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오류 지적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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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역시 훨씬 낫다. 전날 마사지를 받아선지 몸이 훨씬 가볍고 그렇게 늦게 잠들었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는 게 편하다. 평소라면 아침에 못 일어나서 출근하기 직전까지 자는데 오늘은 아침 식사까지 뱃속에 들어갔다. 가끔 이런 날도 있는 게 좋지.


"아, 안녕하세요, 박사님...."


"음? 오늘은 글로리아인가. 안녕. 기다렸지."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비서 오퍼레이터 자리에 옅은 금발에 서로 다른 눈 색을 가진 필라인 여자아이가 앉아 있다.


조금 당황스럽다. 컨디션이 좋은 판에 비서 오퍼레이터가 글로리아....인가. 이쯤 되면 켈시의 비서 오퍼레이터 로테이션에 마가 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대신 그 반대급부로 오늘은 일이 좀 적겠지.


물론 자리 비우고 땡땡이 치는 모 성녀님이라던가, 앉혀놓으면 대체 뭘 하는지 모르는 야생 멍멍이라던지, 인형만 만지고 있는 꼬마라던지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들이 좀 있는 걸 감안하면 글로리아는 성실하게 일하는 편이다. 문제는 글로리아 안에 있는 제2의 인격인데. 얘는 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멀쩡하게 하던 일을 망쳐놓으니 문제다.


물론 글로리아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최대한 글로리아가 뒷감당할 건 없게 하니까. 물론 정말 억세게 운이 좋다면 일이 적고 나이트메어가 사고를 안 치는 날도 있지만, 인생이 어찌 마음대로 굴러가던가.


오늘은 무탈히 넘어가길 기도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나보다도 먼저 사무실에 와서 인수인계사항을 다 읽은 터라 지시할 것도 없고, 바로 하루 일을 시작한다.


"...."


"...."


서류 넘어가는 소리, 컴퓨터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실내에 울린다. 가끔 지쳤는지 글로리아가 졸곤 하지만 일 자체의 페이스가 줄어들거나 하진 않는다. 기본적으로 글로리아도 숙련도가 있다 보니 나이트메어가 깽판을 쳐도 어느 정도 커버가....


쨍그랑.


"...."


또 시작이다. 그래도 오늘은 좀 오래 버텼다. 15분만 있으면 점심시간이니까 적당히 받아 주고 점심 먹으러 가라고 쫓아내면 되겠지.

소리랑 냄새로 봐선 레나가 나이트메어 억제용으로 쥐여준 유리병 형태의 펜던트를 벽에 던져서 깨먹은 모양이다.


이젠 이골이 날 정도라 끝내놓은 일거리들을 전부 서랍에 집어넣고, 컴퓨터로 하던 작업은 전부 저장했다. 이러면 이제 다른 거 박살내 놔도 오후나 저녁에 일 시작하면 되니까.


터벅터벅 걷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종이 한 뭉치가 내 책상에 얹어졌다. 낙서가 그려져 있다거나 종이가 신경질적으로 구겨져 있다거나 하지 않고 곱게 들고온 걸 보니 글로리아가 많이 자제시켜 준 거겠지.


"이거. 아휴, 진짜. 뭘 이런 걸 시키고 있어."


"고맙다. 점심때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이야기나 좀 하자."


"어머, 오전은 이걸로 끝이야? 그럼 나 책상 부숴도 돼?"


"그건 좀 참아주라."


책상은 비싸다. 

눈에서 붉은빛 이채를 띄운 필라인 소녀가 까르르 웃더니 내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뭐야? 이 냄새. 분명 그 망할 병 깨뜨렸는데 여기서도 그 냄새가 나네?"


"그거 깨먹으면 당연히 실내에 냄새가 확 퍼지지."


대충 둘러댄다. 분명 그 전날 밤에 레나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간 곱게 안 끝날 테니까.

그래도 글로리아는 몰라도 나이트메어는 바보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아니, 생각해보니 저거 오일일 텐데. 어떻게 닦냐.


"으음....아니. 아니야. 되게 짙게 냄새가 나."


그렇게 말한 나이트메어는 이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해 왔다.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 한가운데에서 같은 빛을 내는 두 개의 거울이, 그 주변에 엷게 퍼진 붉은 선까지 보일 정도였다. 오늘은 그래도 뭘 부수고 하진 않는데, 여기까지 다가와 있으면 좀 부담스럽다. 일단 뭔 짓을 할지 모르니 곱게 가져온 서류뭉치도 서둘러 가방에 집어넣어 두었다.


"너 아까까지 목에 걸고 있었잖아. 그 냄새 아냐?"


"....그렇지? 어제 그 여자랑 있었지?"


이걸 안 속네.

아니, 생각해 보니 굳이 레나하고 있었다는 걸 숨길 필요가 있었던가?


"난 모르겠는데. 글로리아도 그렇고 박사도 그렇고. 그 여자가 뭐가 좋은 거야?"


"뭐....사람이 좋은 거에 이유가 있나."


"그럼 그 여자랑 어디까지 했어?"


"뭐?"


거의 들리지도 않을 낮은 목소리였지만 생각도 못한 내용에 놀라 나이트메어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얘 뭔가 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야? 그 여자하고 짝짓기 안 해?"


"짝짓....아니. 잠깐만. 야."


나이트메어가 말하는 '어디까지'나 '짝짓기'는 그걸 말하는 게 맞을 거다. 물론 남녀가 같이 있다보면 그런 분위기가 될 법도 하기야 하지만 애초에 레나는 메딕 겸 아로마테라피스트로 만나고 있다. 내가 흑심이 있었다면 레나가 날 자기 방에 오게 하지도 않았겠지.


"어차피 그 여자도 한 마리 암여우인걸. 그런 호의를 괜히 베푸는 거 같아? 다 목적이 있는 거야. 좋은 종자 받아서 새끼 치는 거. 아, 당신은 좋은 종자가 아닌가?"


순간 폭언이 목에 걸렸다가 다시 들어갔다. 여자애가 가까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뒤에 한 말은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야. 장난이 지나치다. 너 아무리 그래도 네 주치의한테 한다는 말이...."


"여기 있지도 않잖아. 없는 자리에선 나랏님도 욕한다는데 겨우 암컷 여우 한 마리 갖고. 그리고 날 못 나오게 하려고 안달인 건 그 여자랑 글로리아 아냐? 근데 내가 그 여자 좋을 소리를 왜 해?"


"정신나간 소리 하지 말고 가서 밥이나 먹어. 조퇴야."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가서 뭔 소리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쫓아내서 다른 자극을 주는 게 급선무다. 아마 '글로리아'는 자기가 왜 밖에 있는지 모르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조퇴라고 '나이트메어'에게 말했으니 나이트메어가 되면 알아서 안 올 거고. 얘가 있는 것보다 혼자 일하는 게 시간은 걸려도 스트레스는 덜하다. 몇 번 일 작살내다 보니 생긴 노하우 같은 것이기도 하다.


"너 있잖아. 짝짓기 해본 적 없지?"


나이트메어는 그렇게 말하며 내 의자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무릎 위에 걸터앉듯 했다. 이미 셔츠를 풀어헤쳐 하얀 피부 위에 쇄골이 선명한 양각을 그리는 것이, 그 옆에서 자기 주장을 하는 듯한 연보라색 속옷의 어깨끈이 드러나고 있었다. 라벤더 향기가 목덜미 근처에서 올라와 코와 입을 틀어막고, 반 정도 체중을 맡겨 딱 끌어안기 좋은 무게감이 온몸을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멀쩡한 남자라면 눈 돌아가서 눈앞에 있는 여자애가 꿀인지 독인지도 모르고 안았을지 모를 정도다. 


"안 끝났냐?"


"그럼 나랑 해서 딱지 뗄래?"


"안 나가!?"


"진짜 궁금하다. 자기 환자가 당신이랑 하고 있는 거 보면 그 여자는 어떤 얼굴로 당신을 볼까. 한 번 해 볼래? 얘도 처음이야." 


눈이고 귀고 지금 몸에 들어오는 입력값이 소화가 안 된다. 

환자가. 그 여자가ㅡ레나가. 딱지. 뭐의 딱지?


"뭐야. 당신 고자야? 왜 아무 반응도 안 해?"


"무슨 반응을 보고 싶은 거냐?"


이미 일이 났어도 한참 전에 났을 상황이겠지만 이유 모를 분노에 성욕 같은 건 온데간데 없었다.

대체 왜 화내고 있는 거지? 나이트메어가 미친 소리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눈앞에서 사무실을 깽판놓다가 잡혀가는 것도 많이 봤다. 그런데도 이 정도로 머리끝까지 성질이 뻗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머리뚜껑 열면 허옇게 김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방금도 좀 많이 기분나쁜 말을 한 것 같았지만 그딴 건 됐고.


"남자는 여자애가 처음이라고 하면 막 흥분하는 거 아니었어? 막 이 여자애를 더럽히고 싶고, 정복하고 싶고."


이 녀석을 육체적으로 제지시키려다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걸 인식했을 땐 이미 업무용 의자는 저 뒤로 밀려 미끄러지고 있었고, 나는 나이트메어의 양 손목을 잡고 벽에 몰아세우고 있었다. 잠깐 놀랐는지 붉은빛 이채가 도는 눈동자가 크게 치떠지더니, 이내 기분나쁜 비릿한 미소로 변했다.


"뭐야. 벽에 세워놓고 하는 게 취향이야? 그럼 그렇게 말하지. 근데 잘 생각해. 문 안 잠겨 있어."


"너 매번 하는 짓이 사람 골때리게 한다."


이미 이성의 경고는 들리지도 않았다. 나이트메어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 가라앉은 내 목소리,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


"12시. 점심시간입니다. 선내 모든 오퍼레이터 여러분은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그리고 스피커로 점심시간을 알리는 아미야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들린다. 이미 점심시간이라는 인식도 들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이 미친 고양이를 쫓아낼 기회인데.


"너 나가. 점심 먹는 김에 냉수도 먹고 머리 좀 식히고, 어지간하면 오늘은 더 이상 오지 마라."


뭘 하려고 했는지 겨우 떠올리고 나이트메어에게 명령했다. 이미 리미터는 제기능을 못한지 오래였다.

레나나 켈시가 나이트메어를 대할 때 어떻게 하라고 말해준 것도 떠오르지 않고 속에 깔려 있던 말을 내뱉고 있었다.


"미안한데, 박사. 나는 남자 팔다리 하나 작살내고 하는 취미는 없는데."


뭣, 하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내 몸이 공중에 뜨는가 싶더니, 그대로 의자가 밀려난 곳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사람 몸이 이렇게 가볍게 날아갈 수 있던가. 안젤리나의 아츠에 올라탔을 땐 재미라도 있었는데. 젠장.


"윽....으으...."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다. 일단 목소리가 나오는 정도인 걸 보니 말하곤 다르게 어디 부러진 건 아닌 모양이다.


"냉수는 누가 처먹어야 되는데. 됐어. 줘도 먹지도 못하는 거. 이거 아주 좋은 종자가 아닌 게 아니라 그냥 ㄱ...."


나이트메어가 말을 멈추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니 기다렸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이트메어가ㅡ글로리아가 자기 양손을, 나를 보고 부들부들 떨고 있다. 타이밍 미친 거 봐라. 한 5초만 더 빨리 오지.


"바, 박사님!? 박사님! 여기....이게 어떻게....대체...."


슬슬 눈앞도 맛이 가기 시작한다. 이거 점심시간 안에 어떻게 될 게 아닌 모양이다.

어제 아로마테라피 받았는데....오늘 한 번 더 해 달라고 해야 하나.


....아, 들것 왔나보다. 몸이 짐짝마냥 어디 실려가고 있는 걸 보니.




그 뒤로 눈을 떴더니 병실이었다.

나이트메어에게 날려서 벽에 처박힌 건 가벼운 타박상으로 끝나서 오늘 하루 쉬고 내일 일을 마저 끝내기로 했다. 모처럼의 휴일이 주어진 셈이지만 뭐 다른 걸 하면서 쉬진 못하고, 그냥 저녁을 아미야가 가져다 주는 정도였으니 한 번쯤은 이렇게 몸져눕는 것도 편하겠구나 싶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아미야에게 했다간 세끼 식사를 내 방이 아니라 병실에서 받게 될 테니 참아야겠지.


글로리아는 결국 비서 오퍼레이터 로테이션에서 빠지게 되었다고 켈시가 이야기해 주었다. 평소에 일을 잘 하지만 그 반대로 나이트메어가 나왔을 때 사건사고가 너무 많았다 보니 켈시와 아미야도 고민 끝에 빼버린 모양이다. 그 빈 자리를 채울 방법은 천천히 고민해 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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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 호전성을 비틀면 S여대생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메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