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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라니... 지금?”

갑작스레 나타난 이 장벽 때문에 당황했더라도 모스티마가 말한 것만은 확실히 들었다. 

우리 사이의 ‘내기’라면 단 하나밖에 없다. 작년 서우인 때, 용문에서 이뤄진 그것이다. 친구가 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두고 이뤄진, 반년 넘게 지속된 장기전. 

그것을 지금, 모스티마는 끝을 맺으려 하고 있다.

“...좋아. 결심이 섰나 보네?” 

그런 내 질문에 모스티마는 대답 대신 몇 걸음 걸어오더니 마치 수면을 넘나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장벽을 통과했다. 나도 이걸 넘어갈 수 있는 건가 싶어 손을 뻗어봤지만, 그대로 장벽에 가로막혀 버렸다. 시전자를 제외하고는 간섭이 불가능한 아츠인 건가?

“그거 알아? 박사.”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 모스티마는 말 한마디 내뱉었다. 그것이 트리거가 된 것처럼, 장벽에 새겨진 수많은 시계 문양의 초침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천장에 있는 제일 큰 시계 문양을 기점으로,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의 합주곡이 잔잔히 들려왔다.

“난 원래부터 쾌락주의자에 개인주의자, 그리고 공감할 줄을 모르는 녀석이었어. 하물며 관심이 생긴 것도 곧바로 흥미를 잃는 피곤한 타입의 사람이었지.”

그렇지, 라고 무심코 입에 담을 뻔했다. 1년 넘게 알고 지내면서 이리저리 쌓인 것에 대한 반동인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실언을 해서 초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덕에 내게 처음 가까이 온 사람들은 그렇게 전부 멀어져갔지. 기분 나쁜 녀석이라느니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야.”

나를 중심으로 모스티마는 원을 그리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위치가 초 단위로 달라지는 것이 느껴져서,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녀가 어디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딱히 슬프거나 하진 않았어. 충분히 이해 가는 행동이었고. 애초에 누군가에게 얽매이는 것만큼 귀찮은 게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사랑. 우정. 신뢰. 전부 멋진 것이지만 내겐 모든 게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으니까. 별 상관없다 생각했어.”

한 바퀴를 돈 모스티마는 그대로 장벽을 빠져나갔다.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햇빛에 매료된 것인지, 아니면 생각에 잠긴 건지는 몰라도, 그녀가 다시 몸을 돌려 다시 입을 열기까지 10초 정도의 시간이 들었다.

“그러다가 박사, 널 만났지.”
“나...?”
“넌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게 계속 나랑 가까워지기 위해 다가왔어. 처음엔 그저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 친구가 되기 위해 내기까지 걸 줄은 몰랐거든.” 
“그건 뭐...”

그만큼 친구가 되고 싶었으니까, 같은 막연한 이유는 아니었다. 소년만화의 열혈 주인공 같은 대사를 하기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그렇다고 뭘 특별히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말뿐이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어.”

다만, 그녀를 처음 볼 때부터 무언가가 느껴졌다. 행동, 어조, 태도. 이러한 것들만이 아닌 영혼이 자극받는 것만 같은 형용할 수 없는 감각. 

주어진 정보가 없는 만큼 그녀의 과거와 사상을 알고 이해하는 게 어렵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것도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느껴왔던 모스티마의 푸른 기백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 그런데도 그녀에게 다가가야만 한다고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고독해 보였으니까. 내버려 둘 수 없었으니까. 뭔가 해주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발버둥 쳤다. 그러다가 용문에서 그런 내기를 무심코 걸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도중, 우연히 대원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다.

“박사는 순수히 내 성격을 알고 배려해준 거였어. 내가 원할 때 다가올 수 있도록, 그리고 원할 때 자유로이 떠날 수 있도록. 마치 상록수의 그늘과도 같이, 언제나 내가 편히 왕래할 수 있게.”

‘햇빛과 바람처럼 쫓아 들려 하지 말게. 박사. 여행자가 필요한 건 나무 한 그루 아래의 그늘일지도 모를 테니.’ 

한참 전에 기타노가 나에게 해준 조언을 들으면서, 난 평소와는 달리 나서지 않고 모스티마를 계속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도는 그녀인 만큼, 최소한 그녀가 로도스를 편하다고 생각해 주기를 소망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만큼 마음이 든든한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이, 아무래도 모스티마에게도 잘 전해진 것 같다.

“넌 언제나 내 상상을 뛰어넘어. 박사. 매번 널 볼 때마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을 거 같아서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아. 누구든 금방 마음속에서 잊어버리는 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너의 존재가 내 머릿속에 깊이 뿌리 내게 되었어.”
“모스티마...”
“시나브로 널 알고 싶어졌어. 점점 널 빨리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됐어. 여러 곳을 전전하는 네가 걱정돼서, 네가 무사하면 좋겠다고 어느 순간 매번 기도하게 됐어.”

먼지투성이가 된 흰색 상의를 멱살 잡듯이 쥐면서 모스티마는 외쳤다. 심장 박동의 크레센도를 억제할 수 없다는 듯이 괴롭게 가슴을 움켜쥐면서, 그녀는 계속 속에 담아왔을지도 모른 감정 전부를 내게 부딪혀 왔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뇌리에 깊이 박혀오면서, 나 역시 울컥해지는 심정이었다.

“계속 궁금했어. 이 가슴이 미어지도록 끓어오르는 감정이 대체 무엇인가 하고, 그리고 이제 와서 알게 된 거야.”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좁은 보폭으로 모스티마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장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 두 사람은 서 있었다.

“내가 어느 순간부터 너를 친구로 인정하게 됐다는 걸.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로 생각하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 뜻은...”
“지금까지 했던 친구가 필요 없다느니 한 이런저런 말은 모두 취소할게.”

한순간이었다. 

황야의 거친 바람 소리도. 장벽의 시계 문양에서 나오는 초침 소리도.  

저 새벽하늘을 비추는 태양도. 지평선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구름과 새들의 무리도.  

들리고, 느껴지고, 보이는 모든 것이.

“내 패배야. 박사.”
“...그래, 그리고 내 승리네.”

시간이 멈췄다고 느낄 정도로, 모스티마의 짧은 선언은 넋이 나갈 수준으로 아름답게 주변에 울려 퍼졌다.

오랜 기간 동안 겨루어 왔던 이 승부가, 나의 승리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래, 필요했을지도 몰라.”

어느새 모스티마는 내 오른손을 양손으로 잡아 자신의 뺨에 맞대고 있었다. 손목으로 미세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이, 간지럽고 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나에게도 이런 온기가...”

그대로 두 눈을 감은 채, 모스티마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내 손의 감촉을 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가만히 선 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헤아리고 있는 ‘친구'를 기다려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널 보내야만 해.”

1분쯤 지나더니 오른손에서 느껴졌던 온기가 멀어져 갔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감성에 젖은 모스티마의 일렁이는 두 눈동자는, 무심코 숨을 삼키게 만드는 매력을 자아냈다.

째깍. 째깍. 장벽의 시계 문양은 좀 더 빠르고 요란한 초침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밝아져 오는 아침을 알리듯이. 우리 두 사람이 함께해 온 시간을 강조하듯이.

“박사. 예전에 네가 추측한 대로, 시간 아츠를 발동하려면 상당한 체력을 소모하게 돼. 특히 거리가 멀고 대상이 생명체일 경우엔 더더욱.”

심호흡과 함께, 끓어오르는 감정을 정리하는 것처럼. 모스티마의 옅은 숨결이 내 목을 간지럽혔다. 내 오른손을 바라보며 만지작거리더니, 그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니 며칠간 비축해둬서 지금 낼 수 있는 힘으론, 사람 한 명 정도만 로도스로 옮길 수 있다는 거야. 애초에 스태프도 이 이상은 못 버텨.”
“아...”

며칠간 모스티마가 아츠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건, 좀 전에 말한 날 속였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라든가 그런 질문을 던진 건, 전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열차에서 추락한 때부터 계속, 그녀는 날 신경 써주고 있던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전에서부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산크타 여성의 상냥함을 좀 더 빨리 알아챌 걸 그랬다는 막연한 아쉬움이 나한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박사. 난 이 온기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마침내 갖게 된, 언제나 내가 돌아갈 장소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니까. 내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가, 언제나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그러니...”

소중한 인형을 놓지 않으려는 어린이와도 같이, 모스티마의 손길에 힘이 쥐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수년은 쌓여왔을 것 같은 이 여성이 가진 근심의 무게가 내 손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을래? 박사.”

지금까지 숨기고, 속이며, 피하려 들었던 여성의 진심은 보이지 않은 화살이 되어 내 심장을 꿰뚫었다. 언제나의 포커페이스는 온데간데 없이, 수정처럼 빛나는 모스티마의 촉촉해진 눈빛을 비추며, 희미하게 떨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고서야,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기다릴게. 모스티마.”

그러니, 내가 건넬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먼저 돌아가서, 그녀가 언제든 돌아와서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것이 내가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시야가 점차 백색으로 물들어갔다. 장벽의 천장에서 강렬한 섬광이 번쩍이며 내 몸을 감싸더니, 몸이 두둥실 떠오르며, 마치 깊은 잠에 빠질 것만 같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런데도, 눈앞에 있는 장면은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되었다.

“곧 갈게. 박사.”

지평선에서 피어나는 여명을 뒤로 하고 있어도 환하게 보일 정도로, 밝게 웃고 있는 모스티마의 아름다운 모습을.



푸른 섬광이 대지를 한순간 비추었다. 이윽고 빛은 점차 사그라들어 푸른 불씨가 되어 허무하게 공중에 흩어졌다.

여성이 마침내 찾은 소중한 ‘친구’는 이곳에 이제 없다. 그는 시공을 뛰어넘어 그가 있어야 할 곳으로 이동했다. 

“윽...”

휘청거리는 몸을 부서지기 직전의 스태프로 지지하며 여성은 간신히 자세를 유지했다. 남아있는 모든 기력을 쏟아부어 발동한 아츠인 만큼, 그 여파 또한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수해서라도 ‘친구'를 무사히 집으로 돌려 보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여성은 안도감과 함께 땅에 털썩, 하고 쓰러졌다.

“괜찮으십니까?”

땅 위에 누워 있는 여성의 시야에 운전수의 모습이 보였다. 트럭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터인데 어느새 여기까지 와서 눈앞에 서 있다니. 일반인이라면 깜짝 놀랄 일이었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운전수의 질문에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죽을 거 같아. 전신이 뻐근해.”
“그러게 왜 이렇게까지 무리를... 평소의 모스티마답지 않군요.”
“후후. 그래 보여?”

운전수의 부축을 받으면서 산크타 여성, 모스티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모처럼 생긴 친구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정말로 좋은 친구가 생겼군요.”
“그렇지?”

트럭으로 돌아갈 때까지 대략 20분. 태양은 지평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 온 세상을 비췄다. 운전수는 모스티마를 조수석에 태운 다음 운전석으로 이동해 시동을 걸었다. 중후한 트럭의 울음소리와 함께, 덜컹하고 엔진이 대지를 박차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스. 너 변장이 너무 서툰 거 아냐? 하마타면 박사도 알아차렸겠어.”
“그렇게 눈에 띄었습니까?”
“당장 그 뿔부터 눈에 매우 띄는데.”

벗은 후드 너머로 운전수 이스의 얼굴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의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엔 주황색의 선 하나만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고, 그저 흑요석의 기괴하고 반들반들한 껍질만이 있었다. 인외의 형상을 한 얼굴 양옆으론 흰색의 뿔이 종유석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런. 주의해야겠군요. 그나저나, 스태프가 완전히 고장이 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냥 이리저리 험하게 쓰다 보니...”
“저 로도스의 박사라는 분을 먼 곳으로 옮긴다고 간단히 망가질 스태프가 아니니까요. 분명 그 이상으로 출력을 높였다는 거 아닌가요?”
“그야 뭐...”

창문에 팔을 기대면서 모스티마는 재빨리 지나가는 황야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전에 있던 일을 회상하면서, 그녀의 시선은 현재를 벗어나 다른 시간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목숨 살려야 되는데 좀 무리할 수도 있잖아?”

뭔가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이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있지도 않은 눈을 모스티마에게로 향했다. 이리저리 생각해보기를 몇 초. 그러고는 마침내 이해했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죽은 사람을 시간을 되돌려서 살렸다는 거군요. 참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셨네요.”
“뭐, 대충 그런 거지. 어찌 됐든 잘 끝나면 좋은 거잖아? 스태프나 빨리 수리하러 가자.”
“...참 곤란한 스태프 주인이네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이스는 복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몇 년째 함께하는 동업자지만, 이렇게 가끔 상상 이상의 일을 벌이는 그녀를 볼 때마다 있지도 않은 머리카락이 빠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동업자의 심정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는 것일까. 모스티마는 회사 상사에게 받은 음반을 cd 플레이어에 집어넣었다. 

경쾌한 배경음악이 울려 퍼진 채, 트럭은 황야를 넘어서 목적지를 향해 호쾌히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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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는 소란의 법칙에 나오는 모스티마의 지인임. 


드디어 다음화로 끝이네. 길고 긴 뻘글 봐주는 모두에게 미리 감사의 말을 전한다.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