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의 휴식 시간. 휴게실의 자판기 커피와 함께 창밖의 경치를 느긋하게 감상할 생각이었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박사님. 이상형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런 내 앞으로 갑자기 한 남성이 다가와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져왔다. 전신을 훑어봐도 로도스의 오퍼레이터임을 증명하는 팔찌나 정예화 배지가 달려 있지 않다. 단단해 보이는 각진 헬멧과 용문 경찰 조끼. 그 밑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의 옷. 계급장을 보아하니 용문 총독찰급. 고급 경사인 스와이어보다 두 단계 아래다. 스와이어가 데려온 부하인가? 그나저나 다짜고짜 이상형 질문이라니. 혹시...?
“죄송한데 남자한텐 관심 없는데요.”
“하하. 저도 없습니다.”
들어보면 얼추 30대쯤으로 추정할 수 있는 중후한 웃음소리가 헬멧 안에서 울려왔다. 말하기가 불편한지 내 앞의 의자에 앉으며 헬멧을 벗더니, 정돈되지 않은 흑발 아래로 갈색 눈동자를 가진 젊은 남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나저나 뉘신지...”
“아. 실례했습니다. 스와이어 누ㄴ...이 아니라, 스와이어 고급 경사의 직속 부하인 류 샤오청(刘小橙)입니다. 편하게 청이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자신을 청이라 불러 달라는 용문 총독찰은 이리저리 뻗친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졌다. 직위가 증명하듯, 중간중간에 섞인 새치는 그가 어떠한 역경을 겪어왔는지를 알려주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박사님.”
코너 부근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 앞에 있는 남성처럼 헬멧과 방탄조끼를 입고 있는 무리가 날 보며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용문 경찰들이 저 구석에서 쑥덕거리는 게 영 보기 좋은 상황은 아니다마는, 아마 청이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과 연관이 있는 거겠지.
이유가 뭐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 내가 던진 발언 하나가 로도스와 용문 사이의 우호 관계에 영향을 미칠 나비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신중하자.
“뭐... 일이 제 애인인걸요. 언제나 함께하고 있죠.”
그런 내 대답이 재미없던 걸까. 청은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뭔가 재밌는 게 떠오른 듯 손바닥을 탁, 하고 치며 질문을 던져 왔다. 상사며 부하며 행동이 하나같이 똑같아서, 무심코 웃음이 튀어나올 거 같았다.
“박사님. 남자 대 남자로서,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묻는겁니다. 일부러 피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어... 네.”
내 대답의 의도를 알아차린 걸까. 아니면 순수한 호기심에 묻는 걸까. 어느 쪽이던 간에 참 곤란한 상황이다. 이렇게 된 거 적당히 답해주는 게 그나마 낫겠지.
“여성의 긴 머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죠.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매력적이잖아요.”
“동감합니다. 그럼 슬렌더한 체형은 어떠신지요?”
“웬만한 사람이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긴 머리에 마른 몸매. 테라 동부 출신 남성이라면 흔히 가지고 있는 로망이라 들었다. 이 정도 질문이면 진짜 개인적으로 묻는 건가. 다만 명색이 공무원인 사람이 이런 가벼운 질문을 해도 되나? 사석이라 괜찮다 이건가.
아니. 그 이전에, 저기 구석에 있는 경찰들은 왜 같이 좋아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좋았어!’라면서 주먹을 꽉 쥐거나 옆에 있는 사람이랑 하이파이브를 하는 등. 설마 내 이성 취향을 두고 내기라도 하고 있는 건가? 기분이 좀 묘해지는데.
“자기 사람한테 잘 대해주는 부잣집 아가씨는요?”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요. 이상적인 여성상 수준 아닌가요?”
“키 160 초반대 정도의 필라인 여성에 대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잠깐. 질문 상태가...?”
얼추 20cm 가까이 차이 나니 딱 적절하다고 입 밖으로 꺼내기 직전에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어째 갈수록 질문이 점점 디테일해지고 있다. 마치 특정 인물로 내 대답을 유도하려는 것처럼, 청이 한 질문은 날 앞을 알 수 없는 수렁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사람의 말은 어떻게든 조작이 될 수 있는 법. 이 이상의 대답은 삼가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 자리를 뜨려 했다. 그 순간, 다른 경찰들이 모여 있는 구석에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전신을 훑는 것 같은 섬뜩함은 공기조차 비명을 지르게 했다. 묵직하게 울리는 하이힐이 지면을 짓밟는 소리는 막귀가 들어도 그 감정을 확실히 느낄 수가 있을 정도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 있는 건 겁에 질린 용문 경찰들을 뒤로 하고 다가온, 성난 호랑이 한 마리.
그걸 느끼지 못하는 걸까? 내 눈앞의 남성은 몇 초 후의 비극을 뒤로 하고 즐겁게 할 말을 하고 있었다.
“매우 좋습니다. 박사님! 그런 의미에서 박사님과 잘 어울릴 것 같은 분을 소개 드리고 싶은... 켁?!”
바위가 부서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청의 머리는 테이블에 곤두박질쳤다. 그 뒤를 보니 눈살을 찌푸린 채 씩씩거리고 있는 스와이어의 모습이 보였다.
“류 샤오청, 이 *용문 욕설*아! 뭐하고 있는 거야!”
핸드백 줄을 잡은 채 철퇴 휘두르듯이 머리를 내리찍은 건가? 청의 후두부가 핸드백에 박혀 있는 징이랑 비슷한 사이즈로 몇 군데 함몰된 것이 보였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의료부에 보내야 하는 거 아냐?
“누, 누님?! 언제부터!”
이런 일이 일상이라는 듯, 청은 멀쩡히 일어서며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석이라서 직책으로 부르지 않고 편히 누님이라 하는 건가. 팀원끼리 사이가 좋구만.
“얘들이 전부 여기서 뭘하고 있길래 와봤더니. 박사를 괴롭히러 온 거였어?”
“아닙니다, 누님! 저는 극히 정상적인 남자 대 남자의 심오하고 이성적인 토론을... 앍!”
퍽! 하고 묵직한 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핸드백을 안 쓰고 손수 주먹으로 부하의 머리에 친절하게 꽂아넣는 스와이어였다. 꽤 아팠는지 뒷통수를 손으로 매만지며 고통을 호소하는 청의 모습이 보였다. 슬랩스틱을 연상시키는 이 상황. 상점에 가서 클로저에게 팝콘이라도 사와야 되나 3초 정도 진지하게 생각했다.
두통이 오는지 머리를 짚더니, 스와이어는 땅이 꺼질 것 같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팔짱을 낀 채 휴게실에 있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나지막이 말했다.
“내 밑으로 모두 다 집합해.”
어이쿠. 군인 출신 오퍼레이터들한테 자주 듣던 ‘사형 선고’라는 건가. 목소리 확 깔고 말하는 저 한 마디가 제 3자인 내가 들어도 무심코 등이 꼿꼿이 펴지게 만드는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청이 얼굴을 공포로 덧칠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이 흔들고 있다. 구석에 있는 용문 경찰들도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듯 각종 손짓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거 어쩔 수 없구만.
“저... 스와이어. 잠시만요. 오해가 살짝 있는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박사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온 건데.”
“아뇨 딱히... 그냥 말 그대로 남자들끼리의 평범한 대화를 하고 있었던 거뿐이에요.”
“그래...? 음...”
컬이 예쁘게 들어간 옆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스와이어는 나랑 그녀의 부하들을 번갈아보면서 보고 있었다. 뭔가 미심쩍은듯 손톱을 물고 있더니, 이윽고 결심했다는 것처럼 팔짱을 끼며 미소를 보였다.
“뭐, 박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스와이어가 던진 한 마디와 함께 부하들 전원이 소리 없는 축가를 부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향해 경례로 끝나지 않고 절까지 하는 사람들까지 보였다. 스와이어가 갈구는 게 어지간히 무서웠긴 헀나 보다.
“아무튼! 다들 여기서 노닥거리지 마! 로도스 사람들이 불편해하잖아! 해산이야! 해산!”
부하들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치면서 스와이어는 큰소리로 외쳤다.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코너에 있던 용문 경찰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테이블에 있던 청도 고개를 돌려보니 진작에 모습을 감췄다. 조금 전의 일이 한순간의 신기루였던 것처럼 느껴져서, 문득 조금 전까지의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말썽꾸러기들이라니까.”
“부하분들이랑 사이가 좋으시네요.”
“알고 지낸지 오래 됐으니까.”
옛날 일이 떠올랐던걸까. 스와이어의 옅은 웃음소리가 휴게실을 감쌌다. 다소곳이 손으로 미소를 가리면서도 포근한 곡선을 자아내고 있는 눈썹은, 아마 어떤 사람이든 두근거리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다들 유능하고 착해. 내게 있어선 팀원 모두가 가족 같은 사람들이야.”
“상냥하네요. 스와이어는. 그게 당신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어? 음... 고마워?”
“제가 뭐 이상한 말 했나요?”
“가, 갑자기 칭찬해서 놀란 거일 뿐이야.”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면서, 스와이어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햇살에 비쳐서인지, 그녀의 양쪽 뺨이 평소보다 붉어진 것이 보였다.
사실 어머니같다고 말하려 했지만, 젊은 나이의 여성에게 그리 말하는 건 실례인 것쯤은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어머니 같은 상냥한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부하들이 저렇게 잘 따르고, 행동마저 비슷하게 따라할 정도라는 건, 그만큼 상사에 대한 충성심과 애정이 크다는 뜻이니까. 무심코, 한 기업의 지도자로서 부럽다고 생각할 정도다.
“아아, 암튼! 저 바보들을 한 번 혼내러 가야겠어! 실례할게!”
결국은 혼내는 건가. 스와이어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휴게실 문으로 향했다. 하이힐이 경쾌하게 바닥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목시계를 보니 사무실에서 나오고 나서 벌써 20분이나 지났다. 이 이상 있으면 비서 오퍼레이터인 폴리닉에게 혼날 수도 있으니 빨리 가봐야겠군.
“저... 박사.”
싹 비운 자판기 커피를 쓰레기통에 넣고 휴게실을 나온 순간, 오른쪽 복도에 서 있는 스와이어의 뒷모습이 보였다. 말할 게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아까 그거... 사실이야?”
“네? 뭐가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걸음소리가 1초에 몇 번은 들릴 정도로 빠르게, 스와이어는 복도 저 너머로 사라져갔다.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이 당황스러워 목덜미를 긁적였다.
아까 그게 사실이냐, 라니. 뭘 말하는 거지. 설마 아까 청이 물어본 그건가? 내 이상형이 어떻다는 등 이상한 소문은 퍼뜨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이거 잘못하면 한동안 또 시끄럽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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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언급되는 총독찰/고급 경사는 홍콩 경무처의 실제 직급임. 스와이어의 직급은 총경이 아니냐는 질문이 있을 수도 있는데, 중문판엔 확실히 '용문 고급 경사(龙门高级警司)'라고 써져 있으므로 이쪽으로 갈 거임.
류 샤오청이라는 오리지널 캐릭터를 조연으로 등장시켰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호불호 좀 있을 듯.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