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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잔은 준비됐어?”
“네!”
“그럼 작전 성공을 기념하며!”
“건배!!”

사방팔방 잔과 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북적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너도나도 가릴 것 없이 이 순간을 축복하며, 용문 경찰 출신 오퍼레이터들이 전 직장 동료들과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이번 작전에서 처음 만날 터인 대원들과 용문 경찰들이 대화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술기운과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이 꿈이라 느껴질 정도로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용문 협력 작전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나버렸다. 워낙에 준비를 철저히 해온 것도 있었지만, 적측의 방어가 소홀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덕분에 심해봤자 경상 정도로 그치고, 로도스의 대원들과 용문 경찰들 모두가 파티를 즐길 수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 전체를 개조하다니...”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스와이어가 내게 제공해준 호텔의 옥상. 어제 내가 말실수를 해서 큰일을 낼 뻔한 그곳이다. 설마 카페 전체를 파티용으로 개조하다니. 재벌가의 스케일에 혀를 내두를 따름이다.

파티 비용을 전부 부담한 저 필라인 아가씨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작전에 참여한 사람들이랑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순수하고 진심이 담긴 칭찬.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지는 세심한 피드백. 집단의 리더라면 언제나 바쁘다는 증명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나도 비실비실한데, 저럴 체력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박사님. 뭐하고 계십니까!”

등 뒤를 누군가가 탁하고 치면서, 이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맥주가 가득 담긴 잔을 든 채, 류 샤오청이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을 걸어왔다. 이미 잔뜩 마신 건지, 평소보다 어조가 격양되어 있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다. 파티라도 나름 공석인데 이거 괜찮은 건가?

“누님과 더불어 이번 작전의 MVP이신데, 좀 더 즐기시죠!”
“아뇨, 뭐... 술이 그리 강한 건 아니라서.”

건배를 권하길래 탄산수가 담긴 잔을 살짝 부딪쳤다. 한 모금 마시는 나와 다르게, 청은 호쾌하게 식도 너머로 맥주를 들이부었다. 지난번에 같이 어묵 먹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저렇게 마시다간 간이 안 남아날 거 같다는 의미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자자. 박사님도 찐하게 한잔하셔야죠.”
“아니, 전...”
“그간 고생많으셨다는 의미의 제 선물입니다! 받으시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탄산수가 남은 잔에 청이 들고 있던 샴페인이 난입했다. 의도치 않은 진 토닉이 완성되었다. 대체 어디서 샴페인을 가져온거지? 아니, 그 이전에 내가 술을 잘 못 마시는 걸 모르는 건가? 혹시 알면서 이러는 건가? 옆에서 마시길 권하는 이 경찰의 대학 이력이 혹시 암살학과 수석 졸업이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청. 너 또 박사 괴롭히는 거야?”

강제로 마실 뻔한 상황에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불만스러운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스와이어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독 후광이 비치는 거 같았다. 

“에이. 설마요! 평소에 누님을 잘 챙겨주신 박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담아 술 한 잔 따르고 있는 거 뿐인걸요.”
“말은 잘하네.”

감사의 인사로 도수 40을 넘기는 술을 대접하다니. 그럼 나중엔 복수할 땐 스피리터스라도 줄 생각인 건가? 술로 혼쭐을 내준다니.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란 말인가? 졸려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실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춤추고 있었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서 자고 싶은 심정이다.

“박사 술 약한 거 몰라? 이런 거 먹다가는 바로 뻗는다고.”
“오. 그 뜻은! 박사님을 대신해 누님이 드시겠다는 건가요?”
“그 뜻이 아니잖아. 이 바보야!”
“다들! 주목해 주세요!”
“류 샤오청! 이 *용문 욕설*...!”

옆에서 스와이어가 소리를 지르고, 욕을 내뱉으며, 볼을 꼬집어도 당당하게, 청은 큰소리로 외쳤다. 그것에 이끌려 들고 있는 술잔이나 식기구를 전부 내려놓은 채, 64명의 오퍼레이터와 용문 경찰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들어보십시오! 저희 누... 스와이어 고급 경사가 여러분들에게 축배를 다시 한 번...”

뭘 하려고 하기도 전에 승부는 이미 결정 났다. 술에 취해 텐션이 오른 것도 있지만, 내 눈앞의 남성이 가진 세 치 혀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스와이어는 각종 알코올의 혼합물이 들어간 컵을 손에 쥐고 있었다.

“마셔라! 마셔라!” 
“원샷! 원샷!”
“멋지다! 스와마망!”

술에 절어버린 또라이들의 광기어린 구호가 들려왔다. 중간에 이상한 애칭도 들린 거 같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저... 스와이어... 역시 무리하지 않는 게...”
“아, 아니. 괘...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가까이 다가가 보니 울상을 짓고 있는 스와이어의 모습이 보였다. 새빨개진 얼굴. 씰룩거리는 입술. 부들거리는 양팔.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정말 무모하다. 저 술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독극물을 마시다간 위랑 간이 못 버틸 것이다.

“이건 진짜 못 마셔요. 차라리 제가...”
“아니. 나는 스와이어 가문의 영애. 이 정도의 시련에 도망친다는 건 자존심이 허용하지 않아!”

평소엔 세우지도 않는 자존심을 이상한 곳에서 내세우고 있다. 분위기에 취해서 이성적인 판단이 힘들어지기라도 한 건가? 안 그래도 부산스러운데 그녀까지 이런 상황이면 참 곤란할 수밖에 없다. 덕분에 오랜 지병인 편두통이 오늘따라 유독 욱신거려왔다.

그 순간, 빛줄기가 지나간 거 같이 머릿속이 말끔해지면서,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그냥 저 술을 청한테 흑기사 하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대충 상관을 향한 충성심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살살 꼬드기면 어떻게든 될듯싶다. 그러면 나나 스와이어가 저 독극물을 마실 필요도 없고, 더불어 계속 은근슬쩍 우리를 엿먹인 저 용문 경찰에게 복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시 썩어도 준치라고, 로도스의 지도자다운 두뇌가 간만에 열심히 일했다. 남은 건 실행으로 옮길 뿐이다. 

“스와이어 잠시만...!”
“에잇!”

역시 현실은 계획대로 안 흘러간다. 말을 꺼내기 전에 스와이어는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그에 맞춰 그녀를 찬양하는 관중들의 환호 소리는, 뒤늦게 나온 내 목소리를 집어 삼켰다. 기껏 내세운 계획은 등장하기도 전에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다.

에라이 몰라. 될대로 되라지.



‘용기의 핵심 부분은 신중함이다.’ 

빅토리아의 유명한 작가가 남긴 격언이다. 무언가에 도전할 용기를 가지려면 그 행동을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고민해 볼 신중함을 가지라는 뜻이다. 그만큼 용기와 신중함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관계. 용기가 없는 신중함은 기우가 될 뿐이고, 신중함 없는 용기는 만용일 뿐이다. 

여러 사람에게 알려줘야 할 훌륭한 격언이지만, 일단 최우선으로 내 등 뒤에 업힌 여성에게 명심하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붸에에... 쥬글 거어어 가타....”

혀가 270도는 꼬였을 거 같은 신음이 들려왔다. 조금 전에 그 술잔을 원샷한 베아트릭스 아가씨가 내 목을 양팔로 감싼 채 머리를 푹 숙이며 내는 소리였다. 스르륵 흘러내린 금색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술 냄새가, 왜 그녀가 이런 상태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어쩌다 이리 됐는지...”

예상했던대로, 스와이어는 마시고 나서 얼마 안 가 뻗어버렸다. 쓰러질 뻔한 걸 어찌저찌 붙잡아서 근처의 소파에 앉혔는데, 갑자기 스와이어의 부하들이 내 앞에 나타나 그녀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누님을 맡길 수 있는 건 박사님뿐입니다!]
[저희는 술을... 아니, 파티를 지켜보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나갈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 부탁합니다!]

의견을 묻는 것도 없이, 만장일치로 스와이어를 나에게 던져놓고 용문 경찰들은 도망쳤다. 마치 진작에 계획해둔 것처럼, 행동과 언변이 자연스러워서 당시엔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 사람들, 상관을 너무 막 대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동업자라 해도 엄연히 외간 남자한테 함부로 맡기다니. 괜찮은 건가? 용문 경찰.

“이 자시이이드으으으... 내일 주길꺼야...”

정정. 군기는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용문 경찰들은 일단 내일 단체로 죽겠군. 특히 류 샤오청 그 양반. 잘못하면 해고당하지 않을까? 명복을 빌어주자. 나쁘진 않은 사람이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어디... 보자... 1808호... 여긴가?”

청이 말해준 스와이어의 방이 분명 여기였지. 입에 물고 있는 카드키를 잠금장치에 갖다 대니, 곧바로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성인 여성을 업고 있어서 손잡이를 잡을 힘이 없는 나에겐 감사할 따름이다. 곧바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니, 퀸사이즈로 추정되는 원형의 침대가 나를 반겼다.

“머리 아프아아... 어지러어...”

힘이 빠져가는 양팔에 남은 힘을 쥐어짜내서, 뒤에서 칭얼거리는 스와이어를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새빨갛게 물든 얼굴에 땀이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업고 힘들게 내려온 건 난데 왜 땀을 흘리는 건 이 사람인지 원.

“박스아아... 여페 이써...?” 
“있어요.”
“무 조... 목 마라...”

침대 앞에 있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문쪽 선반에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생수병 여러 개가 줄을 서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어, 스와이어에게 가져갔다.

“스와이어. 물 가져왔어요. 잠시 일어나 보세요.”
“시러어.. 무리...”

 이리저리 고개를 도리질하며, 이 필라인 아가씨는 어린아이 같이 칭얼거렸다. 평소라면 전혀 보여주지 않을 모습이 낯설어서, 무심코 귀엽다는 감상을 느끼게 만들었다.

“머겨져...”
“네?”
“이르켜져서.. 머겨...져...”
“어... 음?”

꼬인 발음 때문에 알아듣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일으켜서 먹여달라는 건가. 오늘따라 유독 손이 많이 가는 아가씨라는 생각이 들어 한숨이 나왔다.

한 손으로 조심히 스와이어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다른 한 손으로 흘리지 않게 물병을 조심스레 그녀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이윽고 물이 목으로 넘어가는 작으면서도 선명한 소리가 한동안 내 귀에 맴돌았다. 

“다시 눕힐게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아 천천히 손을 내려 스와이어의 머리를 베개에 다시 눕혔다. 조금 전보다는 안정된 거 같이, 얼굴빛이 서서히 원래 색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참... 보기도 뭣하네...”

만취한 채 침대 위에 드러누운 스와이어의 모습은 여러 가지 의미로 장관이었다. 컬이 풀린 금색 머리카락이 램프에 비쳐 빛나고 있었다. 덥다면서 살짝 풀어헤쳐진 와이셔츠 너머로, 흐릿한 브래지어의 윤곽이 보였다. 짧은 치마도 말아올라가서 그 너머로 선명히 보이는 하의까지. 여자 경험이 1도 없는 나에겐 상당한 수준의 자극이었다. 빨리 이불을 덮어줘야겠군.

새근새근. 5분 정도 됐을까. 스와이어에게서 안정된 콧소리가 들려왔다. 이쯤이면 되겠지 싶어 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계속 있다간 분명 이상한 기분이 들어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다.  

“박사...” 

누군가가 척추 양쪽을 손가락으로 꾹 누른 것처럼, 몸이 곧게 펴지며 뻣뻣해졌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봤지만, 내 시야에 비친 건 옆으로 몸을 돌린 채 곤히 자고 있는 스와이어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잠꼬대인듯 싶다. 

“박사... 바보... 멍청이...”

대체 무슨 꿈을 꾸길래 내 욕을 하는 것일까? 평소에 나한테 쌓인 게 많았던 거 같다. 어찌 되었든 꿈속을 만끽하고 있어 보이니, 외부인은 조용히 빠져줘야 인지상정. 내려온 김에 나도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자야겠다.

작은 소리로 잘 자라고 인사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벽에 있는 버튼을 누르니, 잠금장치가 풀리면서 서서히 복도의 불빛이 날 맞이해 왔다.

“좋아...한다고오...”

방에서 나오고, 문이 서서히 닫히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멈췄다. 정정한다. 시간이 멈추기를 간절히 빌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나... 박사... *용문 비속어* 좋아한다고... 이 둔탱이 *용문 성불구자*새끼야...”

숨을 쉬기가 힘들어질 정도로 가슴의 고동이 거칠어져서, 몇 걸음만 걸었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다. 날뛰고 있는 가슴을 움켜쥐면서 자동문 반대편에 있는 벽에 등을 기댔다. 몇 초 전에 스와이어가 잠결에 던진 말만이 내 머릿속을 휘저어버려서, 미약하게 있던 술기운이 허공 너머로 흩어졌다.

환청이 아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들었는데, 잘못 들을 리가 없잖은가.

“스와이어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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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이어 1부 끝. 2부 바로 시작...하고 싶은데, 글쓴이가 이제 중간고사 시간이 다가와서... 3~4주 정도 휴재하려 한다. 미안...


피드백이나 감상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