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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겠다...”

 

머리를 책상에 처박으며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분명 새벽까지 힘내서 해치운 줄 알았던 서류더미가 3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니 다시 내 시야를 가릴 정도로 가득 채워져 있다. 알고 보니 내가 서류 지옥의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행복 회로를 돌리면서 볼을 잡아당겨 보았지만, 잔혹하게도 내 눈앞에 보이는 건 엄연한 현실이었다.

 

“징징대지 말고 마저 하던 일이나 해, 박사!”

 

그런 내 볼멘소리에 질린다는 듯, 앞의 소파에서 서류들을 뒤적이고 있는 오늘의 비서담당이 호통을 쳤다. 얼핏 보기엔 성숙해 보이는 야무지고 날카로운 눈매와 길게 아래로 퍼진 붉은 머리카락과는 정반대인 앙증맞은 뿔과 아담한 몸집은 무심코 미소 짓게 만드는 귀여움이 느껴졌다. 살카즈 종족의 로도스 소속 뱅가드 오퍼레이터, 비그나였다.

 

“킹치만... 아침도 못 먹었는걸...”

“나도 아침 못 먹었어. 빨리 끝내야 점심이라도 먹지!”

“킹치만... 너무 졸린걸...”

“점심 먹고 잠시 자면 되잖아. 어차피 오후엔 스케줄이 비어있고. 빨리 끝내야 빨리 쉬지!”

“킹치만...”

“그 이상한 말투 그만 쓰면 안 돼?!”

“테에엥...”

 

수면 부족에 공복이라 그런지 정신이 더욱 오락가락하는 거 같다. 내가 뭔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냥 빨리 점심시간 알림이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니, 차라리 점심을 먹지 않고 잠을 자서 조금이라도 피로를 푸는 게 더 나으려나. 그냥 아무거든 상관없으니 좀 쉬었으면 좋겠다.

 

[점심시간입니다. 각 대원들은 하던 일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하십시오.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점심시간입니다. 각 대원들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기다리던 알림이 벽 가장자리에 있는 스피커에서 들려왔다. 

 

“비그나, 배고플텐데 일단 식사하고 와. 난 이거 마저 하고 먹으러 갈게.”

“뭐? 하지만 아직 일이...”

“쉬엄쉬엄 하자고. 제대로 안 먹고 과로하면 키 안 큰다?”

“윽! 지금 키 작다고 놀리는 거지!”

“그럴 리 없잖아. 난 그저 네가 걱정되서 말한 것 뿐인데?”

“나 내보내면 바로 소파에서 자려는 거지? 지금 내가 나갈 거 같아서 엄청 좋아하는 표정이거든?”

 

어떻게 알아차렸나 깜짝 놀랐다가 곧바로 이어진 그녀의 말에 무심코 하관을 손으로 가렸다. 확실히 입가가 올라가는 것이 손가락 너머로 느껴진다. 지도자라는 인간이 표정 관리 하나 못 하다니. 거참 한심하구먼.


그런 내 모습에 한심한 듯 한숨을 쉬며, 비그나는 ‘못 말린다니까’라는 한 마디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밥 먹고 올게. 서로 좀 쉬자.”

“그래. 잘 갔다 와.”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난 곧바로 코트를 벗고 소파로 몸을 던졌고, 이윽고  기분 좋은 푹신함이 내 전신을 어루만졌다. 하도 여기서 잠을 많이 자다 보니 침대보다 여기가 더 편하단 말이지. 


핸드폰에 알람도 맞춰 뒀고, 담요랑 베개도 준비 완료. 이제 안대를 쓰고 느긋하게 단잠에 빠지면 되...

 

“박사님? 계신가요?”

 

...지 않나 보다. 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서 화들짝 놀라 황급히 일어나더니, 팔이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소파에서 굴러 떨어졌다. 

 

“끄어어어어어어어어..........”

 

상 위에 있던 머그컵과 서류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둔탁한 굉음. 거기에 형용할 수 없는 전신의 고통은 덤이다. 모서리에 제대로 찧은 건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찌르는 것 같은 아픔, 그리고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인해 욱신거리는 등뼈와 함께, 눈앞에 별들이 요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괜찮으신가요?!”

 

다급한 듯 빠른 발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뜨는 감각과 함께 방 안에 들어온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손길이 목덜미와 가슴팍에서 느껴졌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자, 내 눈앞에 블루포이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부축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블루포이즌...?”

“네. 저랍니다. 시야엔 문제 없으신 거 같네요.”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소파에 맞닿고 있는 몸에서 격렬한 통증이 나를 덮쳐왔다.

 

“부축해서 고마워.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아, 그게...”

 

내 질문에 블루포이즌의 시선이 살며시 문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푸른 눈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내 시야에 보인 건, 스테인리스로 된 푸드 커버가 올려져 있는 철제 이동형 트레이였다. 

 

“저건...?”

“그... 좀 전에 아미야씨에게 들었는데, 박사님이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드셨다고 하셔서...”

 

블루포이즌은 쑥스러운 듯, 양손으로 짧게 묶여 있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조명에 반사되며 은은하게 반짝이는 것이 마치 비단결과도 같아 무심코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진짜 하다간 부하 성희롱으로 수갑 찰 수 있으니 자제해야지.

 

“간단하게 브런치로 드실 만한 걸 가지고 왔는데, 설마 주무시고 계셨을 줄이야... 죄송합니다.”

“아니, 미안할 거 없어. 막 누웠던 참이니까.”

 

별거 아닌데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사과를 하다니. 예의가 너무 바른 것도 탈이라고 해야 되나, 무심코 왜인지 모를 죄악감이 바늘로 찌르듯 내 몸을 쿡쿡 쑤셨다. 


거기에 저 상심한 건지 아니면 미안해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음영이 진 얼굴은, 마치 말뚝에 망치를 박듯이 죄악감이 세 배로 증폭시키는 것 같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전에 주제를 돌리자는 차원에서, 난 헛기침을 몇 번하면서 먼저 말을 걸었다.

 

“암튼간에, 이번엔 뭐야? 기대되는데?”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블루포이즌은 곧바로 트레이에 있는 푸드 커버를 조심히 들어서 내 앞에 있는 테이블에 살며시 올렸다. 접시와 맞닿아 있는 경계면이 넓어지면서 은은하게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하는 김과 함께, 뭔가 고소한 향기가 내 코를 자극했다. 이윽고 푸드커버가 접시에서 완전히 떨어지면서, 서서히 선명해지는 음식의 윤곽에 무심코, 꿀꺽하며, 혀에 얼마 없는 침을 삼켰다. 

 

완벽하게 원의 형태를 이룬 푸른색의 디저트 2개. 그 위로 열기에 흐물흐물 녹고 있는 사각 버터의 용액이 그 전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추가로 뿌려진 진한 갈색의 액체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내음은, 방금 전까지 정지되어 있던 위장이 갑자기 격동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하게 날 유혹하고 있었다. 색깔로 보아 꿀이나 아가베 시럽인가?

 

“팬케이크네?”

“네. 브런치로 제일 적합할 거 같아서...”

 

작은 감탄사를 내비치며, 블루포이즌이 건넨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들었다. 청색이라는 강렬함 때문에 잠시 놓치고 있었지만, 팬케이크의 옆으로 여러 음식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날 맞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시지 2개, 베이컨 4조각. 스크램블 에그 한 줌. 그리고 약간의 베이크드 빈. 그야말로 단백질의 향연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아니, 당연한 거긴 하지만, 이 녀석들은 파랑색이 아니다. 어째서지? 최후의 양심으로 색소를 넣는 걸 포기한 건가? 아니면 무슨 특수한 기준이라도? 워낙 어제의 그 모습이 너무 인상 깊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오만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팬케이크에 베이컨이랑 스크램블 에그 같은 것도 곁들여 먹는 거였어?”

“지금은 팬케이크가 주로 디저트로 쓰이지만, 컬럼비아나 림 빌리턴에서는 아직도 아침식사로 먹습니다. 서적을 보아하자니 옛 농민들의 주식으로 쓰였다고 하네요.”

 

그건 진짜 금시초문이네. 새로운 지식이 늘었군. 

 

“고마워. 잘 먹을게.”

 

이 진수성찬을 만들어준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며, 양손을 팬케이크로 옮겼다. 포크로 고정하고 나이프로 살며시 잘라서 그대로 한 입. 천천히 꼭꼭 씹으면서 풍미를 느꼈다. 마치 쿠션에 얼굴을 파묻는 것과도 같은 부드러운 맛이 내 입안을 오고 갔다. 그와 동시에 버터의 고소함과 시럽의 달콤함이 어울리면서 내 혀 위에서 미끄러지듯이 목 너머로 사라져갔다. 이윽고 느껴진 견과류 특유의 향. 아몬드나 헤이즐넛 시럽을 조합한 건가?

 

“커피는 블랙으로 괜찮으신지요?”

“아, 고마워.”

 

블루포이즌이 건넨 머그컵에 입김을 후후 불며,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혀에 남아있는 달짝지근한 잔재가 마치 청소라도 한 것처럼 커피에 섞이면서 깨끗이 씻겨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기름진 걸로 위장을 코팅해보자는 마음에, 포크로 소시지와 베이컨을 동시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크게 한 입. 파삭하고 입안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농후한 육즙과 바삭한 질감이 만나면서 격렬한 단백질의 카니발. 그야말로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맛이다. 곧바로 스크램블 에그도 한 입. 몽실몽실하고 담백한 풍미가 마치 잔잔한 클래식의 풍요로움과도 같이, 방금 전의 육류의 자극과는 전혀 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맛은 어떠신가요?”

“진짜 맛있어. 몇 그릇이고 먹어치울 수 있을 거 같아.”

 

조합을 바꿔서 이번엔 팬케이크랑 소시지를 한 입. 얼핏 보면 어색해 보이는 상성이라 생각했는데 그 선입견은 내 입에 들어오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렸다. 소시지의 육즙과 팬케이크랑 함께하는 시럽이 서서히 서로를 탐닉하면서 하나가 되며, 여태껏 생각해보지 못했던 자극적인 맛이 내 입안 전체를 감쌌다. 

 

잠시 소외되어 있던 베이크드 빈도 한 입. 카시미어에 갔을 때 먹어본 이후로 처음이다. 부드럽게 부서지면서 느껴지는, 스크램블 에그와는 사뭇 다른 담백함과 고소함의 하모니가 더더욱 날 즐겁게 만들어줬다.

 

“잘 먹었습니다.”

 

살짝 부풀어 오른 배를 살살 어루만지며, 남은 커피랑 함께 포만감으로 가득 찬 행복을 만끽했다. 마치 걸신이라도 들린 듯이, 10분도 되지 않아서 접시를 가득 채우던 모든 음식들은 내 위장 속으로 사라졌다. 평소라면 4분의 1 정도는 남길 양이었는데 이렇게 전부 먹어치우다니. 굶고 있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뭐니 해도 블루포이즌의 요리 실력이 대단하다는 증빙이겠지.

 

“어제도 그렇고 정말 고마워. 계속 신세 지고 있네.”

“저야말로 맛있게 드셔주셔서 감사한걸요.”

“그야 진짜 맛있으니까... 아, 정리는 내가 할게.”

 

양심적으로 정리만이라도 내가 해야 된다는 심리 때문인지, 비워진 접시로 향하는 블루포이즌의 손길을 보고 황급히 손을 뻗어, 접시를 들고 일어서서 트레이에 옮겼다.

 

“넌 들어가서 쉬어. 난 이거 식당에 옮겨두고 마저 일할게.”

 

내 말에 아무런 답변 없이 블루포이즌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디 다쳤나 싶어 가까이 가보았지만, 딱히 그녀의 얇은 손가락에 상처의 흔적은 보이지가 않았다.

 

“손이... 닿았...”

“손이 왜?”

“아...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그럼...”

 

내 질문에 화들짝 놀라더니 블루포이즌은 그대로 후드로 머리를 뒤집어쓴 채 황급히 방에서 달려나갔다. 손이 어쩌고저쩌고 했던 거 같은데 너무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가 않았다.

 

잠깐. 살짝 되짚어보니, 접시를 잡을 때 블루포이즌의 손이 스쳤던 거 같은 기억이... 설마 이것 때문에...? 


하긴, 나이 차이 수두룩한 아저씨한테 손이 잡혔으니, 그 나이대 애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려나... 나중에 사과하러 가든지 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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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에 올린다고 약속했는데 어겨서 정말 미안하다... 대4 기말고사를 너무 얕봤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