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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해왔다


 

니엔의 요청으로 라바와 크루스가 시를 로도스로 데리고 온 지도 벌써 1주일이 지났다.

 

 


약식으로 작성한 이력서를 든 시, 만족한다는 듯이 스리슬쩍 웃으며 시를 뒤따라 들어오는 니엔, 그리고 오퍼레이터 계약을 도와줄 아미야까지. 언니한테 마지못해 끌려온 시의 심드렁한 표정은 지금까지도 눈앞에 선하다.

 

“또 계약서야? 알았어 사인 해줄거니까, 이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마.”

 

방금 전까지 내 손에 쥐고 있던 고가의 만년필을 건네자 시는 손을 저으며 자신의 품속에서 붓을 꺼냈다. 한겨울의 서리와 같이 털이 새하얀 붓. 우아한 장식은 없으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 붓은 분명 기나긴 세월을 시와 함께 했음이 분명함에도 갈라진 곳 하나 없었으며 또한 칠이 벗겨진 곳 하나 없었다. 다만 유려한 곡선으로 파여 붓에 조각된 문양들만이 그 은은한 미학을 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벼루와 먹은 준비 안해도 돼.”

 

시가 짧게 몇 마디를 날숨과 함께 툭 내뱉은 후 붓을 고쳐 잡았다. 그러자 팔에 있는 거뭇한 문신과도 같은 형체가 서서히 이지러지더니 검은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가녀린 물줄기는 붓에 파인 문양을 따라 달려, 그 은은한 미학을 백과 흑으로 이루어진 단조롭지만 아름다운 예술로 강렬히 표현해 놓았다.

 

“이걸로 됐지?”

 

“네 감사합니다. 시.”

 

아미야가 서명이 완료된 서류들을 정리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로써 시 씨는 로도스 아일랜드와 정식으로 계약한 오퍼레이터가 되셨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미야가 서류더미를 품에 안고 방문을 나서자 니엔이 윙크를 하며 아미야를 뒤따라 나섰다.

 

“박사, 내 못난 동생 잘 부탁해”

 

니엔의 한마디에 시가 잠시 언니 쪽을 흘긋 보더니 이내 내쪽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집무실 방문이 닫히고 잠깐의 정적 후, 말문을 트려고 하는 찰나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두지만, 이 『시』가 그린 그림은 줄 수 없어!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꺼야. 리퀘스트도 받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알았으면 이젠 나를 방해하지마.”

 

미묘하게 본인 이름을 강조해서 말한 시는 몸을 홱 돌려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제멋대로에 귀찮은 것을 싫어하면서도 본인의 실력에 관해서는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그녀는 내가 일언반구도 꺼낼 새 없이 본인의 할 말만 하고 가버린 것이다.

 

“요원증!”

 

그대로 말문이 막혀 입을 벌린 채로 얼어 있다가, 아미야가 부탁한게 생각나 닫힌 문을 향해 짧디 짧은 한마디 만이 간신히 새어 나왔을 뿐이다.

 

‘요원증은 박사님께서 직접 건네주시는게 좋을 듯해요. 시 씨는 일반적인 오퍼레이터와는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이전 오퍼레이터 모두 그렇게 해 왔으니까요.’

 

이력서에 적힌 대로라면 분명이 시는 로도스 함내 어딘가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요원증 하나 제대로 전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아미야가 알게 될 경우는 차치하더라도 당장에 요원증이 없으면 로도스 함내 생활에 큰 장애가 생긴다. 그리고 간단한 일처리도 못하냐며 아미야와 켈시에게 받게 될 따가운 눈총 또한 사실 꽤나 신경쓰이기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집무실을 나와 정처없이 로도스 함내 복도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박사님.”

“오 란셋! 혹시 근처에서 시 못봤어? PRTS 네트워크 요원 목록에 오늘 새로 갱신된 요원이야.”

 

란셋은 잠시 뜸들이더니

 

“아 찾았어요 박사님. 현재 2번 발전소 근처 카메라에 모습이 잡혔어요.”

“고마워 란셋. 바로 가볼께”

“박사님! 커피는 받아가셔야죠.”

“나중에~!”

 

커피 심부름을 시켰던 란셋을 뒤로하고 2번 발전소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 나는 얼마 안가 진기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우중충한 복도에 칙칙한 색의 복도 벽, 복도의 중간에는 난데없이 문이 하나 나 있었다.

 

“여긴 설계상 방이 있을 만한 곳이 전혀 아닌데…”

 

기이한 문에 한발 한발 다가서자 그 형체의 작위적인 모습이 더욱 부각되었다. 문틀에는 붓이 지나가며 색을 입힌 길이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하고 태양과도 같은 강한 빛을 내던 손잡이는 개나리색 안료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커다란 서고가 나타났다. 사람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듯한 서가들은 열 맞춰 늘어서 마치 살카즈 왕궁에 있는 왕의 회랑을 보는 듯했으며, 각양각종의 서책, 도면, 화지, 두루마리 등이 차분히 정돈되어 있는 모습은 방금 전까지 전력 질주하던 내 가슴을 가라앉히고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양 극단을 채운 웅장한 서가들 가운데, 내 시선의 정 가운데에 그 방 주인이 보였다.

 

“내가 말했을 텐데. 귀찮게 하지 말라고.”

 

황혼을 따라 서가들 사이로 스며드는 잿빛 물결. 그 유약한 빛을 받으며 자신의 세계에 몰두하고 있는 한 소녀는 집무실에서 도도하면서도 차가웠던 것 과는 달리, 이번에는 신묘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수많은 겨울을 겪은 버드나무처럼 길게 늘어뜨린 흑발, 이와 대조되는 새하얀 민소매. 그리고 개의치 않는듯 어깨를 내비쳐 보이는 배꽃따리 같은 피부. 그것은 소녀라고 하기에는 몹시도 이질적이고도 신묘한 것이었다.

 

“요원증… 전해줘야 해서.”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간신히 입 밖으로 해야 할 말을 끄집어 내었다.

 

“거기다 적당히 두고 가.”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자신의 공간을 침범하지 말라는 듯, 시간을 빼앗지 말라는 듯, 무신경한 강압은 그 건조한 색채 하나만으로도 내 발걸음을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나는 방 문턱을 넘기지도 못하고 요원증을 방 안쪽에 내려놓은 채 뒤로 물러섰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제 스스로 삐그덕거리며 움직이더니 서고와 복도를 잇는 빛줄기를 끊어버렸다.

 

 


“시는 뭔가…. 어렵단말이야.”

 

니엔이 차를 한 모금 머금고는 찻잔을 덜그럭거리며 상에 내려놓았다.

 

“역시 매운 맛을 먹고 난 뒤면 염국의 차를 곁들여줘야 한다니까.”

 

니엔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며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걔는 원래 그래. 제멋대로에, 자기 중심적이고, 어딘가에 하나 푹 빠지면 헤어나올 줄 모르지. 근데 그렇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어.”

 

잠시 과거의 편린을 붙잡는가 싶더니 니엔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전에 『우리』에 대해서 얘기해 줬던 거, 그거 말고는 내가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은 더 없어. 나머지는 너가 직접 나와 내 친족들을 보면서 스스로 판단해야 할꺼야.”

 

염국의 매운 요리를 먹고 차를 마시며 만족감에 올라갔던 입꼬리는 어느새 내려와 있고 니엔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가신지 오래, 다기를 올려 둔 상에 두 손을 짚고 점차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니엔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전혀 가볍게 마음먹을 만한 상대가 아니야. 박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지 않겠어? 잘못하면 먹혀버린다고?”

 

그런데 니엔이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샐쭉 웃었다.

 

“뭐 박사도 알아서 조심할 거라 믿어. 그리고 내가 그렇게 되도록 두지도 않을테고.”

 

니엔은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가 기지개를 펴며 일어설 준비를 했다. 내 한달치 생활비를 먹어치운 니엔은 나올대로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자 줄께. 장난감이야.”

 

니엔에게서 형체모를 무언가를 건네받고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자

“때가 되면 요긴하게 쓰일 거야. 그리고… 어떻게 먹히는지는 박사 상상에 맡기지. 난 밥도 먹었겠다 가서 한숨 자야 되겠다. 잘~먹었어.”

 

‘계산은 항상 내 몫이지.’

 

니엔이 먼저 자리를 뜨자 속으로 푸념을 하며 음식값을 지불하는데 뇌리에 계속해서 니엔이 한 말이 맴돌았다. 도대체 그녀의 친족은 어떤 존재들이기에… 먹힌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날이 되기 전 까지는…




지금 빌드업 중인데 다들 흥미 있으면 계속 하고 아님 말고

해달라고 해도 안할 수도 있어


참고로 그림은 대충 구글에서 돚거해 온거라 정확한 주소는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