 얼추 새벽쯤 아닐까? 너 자고 나서도 시간이 꽤 흘렀거든.”

모스티마의 말대로라면 지금은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새벽. 지평선 너머의 하늘은 보라색의 그라데이션으로 칠해져 있었다. 지금이 초여름이 가까운 걸 감안하면 새벽 5시에서 6시쯤? 아니다. 허허벌판이니 그보다 좀 이르려나. 알프스를 완전히 떠났을 때가 석양이 지기 시작했을 때니 대략 8시간... 꽤나 거하게 숙면을 취했구만.

“그, 미안. 모스티마. 도중에 자버려서.”
“신경 쓰지 마. 피곤해서잖아?”

본인은 별 상관 안 하는 것 같지만, 실례인 건 실례인 거다. 아무리 피로가 쌓여있다 하더라도 이런 실수를 범하다니. 로도스의 지도자라는 자리가 무색해지는 느낌이다.

짐칸 밖을 보니 트럭에 연료를 채우고 있는 운전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작은 모닥불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탄 장작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은 걸 보니 불을 피운 지는 얼마 안 된듯 싶다. 아마도 모스티마의 불꽃 아츠겠지?

짐칸에서 살며시 내려와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스트레칭을 했다. 쌀쌀한 새벽바람이 관절 사이사이를 스쳐 지나는 것이 느껴져 지금 당장이라도 이불 속으로 달려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여긴 어디쯤일까?”
“카즈델 중남부쯤일거야. 여기서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아마도 사막 지대가 나올 거고.”
“용문까진 그럼 얼마나 걸리려나?”
“글쎄. 용문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재앙이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이맘때쯤 시작되는 더위 때문에 염국 북쪽으로 향했겠지.”
“요컨대 며칠 걸릴지 모른다는 거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모스티마는 대답을 대신했다. 용문은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재앙에 유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동도시다. 재앙전달자들의 정보를 기반으로 해서 비정기적으로 동선이 바뀌는 만큼 위치를 특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 거대한 규모 덕에 몇십 킬로미터 거리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가는 동안 실루엣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할 수밖에.

“산 넘어 산이구만...”
“후후. 박사는 의외로 역마살일지도 모르겠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방 안에서 이불 깔고 TV 보다가 낮잠 자는 게 최고의 낙이거늘. 대체 며칠째 야외에서 노숙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트럭 바퀴에 등을 기대면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니, 오늘따라 유독 굼 녀석이 만들어주던 우르수스식 아침 식사가 그리워진다.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그걸 시발점으로 여러 기억이 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언제나 소리를 지르게 만드는 블레이즈의 스카이다이빙도, 매번 기억을 되짚으려 노트를 들고 오는 로즈몬티스도, 항상 쉬면 안 된다며 서류를 내미는 아미야도, 내 신경을 언제나 박박 긁어대는 켈시 녀석도, 그 외에 언제나 조용한 일이 없는 로도스의 대원들 전부. 그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내 시야를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을 크게 뜰 수가 없어지는 내 모습이 워낙 볼품없다 느껴져서, 무심코 고개를 팍 숙였다.

“손수건이라도 빌려줘?”
“...됐거든요.”

숙였던 고개를 위로 들어 콧등을 잡은 채 애써 나오려는 무언가를 집어삼켰다. 그런 내 모습이 웃긴 건지 모스티마는 작은 소리로 웃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좋은 거야. 아예 없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뭔가 듣기 묘한 말과 함께 모스티마는 등에 매달린 스태프를 어루만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시선은 지평선 저 너머의 무언가를 향하고 있었다. 문학적 소양이 없는 나더라도, 그녀가 왜 저 말을 했는지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아직도 없는 거야?”

내 말의 의미가 너무 함축되어서 못 알아들은 것일까. 내 목소리가 작았던 걸까. 아니면 그냥 대답을 회피하는 걸까. 그 이상 모스티마에게서 들려오는 건 없었다. 우리 사이의 정적을 감싸는 건 모래 섞인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머쓱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보니 운전수가 연료통을 다시 짐칸에 싣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슬슬 이동해야 하나 싶어 몸을 일으키려 했더니, 오른팔이 갑자기 묵직해지면서 바다에 빠진 철근처럼 몸이 훅하고 내려갔다. 뭔가 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모스티마가 소매를 강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박사, 좀 걷지 않을래? 산책이 하고 싶어졌어.”
“갑자기? 그래도 이제 출발해야...”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운전수는 이미 문을 연 상태로 트럭의 시동을 걸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상황에선 산책은 무리다. 아쉽지만 거절해야지. 부탁을 들어주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어떻게 에둘러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모스티마는 운전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운전수씨. 잠시 산책하고 와도 괜찮을까?”
“네. 30분 정도 쉬고 있을 테니 천천히 갔다 오세요.”

간단히 허락해주는 거 실화냐? 허무하게 끝나버린 두 사람의 대화에 어이없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 내가 그렇게 고민했던 건 대체 무슨 소용이었을까. 알고 보니 내가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별 시덥잖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잠식했다. 

“허락도 받았으니 됐지?”
“어...? 어...”

얼떨결에 한 대답에 모스티마는 만족하듯이 내 어깨에 한 손을 툭 치고서는 발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앞으로 가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기를 5초. 정신 차리자는 의미로 양쪽 뺨을 손으로 툭툭 치며 뒤늦게 저 산크타 여성을 따라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뒤에 있을 트럭의 형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지평선 너머의 하늘도 시나브로 오렌지색으로 덧칠되어가는 것이 보였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게 변해가고 있음에도, 눈앞에 있는 푸른 머리 여성은 그저 앞으로 걷고만 있었다. 

갑자기 산책하자고 해서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가 싶었지만, 아쉽게도 모스티마는 걷는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마치 상황이 작년 서우인 때 용문 공동묘지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다가 폭력배들을 만났던 그 때와 같은 게, 여기선 갑자기 도적단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만화 같은 망상을 하게 만들었다. 왜인지 몰라도 모스티마랑 있으면 온갖 황당한 일에 휘말리는 거 같아서 더더욱 그렇다.

“이쯤이면 되려나.”

말 끝나기 무섭게 모스티마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거고는 몸을 빙 돌려 시선을 내게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그녀의 두 눈동자는 뭔가 형용할 수가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박사. 지금까지 함께하면서 별 이상한 거 느낀 거 없어?”
“뭐가?”
“알프스에서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내가 불꽃 외에는 아츠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거.”
“아츠 자체가 너랑 스태프에 부담이 많이 가서 안 쓰는 거 아니었어?”
“그게 만약 거짓이었다면?”

마치 시간이라는 이름의 종이가 반으로 접힌 것 같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스티마는 바로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저 이 상황을 즐기려고, 혹은 너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일부러 힘을 아껴둔 거라면, 어떡할래?”

보이지 않은 기운이 서서히 날 옭아매는 것이 느껴진다. 내 눈앞의 여성은 푸른 안광을 번쩍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초식동물을 노려보는 육식동물처럼. 혹은 미물을 관찰하는 연구자처럼. 언젠가 꿈에서 본 것 같은 전신을 훑는 것 같은 위압감은 무심코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들었다.

“...서프라이즈라도 생각하고 있는 거야? 모스티마.”

1초. 아니면 그보다 짧은 순간이었다. 시계 초침이 한 번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주변을 감싸던 정체 모를 기백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메마른 지반의 틈으로 용솟음치는 푸른색의 빛줄기는 곧바로 내 주변을 크게 감싸는 구체의 형상을 띈 채, 나와 모스티마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박사. 슬슬 결정하도록 할까.”

시계 문양이 새겨진 청색의 장벽 너머로 모스티마는 미소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평소와 같아 보이면서도, 뭔가 사뭇 다른 듯한 모습으로. 그녀는 나지막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몇 개월간 지속되었던, 내기의 승패 여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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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의 카즈델 묘사는 켈트족을 모티브로 뒀어. 


글쓰는 놈이 대4라서 자격증 따느라 점점 글쓰는 게 늦어진다. 미안...


원래 이번 화가 클라이맥스였는데 또 분량이 폭주했다... 연재 회수 한 화 더 늘 거 같다... 정말 미안하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