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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유독 햇살이 날 비웃는 듯이 온몸을 훑는 거 같았다.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의 심정이 이런 느낌인 걸까.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추를 단 것 같이 무거웠다.

“진짜 가기 싫다...”

약속을 지키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미덕이다. 특히 나 같이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살다 보면 지키기 싫은 약속이 늘어나는 법이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가드 오퍼레이터 시데로카와의 약속을 위해 헬스장을 가는 것처럼 말이다. 

안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함교 어디에 숨던 곧바로 추격해서 잡아가는데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도주 따윈 포기한지 오래다. 흔히들 말하는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것이다.

“하아... 오늘도 와버렸어...”

궁시렁궁시렁거리더니 어느새 헬스장의 앞에 서있었다. 내 눈앞에 지옥의 헬스 트레이너가 있을 것이라는 끔찍한 상상을 떠올리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런다고 뭐가 바뀌랴. 그냥 빨리 끝내고 침대에 가서 기절하는 게 낫겠지. 

“시데로카, 나 왔... 음?”

헬스장의 문을 열었더니 한 사람이 보였다. 허나 시데로카가 아니었다. 이 땀내가 진동하는 장소와 이미지가 정반대일 거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평소와 복장이 달라 못 알아볼 뻔했지만, 저 분홍빛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를 어떻게 모르겠는가.

“블루포이즌? 네가 여기 왜...”

평소의 푸른색 후드 재킷이랑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반바지가 아닌, 분홍색 체크무늬의 탱크탑에 검푸른 레깅스. 분명 잡지에서 운동하는 여성들이 입는 패션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아니, 왜 저 차림인지는 둘째 치고,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운동하러 온 건가?

“어서 오세요, 박사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내가 들어온 걸 확인하자, 블루포이즌은 입가에 꽃을 피우며 내게 다가왔다. 자연스레 양손으로 내 오른손을 살며시 잡으며, 본인의 기분 좋게 서늘한 체온을 내게 전했다. 예전엔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정도였는데, 어느새 이 아가씨 측에서 먼저 접촉해오는 게 일상이 되었다. 이걸 보면 세월에 감탄할 따름이다.

“기다렸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어?”
“시데로카씨에게 전달 못 받으셨나요?”
“시데로카가? 뭐를?”
“켈시 선생님께서 임무를 내리셔서 급히 파견을 가신다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대타로 박사님의 트레이닝을 맡게 되었어요.”

오늘따라 그 얄미운 녹색머리 필라인 녀석이 매우 호감이 가는군. 다음번에 선물이라도 준비해둬야겠어. 캣닙 같은 거 가져다주면 좋아하려나. 

“근데 괜찮겠어?”
“네?”
“그... 결코 무시한다는 뜻으로 묻는 건 아닌데. 너와 내 체급 차이도 있고... 좀 힘들지 않아?”

내 키가 170 중반대. 블루포이즌의 키는 150 후반대. 키 차이도 상당히 나지만, 문제는 블루포이즌의 근력이다. 저 얇은 두 팔로 과연 날 지탱해줄 수 있을지 걱정된다. 턱걸이 같이 체중을 지탱해줘야 하는 걸 도울 수 있으려나?

잠시 멍하니 날 보더니 그런 내 생각이 재밌다는 듯, 블루포이즌은 살며시 웃었다. 그녀의 감정에 반응하듯이, 분홍빛 머리를 감싸는 흰색 반다나가 동물의 귀처럼 쫑긋거렸다. 무심코 만져보고 싶다는 욕구가 든 건 덤이다.

“걱정 마시길. 나름 오퍼레이터로서 단련하고 있는 몸이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럼 운동을 시작해볼까요? 우선 오늘 할 리스트부터 말씀드릴게요.”

블루포이즌의 설명을 들으며 운동기구로 향했다. 우선은 가벼운 조깅부터인가. 이 정도는 이제 익숙해져서 별 거 아니다. 그다음이 어떨지가 관건이지만.

...그나저나 잡고 있는 손은 언제 놔주는 거지?
 


1시간 반 정도가 지나면서 오늘자 운동이 끝났다. 벤치에 털썩 앉으면서 물병을 벌컥벌컥 마시니, 세상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상쾌함이 날 반겼다. 그러나 곧바로 종아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덮쳐 오니, 빨리 샤워하고 자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어으... 빡세네...”

처음엔 쉽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내 오산이었다. 블루포이즌과의 운동은 시데로카에 비해 편한 건 맞지만 결코 쉬운 건 아니었다. 무산소 운동에 초점을 둔 시데로카에 비해 블루포이즌이 설계한 스케줄은 유산소 운동의 비율이 높았다. 나름 전장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폐활량엔 자신 있다 생각했는데, 맨 마지막의 15분 동안의 파워 워킹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쳤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거 같은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날 뒤로 하고, 블루포이즌은 헬스장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사용한 기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내가 해야 되는 게 맞겠지만, 나 힘들다고 저 아가씨가 대신 정리해주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저 상냥한 마음씨엔 몇 번이고 감사할 따름이다.

“시간 참 빠르네.”

계산해보니 얼추 반년 가까이 지났다. 그날 새벽에, 내가 식당에 가서 우연히 맺게 된 우리 둘의 인연이. 지금이랑 달리 아직 ‘독극물’이라 불리며 대원들에게 기피당하던 그 시절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결코 저 아가씨에게서 실망하거나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던 그 순간이.

그때에 비해 지금 저 소녀의 얼굴엔 미소가 자연스레 묻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은 행복해지지 못할 거라고, 자신은 언제나 혼자일 거라고 자조하던 게 거짓말같이 느낄 정도로, 지금의 블루포이즌은 많은 대원들에게 사랑받으며 청춘을 구가하고 있다. 덕분에 요즘 들어서는 그녀가 만든 디저트를 먹는 게 좀 힘들어져서 아쉽지만, 부하 직원이 행복하다면 상관으로서 그걸로 만족한다.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블루포이즌이 입은 저 복장은... 운동 중에도 느꼈지만, 꽤나 여러모로 자극적이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특히 나 같이 이성 경험이 전무한 사람한테는 더더욱. 디펜더 오퍼레이터 유넥티스라던가 몇몇 노출이 심한 여성 오퍼레이터가 몇몇 있어서 어찌어찌 익숙해졌지만, 저렇게 ‘평소엔 꽁꽁 싸매다가 갑자기 피부 면적이 넓어지는’ 케이스는, 좀 많이 당황스럽다.  

일단은 상체부터. 와이셔츠에 가려져서 몰랐는데, 저 아가씨도 은근 굴곡이 있다는 걸 느꼈다. 우타게나 시데로카 같은 규격외랑 비교하면 훨씬 작지만, 적어도 탱크탑 위로 보이는 살집의 계곡이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확실히 뽐내고 있었다. 물론 저 상체의 곡선의 근원이 되는 매끈한 겨드랑이도 빠질 수 없다.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보이는 삼각함수의 경이로움이 압축된 것 같은 저 기적의 공간을 볼 때마다 무심코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든다. 

상체에서 끝나느냐? 당치도 않는 소리다. 지금도 저기 땀으로 인해 반짝이는 복근이 보이지가 않는단 말인가? 군살이 1도 보이지 않은 저 허리의 라인은 그대로 레깅스와 랑데부를 해 인체의 아름다운 곡선을 끊기지 않고 이어갔다. 개인적으론 레깅스를 입으면 살집이 살짝 파이면서 강조되는 것이 취향이지만, 허리, 골반에 이어 허벅지에 다리, 종아리까지 매끈하게 이어진 저런 하체도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슬렌더의 화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모습. 볼 때마다 번뇌가 머릿속을 종횡무진 휘젓는다.

“...미친 건가.”

솔직한 심정으론 철퇴로 머리를 찍어야겠지만, 아쉽게도 헬스장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덤벨을 들 근력도 없고.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기대고 있던 벽에 머리를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처박았다.

눈앞에 별이 반짝이며, 묵직한 통증과 함께 후두부에서 화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머릿속에 맴돌던 잡념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대신에 이번엔 자괴감과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저 나이가 한참 어린 아가씨한테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란 말인가. 한 단체의 지도자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실격이다. 말로 안 꺼내서 망정이지, 하는 순간 용문 경찰들에게 연행돼도 할 말 없는 망언이었다.

“박사님...? 아까 큰 소리가 들렸는데...”
“걱정 마. 머저리 같은 녀석 정신 차리라고 한 대 팬 거뿐이니까.”
“박사님 근처엔 아무도 없는데요...?”
“아~ 슬슬 가자. 빨리 샤워해야지.”

내가 머리를 벽에 박은 소리를 듣고 달려온 블루포이즌을 뒤로하고, 나는 도망치듯이 헬스장에서 나왔다. 그것에 블루포이즌도 재빨리 짐을 챙겨 나를 뒤따라왔다. 

“괜찮으신 건가요? 어디 상태가 안 좋으시다던가...”
“괜찮아.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복도를 걷는 내내 조금 전까지의 추태를 잊지 못해서 블루포이즌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속으로 끊임없이 미안하다고 외치고 있는 내 양심은 덤이다.

빨리 샤워하고 자야지. 자고 일어나면 다 해결될 일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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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다 명붕이들. 2월 중순이 되가고 있는데 잘 지내냐. 난 오늘 사랑니 뽑고 왔다.


청독이편 완결 아니였냐고 궁금한 얘들 있을텐데, 발렌타인이기도 하고 마침 청독이가 지난 공식 발렌타인 영상에서 출연한 적이 있다보니 이걸 기회삼아서 후속편을 써보기로 했다. 보통 애니메이션이 완결나면 ova가 나오는 거랑 비슷한 거 ㅇㅇ


원래 2편만 쓰려했는데 또 분량이 폭주해버렸다. 얼추 5~6화 정도 분량 나올듯. 


누구나 대충 감 오겠지만 작중 묘사되는 청독이 복장은 이 스킨이다. ㄹㅇ 이쁘지 않냐. 역시 청도기는 전설이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