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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에: 수위가 좀 있는데 문제 된다면 18금으로 옮기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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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 단 1초였다.

내 눈앞의 소녀가 나에게 다가오는 그 순간도 1초.

내 뺨을 잡아 오고 피부를 맞닿는 것도 1초.

다시 거리를 떨어트리는 것도, 1초.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 건지를 아는지, 블루포이즌은 분홍빛 화장을 얼굴 전체에 덧씌운채, 그 푸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했다. 어쩔 줄 몰라서 이리저리 비틀고 있는 몸짓. 떨리고 있는 어깨. 그녀가 지금 한 것은 용기를 쥐어 짜내서 한 행동이라는 증표였다.

“블루포이즌... 이건, 대체...”

솔직히 말해서, 지금 상황에 대해 아직도 갈피를 못 잡겠다. 조금 전에 벌어진 일이 내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땅이 스펀지처럼 푹신해지고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여성이 퐁뒤를 먹다가 빵을 떨궜을 땐, 옆의 남성에게 입맞춤하게 되어 있어요.”

아직 입술에 남아있는 이 온기가 내 정신 속에 아지랑이를 꽃피우고 있을 때, 그 너머에서 블루포이즌은 천천히 다가왔다. 의연해 보이면서도 흐릿해 보이는 눈빛을 머금으며, 소녀는 내 가슴에 손을 얹어 왔다. 그 손길은 내 마음속에 물결을 일으켜, 이성이라는 이름의 둑을 조금씩 건드려 오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요란한 심장의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이 박동이 전부 이 소녀의 손끝으로 전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얼굴이 화끈거려 어딘가에 숨고 싶어진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여자아이에게 입맞춤을 당한 것에 대한 죄악감 같은 게 아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 아니, 나 자신이 일부러 형용하고 싶지 않은 거일지도 모르는 이 감정이, 껍질을 부수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진정하자. 그저 벌칙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암시를 거는 한편, 허물뿐인 이성을 내세우며 이 빌어먹을 관습에 대해 불만을 내뱉으려 했다. 

“아무리 그래도... 싫은 건 하지 말아야지. 이런 건 더 소중한 사람이랑 해야... 읍?!”

허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내 입은 블루포이즌에 의해 물리적으로 틀어막혔다. 키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까치발을 서면서까지, 그녀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내 코트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다. 이 감촉을 기억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이 온기를 몸에 새기기 위해서인 것처럼. 날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떨어트려야 되는데. 밀어야 하는데.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뚱아리는 이미 당혹감이라는 이름의 독에 중독된지 오래였다. 그저 몸을 뒤척이는 것 말고는, 마치 수렁에 빠진 동물과도 같이 내 몸은 이 상황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1초. 10초. 30초.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가 오는지, 소녀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상태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호흡을 멈추는 걸 참긴 어려웠는지, 1분쯤이 되어서 블루포이즌은 숨소리와 함께 내게서 멀어졌다. 

“블루포이즌... 벌칙은 아까로 끝난 게 아니었...”

지금 이 상황을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어서,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런 내게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어느새 블루포이즌은 몸을 숙여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잠깐, 블루포이즌...”
“...괜찮아요.”

이 아가씨는 지치지도 않는지 또 하려는 건가. 지레 겁을 먹어 눈을 질끈 감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입술에선 아무런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에 코트에서 악력이 느껴져 고개를 숙이니,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당신이, 그 ‘소중한 사람’이니까.”
“...뭐?”

소녀가 말한 한마디에, 이리저리 난잡한 내 머리는 끝내 사고를 멈췄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은 의심 따위도 없이, 그저 눈앞의 상황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로도스의 모든 분께 기피당했던 그 시절에, 유일하게 저에게 다가와 주신 분.”

코트가 뜯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블루포이즌의 양손은 날 강하게 갈구하고 있었다. 그 손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감정은, 둔감한 나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제 체질을 알게 되어도, 놀라지 않고 계속 제 곁을 떠나지 않으신 분.”

살며시 고개를 든 소녀의 눈동자엔 푸른 반짝임이 가득했다. 그 너머로 멍청한 표정을 짓는 내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로, 잔잔한 수면과도 같이 투명했다.

“그런 분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블루포이즌은 눈을 감으며 내게 다가왔다. 작고 사랑스러운 연분홍빛 입술을 살짝 내밀면서, 나에게 대답을 요구해 왔다.  

양쪽 어깨를 부여잡으며, 다시 한번 입술을 맞추려 다가오는 아누라 아가씨를 제지했다. 꿈틀거리는 정욕을 견디고 내던진, 내 이성의 마지막 브레이크이자 단말마였다.

브레이크가 걸림과 동시에, 마음속의 어떤 껍질이 깨지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 묵혀두고 있었던, 내가 외면해 왔던 ‘무언가'가, 의식의 수면으로 부상해 왔다. 그리고, 깨달아버렸다.

“블루포이즌... 내가 한 건... 그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행동이었을 뿐이야.” 

어느 순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이 소녀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알게 되는 것을. 그렇게 되면 나에게 어떻게 행동해 올지를.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난 그랬을 거고, 거꾸로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언젠간 너에게 다가갔을 거야.”

그와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런 그녀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그저 우연에 우연이 겹쳐, 어쩌다가 내가 그 대상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그러니, 난 너한테 이런 호감을 받을 자격은 없어.”

귀여운 외모. 가녀린 체형. 상냥한 성격. 뛰어난 요리 솜씨 등. 체질이 살짝 특이할 뿐, 블루포이즌이 이성에게 사랑받을 만한 사항은 여러 가지다. 분명히 나 같은 나이 많은 아저씨보다, 이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멋진 남성이 수도 없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소녀의 가능성을 막고 싶지 않았다. 우연히 내가 준 호의를 빌미 삼아, 이 아가씨의 감정을 악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차가 많다는 궤변으로 회피해 왔다. 그저 착하고 배려심 많은 아이니까 나에게도 잘해주는 거라고 외면해 왔다. 내가 이 소녀에게 어렴풋이 느끼게 된 감정도 몇 번이고 부정해 왔다. 

하지만, 그 촌극도 결국은 끝이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감정을 부딪쳐 오는데 어떻게 회피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은, 그녀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설득하는 것밖에 없었다.

“언젠간... 이라 하면 그게 언제일까요?”
“...뭐?”

어떻게 설득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블루포이즌은 눈높이를 내게 맞추며 말을 걸어왔다.

“박사님이 아니었다면, 며칠이 걸렸을까요? 하루? 일주일? 한 달? 어쩌면 영원히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과연 계속 기다리는 게 옳았을까요?”
“그건...”

그녀에게 있어서 내가 조금 전에 한 말이 꽤 무책임한 말이란 걸 직감했다. 지금 당장 사과해야 하나 싶었지만, 내 걱정과 다르게 블루포이즌은 평온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방황하던 저에게 필요했던 건, 무언가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애매한 ‘미래’보다, 저 자신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현재’였습니다.”

블루포이즌은 내 왼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밀착시켰다. 젤리같이 부드럽고 탄력 있는 감촉이, 무심코 주물럭거리고 싶은 욕구가 들게 만드는 살결이었다.

“그리고 그런 ‘현재'를 저에게 준 건, 박사님이었어요. 제 삶에 빛을, 희망을, 의미를 준 건 전부, 당신이 당연하다 여겼던 손길이었어요.”

손바닥 너머로 소녀의 옅은 숨결이, 그리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내 손길을 계속 맛보고 싶다는 듯이, 내 손가락 한 마디 한 마디에 입을 맞추고, 약하게 깨물면서, 그 작은 양손으로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다. 마치, 주인의 손길을 갈구하는 반려동물처럼. 

그 모습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지켜주고 싶고, 내가 독점하고 싶어졌다. 

“그러니, 제가 박사님을 사모하는 건 당연한 일이랍니다.”
“블루포이즌...”

뺨에 갖다 대고 있던 내 손은, 어느새 소녀의 가슴 정중앙에 맞닿아 있었다. 부드러운 살결의 계곡 너머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격한 감정의 파도가 나를 향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리저리 설득한다던가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은 철회다. 이렇게까지 올곧게 달려온다면, 성심성의껏 받아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차려진 밥상을 마다하는 것도 남자의 수치이다.

“그러니 받아주시지 않겠어요? 그리고, 풀어주시지 않겠어요? 박사님을 향한 이 마음이 만들어낸, 당신만이 풀 수 있는 이 ‘독극물’을?”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블루포이즌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대로 내 감정을 그녀에게 부딪혔다. 아까는 당혹감에 젖어 있어 감상을 느낄 수가 없었지만, 블루포이즌의 입술은 생각 이상으로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읍?!”

입술이 맞닿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했던 걸까. 입술이 맞닿고 있는 동안, 내 입안으로 무언가가 들어오려는 이물감이 느껴졌다.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녀의 행동이 당황스러웠지만, 난 그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런 건 해본 기억이 전혀 없지만, 웃기게도 몸은 방법을 아는 듯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이게 자연의 본능이라는 것일까? 잡념을 전부 버리고 키스만 하고 있더니, 어느새 우리 둘은 침대 위에 있었다. 뱀이 똬리를 틀듯이 서로의 혀를 겹친 채, 상대방의 단추를 풀고, 양쪽의 살결을 어루만지며,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은밀한 곳을 탐했다.

기나긴 키스가 끝나고 두 입술이 잠깐의 이별을 고했다. 은빛의 실타래는 달빛에 반짝이며 점차 얇아지더니, 눈꽃송이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침대에 누워 반쯤 헐벗은 채, 블루포이즌은 웃으면서 양팔로 내 목을 감싸고 있었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간신히 버티고 있던 하반신의 잠든 맹수가 날뛰게 만들 거 같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와 동시에 선정적이었다.

“...이 이상 하면 아무리 나이 많은 아저씨인 나라도 못 참겠는데?”
“원하시는 만큼... 저를 맛봐주시길.”

블루포이즌은 풀어헤쳐진 옷 너머의 자신의 살결을 천천히 훑으며,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속삭임을 건네왔다. 아마 나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볼 기회가 없는, 청초함 속에 농밀히 묻어나오는 색기는, 본능의 마지막 목줄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시계 초침이 빨리 잔업을 하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초콜릿보다 더 달콤한, 진정한 디저트를 맛볼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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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놈이다. 2연참의 영향인지 이번엔 올리는 게 좀 늦어졌다. 외설 묘사는 스카디편 쓸 때 이후로는 안 써봐서 감이 좀 많이 죽은 것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청독이편의 주제를 꿰뚫는 화라는 느낌으로 쓰다보니 생각할 게 많은 게 한몫하는 거 같음.


다음화로 청독이편 후일담도 완결이다. 계속 읽어주는 명붕이들에게 언제나 고마움.


피드백은 언제나 대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