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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흘 만에 들어온 레나의 방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가지런히 모포가 개켜진 침대, 제자리에 놓여서 똑바로 세워진 의자들.

그런데도 사흘 동안 레나가 없었던 탓인지 쓸쓸하고, 차갑다.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향도, 여유롭게 뒹굴거나 자고 있던 바이올렛도 없다.


그 방이 있을 뿐, 더 이상 레나의 방이 아닌 것 같다.


"고마워. 고생했어."


침대까지 부축을 받아 앉은 레나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얼굴을 바로 볼 수 없는데도 나갈 수 없었다. 스즈란의 말을 듣고 레나를 찾아왔지만 여전히 무서웠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잠깐 앉아 볼래?"


나갈지 말지, 레나의 얼굴을 바로 봐야 할지 아니면 두려움에 몸을 맡기고 시선을 피할지 고민조차 할 수 없게.

그 말을 무시하고 또 다시 도망갈 용기도, 차마 침대에 앉을 용기도 나지 않아 스툴을 끌어다가 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별거 아니라고? 당연히 할 일이라고?

괜찮냐고? 괜찮아질 거라고?

포덴코가, 글로리아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떠나지 말아달라고?


ㅡ좋아해요, 레나.


그 마지막에는 도망치듯 방에 돌아온 내 모습이 있었다.


"박사. 그날....왜 도망갔니. 내가 대답할 틈도 안 주고."


레나가 조용히 책망하듯 물었다. 짧지만 무거운 목소리에 온갖 생각이 전부 쓸려나가 버렸다.

고개를 들자, 모포를 내려다보고 있는 밀크커피색 시선이 복잡한 심경을 자아내고 있다. 한참 휘저어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도망갔던 걸까. 뭐가 무서워서?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서였을까?


"그날 일은....잊어버리세요, 레나. 제가 역시 잘못 생각했던 거였어요. 저는...."


"....뭘 잘못 생각해?"


거의 들리지도 않는, 아까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에 말하던 걸 멈추었다.

침착하자.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말하면 돼.


"그....레나하고, 그전보다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는 걸요."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고....?"


방 안의 온도를 10도쯤은 더 떨어뜨릴 것 같은 날선 목소리가 나직이 물었다.

처음 보는 레나의 분위기에 두근거리던 것보다도, 몸이 떨렸다.


"레나....?"


"뭐야, 로도스 아일랜드가....여기 수장이라는 사람이, 말은 그럴싸하게 하면서...."


고개를 들어 레나의 얼굴을 보았다. 책망은 실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잠시만요, 레나. 그게 무슨...."


"자발적으로 그렇게 나서는 딱한 사람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사실은 위선자였어? 그 사람들을 지휘하는 것도, 교묘하게 화살받이로 내몰아 죽일 생각이었던 거야?"


"네?"


뭔가 이상하다. 방금 내가 한 말로 레나의 신경을 건드린 게 있었나?


"그래, 그렇구나. 감염자들을 위한다고 듣기 좋은 말로 말해놓고...."


"아니에요. 레나, 저는 지금...."


"아니라고? 그러면 뭐야. 아로마테라피를 빌미로 나한테 접근한 거였어? 어차피 내가 당신 몸 만지고 있으니까 기회다 하고? 잠깐만, 뭐야....그런 거였어? 당신 그래서 그럴 생각으로 그날...."


무슨 이야기인지 바로 알아챘다. 레나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실망감이 경멸로 바뀌어버렸다.


ㅡ남자니까 그건 어쩔 수 없지. 맘대로 못 하잖아?


레나가 웃어넘겼던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순식간에 뒤집혀버린 것이다.


잠깐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데?

어디서....뭐지?


"아니에요. 레나. 저는...."


"그래? 나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더 중증인 사람들....에이야퍄들라나, 글로리아는 어떨까. 하나는 앞을 잘 못 보는 아이니까 대놓고 덮쳐도 누군지 모를 거고, 다른 하나는 자기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유약한 아이니까 힘으로 짓눌러버리면 되겠지. 그리고 둘 다 중증이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니, 원하는 대로 범하고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 버리면 완전범죄고."


ㅡ막 이 여자애를 더럽히고 싶고, 정복하고 싶고.


"아니요! 레나, 당신이 지금까지 본 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순간 나이트메어가 했던 말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일어섰다. 스툴이 삐걱거리며 뒤로 미끄러졌고, 레나의 얼굴이 불과 일 미터도 안 되는 거리 앞에 있다. 벌레, 아니 그보다 더 못한 것을 보는 시선은 눈도 깜짝 않고 나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가득 실려 있던 온기는 더 이상 없다.


애초에 말이 안 된다. 수뇌부 두 명이 당장 감염자인데, 그런 짓 했다간 그 두 명한테 죽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글쎄? 아닌 척 속였을지도 모르잖아? 해볼 테면 해 봐. 아니, 차라리 나한테 다 풀어버리라고. 서 있지도 못하고, 기억을 잃어버리고, 일상을 뺏기고, 앞도 잘 못 보고 듣지도 못하는 딱한 사람들한테 하지 말고. 무슨 짓을 해도 우는 소리도 안 하고, 이 악물고 받아낼 거니까. 하지만 '처리'당한다고 하면, 그렇게 되기 전에 다른 감염자들에게 전부 까발리겠어."


"아니요....아니에요. 레나, 그런 말 하지 마요...."


이 사람이 감염자들을, 자기 환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진짜로 그럴 것 같아 무섭다.

더구나 나이트메어에게서 레나를 향한 그런 폭언을 직접 들은 탓일까, 그 말에 내가 괴롭기까지 하다.


정말 미칠 노릇이다. 내가 사흘 동안 마음고생했던 게, 이것 때문이라고?

대체 뭘 잘못했길래 이 사람한테 이런 오해를 받는 거지?


사흘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이 사람에게 내 마음을 들키는 건 아닐까 하고 조마조마했던 게 전부 거짓말 같다.

아니, 어쨌든 이걸 풀어야 한다.


"설령 여자를 취하고 싶은 본능이라던가 있다 해도, 그리고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해선 안 되는 짓은 알아요. 잠깐만....제발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변명해 봐."


지금 속에서 대체 얼마나 많은 말들과, 생각들이 뒤엉키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 입으로 나와야 할 것들이 어디로 나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나는 레나를, 언제부턴지는 몰라도 이성으로서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데.

정말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나? 레나한테는, 그저 손님인 사람이고, 같은 배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니, 마음만 갖는 거라면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는다면 괜찮은 거겠지. 역시 고백하면 안 되는 거였나 보다.

내가 이야기했던 '그럴 사이'. 남자와 여자가 마음이 맞고, 연인으로서 만나는 사이.


숨이 쉬어지지 않고, 입은 틀어막은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스즈란이 용기를 북돋워주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제 와서 우는 얼굴 하지 말라고. 왜 말을 안 해? 이야기 좀 들어 달라며?"


교착에 들어간 잠깐 사이에 조금 진정한 것 같은 레나가 위협하듯 쏘아붙였다.


"그게 아니라....그저 전....제가 그날 한 말 때문에 당신이 놀란 줄 알고....제가 당신을 이성으로 보고 있지 않길 바랬던 건 줄 알고....제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줄 알았던 거였어요. 그래서 당신한테 대답 들을 새도 없이 도망갔던 거라구요."


"거 봐. 비감염자한테 감염자는....어?"


겨우 짜낸 내 말과 함께, 가슴속을 꽉 막고 있던 모든 것이 출구를 눈으로 정한 것처럼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말에 오히려 놀란 건 레나였다. 사방으로 짓눌러 오던 압력이 조금 느슨해졌다.

레나는 잠깐 곤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퍼즐을 맞추듯 이리저리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모든 조각이 맞춰지고서 레나의 얼굴에 피어오른 꽃의 이름은ㅡ당혹감이었다.


"이....이게....그러면 뭐야....? 내가 대체 무슨 말을...."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레나의 눈에 물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있는 힘껏 경멸과 분노를 실어 내뱉었던 말들이 전부 칼끝을 자신에게 향한 것이었다.


"내가....도대체....아, 아니야....나는...."


이제야, 이제야 알아준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이 큰 오해를 해서 내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레나의 목소리가 무언가에 틀어막힌 듯 짓눌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이 레나를 옥죄고 있다.


"미안해....미안해....내가 무슨 말을....미쳤나봐....미안해, 미안해 박사...."


말없이 가까이 다가갔다. 레나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서럽게 울며,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흘 동안의 마음고생, 그리고 이 잠깐 동안 레나를 둘러싸고 있던 오해....그리고 죄책감.


겨우 눈물을 참고 그걸 전부 받아내면서, 나는 레나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ㅡ괜찮아요. 오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위로도 목구멍 안에서만 놀고, 형체를 갖추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레나의 어깨를 안고 다독이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겨우 실내가 조용해지고, 나는 잠깐 나가서 레나가 마실 물을 사 왔다.


"좀 괜찮아졌어요?"


겨우 목을 축인 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눈물은 이미 한참 전에 멎었지만....아니, 너무 오래, 거의 몇 시간을 울어서 눈물이 말라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덕분에 겨우 진정한 모양이다.


"나는 참 바보였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일을 저지를 생각이었다면 내가 부르지도 않았을 거였는데."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이트메어 말마따나 고...아니, 그거랑은 상관없이 사람의 이성에 대한 이야기지.

나도 조용히 물 한 모금으로 말라버린 입을 적셨다.


"정말 그 애 말대로였어.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볼걸....우리 둘 다 시간을 들여서 느긋하게 이야기했으면 오늘 같은 일도 없었을 텐데. 나도 엄두가 나질 않아서 찾아갈 수가 없었어. 박사가 무서웠던 만큼 나도 그랬으니까."


레나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서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 애?


그러고 보니 어디서 그런 비슷한 걸 들었던 것 같은데?


ㅡ그래도 그 사람이 정말로 싫었던 게 아니라면요? 그 사람이 싫다고 한 것도 아닌데, 대답도 안 듣고 나오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박사님도 아직 모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아. 그때는 뭐가 이상한지 몰랐는데. 

그날 내가 어설픈 고백을 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스즈란이 알고 있었다. 레나도 스즈란에게 그날 일을 이야기한 거다.


"생각해 보면 그 애한테도 정말 큰 잘못을 할 뻔했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서 나한테 이야기해준 걸텐데, 나는 어른이 되어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하지만 그건 지금 와서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사람이 나를 이성으로 봤던 아니던, 아니면 오해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이든 아니든 자신을 이성으로 보길 원하지 않더라도 그날 일에 대한 사과는 해야 한다.


"레나. 지금 와서 이야기지만....그날 도망가서 미안했어요. 그런데 그 고백....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한 게 아니에요. 당신하고 있는 시간 내내 어떻게 해야 할지, 당신하고 이야기하면서 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도 못 잡고 있었어요. "


"아아, 그래서 긴장하고 있었구나.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묻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날보다도, 레나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이젠 말해야 한다.


"당신하고 같이 지내면서 같이 있는 게 좋았고,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으면 당신하고 같이 있고 싶었어요. 같이 일하고, 이야기하고, 웃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고....그러면서 당신을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대답을 들어야 한다.

어떤 대답이 오더라도 먼저 두려워하지 말고. 


"이런 말 할 상황이 아닌 건 알아요. 그래도 그날 제가 잘못했던 거라던지, 제대로 못했던 말을 똑바로 하고 싶었어요. 같이 있어주어서 고마워요. 그리고....좋아해요, 레나."


그날하고 비교해서 사실 나아진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 흔한 무드도 없고, 내가 할 말을 내뱉었을 뿐이고. 좀 더 좋은 말도 할 수 없다.


떠오르는 그대로,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여온 레나에 대한 감정을 솔직히 말한 것 뿐이다.

달라진 거라면 이제는 레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다는 것.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 난방 돌아가는 소리만 방 안에 울리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의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한참만에 레나가 숨을 고르고, 시선은 살짝 아래를 향했지만, 그럼에도 대답을 했다.


"분위기고 뭐고, 나도 당신하고 같이 있으면서 즐거웠어. 많은 환자들을 봐 왔고, 같이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그런데 그 안에서도, 나는 일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한 것에 무언가로 돌려주려 하고, 그 방법을 찾아봐 주고....그 마음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어. 같이 있고 싶다고, 좀 더 가까이에 있고 싶다고....나도 언젠가부터 생각한 것 같아."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나를 똑바로 보는 그 눈은 오히려 슬픔과 죄책감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나는 그런 당신을 오해해서 그런 말을 했어. 감염자니까 원하는 대로 범하고 처리해버린다니....안 돼. 나한테는 자격 없어...."


너무 멀리 돌아왔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서로 어긋났던 길을 이제야 맞추어서 함께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더 이상 두려울 건 없다.

레나가 한 말은 용서하면 된다. 내가 나이트메어가 했던 폭언을 숨겼던 것처럼.


"괜찮아요. 오해였잖아요. 감염자든 아니든, 당신이 좋은 거에요. 풀었으면 된 거에요."


"미안해....그렇게 좋아했던 사람을...."


"사과는 이제 괜찮아요. 레나. 다 용서했으니까요. 오늘 일은 잊어버릴 정도로 좋은 추억 만들면 돼요."


겨우 남은 눈물을 닦은 레나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못 잊어버리지. 좋아하던 사람이....내가 좋다고 고백한 날인데."


레나가 엷지만 수줍은 미소를 띄웠다. 그제야, 오랜만에 보는 레나의 웃는 얼굴이다.

이 표정을 너무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고마워. 많이 미숙할지 몰라도, 잘 부탁할게."


"저도 잘 부탁드려요."


용기를 내어 내 손을 레나의 손등 위에 얹어 살며시 붙잡았다. 사흘간 쉬지도 않고 일해 메마르고, 지쳐있었지만 따스했다.

조금 놀라면서도, 눈은 수척해지고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두 뺨에 엷게 장미꽃을 피우고서 레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사흘 간 쌓여있었을 말들이 많았을 텐데. 야속했던 것도, 아쉬웠던 것도.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맞닿은 손만으로 조용히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레나가 예전처럼 돌아오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항상 레나가 말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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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퓨머가 급발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오리지널 설정으로, 과거 트라우마 비슷한 무언가 때문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