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열심히 준비해 왔지만, 또다시 같은 패턴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수고했습니다."


"네..."


면접관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이번에는 느낌이 좋았는데...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나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복도를 터덜터덜 걸으며 나는 초점이 흐릿해진 눈을 들어 천장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디에다 면접을 알아봐야하나."


몇 번째인지도 모를 내 취업은, 또다시 실패로 끝난 모양이다.




[또 떨어졌냐?]


"그래, 임마."


[기운내라, 짜샤. 밥이나 한 번 살게.]


"말만이라도 고맙다."


사람없는 텅 빈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와서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녀석은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번에 눈치챘다. 밥을 먹고싶긴 했지만 괜히 부담만 주는 것 같아 사양했다.

밥을 먹는 건 좋은 일이 생겼을 때로 미뤄두자. 괜히 걱정 끼치기는 싫으니...

그런데 친구는 나와 생각이 달라보였다.


[원래 힘들 때일수록 맛있는게 필요한 법이라는거 모르냐? 조만간 한 번 이 형님께서 찾아가주마. 감사히 여겨라.]


"그럴 필요 없는데."


[없기는 무슨. 비는 날 잡아서 알려줘라. 그럼 그 때 보자.]


"하하, 알았어."


친구가 호탕하게 말하고 통화를 끊자 나는 살짝 웃었다. 어지간히도 사람 좋은 녀석이다. 공사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사는데 이 녀석은 늘 활기가 넘쳤다. 참 오지랖도 넓다.

그건 그렇고...


"하아... 앞으로 어떡해야하나."


나는 면접에 떨어져 앞으로의 일이 막막해져 창 밖을 내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취업 준비에 나선지도 벌써 몇 년이 넘어가는데 아직까지 이렇다 할 만한 성과가 없다. 편의점 알바나 전전할까 생각해본적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제대로 된 직장에서 일하고 싶다. 그런 고집을 내려놓지 않고 현실과의 타협을 뿌리치며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모르겠다. 고민해본다고 바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나는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털어내듯이 가로젓고 폰을 꺼내들었다. 이러다간 밑도 끝도 없이 울적해지고 말 것 같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답을 찾을 수 있겠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자기위안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나는 내가 하는 모바일 게임... 명일방주를 켰다.


"오? 픽업 바꼈네."


익숙한 로비 화면에 새로운 픽업 헤드헌팅이 눈에 들어와 눌렀다. 6성은 사리아, 블레이즈였고 5성은 스카이파이어, 프틸롭시스, 프로젝트 레드. 거의 꽝이 없는 라인업이다. 합성옥은 2만개 가량 있으니 해볼만하겠는데?

사리아랑 블레이즈 둘 다 없었는데 잘 됐다.

그러나 야심차게 돌린 10연차 3번에서는...


"켁, 천화만 3번..."


6성은 하나도 뜨지 않고 스카이파이어, 천화만 떴다. 하다못해 다른 5성이 나와주길 바랬는데 어떻게 얘만..

이것도 굉장한 확률이라면 확률이겠지, 하아.

기분전환하려던게 역효과가 나버렸다.




스카이파이어, 천화. 5성 범위 캐스터. 사실 천화는 5성 오퍼레이터 전체를 통틀어 봐도 상위권에 속하는 좋은 캐릭터다. 성능도 좋고, 키우기도 편하고. 여러모로 버릴 게 없다. 일러스트가 다소 평가가 갈리긴 하지만, 나는 꽤 이쁘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5성 중에서 헤드헌팅 등장 확률이 다소 높은건지 천화가 필요없거나 이미 있는 플레이어들에게도 마구 뜬다. 그래서 좋은 성능에도 불구하고 좀 찬밥 대우를 받는다. 

내가 명일방주를 처음 시작했을 때 천화의 성능에 얼마나 매달렸었는지 생각하면 좀 씁쓸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마치 내 상태처럼...


"으으, 피곤하다."


내가 혼자 살고 있는 원룸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오니 별 일 없었는데도 피로감이 몰려왔다. 면접을 보러 좀 멀리 갔다오긴 했지만 평소라면 별 탈 없을만한 거리였다. 그런데도 몸이 이렇게 무겁게 가라앉는다는건 그만큼 정신적 피로가 크다는 뜻일 것이다.

정말 지친다... 그냥 빨리 자야겠다.


"내일은 뭐하지?"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는데 막상 내일이 주말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아르바이트도 내일은 쉰다. 

마음같아서는 휴일을 맞아 기분전환이라도 나가고 싶지만...


"에휴, 그럴 기분도 아닌데 뭘. 내일은 방에 그냥 박혀 있어야지."


오늘 겪었던 일이 떠오르며 기분이 울적해진 나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서 자기 전에 명일방주의 이성을 녹이려고 폰을 꺼내 들었다. 아무생각없이 하기엔 역시 이것만한게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응? 이거 왜 이러지?"


나는 명일방주가 접속 화면에서 굳고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자 당황해서 앱을 껐다가 켰다. 그래도 똑같이 같은 부분에서 굳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서 당황스럽다가 괜스레 짜증이 났다.


"에이, 이건 또 왜 이러는거야? 나 참, 기가 막히네."


도저히 게임이 실행될 기미가 안 보여서 나는 투덜거리면서 폰을 옆에 툭 던지고 몸을 돌려 이불을 덮었다. 몸에 만연해 있던 피로감이 몸을 타고 올라오면서 의식이 몽롱해지고 난 곧 잠에 빠졌다.

되는 게 없네, 되는 게...

그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되뇌이면서.




"...어나."


으... 음? 누구지?


"일어나! 언제까지 자고만 있을 셈이야?"


곤히 잠들어 있던 나를 누군가 부르면서 내 몸을 흔들었다. 물먹은 스폰지같은 의식이 빠르게 원래 자리를 찾아가고 정신이 또렷해져갔다.


"이 내가 직접 찾아왔는데 잠이나 자고 있다니, 배짱 하나는 인정해줄게."


무척이나 기가 센 하이톤의 목소리, 자신감이 넘쳐나는 말투.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함이 들었다.

뭘까, 이 묘한 친숙함은...?

그리고 게슴츠레 눈을 뜬 나는-


"...허어어억?!"


그야말로 벼락맞은것처럼 놀라 아까까지의 몽롱함이 깨끗하게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펄쩍 뛰어올랐다.


"뭐, 뭐야. 뭘 그렇게 놀라?"


내 앞에 서 있는 고양이귀의 소녀는 내가 튀어오르자 되려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교복같아 보이기도 하는 특이한 모양새의 붉은 옷, 한 쪽에 귀걸이를 하고 있는 고양이 귀와 긴 꼬리. 그리고 손에 쥐어져있는 석장같은 모양새의 지팡이...

틀림없다. 

명일방주에 나오는 스카이파이어, 천화다!!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무슨 소리야?"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내가 현실도피를 하려고 하자 천화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내 말을 바로 일축해 버렸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건...

내가 당혹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자 천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얼빠진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네. 정말 모르겠어?"


천화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하, 하고 내쉬더니 자신의 가슴에 손을 턱 얹고 한껏 고양감에 고취되어 말했다.


"흥, 이제 보니 내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지? 그럼 알려주도록 할게. 내 이름은 스카이파이어- 빅토리아의 아츠 기관, 왕의 지팡이의 수석 화염술사야! 최고의 실력 뿐 만 아니라 미색도 갖춘, 그야말로 문무겸비의 절정... 그게 바로 나야!"


"어, 어... 그래..."


누가 시켜도 못 할 것 같은 말을 너무나도 당당하게 해버리는 천화. 콧대가 높다 못해 천장을 뚫을 기세다. 생긴 것 뿐 만 아니라 말투며 행동까지 정말 명일방주 속 천화 그 자체. 우쭐대면서 낮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천화에 대한 어이없음과 황당함에 나는 눈만 깜빡깜빡거렸다.

...이거 정말 실제상황인 것 같은데.

그제서야 이 상황이 꾸며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 나는 일단 뭐라도 말을 붙여보기로 했다.


"진짜 스카이파이어, 너야?"


"당연하지! 후후, 영광으로 알라구. 난 좀처럼 누군가를 찾아가는 일이 없거든."


...찾아간다고?


"잠깐, 찾아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마치 자신이 직접 게임 속을 나와서 찾아왔다는 듯한 천화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게임 속에 있던 천화가 튀어나어기라도 했단 말인가?

에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려던 찰나였다.


"그 말대로야!"


"어?"


빙고! 하면서 찡긋 윙크를 날린 천화가 말했다-


"기뻐하도록 해! 넌 내 특별한 선택을 받았어! 앞으로 기분나쁜 일 따윈 모두 잊어버리고 신나게 나랑 놀아보는거야!"


"뭐... 뭐어~?!"


그렇게 나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천화와의 생각한 적도 없는 기묘한 일상이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