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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었나.”

따스한 오렌지색의 빛줄기가 내 눈을 괴롭혀 왔다. 간만의 낮잠을 방해받았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켈시 녀석이랑 실랑이하는 며칠 전 기억을 다시 감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등 뒤에서 떨어졌다. 슬리퍼를 신고 창가로 가보니, 노을빛으로 물든 용문 시내의 모습이 보였다. 용문 근위국 측에서 제공해준 유명한 5성급 호텔이 보여주는 경치. 이름값만큼 그야말로 사진 하나 찍고 싶은 장관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물을 한 잔 마시니 비몽사몽이었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 분명 어제 용문에 들어온 다음, 근위국의 간부들이랑 최종 회의를 새벽쯤에 끝마쳤다. 그리고 그대로 호텔에 체크인한 다음 넉다운.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 번에 터져버린 걸까. 지도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풀어져서야 웃음만 나올 따름이다.

“그나저나 뭐하지...”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40분. 작전이 새벽 4시에 시작하니 아직 한참 남았다. 다른 대원들한테 놀자고 말하려고 해도, 다들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방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그렇다고 다시 눈을 붙이려 해도 잠은 진작에 깼다. 

그러다가 문득 체크인을 할 때 본 로비의 설명문이 떠올랐다. 옥상에 정원을 곁들인 카페테리아가 있다고 하던데, 기분 전환할 겸 잠시 갔다 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트나 지갑 같은 기본적인 것만 준비하고,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걸어서 코너를 도니, 금색으로 치장된 6대의 엘리베이터가 원을 그리며 중앙의 원형 소파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 가장 좌측의 엘리베이터 위의 계기판의 숫자가 반짝였다. 10. 11. 12. 서서히 내 층수에 가까워지는 것이 보여 서둘러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늦지 않았는지, 벨 소리와 함께 계기판의 숫자가 올라가는 게 멈췄다. 이윽고 문이 열려서 들어가려 했더니, 웬 익숙한 인상의 여성이 내 시야에 비쳤다.

“어라?”
“스와이어...?”

의아한 상황이지만 엘리베이터를 멈추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자, 문이 닫힌다는 안내문이 들려왔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안엔 나랑 스와이어 두 사람만이 있게 되었다.

“왜 여기에 있어요?”
“왜라니... 내 소유 호텔이니까 있지.”

왜 당연한 걸 묻냐는 저 표정에 잠시 어이가 가출할 거 같았다. 이 초호화 5성 호텔이 재산 중 일부에 불가하다니. 다시금 스와이어 가문의 무시무시한 재력에 입이 떡 벌어지면서 감탄할 따름이다. 

“그러는 박사는? 온종일 잘 거라 하지 않았어?”
“어쩌다 잠이 깨버려서... 산책이라도 하려고요.”
“타이밍 좋네. 마침 같이 산책하러 나가자고 물어보려 온 거였는데.”
“우연이네요.”

이윽고 스와이어는 벽에 있는 옥상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몸이 잠시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들더니, 엘리베이터의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의 고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엘리베이터가 멈춰 있던 것이었다.  

“이 호텔 옥상의 카페가 꽤 괜찮거든? 옆에 정원도 있으니까 음료 사서 걸어 다니자.”
“좋죠.”

엘리베이터가 옥상을 향하는 동안, 스와이어와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근위국 건물에서 헤어진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야기할 게 넘치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스와이어한테 잘 거라고 말했던가? 



호텔 옥상은 꽤 인상적이었다. 저녁에 맞춰 조명이 켜진 정원. 잔잔한 발라드곡이 울려퍼지는 카페테리아. 연보라색 도화지 위에서 빛나는 용문 시내의 야경. 이 모든 것이 손에 쥐고 있는 얼그레이 티의 향과 맛을 더욱 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박사가 커피를 안 마시다니 별일이네?”
“요즘 내성이 생겨서요.”

순 거짓말이다. 내성 따윈 진작에 생겼다. 지금쯤 로도스에서 다른 대원들 갈구고 있을 초록 머리 필라인 녀석 덕분에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도 이 고충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당히 핑계를 댈 수밖에.

“드디어 내일이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는데, 기분은 어때?”
“이 일 끝나고 켈시가 또 무슨 일을 던질지 걱정인데요.”
“뭐야 그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난간에 몸을 기대며 저 멀리 도시의 풍경을 보고 있는 스와이어가 있었다. 뒤에서 오는 조명에 비추면서, 그녀의 황금색 머리칼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작전이 끝나면 난 아무래도 로도스에 늦게 합류할 거 같아. 용문에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며칠 정도요?”
“글쎄? 좀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그동안은 심심하겠네요.”

그런 내 대답이 불만스러운 건지, 스와이어는 볼을 살짝 부풀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뒤로 보이는 긴 꼬리 역시 아래쪽으로 축 늘어진 것이, 아무래도 기분이 팍하고 상했나 보다.

“뭐야. 내가 무슨 심심풀이 땅콩 같은 거야?”
“그럴 리가요. 한동안 못 볼테니 쓸쓸하겠다고 생각한 거에요.”
“그, 그래...? 흐음...”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를 들이키고 있지만, 그녀의 꼬리는 솔직했다. 조금 전이랑은 전혀 다르게 살랑살랑 흔들면서, 꼬리 끝에 박힌 징이 반짝이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도자로 살아오면서 발달한 임기응변 능력이 빛을 발한 걸까?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단국의 속담이 왜인지 모르게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순간적인 위기를 넘기고, 잠시 조용한 티 타임이 도래했다. 별다른 말 없이 우리는 각자 시킨 음료의 향을 즐기면서 지금 이 순간을 즐겼다. 아니, 즐기려 했었다. 머릿속이 켈시 녀석의 핀잔으로 가득 차 버리기 전까진.

[베아트릭스 스와이어는 용문의 딸이야. 박사. 행동 하나하나가 용문을 향한 이득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지.]
[과연 순수한 본심이라 생각해? 그런 교활한 여자가 너에게 호감을 내비치는 것이.]
[그런 타입의 사람은 언제나 행동과 언변에 진심을 숨겨놓지. 특히 뒤쪽 싸움이 많은 재벌가의 사람이라면 말이야. 베아트릭스 스와이어도 예외는 아니야.]

이미 며칠이 지났지만,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던 불꽃이 일렁인다. 온갖 욕설이랑 험담을 들어봤지만, 유독 이건 화가 오래 가고 있었다. 사람의 호의를 철저히 무시해 울컥해서? 이유치고는 너무나도 가볍다. 더욱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한창 고민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보라색 하늘은 검푸른색으로 덧칠되었다. 옥상의 조명은 하늘을 밝힐 정도로 빛나고 있었고, 눈앞의 야경은 더욱더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별다른 말 없이 커피를 입에 대며 도시의 야경을 즐기고 있는 스와이어의 옆모습이 보였다. 예쁘게 올라간 긴 속눈썹. 에메랄드를 연상시키는 녹색 눈동자. 오똑한 콧날. 윤기 나는 분홍빛 입술. 강한 조명 때문에 얼굴에 음영이 졌음에도 내 눈앞의 여성의 얼굴은 햇빛과도 같이, 화려하고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박사님. 우리 누님말입니다. 가끔 말하는 게 *용문 음란 언어*같지만, 사람도 좋고 얼굴도 예쁜 편이고, 능력도 있는 분입니다.]
[박사님도 인정하는 부분 아닙니까?]

그걸 보자니 청이랑 술자리를 가질 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땐 술자리에서의 잡담 정도로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그 뉘앙스가 달리 느껴졌다. 

[그러니, 우리 누님... 잘 좀 부탁드립니다. 박사님.]

분명 상관의 동업자로서, 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인데. 마음 한 칸에서 사심이 계속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게 다른 의미가 아니었을까?’라고 질문하면서, 더욱 과거에 있던 일까지 파헤쳐 온다. 심지어 처음 만났을 때 청이 던진 질문들까지.

[여성의 긴 머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슬렌더한 체형은 어떠신지요?]
[자기 사람한테 잘 대해주는 부잣집 아가씨는요?]
[키 160 초반대 정도의 필라인 여성에 대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던지고 싶은 질문이 생겼다. 이 고뇌를 해결해줄 수 있으면서도, 해서는 안 될 거 같은 금단의 과실과도 같은 하나의 질문이. 그걸 생각하자니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주먹을 꽉 쥐며, ‘설마’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번이고 부정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실수해버릴 것 같은 충동을 억제했다. 

하지만, 내 짓궂은 혀는 그 노력을 무시했다. 

“스와이어는 좋아하는 사람 있나요?”
“푸흡?!”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다소곳이 막고 있는 스와이어의 모습이 보였다. 향차의 향기를 짓이겨 버릴 정도의, ‘불안함’의 냄새가 느껴졌다. 이윽고 직감했다. 당겨선 안 되는 폭죽을 당겨버렸다는 걸. 

임기응변이 어쩌고저쩌고 자화자찬했던 조금 전 말은 취소다. 역시 나는 말조심 하나 제대로 못하는 머저리 병신이다.

“가, 갑자기 무슨 질문을...”
“어...”

나중에 벽에다 머리를 박던. 창가에서 뛰어내리던. 혀를 뽑아버리던. 방법을 생각하는 건 나중이다. 일단, 이 끝내주게 빌어먹을 상황을 만회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냥 궁금해서요.”

평소에 잘 나불거리는 혀야. 이때만 굼뜨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여라. 더욱더 살을 붙여서 그럴듯하게 말하란 말이다. 하다못해 분위기를 이 이상 어색하게만 만들지 말아다오.

“스와이어 정도면 사람도 괜찮고 얼굴도 예쁜데, 교제 중인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못 들은 거 같거든요. 그래서 신기해서 물어본 거에요.”

사레들린 게 진정된 건지, 스와이어는 땅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툭툭 털었다. 그러고선 손수건을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건지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이윽고 그녀에게서 답변이 들려왔다.

“...있어.”

짧은 대답 한마디. 냉수 한 바가지를 끼얹은 것처럼, 속을 휘젓던 알 수 없는 열기가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입술을 꾹 다물며 지금 당장 뱉고 싶은 한숨을 집어삼키니, 머리가 자연스레 땅을 바라보게 되었다.

“역시 있구나. 하긴, 없는 게 이상하죠.”

심장박동이 진정되면서 느껴지는 개운함과 편안함. 동시에 입술이 파르르 떨리게 만들 정도의 답답함과 불쾌함. 상반되는 감각이 성게 가시처럼 전신을 찔러왔다. 하지만 그걸 티내면, 오해를 살 수밖에 없으니 참기로 했다.

“혹시 누군지 물어봐도 될까요? 역시 용문 근위국쪽 사람이려나요?”
“아니, 로도스.”
“로도스요...? 와, 내가 왜 몰랐지?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그냥, 있어. 계속 신경쓰이는 녀석이.”

노 코멘트하겠다는 건가. 컬이 들어간 옆머리로 가려져서 지금 스와이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신경쓰이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테니 예상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심코 주먹을 꽉 쥐게 만들었다. 

“잘 됐으면 좋겠네요. 그 사람이랑.” 

근심과 잡념이 섞인 한숨을 크게 내뱉으니, 시원섭섭한 기분과 함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어리석은 망상은 여기까지. 더 이상 혹사시킬 뇌세포도 없다. 그래도 덕분에, 스와이어와의 관계를 대충 어떻게 두면 좋을지 감이 잡혔다. 

얼마 안 남은 향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가을 바람에 이미 차갑게 식어버려서 뭔 맛인지 모르는 맹물이 되버렸지만, 아무렴 어떤가. 

“슬슬 들어가죠. 일찍 일어나려면 빨리 자야하니까요.”
“박사... 이 *용문 성불구자*.”
“네?”
“흥이다. 바보야!”

딱히 말실수를 하는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스와이어는 기분이 팍 상한 듯 먼저 출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 먹은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헐레벌떡 뒤따라 갔지만, 이미 스와이어가 탄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내려간지 오래였다. 하이힐을 신고 저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는 건 덤이다.

“...왜 화내는 거지?”

구름이 낀 밤하늘처럼, 여러모로 영문을 알 수가 없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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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나 심해지던데 다들 몸조심해라.


피드백이나 감상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