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링크


창문 밖 멀리에 있는 숲에서 매미들의 합창이 들려왔다. 마치 내 심장박동에 템포를 맞추는 것처럼 기가 막히게 소리를 내는 게 짜증을 돋워서, 당장이라도 파리채를 들고 달려가서 족치고 싶은 심정이다.

 

로도스의 모든 부유선은 현재 용문 근처에 있는 초원에 착륙해서 대대적인 오버홀(overhaul)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선령이 20년이 넘어가는 일부 부유선의 경우는 용문 쪽 기기 산업의 제휴를 통해 아예 뜯어고친다고 했으니, 아마 꽤 오랫동안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까지 합해 정박 일주일째. 날짜는 어느새 7월 말을 맞이하기 직전이었다. 오후 2시쯤에 기관실 정비가 끝났다는 보고를 들었고 내일부턴 갑판 수리에 들어간다고 하니, 선체 표면까지 수리하는 걸 기다리려면 아직 한참 남은 거 같다.

 

7월답게 현재 저녁 기준으로 기온 28도. 거기에 습도도 72퍼센트. 후덥지근한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이런 날씨에 장기간 노출되어 있으면 높은 확률로 더위 먹게 되겠지.

 

다행히도 그런 방면에 있어서 로도스는 안전하다고 확언할 수 있다. 순오리지늄을 정제해서 만든 고효율의 엔진 연료를 통해 만들어낸 냉방 시설이 모든 방에 설치되어 작동하고 있으니까. 덕분에 대원들 전부 이 열대야에 아랑곳 않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느끼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더워어어어어어.........”

 

단, 그 중에 나만 빼고 말이다. 

 

“살려즈어어어어어..........”

 

도대체 전력실 담당이 무슨 사고를 친 건지, 다른 방은 괜찮은데 내 방만 전력 공급이 뚝 끊겼다. 당시 당직표 명단이랑 정전이 된 시점을 종합해서 생각해보자면, 아마도 캐스터 오퍼레이터 이프리트가 또 뭔가 욱해서 발화하다가 회로를 잘못 건드렸을 확률이 높다. 아니, 내가 없을 때 사일런스가 테이블 위에 웬 선물을 주고 간 걸 보면 확실하다. 이프리트 이 녀석... 나중에 쪽지시험 10개로 혼내주마. 

 

안 되겠다. 점점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옷이 축축해지는 게 상태가 영 좋지 못하다. 빨리 다른 방에 피신을 가든지 해야겠어. 다만 샤워는 하고 가야겠지. 아무래도 이런 끈적끈적한 상태로 가는 건 민폐니까.

 

서랍에 있는 반팔 후드티와 수면용 반바지, 그리고 속옷과 수건을 종이 가방에 넣고 방을 빠져나왔다. 문이 열리면서 복도의 에어컨 바람이 땀투성이인 내 온몸을 핥는 것 같아서, 안 그래도 높은 불쾌지수를 더욱 상승시켰다. 

 

“켈시 녀석... 왜 화장실은 있으면서 욕실은 따로 안 만들어 둔 거야.”

 

전부터 생각해 온 거지만, 내 방은 뭔가 하나씩 나사가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화장실은 있으면서 욕실은 없고, 에어컨은 있으면서 히터는 없고, 커피포트는 있으면서 정수기가 없고... 그것 때문에 씻을 때마다 아래층에 있는 정전 사태일 때를 위한 비상 공용 샤워실을 사용해야 하지를 않나, 겨울이 되거나 한랭 지역을 갈 때는 침낭이랑 버너를 준비해놔야 하지를 않나, 물은 계속 상점에 가서 생수병 세트를 사 와야 하지를 않나. 그 외에도 불편한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무리 내가 들어오기 직전에 급조한 거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싶다. 켈시한테 시설 좀 개선해달라고 해도 돌아오는 건 예산 아끼게 참으라는 핀잔뿐. 그 녹색 수전노 악마의 끝내주는 알뜰함에 화가 날 거 같았다. 그렇다고 화낸다고 상황이 딱히 변하는 게 없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말할수록 짜증난다. 빨리 샤워와 함께 이 기분도 씻어내야지.

 

@

 

샤워를 다 끝내고 땀으로 끈적해진 옷을 종이 가방에 집어넣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싼 채 고용 샤워실의 문을 열었다. 아까와는 달리 에어컨 바람이 온수 샤워로 데워진 몸을 식혀주며 기분 좋은 쾌적함을 선물했다.

 

“음... 그나저나 어딜 가지?”

 

피서를 위해 누구 방을 들를지가 문제다. 시간이 아직 저녁 8시니 아마도 잘 사람은 없겠다마는, 역시 늦은 시간에 들르는 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음... 생각해보니 예전에 예비 작전팀 아이들이 같이 보드게임하자고 말한 거 같긴 한데, 한 번 보러 가볼까? 

 

“한가하면 식당이나 가보는 게 어때?”

 

식당이라, 확실히... 에어컨도 있고 누구에게도 민폐를 안 끼치니 쉬러 가기에 좋은 장소... 음?

 

“이 목소리는... 에단이야?”

“정답~”

 

장난기가 느껴지는 얇은 톤의 목소리가 벽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아삭, 하고 과일이 씹히는 소리와 함께, 허공이 일렁이면서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곳에 사브라인 남성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회색 피부인 덕에 더 눈에 띄는 하늘색의 머리와 꼬리, 이마를 감싸는 커다란 고글. 전 리유니온 유령부대 소속이자 현 로도스 스페셜리스트 오퍼레이터, 에단이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그냥 식당에서 간식으로 과일 몇 개 집어오다가 만난 거야. 딱히 미행하진 않았다고?”

 

대상 물질을 수동 식별하여 색소 시뮬레이션을 통한 은신 능력. 에단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한 아츠 능력이다. 로도스엔 로프나 헤이즈같이 잠입과 은신에 특화된 오퍼레이터들이 꽤 있는 편이지만, 그 누구도 에단만큼 완벽하게 기척을 감추지는 못한다.

 

“평소엔 은신 좀 풀면 안 돼? 깜짝 놀랐잖아.”

“미안~ 버릇이 되다 보니 고치기가 힘들더라고.”

 

정말 미안하기나 한 건지 의심스럽게, 에단은 킥킥 웃으면서 아까부터 들고 있던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먹음직스럽게 먹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왜인지 모르게 더위로 인해 가출했던 식욕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식당에 가보라고 했지? 뭔 일 있어?”

“엉. 더위 먹은 박사를 위한 깜짝 선물이 준비되어 있을걸?”

 

웬 깜짝 선물? 딱히 짐작이 가는 게 없어서 이리저리 고개를 갸우뚱거려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에단은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박사의 담당 파티시에가 지금 주방에서 열~심히 디저트를 만들고 있거든.”

“파티시에...? 혹시... 블루포이즌 말하는 거야?”

“그 녀석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이라고 무심코 대답할 뻔했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블루포이즌의 디저트를 먹어온 지 꽤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겠지. 얼추 2주 정도 됐으려나.

 

"그 녀석의 디저트, 맛있더라? 거의 매일 너한테 가져가길래 어떤 맛인가 해서 먹어봤는데. 색깔만 빼면 진짜 일류의 솜씨였어."

"확실히 맛있긴 하...음?"

 

방금 뭘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잠시 귀를 손가락으로 후벼팠다. 맛있다고? 먹어봤다고...? 

 

"에단, 방금 블루포이즌의 디저트를 먹었다고 했어?"

"응...? 아, 오해는 말아줘. 확실히 허락받고 먹은 거니까."

"아니, 그거 때문이 아니라... 무섭지 않았어? 먹으려 할 때 말이야."

 

잠시 잊었었지만, 블루포이즌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여전히 그렇게 호전되지 않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내 나름대로 다른 오퍼레이터들에게 그녀의 디저트 맛이 훌륭하다는 등 입김을 불어넣어 봤지만, 그 시도는 블루포이즌 주변으로 여전히 다가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그다지 효용이 없어 보이는 걸 증명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그녀의 디저트를 먹어봤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니. 들은 걸 의심할 수밖에 없잖은가? 

 

에단은 그런 나의 질문에 의아한 듯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곧바로 알아차렸다는 것처럼 씨익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녀석의 독 때문에 묻는 거지? 확실히 처음엔 주변 소문 때문에 먹을까 말까 고민했지." 

 

다시 한번 아삭, 하며 상큼한 소리가 복도를 감쌌다. 어느새 중간의 씨앗 부분만을 남기고 사과의 탐스러운 과육은 전부 에단의 목 너머로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애초에 독을 넣을 생각이었다면 로도스에 있는 누군가가, 혹은 전부가 진작에 독살되었을 거 아냐? 지금까지 그런 일도 없었고, 아마 그 녀석 성격이라면 이 이후에도 영원히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게 되니까 저절로 무슨 맛일지 호기심이 생기더라고. 색깔만은 여전히 탐탁지 않지만."

 

휙, 하며 에단이 던진 사과의 잔해가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의 안에 쏙 들어갔다. 훌륭한 롱슛에 나름 만족한 건지, 그는 휘파람을 한 번 불면서 다른 사과 하나를 품에서 꺼냈다.

 

"진짜 맛있더라. 여태껏 리퀘스트를 안 넣은 게 후회될 정도더라고. 그래서 아까 사과를 가져오는 김에 다음번에 그... 자허, 뭐시기였던가? 암튼 그걸 추가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지! 이야, 벌써부터 기대되는걸~"

"그... 혹시, 다른 대원들 중에 블루포이즌이 만든 음식을 먹은 적 있어?"

"응? 아마 아직은 몇 명 없을걸? 기껏해야 주방의 금발 우르수스 꼬마 아가씨 정도 아닐까? 어제 저녁쯤에 아누라 아가씨가 만든 요리를 먹는 걸 봤거든. 아. 이번에 새로 들어온 글라우쿠스?인가 하는 녀석도 먹는 걸 본 거 같다. 꽤나 맛있게 먹던데?"

 

에단에 굼, 그리고 글라우쿠스라. 벌써 3명이나 되는군. 나 이외에도 그녀의 요리를 먹어주는 사람이 드디어 생겼다니. 꽤나 좋은 상태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에단이나 굼이면 로도스 내에서 인망이 두터운 편이니, 입소문이 금방 퍼지면서 블루포이즌에 대한 거짓된 소문도 사그라들게 되면서 점점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사람들도 늘어나겠지. 

 

나와 관련된 일은 아니긴 하지만, 희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 소식에 대한 축하도 할 겸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러 가볼까.

 

"고맙다 에단. 가볼게!"

"뭐가 고마운진 모르겠지만, 잘 갔다 와~"

 

손짓 한 번과 함께 난 몸을 돌려 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걸어가니, 뒤에서 에단이 깜빡했다는 듯 큰 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 박사!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블루포이즌 녀석이 디저트를 만들고 있다고 내가 알려줬다고 하지 마? 그러다가는 그녀에게 독살당할 게 뻔하거든.”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

 

식당 안으로 들어오자, 방금 전까지 선선하게 불어오던 에어컨 바람의 세기가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저녁시간이 7시에 끝나니, 대략 1시간 정도 냉방시설이 꺼져서 실내 온도가 상승한 거겠지. 

 

"바, 박사님...?"

 

찾을 필요도 없이, 내 눈앞에 바로 블루포이즌의 모습이 보였다. 한쪽 어깨에 소형 보온 박스가 들려 있는 걸 보아하니 요리를 끝내서 내 방으로 오려 했었나 보다. 

 

"여기엔 어쩐 일로..."

"그냥 어쩌다 들렀어. 디저트 만들고 있었나 보네?"

"아, 네... 방금 다 만들어서 박사님께 드리려고..."

 

이 더운 날씨는 그녀도 어쩔 수 없었는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푸른색 후드가 아닌, 하늘하늘한 하늘색 민소매 상의에 남색 돌핀 팬츠를 입고 있었다. 평소에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던지라 살갗의 면적이 평소보다 2배 정도는 늘어난 거 같았다. 

 

"그... 죄송합니다. 복장이 상스러워서... 보통 이 시간에 아무도 오지 않는 데다가 주방 안이 덥다 보니..."

 

자신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의 노출도가 높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건지, 몸을 배배 꼬면서 블루포이즌은 남은 한 손으로 상반신을 가리려 애쓰기 시작했다. 평소랑은 달리 기어들어가는 거 같은 작은 목소리로 횡설수설 하는 게, 왜인지 모르게 귀엽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거기에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만들어지는 민소매 옷 너머로 보이는, 작지만 확연히 보이는 살결의 계곡이랑, 목에서 쇄골로 스르륵 흐르고 있는 땀 몇 방울이 묘하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색기를 자아내서...

 

"매우 좋다고 생각해."

"네?"

"어... 아무것도 아니야. 잠시 말이 헛나왔어."

 

미친. 큰일 날 뻔했다. 더위를 먹다보니 드디어 미쳐버렸구나. 간신히 혀에 브레이크를 걸어서 망정이지. 하마타면 부하 직원 성희롱죄로 수갑찰 뻔했다. 상황이 이상해지기 전에 화제를 돌리는 게 좋겠군. 

 

"아, 암튼! 이번엔 무슨 디저트야? 기대되는걸? 우선 식탁으로 가자."

"저, 저기...!"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블루포이즌은 살며시 내 옷을 잡아당겼다. 말하는 것을 망설이듯, 시선을 이리저리 다른 쪽으로 피하며, 그녀는 짧게 묶은 자신의 분홍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가만히 말하는 것을 기다린 지 5초쯤 되었을까. 블루포이즌은 결심했다는 듯 잠시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더니, 망설인 것으로 추정되는 말을 내뱉었다. 대체 무슨 말이길래 저렇게 고민을...

 

"혹시 괜찮으시다면... 디저트를 제 방에서 드셔주실 수 있을까요...?"

 

...뭐요?


-----



스와이어편에 열중하다 보니 청독이 편을 올리는 걸 깜빡했다... 미안하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