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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박사! 슬슬 일어나야지!”

머리를 징징 울리게 만드는 목소리와 함께,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눈꺼풀이 추가 달린 것처럼 쉽게 떠지지 않는다. 팔의 중량을 이겨내며 간신히 안대를 벗으니 햇살이 날 괴롭혀 왔고, 점점 뚜렷해지는 시야 너머로 날 잡고 툭툭 치고 있는 금발의 아가씨가 보였다.

“스...와이어?”
“일어나. 박사. 벌써 9시야! 근무 시간이라구.”

9시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뇌를 송곳으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이 몸에 브레이크를 걸어왔다. 그러면서 속이 울렁거리는 게, 도무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왜 이러나 남은 이성을 쥐어짜내서 생각해보니, 어제 마신 술이 내 주량을 넘어선 게 원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고량주 두 잔에다가 맥주 두 캔까지. 머리가 안 아플 수가 없는 구성이다. 

“박사. 내 어깨 잡아. 일으켜줄게.”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잠시 한숨을 쉬더니, 스와이어는 날 부축해 조심스럽게 소파에서 일어나게 도왔다. 비틀거려서 넘어질 뻔했지만, 그녀가 날 잡아준 덕에 머리를 테이블에 박는다든지 그런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키 차이가 머리 하나 가까이 나는 남성을 부축할 수 있다니, 용문 경찰의 기본적인 근력에 다시금 놀라게 된다.

“일단 샤워부터 하고 와. 따뜻한 물로 머리 감으면 좀 개운해질 거야.”
“그래도, 지각을 했는...”
“내가 먼저 서류 보고 있을 테니까. 잠 깨고 와. 알겠어? 어차피 이 상태로는 아무 일도 못 해.”
“...네. 고마워요.”

뭔가 말해야 할게 매우 많았지만, 머릿속이 혼돈의 도가니인 지금 상황에선 이 메스꺼운 기분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지도자로서는 좋은 행동이 아니지만, 지금은 스와이어의 말을 듣는 것이 좋겠지.



누가 나에게 아츠를 사용했나 생각할 정도로, 샤워실을 나오니 조금 전보다 머리가 상쾌해졌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등으로 받으며, 바로 사무실로 향했다. 

생각이 정리되니 얼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제 과음한 채로 사무실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9시가 되어서 오늘의 비서 담당인 스와이어가 들어왔는데, 아직 일어나지 못한 걸 깨운 것이다. 어제 옷 그대로 입어서 어묵 냄새와 술 냄새가 잔뜩 묻혀 있는 그 상태의 나를, 이리저리 흔들어서...

“환장하겠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끓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꿎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마음만 같아선 지금 당장 창가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내 용기가 부족했다.

자동문이 옆으로 이동하자, 소파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스와이어의 모습이 보였다. 사무실에 들어온 나를 보더니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그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쭉 훑어보며 내게 질문을 건져왔다.

“상태는 어때, 박사? 일할 수 있겠어?”
“네. 아까보다는 괜찮은 거 같아요.”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스와이어는 고개를 두 번 끄덕이더니 다시 소파로 향했다. 그러면서 내 책상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아침 준비해놨으니까 저거 먹고 시작해.”
“네? 아침이요?”

뭔 소리인가 싶어 책상에 가보니 웬 음식들이 올려져 있었다. 상점에서 팔고 있는 에그 토스트. 코코아가 들어간 흰색 머그컵. 그 옆에 보이는 이온 음료와 숙취해소제. 

“이건...?”
“어제 과음한 거 같아서 부하들에게 부탁해서 급히 준비해놨어. 숙취 해소엔 당분이랑 전해질 섭취가 좋으니까.”

확실히 알코올 분해에 좋다고 예전에 메딕 오퍼레이터한테 들은 거 같다. 그렇다 쳐도 바쁜 아침에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주다니. 절을 몇 번 해도 감사할 따름이다.

“고마워요. 저 때문에 이렇게까지...”
“그거 먹고 정신 차리고 일해야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비닐을 즉시 뜯어서 에그 토스트를 꺼냈다. 명령을 내린 스와이어랑, 준비해준 부하들에 대한 감사를 담아 한 입 크게 베어물려고 한 순간, 문득 어제 일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말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보니 지금이 그 순간인듯 싶다. 

“저, 스와이어.”
“왜?”
“그, 어제 방에서 있던 일은 죄송했어요. 여러모로...”

내 사과를 듣더니, 스와이어의 꼬리가 일자를 그리며, 못에 박힌 곤충 표본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사과처럼 붉어진 뺨을 뒤늦게나마 들고 있던 서류로 가리더니, 다시금 눈을 빼꼼 내밀면서 원망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기, 기껏 잊으려 했는데 왜 지금 말하는 거야. 바보야...”
“그, 바로 사과하려 했는데 그땐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아, 알았으니까 일단 먹어...”
“어... 그, 넵.”

아무래도 말을 꺼내는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던 거 같다. 잠자코 아침이나 먹어야겠다.



아침도 든든하게 먹고, 숙취해소제까지 마시니 컨디션이 거의 다 회복되었다. 일도 생각보다 빨리 끝난 건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이렇게 여유가 넘치는 일정은 얼마 만이던가.

“고생했어. 박사.”

고개를 돌려보니 머그컵을 건네는 스와이어의 모습이 보였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머그컵을 받아 그대로 입에 머금었다. 평소에 스와이어가 즐겨 마시는 빅토리아산 원두의 향이 은은하게 코를 간지럽혔다.

“이제 좀 쉬어야지. 이 뒤에 시간 비어? 비면 뭐라도 먹으러 갈까?”
“이번 주에 있을 작전 검토 좀 하려고요.”

내 대답에 질렸다는 듯이, 투정 부리는 것처럼 스와이어에게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입으로 *용문 욕설*이라도 나오려는 걸 참으려는 걸까? 그녀는 한참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발을 동동 구르더니,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모처럼인데 좀 쉬어. 평소에 잠도 제대로 못 자잖아.”
“미스라도 생기면 큰일 나니까 그래요.”

서랍에 넣어놨던 작전 서류를 꺼냈다. 노트북에 있는 PRTS 연동 시뮬레이터 앱도 기동했다. 

“제가 실수하면, 절대 안 되니까요.”

‘사망률 제로’, ‘인도적인 전술 지휘’, ‘완벽에 가까운 전략가’ 등. 입사하고 나서 자주 듣는 나에 대한 평가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실수할 수밖에 없는 생물이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난 지휘자다. 내 실수 하나만으로 날 따르는 모두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가 있다. 그리고 그걸 난 실제로 경험했다. 설령 죽는 사람이 없더라도, 칼에 베이고, 총에 구멍이 뚫리며, 뼈가 으스러진 대원들을 수없이 봐왔다. 아니,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부터 거짓말이다. 체르노보그에서 날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던, 에이스와 그의 부하들을 어떻게 잊겠는가. 

그걸 생각할수록, 심장이 쥐어짜이는 고통이 날 괴롭혀온다. 날 믿어주고 따라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아무리 가벼운 임무더라도. 좀 더 신속히. 좀 더 확실히. 좀 더 안전히.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은 '강박감'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내 목을 졸라온다. 

“아, 진짜!”

시뮬레이터 로딩이 완료되기 직전이었다. 탁, 하고 노트북이 접히며 그 위로 스와이어의 손이 보였다. 어안이 벙벙해지다 못해,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화가 터져 나올 뻔했다.

“스와이어, 무슨...”
“제대로 휴식은 해야지. 박사. 맨날 쉬고 싶다고 말하면서 지금 안 쉬면 언제 쉴 건데?”

불만스러운 듯 볼을 부풀리며, 스와이어는 팔짱을 낀 채 날 내려보았다. 

“철두철미한 것도 좋아. 대원들을 생각하는 것도 훌륭해. 하지만 말이야. 지휘자라면 여유를 가져야지. 긴장만 해봤자 좋을 거 없어!”
“그래도...”
“또. 또. 뭐가 ‘그래도’야! 앞으로 내 앞에서 ‘그래도’ 금지!”

손가락을 내 입술 앞으로 치켜세우며, 스와이어는 큰 소리로 말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 무슨 억지인가 싶어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리고 이번에 지휘자는 박사만 있는 게 아니잖아. 뭔 의미인지 알겠어?”
“...아.”

머리가 전구가 켜진 것처럼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스와이어가 한 말대로, 이건 로도스 단독으로 수행되는 작전이 아닌, 용문 경찰과 협력해서 이뤄지는 공동 작전이다. 지휘자 역시 나만이 아닌, 눈앞의 필라인 여성도 함께할 예정이다.

빙빙 돌려서 말하고 있지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스와이어가 내게 말하고 싶은 것을.

“그러니... 나한테도 좀 의지하라고. 이 멍청아.”

부끄러운 듯이 스와이어는 고개를 휙 돌려 창밖을 보고 있었다. 햇빛으로 인한 역광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금빛의 긴 꼬리를 통해,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오늘따라 고맙다는 말을 몇 번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에 잠시 손을 올리며 감사의 말을 던졌다. 그것에 만족했는지, 스와이어는 씨익 웃으며 몸을 휙 돌리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신작 음료수가 카페에 들어왔다고 하니, 그거 사서 느긋하게 쉬자. 좀 쉬고 바로 작전 구상 도와줄게. 그럼 괜찮지?”
“그거 좋네요.”

사무실의 문이 닫혔다. 이윽고 복도는 우리 두 사람의 걸음 소리로 가득 찼다. 

오랜만에 복도에서 느껴보는 햇살이,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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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가 대학교 4학년 2학기라 글 쓰는 시간이 점점 줄고 있다. 세이브본 이러다가 바닥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음.


피드백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