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링크


“좀 진정됐나요?”
“...응.”

10분쯤 지났을까.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 찼던 사무실은 정적을 되찾았다. 계속 바닥에 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소파로 돌아와,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켰다. 몸의 수분을 있는 대로 다 내보내서 탈진한 걸까. 스와이어는 냉장고에서 꺼내 준 생수병을 단숨에 비워 테이블에 놓은 채, 계속 내 오른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박사, 이거... 꿈 아니지?” 
“아니라고 믿고 싶네요.”

솔직히 내가 묻고 싶은 심정이다. 아까까지 내가 뭘 말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정도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미쳐버린다는데, 조금 전에 고백한 내가 그런 상태가 아니었을까?

시계의 분침이 한 칸 이동할 때쯤, 옆에서 스와이어가 내가 말을 걸어왔다.

“박사... 난 말이야.”
“네?” 
“난 말이야. 옛날부터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었어. 마음에 드는 건 어떻게든 내 손에 넣고 싶었지. 장난감이건. 보석이건. 근위국이건. 그리고, 용문이건.”

손등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스와이어의 손이 조심조심 달라붙더니, 이윽고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그녀의 따뜻한 손가락의 감촉이 내 심장을 더욱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그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 인재야. 내가 사랑하는 용문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

이것도 극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종종 스와이어가 다른 유능한 대원들에게 용문에서 일해볼 생각은 없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어보는 경우를 봐왔으니까.

“그리고 그건 박사, 너도 포함이었고.”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와중에, 스와이어는 조금 더 나에게 밀착해왔다. 비어있던 다른 손으로 내 가슴에 손을 얹고, 다리 한쪽을 내 무릎에 걸친 채, 내 몸을 끌어안는 듯한 모습으로 그녀는 할 말을 계속했다.

“예전에 리유니온이 용문에 들이닥쳤을 때. 기억하지?” 
“기억하죠. 사실상 우리가 처음 만난 때였으니까요.”

지금이야 추억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1초가 1시간이라 느껴질 정도로 숨이 턱 막히는 전장이었다. 비록 가드 오퍼레이터 블레이즈와 함께 상공에서 뒤늦게 들이닥쳤지만, 길거리에 즐비한 리유니온 병사와 용문 경찰의 시체, 부서진 건물 안에서의 용문 시민들의 살려달라는 비명은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우리와 뜻을 함께하지 못하고 내 앞에서 먼 길을 떠나버린 회색 머리의 ‘동료’까지도. 그 기억을 떠올리자니 무심코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거기서 난 널 보면서 현장 지휘관으로서의 유능함을 느꼈어. 분명 용문 근위국에 들어오면 지휘관으로서 훌륭한 인재가 될 거라고.”

그때 만난 지 얼마 안 됐었는데도, 날 그 정도로 고평가하다니. 베아트릭스 아가씨의 극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괜히 어깨가 들썩거린다. 

“그래서 로도스에 들어온 거야. 로도스가 용문에게 줄 이득도 조사해보고 싶었지만, 무엇보다도 박사를 더욱 알아보고 싶었거든.”

문득, 스와이어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용문 고위 총경, 스와이어야. 신인 훈련 고문으로 로도스에 착임했어. 박사, 용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분명히 ‘용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라고, 그때의 그녀는 말했다. 당시 가드 오퍼레이터 첸을 비롯한 용문 경찰 출신 오퍼레이터들도 스와이어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말한 게 있었다. ‘용문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베아트릭스 스와이어는 용문의 딸이야. 박사. 행동 하나하나가 용문을 향한 이득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지.]

이제와서야 이해가 된다. 부족할 것 없는 부잣집 아가씨가 왜 이 제약회사에 들어왔는지를. 그리고, 켈시가 그때 왜 그렇게 말했는지를. 그 초록머리 필라인은 처음부터 스와이어가 왜 로도스에 들어왔는지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내가 잘 해결할 거라 믿고, 묵인해주었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그걸 커버할 수 있는 대비책까지 세운 건가? 지금이야 어찌 되었든 좋을 일이지만, 의도를 알 수 없는 켈시 녀석의 서늘한 안광을 떠올리니 조금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로도스에 거주하게 되면서, 계속 대화를 나누며 널 알아갔어. 너의 인품을 알아갈수록. 너의 능력을 알아갈수록.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수록. 더욱 욕심이 났어. ‘반드시 이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이야.”

하반신에서 딱 좋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점차 가까워져 오던 스와이어는 어느새 내 허벅지 위에 앉은 채 나를 아래에서 내려보고 있었다. 

“너와 가까워지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했어. 같이 커피도 마시고, 식사도 하고, 업무도 분담하고. 분명 목적은 그랬었어. 그런데...”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저 너와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는 게,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는 게, 업무를 끝내고 서로에게 ‘고생했어’라고 말하는 게. 이 모든 게 전부, 이유 없이 기대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어. 목적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왼손으론 내 뺨을, 오른손으론 내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스와이어는 천천히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점차 가까워지며 살며시 느껴지는 향수의 잔향(殘香) 탓에, 내 이성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그러면서도, 계속 보고 싶어졌어. 커피를 마시면서 졸린 듯이 꾸벅거리는 네 모습을. 식사할 때 싱긋 웃고 있는 네 모습을. 업무를 할 때의 진지해진 네 옆모습을. 모두. 전부.”

30cm. 20cm. 이윽고 10cm. 조금만 움직이면 입술이 맞닿을 거리에서 스와이어는 나를 응시했다. 어두운 조명에서도 반짝이는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 너머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 홍채 너머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매력에,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 독점하고 싶어졌어. 그 짜증 나는 첸도. 다른 여자들도 전부 제치고, 나만이 네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를 않았어.”
“...”
“대체 왜 이럴까, 하고 계속 고민했어. 그리고 알아차렸지.”

툭, 하고 서로의 이마가 맞닿았다. 마치 내 얼굴을 보면서 말하기 부끄러운 것처럼. 혹은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는 건지 두려운 것처럼. 스와이어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널 향한 감정이, 진작에 인재를 향한 소유욕 ‘따위’를 넘어섰다는 걸.”
“스와이어...”

등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난 묵묵히 스와이어가 하는 말을 듣는 걸 계속했다. 

“하지만... 난 이런 거 태어나서 처음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적도 없었고...”
“...설마 지금까지 계속 밥 먹자고 하고 산책하자고 한 게...”
“나... 나도 한심해 보이는 건, 잘 안다구... 그치만,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이었는걸...”

젠장. 귀엽다. 그리고 안쓰럽다. 내 마음속에 두 가지 감상이 교차했다. 연애 경험이 전무한 내가 말하기에도 뭣하지만, 이런 서투른 호감 표현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어떻게든 내 마음을 사려고 모르는 곳에서 고민하고 있을 그녀를 상상하니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거기에 고백한 직후에 바로 이런 고해성사까지. 솔직하지 못하면서도 너무 솔직한 그녀의 아이러니함이 위로 치솟으려는 걸 애써 참는 내 입가의 브레이크를 풀어버렸다.

난 그대로 사랑스러운 그녀의 얇은 허리를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건지 스와이어는 신음과 함께 등에 힘을 잔뜩 주었다. 그러다가 적응됐는지 천천히 긴장을 풀면서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서투른 건 피차일반이었으니까요. 그냥 비긴 거로 하죠.”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에 고백해버릴 걸 그랬어. 이 몇 달 동안 고민한 게 바보 같아.”

남아 있던 일말의 근심마저 털어버린 걸까. 스와이어는 다시 얼굴을 들어, 내 얼굴을 응시했다. 근심이라는 이름의 먼지를 털어낸 한 쌍의 에메랄드는, 어두운 조명에서도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민할 때도, 기쁠 때도, 슬퍼할 때도. 둘이서 같이 나누죠. 그 몇 달 동안 고민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행복하게 해줄게요.”
“뭐야 그 대사... 쓸데없이 멋져가지고... 연애 처음인 거 맞아?”

글쎄요, 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사실 서포터 오퍼레이터 이스티나에게 빌린 로맨스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이 하는 대사를 대충 버무려서 말한 거지만, 괜히 말해서 산통을 깰 필요는 없겠지. 모르는 게 약이라는 단국의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솔직하지 못하고, 욕심 많고, 여러모로 귀찮은 여자지만... 잘 부탁해. 박사.”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스와이어.”

10cm. 5cm. 이윽고 0cm. 며칠 전엔 결코 닿을 수 없던 그 거리까지, 우리는 가까워져 갔다.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스와이어의 무게. 가슴에 맞닿고 있는 스와이어의 심장 소리. 교차하는 얼굴 사이로 느껴지는 스와이어의 부드러운 분홍빛 감촉.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첫 추억을, 서로에게 새겼다.

장황하고 서투른 로맨스의 프롤로그가, 마침내 끝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





해 넘어가기 이틀 전이다. 어찌저찌 스와이어편도 마지막에 다다랐다. 다음화가 에필로그일 예정.


마지막까지 읽어주는 명붕이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내일 에필로그로 보자.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