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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에: 켈시어 대량 포함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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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당직을 제외하면 통계학적으로 함내의 모든 인원이 수면 상태에 접어들 시기다. 제대로 된 수면을 접해본지 몇 년이 지났을까. 그걸 계산할 시간에 업무 하나를 더 처리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도 과연 합리성에 부합한 것일지는 의문이지만, 환자의 상태를 보는 건 의사로서의 사명이니 합리적이라고 해도 틀린 건 아니겠지.


인증을 마친 자동문이 옆으로 열리고, 그 앞엔 링거가 연결된 환자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군데군데 탈색된 흑색의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 영양공급이 의심스러운 얼굴. 머리를 감싸는 붕대가 이 남자의 상태를 대변하고 있었다. 


작전 중 건물 파편에 부딪혀 생긴 가벼운 뇌진탕. 손에 들고 있는 검진표에 쓰여 있는 증상이 시야에 비쳤다. 며칠 안정을 취하면 되는 정도의 경상이지만, 의학에서 확언이라는 건 없는 법이다. 가습기 상태 양호. 조명 양호. 약물 주입량도 정상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오늘만 이곳에 와서 확인 작업을 하는 것이 5번째. 45분마다 오는 것은 결코 효율적인 시퀀스라고 할 수 없지만, 이 남성이 우리 로도스에 가지고 있는 가치를 생각하면 납득이 안 되는 행동은 아닐 테지. 개인적인 감정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지금 우선시해야 하는 건 객관적인 가치다.


옆에 있는 간병인 전용 의자에 앉으며 눈앞의 환자를 바라보았다. 옆에 이렇게 있는데도 세상모르고 유아처럼 새근새근 잠들고 있다니, 경계심이 없는 점은 그때 그 시절이랑 다른 점이 없다.


이불을 살짝 들추니, 반소매의 환자복으로부터 튀어나온 남성의 얇은 팔이 보였다. 작게나마 이곳저곳 분포해 있는 자상과 화상, 그리고 타박상. 대원들에게 보호받고 있는 입장임에도 이런 상흔이 있다는 것은, 이 땅의 전장이 부르는 참혹함의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사…"


천천히, 무감정하게. 이성적으로. 그의 얇은 팔뚝을 살며시 손으로 훑었다. 스쳐 지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상처의 감촉이, 잠시나마 몸속 동맥의 운동을 가속화시켰다. 


숨소리의 간격 사이로, 그에게서 미약한 신음이 들려왔다. 찌푸려진 눈썹. 이리저리 비틀고 있는 몸. 증상에서 보아 가능성은 세 가지. 신체의 통증. 불편한 잠자리. 또는 악몽. 뇌파를 검사할 장비가 없으니 정밀 진단은 힘들지만, 이 사람의 행동 패턴을 감안하면 셋 중에선 악몽이 제일 확률적으로 높을 것이다.


"지금의 넌,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고통스러운 꿈일까. 슬픈 꿈일까. 분노하는 꿈일까. 그 시절의 기억을 잃은 널 어떤 꿈이 반겨올까. 아니면 꿈속에서만은 그때의 너로 돌아와 있을까. 알 방도도 없이 널 바라보고만 있다. 


몸을 뒤척이며 눈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니, 눈썹을 찌푸리는 그의 감긴 두 눈은 여전히 무의식 속을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볼수록,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가게 된다. 옥시토신? 아니면 엔도르핀? 뇌에서 흘러나와 전신을 지배하는 이 감정은,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게 만든다.


"차라리 이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 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없다. 손을 조금만 내리면, 저 남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얇은 목덜미를 움켜쥘 수 있다. 3분 정도만 유지하면, 이라고 속삭이며 격정적인 이드(Id)는 내 손을 움직이게 했다. 


"켈… 시…"


그런 이드를 향해 에고(Ego)가 자장가를 부르는 건 손이 목덜미에 닿을 때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이었다. 깨어난 건가 싶어 황급히 손을 치웠지만, 여전히 남성은 꿈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켈시… 켈시…"


무슨 꿈을 꾸길래 나를 애타게 찾는 걸까. 아무도 신뢰하지 않았던 그 '바벨의 냉혹하고 잔인한 박사'가, 심지어 제일 경계했던 나를 찾는다니. 헛웃음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꿈속에서조차, 그는 '로도스의 어리숙하고 다정한 박사'였다.


"참으로, 제멋대로야."


많은 사람이 너를 기억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이 아직 너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많은 사람이 너를 찾고 있는데. 너는 기억을 잃었다는 구실 하나로 허물 벗은 뱀처럼 현재를 살아가고 있구나. 공적도. 악행도. 과오도. 추억도. 전부 기억의 저편에 던져버렸구나.


"정말, 싫어."


사라질 때까지 제멋대로였으면서.


내 소중한 친구에게 몹쓸 짓을 해버렸으면서. 


나한테 한 말과 행동, 그 모든 걸 전부 잊어버렸으면서. 


몸속의 이드가 다시 꿈틀거린다. 이드에 잠식된 오른손의 벡터가 향하는 곳은, 주사바늘이 꽂혀 있는 그의 손이었다.


"난 네가, 정말 싫어."


진심인지 거짓인지 나조차도 모를 한 마디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그가 들었을지의 여부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계속 이성에 가둔 채 묵혀 왔던 말을, 남몰래 말해본 것일 뿐이었다.


잡고 있던 그의 손은, 움찔거리며 미약하게 내 손을 감쌌다. 깬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현실에 돌아오지 않았다. 꿈속에서의 행동이 반영된 것일까?


"널 바벨에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시간은 냇물이다. 거꾸로 돌아간다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 이미 다 지난 일이고, 그때 당시엔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정확히는, '순리'가 설계한 운명은 이렇게 결정되어 있었다. 난 그것을 보조했을 뿐이다. 하지만 현존재(Dasein)로 사는 한, 후회라는 감정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욕구의 촉매가 된다. 


그 때문에, 나답지는 않은 소리지만, 상상하게 된다. 네가 바벨에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평소처럼 연구에 전념하며 그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지인들이랑 평범한 일상을 지냈을까? 


네가, 그렇게 망가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양손으로 그의 손을 잡은 채, 살며시 눈을 감았다. 병실에 테라피 목적으로 설치된 라일락의 향기에 취해, 어두운 시야 저 너머로 그때의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습해져 가는 눈가. 느려지는 호흡. 달아오르는 머릿속. 일반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부류의 감정이 아니었다. 


널 볼 때마다 화목하게 같이 일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서, 그 온화한 미소를 계속 보고 싶어진다.


널 볼 때마다 쓰러진 친구의 모습이 떠올라서, 당장이라도 그 헤실거리는 얼굴을 망쳐버리고 싶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순리'대로 가는 것이고, 난 그걸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 너무나도 싫다.


이 모순되는 것들이 세월을 거쳐 마모된 내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그만큼 사랑스럽지만 죽여버리고 싶고, 죽여버리고 싶지만 사랑스럽다. 손에서 느껴지는 이 온기가 떨어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다. 손에서 느껴지는 이 따뜻함이 당장 떼어내고 싶을 만큼 소름 끼친다. 


"아마도 난, 앞으로 널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지도 몰라."


역시 난 이 사람이 싫다. 죽을 만큼 싫다. 그러니 말을 모질게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이 이상의 행동을 하기에는, 싫어하는 만큼 크나큰 감정이 내 말과 행동에 제동을 걸어온다.


"...언젠간 넌 모든 걸 되찾고, 다시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선택을 심판받을 날이 올 거야."


'순리'가 만들어낸 길은 아직도 멀다. 분명 날카로운 가시와 치명적인 독으로 점철된 위험천만한 길을, 이 남성은 넘어지고 다쳐도, 그것을 견디고 계속 걸어가야 할 것이다. 


"분명 나를 믿지 못하고, 나를 미워하는 순간이 오겠지. 나에게서 멀어지려 하겠지. 하지만…"


하지만, 그를 계속 인도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거칠고 모진 방법이더라도, 이 세상이 원하는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이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 


"이번엔 꼭, 내가 계속 너의 옆을 지키겠어."


과거의 일도, 주변의 일도. 네가 알 필요는 없다. 네가 저지른 모든 건 내가 짊어질 테니까. 넌 그저 앞으로 나아가면 돼. 


그것이 세상이 정한 일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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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설명)

옥시토신: 자궁수축 호르몬. 정신적 작용으로는 사랑이나 모성애 등에 연관되어 있다. 

엔도르핀: 마약성 호르몬. 사람이 과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생성되며 통증을 경감하는 효과를 가진다.

이드: 정신분석학 용어로 '본능'

에고: 정신분석학 용어로 '자아'

현존재: 형이상학 용어로 다른 존재자보다 우위에 선 존재자. 보통 인간을 일컬음.


주말이다. 잘 지내냐 명붕이들? 이번엔 켈시 단편을 써와봤다. 다른 사이트에서도 이거 연재하고 있는데 조회수가 낭낭하게 나와서 기념으로 써봤음.

이번 편의 키워드는 '애증', '비틀린 모성', '순리'. 박사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비치는 켈시라는 느낌으로 써봤어. 사실 아직 게임에서도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글을 쓰면서 많이 고민을 했던 것 같음. 내용이 너무 다르면 캐붕 설붕 다 되버리니까... 

side. 켈시라고 써져 있는 걸 보고 눈치챈 사람도 있겠는데, 켈시 편은 2편으로 작성할 생각임. 이번엔 켈시의 시점에서 써봤으니 다음 번엔 박사의 시점으로 써보려고. 조만간 써서 올려볼게.

암튼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