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링크


빙수를 다 먹고 간단하게 정리를 끝냈다. 우리 둘은 침대 위에 앉아서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손에 들고 있는 차가 들어있는 머그컵을 입에 대기만을 반복했다. 정확히는, 블루포이즌이 말하는 걸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겠지.

 

“어렸을 때의 일이었어요.”

 

대략 5분쯤 되었을까, 머릿속의 정리가 끝났는지 블루포이즌은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경위가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학교 화단에 있는 꽃을 제 손으로 만지자마자 푸른색으로 변하는 걸 발견하게 되었죠.”

 

블루포이즌은 양손으로 들고 있는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하는 것을 계속했다. 마음이 그럭저럭 정리됐는지, 어조가 평소랑 비슷하게 담담했다.

 

“그리고 곧바로 시들어버리면서 흐물흐물 녹아버렸지만요.”

“아츠가 발현된 거구나.”

 

아누라족 중의 일부는 체내에 비상용 독낭(毒囊)을 가지고 위기 시에 체외로 발산하는 특징이 있다. 블루포이즌 역시 마찬가지, 그녀의 목을 감싸고 있는 푸른 반점이 그 독낭의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이다. 


다만, 이런 동족 특성이랑 확연하게 차이점을 두는 것이 바로 그녀의 아츠, 바로 화학성분을 조작해서 여러 형질의 독극물과 그 해독제를 만들어내며, 그 동시에 주변 환경에 상관없이 체외로 독극물을 분비하는 능력이다. 쉽게 말해서 동족 특성에서 다양성과 자율성이 추가된 돌연변이라 할 수 있겠지.

 

“그때의 전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걸 자랑스럽게 친구들에게 보여줬죠. 어린아이에겐 그 능력이 그저 멋있었을 뿐이었으니까요.”

 

어째 뭔가 예상이 가는 결말이 나올 거 같은데...

 

“하지만, 돌아오는 건 이 능력에 대한 공포감과 적대심. 그리고 괴물이라는 언사뿐이었습니다. 색소가 바뀐 것도 모자라 단숨에 대상체가 녹아버렸으니까요. 심지어 그 당시의 전 이 능력을 제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요.” 

 

역시나는 역시나인가. 확실히 모르는 사람이 보면 꺼림칙할지도 모르겠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것일 테니까. 

 

“검사 결과, 독을 체외로 발사하는 것은 제가 직접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명됐습니다. 하지만...”

“색소를 푸르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하진 못했다, 라는 거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블루포이즌은 머그컵을 살며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몇 번이고 해명했습니다. 몇 번이고 다가가려 했습니다. 몇 번이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 색소를 바꾸는 능력은 무조건적으로 발현돼서, 제게 다가오려 했던 사람들을 여러 번 다시 뒷걸음질치게 만들었습니다. 어느새 전 그대로 혼자가 되버렸고, 몇 년 동안 계속 그래왔었죠.” 

“그런 일이...”

 

제어가 안 되는 종류의 능력이라... 얼추 스카이파이어랑 비슷한 경우인 건가? 다만 색상이 바뀐다는 걸 보면 오히려 비교 대상은 에단이겠군. 에단은 수동 식별을 통한 색상 시뮬레이션으로 오브젝트를 자유자재로 보호색을 씌우는 게 가능하지만, 블루포이즌은 거꾸로 자동으로, 그리고 반강제적으로 푸른색이 되게 만드는 거니까. 

 

“이 현상을 어떻게든 고치고 싶어서,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녔답니다. 그러다가 로도스의 존재를 알게 되고, 자연스레 입사하게 되어 켈시 선생님의 연구를 돕게 되었죠.”

 

대원 정보 기록에 나온 그 문맥인가 보군. 분명, 매일 켈시가 독극물 샘플을 직접 받아 간다고 했었지. 실제로 블루포이즌의 도움으로 만든 해독제 덕에 여러 번의 생화학전에서 무사히 승리를 거머쥘 수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켈시 입장에서도 그녀만한 인재는 없기에 그 정도로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거겠지.

 

“그렇게 제 몸을 검사 받으면서 확인된 건,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물체를 푸르게 바꾸는 능력은 한정된 대상에게만 적용된다는 거였지요.”

“한정된 대상...?”

 

블루포이즌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하는 것을 계속했다. 쓰라렸던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탓인지, 언제나 평온해 보였던 그녀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져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수백 개가량의 샘플을 통해 검증된 결과, 색소가 변질되는 건 식물이나 균 종류에서만 발생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동물이나 사람의 신체 조직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게 가능해?”

“아예 영향이 없던 건 아니었답니다. 낮은 확률로 피부층에 푸른 반점이 발생하지만, 몸에 별다른 이상을 일으키진 않을뿐더러 얼마 안 지나서 사라지죠.”

“흠...”

“그 동시에 제가 샘플이랑 닿는 순간, 몸에서 미약한 아츠 반응이 발생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식물성 단백질이랑 아츠가 화학 반응을 일으키면서 색소 변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는 건가?”

“네. 켈시 선생님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어요.”

 

유기화학이나 생명공학 쪽으로는 그다지 지식이 없다 보니 이 이상의 추론은 힘들겠다마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블루포이즌이 겪는 저 현상은 능력은 아니되, 본인의 아츠에 인한 부작용이라는 거군. 

 

아츠를 사용 가능한 사람은 평상시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극소량으로나마 체내에서 그 에너지를 생성하고 발산하고 있다. 그 미세한 단위까지의 체내 아츠 통제는 숙련된 캐스터조차도 난이도가 꽤 있는 기술이다, 당장 그 잘나신 왕의 지팡이의 필라인 소녀도 매번 조절에 실패해서 옷을 태워 먹으니 말 다 했지. 하물며 아츠 적응성이 표준치인 블루포이즌에게 있어선 더더욱 어려운 일. 아마도 이걸 고치는 데엔 많은 연구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아까 말한 대로 동물이나 사람에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 즉, 인체에겐 무해하다는 것이다. 이걸 잘 설명하기만 하면... 

  

“하지만, 변하는 건 별로 없었습니다.”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블루포이즌의 말 한마디가 비수를 꽂듯이 날아왔다.

 

“장소가 바뀌고 사람들이 바뀌어도, 이 푸른색으로 바꾸는 특성을 감추려 노력해도, 제가 독극물이라는 건 변하지 않고, 저를 향한 두려움 어린 시선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블루포이즌이 들고 있는 머그컵 안의 수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동요하는 그녀의 심상에 공명하듯이.

 

“다른 사람들이랑 다를 바 없는 몸인데. 그저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인데... 다가가려고 걸어가도, 그 사람들은 뒤로 물러났죠. 계속, 계속... 가까워질 일이 없을 평행선과도 같이. 고독이라는 이름의 안개는 제 모든 주변을 흐리게만 만드는 것 같았어요.”

 

뭐라고 말을 해주고 싶어도, 누가 내 혀를 손으로 잡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선뜻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허심탄회하게 늘어놓고 있는 이 소녀의 이야기를, 방해하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그런 제 앞에, 박사님이 나타나셨죠. 제 능력을 아시면서도 아무 상관없다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 주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절 상냥하게 어루만져 주셨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째 마지막이 좀 듣기 미묘하다. 용문 경관들이 있는 앞에서 이 소리를 했다간 분명히 서까지 동행당하겠지...?

 

“그런 박사님을 기점으로, 저에게 다가와 주시는 분들이 늘어났어요. 굼씨, 글라우쿠스씨에, 다른 대원 분들까지. 뒤틀려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을 거 같았던 제 운명이 마치 마법처럼 풀려나는 거 같아서... 정말 기뻤어요.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해도 모자를 정도로...”

 

좀 전에 사그라들었다고 생각했던 블루포이즌의 눈동자가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입술을 깨물며 버티려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오래 참는 건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그만큼 박사님께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이 제어할 수 없는 능력을 보게 되면, 아무리 박사님이시더라도... 절... 의심하고, 두려워하시게 될 거 같아서...” 

 

소녀에게서 흘러내리는 작은 이슬이 한 방울, 두 방울 머그컵 안으로 떨어지는 것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저 찰랑이는 수면처럼, 보고 있는 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무서웠어요. 박사님이 제게 웃어주시지 않을 거 같아서. 제 손을 잡아주시지 않을 거 같아서... 다시는, 절 바라봐 주시지 않을 거 같아서...” 

 

뒤로 갈수록 흐려지는 발음. 점점 두서가 없어지는 말. 한 손으로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아내며 애써 웃음을 지으려 하는 저 모습만 봐도, 어렴풋이 알 수가 있을 거 같다. 이 소녀에게 오랫동안 쌓여 왔던, 당연한 것을 얻지 못했던 것에 대한 소망을. 어느 순간부터 생겼을,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에 대한 망설임을. 기껏 얻은 행복을 잃어버리게 될 거 같은 불안감을.

 

그런 공허에 둘러싸인 소녀를 향해, 아무 생각 할 필요 없이, 난 손을 뻗었다.

 

“박사, 님...?”

 

상황을 뒤늦게 인식한 걸까. 품에 안긴 블루포이즌은 몇 초 정도 느리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 반응을 무시하며, 분홍빛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내 나름대로 해줄 수 있는, 간단하면서 여러 의미가 함축된 한 마디를.

 

“그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

 

짧은 신음소리가 들린 지 몇 초. 날 놓지 않으려는 듯, 블루포이즌의 감정 어린 손길이 옷 너머로 매우 강하게 느껴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도 같이, 그녀의 가녀린 손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이랑은 비교가 안 될 만큼 선명한 소녀의 울음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난 아무런 말 없이 등을 토닥이거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저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다시 다스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줄 뿐이었다.

 

준비된 차는 어느새 에어컨 바람에 식어버렸다. 하지만, 계속 이 소녀가 갈구해온 사람의 온기는,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



새해가 되고 실컷 놀다가 올리는 걸 잊고 있었다... 미안하다...


이 편을 쓴 게 재작년 8월이라서 청독이 패러독스 나오기 전이었던지라 설정 상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청독이의 아츠 설정은 당시 내가 추측해서 쓴 오리지널이라 생각해주면 된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7편 곧 올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