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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천장의 에어컨 바람이 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얼추 이렇게 가만히 5분 동안 에어컨 아래에 서 있다 보니 슬슬 살결이 오들오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박사님."

 

추위를 타기 시작한 상황에 타이밍 좋게, 옆에 있는 문이 열리면서, 평소처럼 파란 후드를 뒤집어쓴 채 블루포이즌이 모습을 보였다. 간단하게 샤워라도 한 것인지 옅은 과일향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들어와도 괜찮다는 말을 듣자마자 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블루포이즌의 방 안에 들어왔다. 평소의 제과나 패션 코디네이트가 취미라는 걸 고하는 듯, 관련 서적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서재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 다음으로 보이는 건 깔끔하게 정돈된 싱크대와 옆에 걸려 있는 푸른색 앞치마.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방금 전의 보온 박스가 올려진, 사이즈가 꽤나 작은 테이블과 의자 2대. 다만 의자 한 쪽만은 유독 깔끔한 새것인 것이 그녀의 일상을 어렴풋이 알려주는 거 같아서,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감상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보게 된, 침대 옆 책상 위에 나열된 푸른 액체가 들어간 정체불명의 실린더들. 아마도 켈시에게 제출해야 할 신조 독극물 샘플이겠지. 새로운 독극물을 매번 아무렇지도 않게 뽑아낼 수 있는 능력. 다시 생각해보면 이 아이가 로도스의 편이라는 게 천운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리유니온이었다면... 상상하기도 싫어지는군.

 

"진짜 들어가도 되는거야?"

"그럼요."

 

마지못해 따라 들어가긴 했다마는... 엄연히 나랑 블루포이즌은 상사와 부하의 관계다. 그것도 꽤나 큰 나이차가 있는 데다가,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는 소문이라는 악성 요소까지. 내가 들어간 게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기라도 한다면 분명 이야기가 이상하게 퍼질 것이 분명하다. 나야 언제나 각종 루머에 시달리고 있으니 괜찮다 쳐도, 블루포이즌에겐 치명적인 악영향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다.

 

물론 저 이유도 한몫하지만, 무엇보다 날 머뭇거리게 만드는 건 방금 전 주방에서 블루포이즌이 대뜸 날린 한 마디였다. 자기 방에서 디저트를 먹어달라니. 처음 들었을 땐 태초의 우주 속의 빅뱅을 경험한 것 같은 아찔한 유체이탈을 경험했다. 얼마 전에 대원이 추천해준 드라마에서 본 '라면 먹고 갈래?'라는 대사가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은 덤이었다.

 

물론 뒤이어서 그녀가 복장상태며 식당 온도며 불편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는 하지만... 역시 단어 선택을 잘 하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순간 두근거렸단 말이지... 그것도 나이차이 수두룩한 여자애한테.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진지하게 심리 상담 스케줄을 잡아야 하나 고민해야겠군.

 

"박사님? 안색이 안 좋아보이신데... 괜찮으신가요?"

"별 거 아냐. 그냥... 굳이 식당에서 먹는 게 왜일까 생각하고 있었어. 식당 온도가 문제인건가 싶어서."

 

생각나는 대로 횡설수설 말하는 내 모습에 이 분홍머리 소녀는 싱긋 웃으면서 내 질문에 대답했다. 

 

"네. 식당에서 그대로 먹다가는 녹아버리니까요."

"녹아? 이번 디저트는 아이스크림인가 보네?"

"비슷하지만, 아쉽게도 살짝 다르답니다."

 

식탁으로 다가간 블루포이즌은 곧바로 보온 박스의 지퍼를 열었다. 거기서 순서대로 나오는 소스가 들어간 튜브형 플라스틱 용기 몇 개랑 과일이 들어간 걸로 추정되는 직육면체형 스테인리스 용기 몇 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음...?"

 

꽤나 큰 사이즈의 얼음팩 2개. 처음엔 용기들의 온도를 조절하기 위해 가져온 건가 싶지만, 큰 글씨로 식용이라 써져 있는 걸로 보아 그건 아닌 거 같다. 그럼 뭐지? 더우니 얼음을 씹어먹으라는 건 아닐 텐데... 혹시 예전에 먹은 과일 화채 같은 건가? 얼마 전에 용문의 세 경찰 아가씨들이 사주신 게 떠오르네. 그거 참 맛있었는데.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만들어드릴게요.”

 

의자에 앉아 화채의 새콤달콤한 맛을 한창 떠올리고 있는 와중에, 블루포이즌은 싱크대 위의 선반에서 뭔가를 꺼내와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윗부분이 깜찍한 개구리 캐릭터의 머리로 되어 있는 직경 30cm는 되는 거 같은, 아랫부분이 텅 빈 꽤나 큼지막한 정체불명의 원통. 이게 뭔가 싶어 이리저리 갸우뚱거리는 내 모습이 재밌는지, 그녀는 그 작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려 쿡쿡 웃더니, 비닐장갑을 낀 다른 손으로 봉투 안의 얼음을 꺼내기 시작했다.

 

원통 위의 개구리 머리가 뒤로 90도 젖혀졌다. 그 안으로 파여있는 홈 안에 얼음 한 움큼이 들어가진 직후로, 먹이를 삼키는 듯 살포시 닫혔다. 저거 뚜껑이었구나...

 

“얼음으로 만드는 디저트인가 보네?”

“네.”

 

블루포이즌은 원통의 아래쪽에 있는 빈 부분에 플라스틱 그릇을 놓더니, 개구리 모양 뚜껑 위에 달려 있는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으드득. 으드득, 내부의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 그릇 위로 소복소복 눈꽃송이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어떤 디저트인지 짐작이 간다. 뭔가 했더니 빙수였구나. 동쪽 지방에서 여름 때 자주 먹는, 개인 취향에 따라 과일이나 팥, 혹은 시럽을 얹는 디저트. 예전에 디펜더 오퍼레이터 니엔이 만든 특제 하바네로 맛 빙수에 당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덕분에 며칠간 위경련이 와서 죽만 먹었었지. 안 좋았던 기억도 돌이켜보면 추억이라는 게 이런 건가.

 

잠시 옛날 일을 회상하고 있자, 얼마 안 가서 그릇 위엔 작은 눈의 언덕이 만들어졌다. 꽤나 이쁘게 쌓인 것에 만족한 듯, 블루포이즌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스테인리스 용기의 뚜껑을 차례차례 열었다. 딸기에 블루베리, 껍질을 벗긴 잘게 자른 오렌지 등등. 형형색색의 과일들이 형광등 빛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블루포이즌은 핀셋을 들어서 과일들을 하나하나 집어서 빙수 주변에 살며시 얹기 시작했다. 세심하면서도 재빠른 그 움직임은 마치 지휘자의 손짓과도 같이 우아해서, 무심코 감탄을 내뱉게 만들 것만 같았다. 

 

"다 만들었습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새하얀 눈더미는 어여쁜 과일 드레스에서 끝나지 않고, 튜브형 플라스틱 용기에서 나온 초콜릿 시럽이랑 연유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숟가락을 들이대기 망설일 만큼 정교하게. 원래부터 블루포이즌의 요리 실력이 굉장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찌된 게 시간이 갈수록 퀄리티가 점점 상승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 잘 먹을게."

 

티스푼을 건네받았다마는, 내 눈앞에 있는 빙수를 빙자한 예술품에 선뜻 손을 대기가 힘들었다. 과연 이 소녀가 공을 들여 만든 것을 내가 부숴도 될까 하는 묘한 죄책감이 잠시 날 괴롭혔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두면 녹아버리는 것도 안 되는 법. 과감하게 한 숟가락 퍼서 그대로 내 입에 집어넣었다. 이윽고 느껴지는 과육의 상큼한 식감과 시럽의 아찔한 당도, 그리고 빙수의 차가운 입맞춤. 세 가지 맛의 행진곡이 내 혀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열대야의 고통을 순식간에 잊어버릴 거 같은 청량감에 감사할 따름이다.

 

다만 역시 뭐랄까... 과일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보니, 잘못하면 토핑이 우수수 떨어져나갈 거 같아서, 함부로 숟가락을 대기가 두려워진다. 거기에 갈린 얼음들이 다시 들러붙기라도 한 건지, 점점 숟가락을 집어넣기가 힘들어진다.

 

"앗."

 

말 끝나기가 무섭게 딸기 하나가 빙수에서 이탈해 테이블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것에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블루포이즌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앞발과도 같이 팔을 휘둘러, 딸기가 바닥에 닿기 전에 휙 낚아챘다. 전투 경험 없는 가련한 소녀일지라도 역시 오퍼레이터는 오퍼레이터라는 건가. 저 가공할 반응 속도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음? 딸기가..."

 

단언컨대, 결코 잘못 보지 않았다. 착시나 환각 같은 게 결코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벌어진 현상에 놀라서, 무심코 숟가락을 떨굴 뻔했다. 

 

비록 1초도 안 되는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블루포이즌이 쥔 손 너머로 낚아챈 딸기의 색이 서서히 변해가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마치, 겁에 질린 사람의 얼굴과도 같이, 탐스러웠던 붉은색은 온데간데없이 서서히 푸르뎅뎅하게. 

 

마치, 내가 지금까지 먹어온 디저트들의 색들과도 비슷하게.

 

그런 나의 반응에 흠칫하며, 방금 전까지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굳어버린 표정과 함께 블루포이즌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처럼, 어느새 그녀의 눈가엔 자그마한 이슬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결국... 들켜버렸네요.”

 

그것과는 상반되게, 소녀의 입가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다만, 어지간한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어떤 사람이더라도 저 표정이 결코 기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죄송해요, 박사님. 끝까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누구보다도, 당신에게만은...”

 

마주볼 수 없는 것처럼, 혹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머리를 푹 숙인 채, 블루포이즌은 아무 말 없이 바닥을 내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어디 아파?”

 

부들부들 떨리는 저 작은 어깨를 보고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는가. 난 곧바로 숟가락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의자에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블루포이즌의 앞에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어 서로의 눈이 마주치도록 높이를 조절했다. 이윽고 내 눈앞엔, 돌멩이가 던져진 수면과도 같이 일렁이고 있는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비쳤다. 

 

“싫어하시지... 않는 건가요?”

“내가 왜?”

“계속... 숨겨왔으니까요. 거짓말을, 해버렸으니까...”

“뭘? 방금 딸기가 파랑색이 되는 거?”

 

그런 내 행동이 이상하기라도 한 건지, 나쁘게 말하자면 얼빠졌다고 해야 될까... 아무튼 블루포이즌은 미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지 몰라 잠시 머리를 긁적였지만, 일단 할 말은 해야겠지.

 

“그게 왜? 무슨 위험한 거라도 되는 거야?”

“그건 아닌데...”

“그럼 됐잖아? 난 그저 색깔이 변하는 것에 놀랐고 그게 궁금한 것일 뿐이야.”

 

과일의 색이 손이 닿자 푸른색으로 변하는 현상. 전염병으로 인해 검게 변하는 건 봤다마는 이런 색깔로 변하는 건 적어도 체르노보그에서 깨어난 이래로 들어본 적이 없는 현상이다. 거기에 블루포이즌이 보여주고 있는 반응까지. 의아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알려줄 수 있을까? 부탁할게.”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일 수도 있으니 마음 같아선 모른 척해주고 싶지만, 로도스의 총사령관인 입장으로서 불확정 요소는 확실히 검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물론 나중엔 프라이버시를 침해한 것에 대해서 정중히 사과해야 되겠지만.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듯이, 블루포이즌은 시선을 피한 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락의 의사를 표했다.

 

“일단...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으니, 다 드신 대로 시작하지요. 저도... 잠시 마음속으로 정리를 해야 되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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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잘 보냈냐. 난 밀린 게임들 하고 운동도 해서 지금 근육통이 오지게 오고 있다. 


도솔레스 이벤트가 코앞인데 난 보유 합성옥이 20연치밖에 없어서 거를련다. 젖틀 눈나 존버해야 됨.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