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링크


밀푀유. '천 겹의 잎사귀'라는 의미를 가진 디저트다. 말 그대로 파이를 겹겹이 쌓아 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과일 같은 걸 집어넣은 형태이다. PRTS가 제공하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모르게 밀푀유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라 버렸다. 전투를 거듭해서 생긴 여유 때문일까. 아니면…

"꺄하하하하하하!!!"

잠시 딴생각을 하던 도중, PRTS 너머로 악마의 광소가 들려왔다. 감정이 고조된 것으로 보이는 '여성'의 웃음소리에 뒤이어 누군가의 비명이 함께 들려왔다. 오지 마. 살려줘. 죽기 싫어. 그 외 기타 등등. 비참하고 잔혹한 목소리가 마치 오늘 꿈에서라도 나올 기세로 내 양쪽 귀를 괴롭혔다. 

"돌겠네 진짜."

아니, 괴로운 건 귀뿐만이 아니었다. 화면 너머로 적들의 머리와 사지가 잘리고, 몸통이 고기처럼 다져지고 있는데 내 눈이 멀쩡하겠는가. 지금 당장이라도 화면을 끄고 싶지만, 상황이 전투 중인지라 끌 수가 없다. 

가만 생각해보니 왜 밀푀유가 생각났나 했는데, 저 시체들이 다져진 형태 때문이었다. 살갗이 빵이요, 내장이 과일이라 생각하니 딱 사진 속의 그 모양새였다. 그러더니 이딴 생각하고 있을 여유가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불쾌함이 뒤늦게 찾아왔다. 위산이 목 근처까지 역류해 왔지만, 어찌어찌 버티는 것에 성공했다. 처음 봤을 땐 곧바로 게워냈는데 이젠 익숙해졌나 보다. 나도 점점 미쳐가는 걸까?

"박사님! 박사니이이임!!!"
"무슨 일이야?"

속으로 내 자아에 대한 고민을 하려는 찰나, 다른 화면에서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보니  로도스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는 신참이었다. 꽤나 다급한지,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블루투스 이어폰 너머로 고스란히 들려왔다.

"제발 부탁입니다! 팀 좀 바꿔주세요…! 정신 나갈 거 같아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구만. 이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신입치고 제정신을 유지하는 사람은 얼마 없었으니까. 

"너무… 너무 무서워요! 이건 전투가 아니에요! 일방적인 학살이라고요!! 근신 처분을 받아도 되니까…! 제발 빨리…! 제발…!"

겁에 질려서 이젠 말도 제대로 못 나오는 건가. 상태가 생각보다 심한 거 같다. 메딕 오퍼레이터 퍼퓨머에게 환자 한 명이 추가되게 생겼다. '그녀'한테도 따로 말 좀 해야겠군.

"다 처리했어. 박사."
"으아아아아아아아!!!"

호랑이도, 아니, 늑대도 제 말하면 온다던가. 화면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바로 옆에 다가오자 그대로 비명소리와 함께 혼절해버린 신입은 덤이다.

"이봐. 괜찮아? 일어나야지. 전장에서 자면 죽어."
"아니, 자는 건 절대 아닐 텐데…"

알고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진짜로 모르는 걸까. 어느 쪽이든 딱히 바람직하진 못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일단은 사후 처리를 해야 되니 슬슬 가봐야겠군.

"지금 거기로 갈게."
"다치지 말고 천천히 와."

패널의 전원이 꺼졌다. 난 그대로 경호원을 데리고 안전지대를 나와, 협곡 아래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길을 이리저리 돌아서 협곡 아래에 도착하니, '그녀'가 손을 흔들며 날 맞이해왔다. 

"어서 와. 박사."

피비린내와 타는 냄새. 그리고 그걸 가리려 노력하는 흙먼지의 풍경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저곳에 무참히 짓이겨져 있는 적들의 시체가 자제했던 불쾌감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그걸 예쁘게 정리한답시고 한쪽에 가지런히 나열해둔 게 더 어이없이 느껴졌다. 

피로 물든 은색의 긴 산발을 수건으로 털며, '그녀'는 내게 씨익 웃음을 짓고 있었다. 쇠를 녹인 것 같이 탁한 회색 눈동자. 낡아빠진 검은색 옷. 피부에 심하게 솟아난 검은색 오리지늄 결정. 그 모습은 분명 광석병에 걸린 광인(狂人)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그 광기마저 잔혹한 아름다움이라 느낄 정도로, '그녀'의 미소는 넋을 빠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라플란드. 전직 살인 청부업자이자, 현재 로도스의 일원으로서 일하는 가드 오퍼레이터다.


-----


오랜만이다 명붕이들. 거의 2달만에 새 글을 써본다. 훈련소를 갔다 오고 나니 코로나에 걸리고 여러모로 멘탈 터지는 상황이 많았던지라 글 쓰는 게 많이 미뤄짐. 미안하다... 


일단 재활운동(?)이라는 느낌으로 2편짜리 단편을 써보기로 했음. 라댕이의 똘끼를 잘 묘사했는지 모르겠네. 재밌게 봐주면 감사하겠음.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