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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좀 매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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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작전 준비는 완료야.”

두 사람밖에 없는 방에서, 천천히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주변을 감쌌다. 눈앞의 여성은 내가 건넨 서류를 꼼꼼히 읽어보고 있었다. 애플 마티니를 입힌 것 같은 녹색 머리칼. 세월이라는 풍파에 다듬어진 것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한여름의 숲을 연상시키는 풀색 원피스. 색깔이 통일된 게 본인의 꽉 막힌 성격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로도스의 실질적 최고 권위자이자, 나에게 몇 달째 휴일을 안 주고 있는 크레이지 그린 몬스터, 켈시다. 

“속으로 욕하지 마. 박사.”
“무슨 말씀이신지...?”
“안 찔리면 똑바로 날 보고 말하던가.”

독심술이라도 쓴 건가 싶다. 어떻게 저리 정확히 맞추는지 원. 마치 자식의 행동을 다 꿰뚫고 있는 부모 같아서 무섭다. 

“아무튼 수고했어.”

서류를 책상 앞에 두면서, 켈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인이 부족해진 건지 곧바로 커피포트로 가는 것이 뭔가 안쓰러워졌다.

“그럼 난 가봐도 되지?”
“아직 남았어. 박사.”

이번엔 또 뭐란 말인가. 이런 종이 냄새가 격렬한 러브콜은 좀 그만했으면 좋은 심정이다. 속으로만 그렇게 불평했다. 입으로 꺼내기엔 내 용기가 부족했다.

“커피라도 한잔할래?”
“고맙게 받을게.”

켈시는 곧바로 종이컵에 탄 인스턴트 커피를 건넸다. 곧바로 한 잔 들이켰다. 입에서 느껴지는 이 가볍고 심심한 맛. 최근에 빅토리아산 커피를 자주 마시다 보니 입이 고급이 되어버린 건가. 영 맛이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요즘 선내에서 소문이 돌고 있더라.”
“뭔데?”
“너와 오퍼레이터 스와이어가 그러고 그런 사이라는 거.”
“푸흡?!”

목 근육이 안으로 들어오는 커피를 강렬히 거부했다. 눈물이 찔끔 나올 거 같은 불쾌함이 목에 남아 날 괴롭혀왔다. 물. 물이 필요하다.

“그 반응을 보니 사실인가?”
“틀려... 사레들린 거야.”

사레가 들렸는데 물 한 잔도 주지 않다니. 매정한 켈시 녀석. 그러니 그 나이 먹고도 결혼을 못 하지.

“어쩌다 그런 소문이...”
“근래에 들어 너희 둘이 같이 붙어 다니는 걸 자주 봤다는데.”
“고작 그게 근거야...?”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난 지금 여러 국가에서 온 여러 종족의 여성 대원들이랑 사귀는 플레이보이라는 소리인가? 지도자인 입장으로서 대원들이랑 교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소한 행동 하나를 과대해석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도자라는 위치가 원래 이런 법이다.

“그래서 박사는 베아트릭스 스와이어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성으로서, 말이야.”

별 생각 없다.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망설이는 거지? 계속 굼뜨면 켈시에게 의심을 살 것이 뻔한데도, 내 혀는 기름 빠진 양철 나무꾼처럼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윽고 한숨 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두통이 오는 건지 머리를 짚으며, 켈시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박사.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 관계는 확실히 해라.”
“...무슨 소리야?”
“너와 스와이어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하라는 거다.”

사회적 지위? 처음엔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지만, 곧바로 알아챘다. 그녀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세계 유일의 광석병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제약회사의 총괄 지휘자. 그리고 상대는 빅토리아 재벌 기업 출신의 용문 고위 경찰. 터무니 없을 정도의 거물이지.”

자신이 마실 커피를 타면서도 켈시의 말은 계속됐다. 과연 설교가 한 시간 이내에 끝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둘이 우호 이상의 관계가 되면 어떻게 될까? 일단 용문과 빅토리아 정계 및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겠지. 매스컴에서도 우릴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테고. 그럼 자연스럽게 용문이나 빅토리아와의 우호 관계인 다른 도시들도 우리에게 손을 뻗으려 하겠지.”

우호 이상의 관계. 나와 스와이어가? 뭔가 현실성이 없는 말이라 무심코 상상하게 돼버렸다. 그런 내 모습이 한심해 보이기라도 한 건가? 켈시는 또다시 한숨을 쉬며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맹수의 눈처럼 날카롭게 째려보면서, 내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왔다.

“이런 거까지 계산한 거면, 정말 치밀한 거지. 박사. 정계 진출이라도 하시려고?”
“내가 그럴 리 없잖아. 켈시.”
“그래.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한 너라면 그러지도 않겠지.”

칭찬인 건지 욕인 건지, 미묘하게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애매한 언변. 듣기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효능이 장난 아니다. 로도스에 들어오고 1년이 넘었는데도 변하지 않는 저 어투는 좀 바꿨으면 좋은 심정이다.

“하지만 과연 그 암호랑이는 어떨까?”
“스와이어가 왜?”

예상외로 켈시의 표적은 내가 아닌 금발의 그 아가씨였다. 평소라면 나에게 온갖 말을 퍼부어야 했을 상황인데. 거기에 심지어 호칭이 ‘그 사람’이라던가 ‘그 필라인’ 같은 게 아닌 ‘암호랑이’라니. 대체 얼마나 위협을 느끼고 있단 말인가?

“베아트릭스 스와이어는 용문의 딸이야. 박사. 행동 하나하나가 용문을 향한 이득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지.”

용문의 딸.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부모의 칭찬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여자아이와도 같다고 생각한 적이 나도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어감은 확실히 달랐다. 내 눈앞의 이성(理性)의 괴물은 명확히, 경계심과 적대심을 품고 있었다.

“과연 순수한 본심이라 생각해? 그런 교활한 여자가 너에게 호감을 내비치는 것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그런 타입의 사람은 언제나 행동과 언변에 진심을 숨겨놓지. 특히 뒤쪽 싸움이 많은 재벌가의 사람이라면 말이야. 베아트릭스 스와이어도 예외는 아니야.” 
“말을 왜 그렇게 해. 켈시.”
“과연 너와 친목을 다지는 목적은 무엇일까? 스와이어 프로퍼티에 대한 노이즈 마케팅. 향후 광석병 치료제의 출시에 대비한 상위 입찰. 용문 정계 진출을 위한 가문의 책략. 그 외에도 여러가지 변수가 있을 수 있겠지.”
“켈시. 그만해.”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동쪽 지방 격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걸 지금 실천하고 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목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주체할 수 없는 맹수를 간당간당한 이성을 목줄 삼아서 붙잡고 있었다.

“혹은 로도스를 독과점하여 용문 산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뇌부와 스와이어 가문이 손을 잡았을지도 모를 노릇이지. 박사 너와의 관계를 구실로 말이야.”
“켈시!!”

그리고, 그 목줄이 지금 끊어지려 하고 있다. 

“제발, 입 닥쳐줘. 진짜로.”

내가 스카이파이어나 이프리트였다면, 진작에 이 방을 불태워버렸을 만큼, 가슴 속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심호흡을 반복하면서 진정해보려 해도, 얼굴이 일그러지고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분노라는 이름의 파도가 내 머릿속을 덮쳐오고 있었다.

“사람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해?”
“만일의 가능성을 말한 것일 뿐이다.”
“너 진짜 대단하다. 여러가지 의미로.”

한없이 평온한 모습을 보이는 켈시를 보니 이렇게 성내고 있는 내가 바보같아졌다. 그러면서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이 난잡한 머릿속으로 미약한 이성 한 줄기가, 싫은데도 억지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내게 물어왔다. 왜 이렇게까지, 울화가 치밀어오르는 걸까. 

사람의 호의를 철저하게 부정해서? 아니면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져버려서? 아니면 다른 이유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건 이 빌어먹을 녀석에게서 떨어지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갈게.”
“박사...”

먹다 남은 커피를 싱크대에 버리고 그대로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헐떡거리기 시작하는 숨을 애써 잠재우며, 열리기 시작한 자동문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난 너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아. 그저 네가,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길 바랄 뿐이야.”

뒤에서 켈시가 뭐라고 말하는 게 들려왔지만, 마음속에서 들끓는 불꽃에 집어삼켜져 사라졌다. 문은 곧바로 굳게 닫혀 안에서 나오는 소리를 틀어막았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황급히 커피를 타서 들이켰다. 하지만 평소의 마시는 빅토리아산 특유의 향기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씁쓸한 맛이 나는 맹물이라는 미각만이 내 혀를 감쌌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커피를 마실 기분이 못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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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지 나왔던데 한섭 언제 나올지 궁금하네. 보카디도 언제 나올지 모르겠고.


피드백이나 감상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